주인 잃은 학교
박종은
초봄의 어느 하루, 등교일도 등교시간도 아닌데 나는 시골학교정문 앞에 서있다. 학교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요, 친구들을 기다리는 중도 아니다. 까까머리에서 희끗희끗한 반백이 되어서야 찾아온 터이다. 꼭 45년 만이다. 하늘을 찌를 듯 한 나무들에 에워싸인 꿈동산이 어떻게 변했을까. 당시 60여명이 꿈을 키우던 교정이다. 세월에서 오는 두려움에 선뜻 들어서기가 망설여진다.
촌로村老가 논둑길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와서는 싣고 온 거름을 논에다 부린다. 고향마을 이웃동네분이면 알아볼 듯도 한데 초면이다. 가볍게 인사를 하니 그는 내가 묻기도 전에 폐교의 원인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농현상에다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더해져 아이들이 도시로 나가게 되었다고. 자신은 이 학교 출신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면서 머지않아 주변 개발이 이루어지면 다시 개교하게 될 거라며 은근히 지역개발을 기대하는 눈치이다.
철제로 된 정문은 굳게 닫혀있고 쪽문만이 한쪽으로 기운 채 열려있다. 수명을 다한 듯 장식마저 떨어져나갔다. 교문위에는 아치형으로 ‘아름다운학교’라는 글자가 흐릿하다. 오른쪽 기둥에 달린 ‘○○국민학교’란 교명만이 문패역할을 한다. ‘초등학교’란 명칭을 사용하기도 전에 주인을 잃은 운동장은 빈터로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여기저기 듬성듬성한 새싹들이 눈부시다.
운동장 둘레에는 반세기를 넘긴 측백나무들이 울타리역할을 하는데, 띄엄띄엄 서있는 은행나무와 교문 양쪽에 버티고 선 플라타너스 두 그루가 학교의 역사를 말해 준다. 플라타너스는 한 아름이 넘는 둘레로 가지가 삭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예전엔 이 나무아래서 꿈을 키우고,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으며, 알 수 없는 외로움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나는 일순 어린아이가 되어 나무들을 팔 벌려 안아본다. 귀를 대고 고목의 깊은 숨소리도 들어본다. 묘한 기운이 감돈다. 아름답고 포근하면서도 순간순간 소스라치게 한다.
학창시절 숙제를 안 해가 벌 청소를 한 날이면, 혼자서 텅 빈 운동장을 서성거리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저 나무들이 든든하게 지켜주었었다. 이제는 제 역할을 다한 놀이기구들만이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어 마음 한쪽이 허탈해진다. 졸업생인 듯 보이는 두 여성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졸업앨범이 없었다. 달랑 한 장의 사진이 그 시절을 말해줄 뿐이다. 뒷면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코팅을 하였지만, 누렇게 변한 사진속의 얼굴은 나로 하여금 어렴풋한 옛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징소리와 함께 막은 오르고 그동안 갈고 닦은 갖가지재능을 펼치는 학예회가 시작되었다. 학부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펼쳐지는 행사는 가을운동회 다음으로 컸는데, 나는 그때 노래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교실 두개를 합해 한쪽에는 무대를 만들고 나머지 공간에는 학부형들이 빼곡히 자리했다. 나는 무대 뒤 교실에서 대기하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긴장한 탓인지 용변이 급해,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그만 무대에 올라가질 못했다. 간발의 차이로 노래가 무산되었으니 무대 뒤에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초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기회였는데 망쳤다는 생각에 발까지 굴렀었다.
사진속의 교실은 목조건물이었는데,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인가보다. 옛 교실 터엔 ‘국민교육헌장’ 탑과 ‘자연보호헌장’ 탑이 새로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들에게서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조금 전까지 일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아쉬움에 잠겨 우두커니 서있다. 공간사이사이에 있던 연못과 동물사육장의 흔적이 쓸쓸함을 더해준다.
교실을 둘러보려고 다가갔으나 문이 잠겨 들어갈 수가 없었다. 유리창을 통해 안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교실엔 칠판만이 남아 있을 뿐 액자는커녕, 책상 걸상마저 없었다. 텅 빈 창고를 방불케 했다. 허탈감에 건물 뒤로 돌아가 보니, 지나간 시간으로 나를 되돌린 듯하다.
내 또래들의 학창시절은 동란動亂이후라서, 굶주림에 지치고 지쳐 허기를 끌어안던 때였다. 미국의 원조품인 밀가루와 우유가루를 배급받던 기억이 떠오른다. 옥수수 빵으로 굶주림을 달래던 시절, 그래도 교육열만은 높았다. 어른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고, 우리들은 한자라도 더 배우려고 교실 안으로 몰려들었었다.
교정을 한 바퀴 돌고나서 나는 다시 운동장에 섰다. 가을하늘아래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에서 그 옛날 운동회 때처럼 마음껏 달려보고 싶다. 뭐니뭐니해도 운동회의 꽃은 릴레이경주였는데, 어디선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순간,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찾았을 때의 놀라움 같은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우렁우렁하고, 어느 교실에선가 새나오던 여선생님의 풍금소리도 환청으로 들린다.
모처럼의 학교방문을 마치고 돌아서는 길, 주인 잃은 학교의 목련꽃이 배웅이라도 하는 양 미소를 보내온다. 논에 거름을 부리던 촌로의 바람대로, 새 주인들이 운동장 가득 들어차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덤으로 얻은 행복
박종은
승무乘務 중 종착역에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면 주변을 돌아보곤 했다. 관광 지도를 보고 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열차 내에서 승객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종착역이 여러 곳이 되다보니 각 지방사투리가 심해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차츰 승객들과 친숙해져 대화가 이루어지고, 각 고장의 정보를 쉽고 정확하게 얻을 수 있었다.
여행할 때면 동행자가 없어도 즐거웠다. 혼자라도 떠나야 직성이 풀렸다. 버스를 타고 차창에 스치는 주변의 풍경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그려 넣으며 목적지에 대한 설렘으로 일렁이기도 했다. 새로운 곳을 찾아 색다른 자연에 심취해 보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지만, 그것이 내게 역마살役馬殺이 될 줄이야.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에 대한 호기심을 동경하던 내 인생에 어느 날 변화가 왔다. 철도생활 10년 만에 열차의 여객전무가 되어 승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하루하루 다르게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십여 년 동안이나 번갈아 다니다보니 역마살이 끼었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그때마다 나는 슬며시 웃어넘겼다.
피서 철이 지난 후 야간열차 승무로 도착한 종착역은 여수역이었다. 도착하기 전 약 5분간은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데 차창 밖을 통해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출의 광경을 보았다. 그날은 낮 시간의 여유를 이용해 혼자서 ‘임포’가는 버스를 탔다. 임포에는 금오산 기슭 바위벼랑 끝에 ‘향일암’이 액자 속 풍경화처럼 걸치고 있다고들 하였다. 그래서 언젠가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어물시장에 도착한 버스는 시장판을 방불케 했다. 생선냄새가 진동을 했고 아낙네들의 사투리가 다투기라도 하듯 머릿속을 마구 흔들어댄다. 빈틈이 없을 정도로 승차하였지만, 밖에는 비가 내려 창문을 열수가 없어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 중에도 버스는 달렸다. 돌산대교를 넘어서자 생선회집이 즐비하게 늘어섰지만, 낮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정거장마다 하나 둘씩 내리더니 버스 안은 승객 몇 명만 서 있을 뿐 어느새 조용해졌다.
꼬불꼬불 끊어질듯 이어지는 몇 개의 산을 돌고 돌아 버스는 해변 가를 달린다. 차창사이로 들어오는 바다내음이 코끝을 맴돈다. 바닷가 양쪽에서 육지로 깊이 들어와 잘록해진 병목 같은 곳에 이르러 두리번거리니 옆 사람이 이곳이 ‘무술목’이라 한다.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패주해 도망가는 왜군을 유인해 섬멸했던 유서 있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포구마다 작은 집들이 나직나직 엎드려있다. 도로에서 얼마 안 되는 촌락마다 포구에 연이어 매어진 어선이 보인다.
종점인 임포부락은 10여 가구가 모여 사는 곳으로 임포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작은 배들을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 같은 항으로 한적했다. 나는 배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골목길을 따라 내려갔다. 마을은 오수午睡를 즐기는 듯 조용했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마을과 다름없는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그물을 만지고 있는 어부와 텃밭에서 고추를 따는 아낙네를 만날 수 있었다. 몇 마디 나누는 인사에서 그들의 삶을 엿볼 수가 있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하품을 하며 졸고 있다. 순간적이지만 한적하고 조용한 이 마을에 잠시라도 정착하고 싶은 작은 충동이 일었다.
거기서 다시 향일암으로 향했다. 금오산의 가파른 언덕을 10여분 올라가니 숨이 차 발걸음을 멈추고 이마에 땀을 닦았다. 한 줄기 맑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기대선 나뭇잎이 살랑거린다. 위를 올려다보니 바위틈에 구부러진 해송처럼 자리 잡고 있는 절이 보였다. 길은 바위로 이어지고…. 암자근처에 이르자 집채만 한 바위 두덩이가 빗대어 서 있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틈새로 몸집이 좋은 내가 지나가기엔 빠듯했다. 암자에서 만난 보살은 ‘여기가 바로 인간의 번뇌를 벗어나는 해탈의 문’이라 일러준다.
대웅전에서는 수험생을 위한 백일기도회를 올리고 있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무한히 펼쳐지는 남해의 절경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발밑에는 기암절벽과 동백나무를 비롯한 아열대 식물로 울창한 숲이 장관을 이룬다. 시원한 바다를 한 눈에 넣어 보며 풍경소리와 목탁소리 벗 삼아 묵상에 잠긴다. 한순간에 세상의 근심을 접은 듯 마음이 후련해진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이 장관이라 하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를 옮겨야 했다.
산 정상을 오르려고 사방을 돌아보았지만 길은 나타나질 않는다. ‘등산로’라는 팻말대로 따라가 보았지만 큰 바위들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바위 한쪽에 밧줄이 늘어져 있기에 힘껏 당겨 올라가보니 그 위에 길이 있었다. 길이라기보다 두루뭉술한 바위들이 무동舞童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산정山頂에 올라가니 바위들이 무리지어 경의를 표하듯 장엄한 모습으로 나를 반기는 분위기였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하니 시원한 바람이 땀을 훑어간다. 사방으로 트인 까마득한 지평선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만그만한 작은 섬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려 있다.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을 따라 펼쳐진 남해바다의 자태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한 척의 통통배가 잔잔한 바다를 깨우듯 지나간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내가 좌선한 자리가 물 위에 떠있는 듯 신선이 된 기분이다.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여유를 가져보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상황 앞에 굴복한 채 허둥지둥 살아온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이곳을 떠나면 또다시 기차바퀴처럼 바쁘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이대로 좌정坐定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린다. 두 다리를 포개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을 하듯 두 눈을 감아보았다. 지친 삶에 위안의 바람이 일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잠시나마 인생의 짐을 벗고,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한 여행길. 그 길에 얻은 것이 참으로 많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 살풀이를 하듯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달려왔던가 보다.
그런 역마살이 내게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지난 날 열차 승무 일을 하며 짬짬이 누리던 여행이 내겐 최상의 덤으로, 종종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