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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을 보면서(2) 무엇을 버렸을까?
2022년 12월 25일 / 행 3:1-10
2022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베드로처럼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소’라는 말을 하기 위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과감히 버려 아무 것도 없도록 해야 한다.
본문을 읽고, 설교도 하고, 듣기도 하는 대부분의 분들이 베드로가 말한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는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춘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돈이 한 푼도 없소)’를 바꾸어 ‘내게는 당신에게 줄 것은 없거니와’로 하였을 때에 나름대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뒤 이어 나오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우리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다.
1. 베드로의 이런 고백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 몇 개를 보면
베드로는 제자로 삼으시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동조하여 곧 배를 호숫가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눅 5:1-11). 분명히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였다.
➊ 누가복음 9:1-6을 보면 [열두 제자의 전도; 마 10:5-15, 막 6:7-13]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➋ 누가복음 18:18-30을 본다[부자 청년; 마 19:16-26, 막 10:17-27]. 베드로가 말하였다. `저희는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따라왔습니다(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분명히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하였고,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과연 이 때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렸는가? 나름대로 버린 것은 있겠지만 사도행전의 베드로나 바울과 같이 버린 상태는 아니었다.
➌ 마태복음 16:21-26을 보면,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이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일과 거기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었다[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막8:31-9:1,눅9:22-27]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절히 말씀드렸다. `주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너희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생명의 가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였는데, 왜 마태복음 16:21-26에서는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가? 그런데 요한복음 14:12-14을 보자.
➍ 요 14:12-14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하라. 내가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아들인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루어 주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찬양을 받으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➍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제는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다. 물론 만찬을 하신 후에 여러 사건도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마가의 다락방에 머물러 기도회를 주관하였고,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어떤 날 베드로와 요한은 제9시쯤에 성전에 기도하려고 올라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만나 ‘우리는 돈이 한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행 3:6)'라고 하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걸어 보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어보기도 하더니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야하는 길에는 사도행전 3장의 기적이 있어야 하고, 베드로와 요한 뿐 아니라 성도들은 모두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우리는 돈이 한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행 3:6)’라고 하면서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를 버리는 일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누가복음 5:1-11에서 ‘배를 호숫가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는라는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18:18-30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또는 생명의 길인 좁은 길로 가는 과정에서는 때에 따라 필요하기도 한다. ‘자기를 버린다’ 마태복음 16:21-26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라는 말씀이다.
2.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사도 바울이 이를 뒷받침하였다(빌 3:1-11)
베드로가 말한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즉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빌 3:1-11 / [진정한 구원의 길]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이미 여러 차례 한 말입니다만 여러분을 위해 또다시 당부하는 것이니 내 말을 단단히 들어 두십시오. 2)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위험한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그 악한 자들을 경계하십시오. 3) 몸의 한 부분을 잘라 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 예배만이 참할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랑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4) 그러나 만일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에 충분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면만을 본다면 확실히 나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5) 나는 순수한 유대인 혈통을 이어받아 오랜 전통의 베냐민 가문에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유대인의 표지를 받기 위해 할례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는 진짜 유대인입니다. 게다가 유대교의 모든 율법과 관습을 지키기를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는 바리새파 회원이었습니다. 6) 얼마나 그악스러웠던지 교회를 모조리 핍박했고 유대교의 모든 규칙과 규정을 빠짐없이 지키려 온 힘을 쏟았습니다. 7) 그러나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8)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9) 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거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을 집어치우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0)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다 내던졌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11)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분이 가지는 신선하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을 몇 군데 더 묵상하고자 한다.
바울의 신앙고백(고전 15:9-10) / 사도 바울이 일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거짓 전도자의 가르침에 속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가 처음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주었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상기시킨 내용이다. 그리고 이 복음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미 받은 것’으로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진리와 사실들을 최초에 목격한 허다한 증인들이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확실하게 전해 준 것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해 준 이 복음의 핵심을 계속하여 붙잡아야 한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간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영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자신을 만나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늘날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오늘날 자신의 참모습을 잊고 살고 있는 신앙인들은 바울의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아가 이 말씀은 교회에서 많은 사역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➊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 교회 안에는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사는 신앙인들이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다 그렇다. 이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종종 교회를 위하여 봉사를 잘 하다가도 실족하여 넘어진다.
사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조건으로 보면, 키가 작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온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늘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겸손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평생 사역을 하면서도 실족하는 일이 없었다.
사람은 자신의 참모습을 망각하면 교만하게 되고 시험에 들기 쉽다. 그래서 넘어지게 된다.
➋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 바울은 어떤 사도보다도 더 많은 사역을 했다. 전도여행을 할 때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졌고,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그에게는 훌륭한 제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영성’이다. 우리는 바울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➌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를 핍박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게 된 것에 대하여 ‘그것이 늘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사역을 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은 주님의 사역에 쓰임 받기는커녕 구원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교만해지기 쉽고,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기가 쉽다. 그리고 은혜가 메마르면 감사할 것이 없어진다. 따라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고백할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깨소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까지 고백하였다.
갈 2:19-20 / 그 많은 율법을 다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성경을 읽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결코 입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20) 그리스도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그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덕분에 지금 내가 참생명을 얻었습니다.
갈 6:14 / 그러나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십자가때문에 나는 오래 전에 이 세상의 온갖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이 세상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빌 4:11-13 / 내 처지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가난을 이겨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압니다. 배가 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는 법을 몸에 익혔습니다. 13) 내게 힘을 주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할 수 있습니다.
딤전 1:12-17 / [자비에 대한 감사]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선택하셨을 뿐 아니라 충실하게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13) 과거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하며 다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며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는 내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14) 오, 우리 주님은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요. 주님은 내가 어떻게 주님을 신뢰해야 하며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16)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크나큰 관용으로 감싸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나 같은 것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7)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 영원 무궁토록 함께 하소서!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결코 죽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일한 분입니다. 아멘.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죽기 전에 꼭 남기고 싶은 말, 가장 소중한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이다. 사도 바울의 유언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시절 AD 67년 경 참수당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 디모데후서는 바로 그 전 해 가을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이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신앙의 결산, 마지막 신앙고백이다.
바울의 마지막 신앙고백(딤후 4:6-8) / 내가 이렇게 당부하는 것은 그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 나는 주님을 위해 오랫동안 어려운 싸움을 치러 오면서 주께 한결같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8) 월계관이 하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내게 줄 월계관 말입니다. 이것은 내게만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열심히 기다리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서 베드로가 버린 것은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찾아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리자.
▶ 빌립보서 3:1-11을 좀 더 보충하여 설명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❶ 바울은 우리에게 자기가 열망하였고 얻으려고 애썼던 것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말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었다. 즉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경험으로 아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실제적이고 효력이 있는 지식이었다. 더구나 그가 가진 지식의 지식 중에서도 가장 고상한 지식이었다. 기독교 신앙 혹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는 여러 뛰어난 인간의 지혜와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을 넘어서는 풍성하고 초월적인 고상한 지식이 있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지식은 타락한 죄인들의 정황에 알맞은 것이며, 그 지식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❷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또한 바리새인으로서의 특권을 왜 포기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러나’ (7절)라는 말로 자신의 자랑스러움을 표현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란 그가 앞서 말한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이다. 이어서 ‘모든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세
상적인 쾌락과 또한 외적 특권들 즉 그리스도 대신에 그 마음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것들 또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가치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그것들을 해로 여긴다고 하였다.
바울은 8절에서 ‘그(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라고 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바리새인으로서의 그의 모든 존귀와 이점들을 내어버렸다. 그리고 복음을 고백하고 전파함으로 따라오는 모든 불명예와 고난을 견뎠다. 기독교 신앙에 닻을 내리게 되자 거기에다가 희망을 걸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특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을 배설물로 찌꺼기로 여겼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비해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에 경멸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요, 내 주인이요, 나의 목적이요 푯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가치관의 중심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목적을 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면 참 신앙은 어떤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이요, 주인이요, 중심이 되는 것이 신앙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가치 변화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속사람이 변화되고, 그 가치관이 전적으로 달라진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달라진 것이다.
믿기 전에는 이런 것이 소중했으나 이제는 저런 것이 소중하다. 전에는 이런 일에 미쳤으나 이제는 그 정반대의 일을 위해 내 온 정성을 쏟고 산다. 이쯤은 되어야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 믿기 전에 좋던 것이 아직도 좋다면 이런 사람은 아직 예수 믿는 사람이라 단언할 수 없다.
전에는 세상 것이 나를 유익하게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해롭다. 취미, 생각, 남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자기만의 신비로운 기쁨을 스스로 향유하며 산다. 이런 것을 가리켜 절대 가치 변화라고 한다. 이렇게 절대적인 가치가 변화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아직도 가치관이 변화되지 못해서 먹고 마시는 세상 것이 좋고, 그 전의 것이 좋아 보이고, 비기독교적인 것이 좋다면 아직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예배하고, 영적인 것을 중히 여기고, 예수님을 자랑하라고 하였다. 그의 긍지가 예수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전에 좋아하던 것을 포기했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마 13:44)’에서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후 돌아와서 집, 땅 할 것 없이 있는 것을 다 팔았다. 밭에 감추인 것이 너무도 값지고 귀한 것이므로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팔아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이 사람이 그것을 팔기를 주저했다면 그는 보화의 가치를 깊이 모르는 사람이겠으나, 저 밭만 사면 된다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가 다른 것들을 아낌없이 팔아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절대 가치를 평가하시기를 부모나 형제나 전토나 무엇이든지,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더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눅 14:26, 33).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버리고 따르라, 부인하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만일 여기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버리고, 손이라도 찍어 버리라고 하셨다(마 5:29, 30).
바울은 옛사람의 가치관, 옛날에 좋아하던 것을 깨끗이 버렸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즉 스스로 상실하고 스스로 포기했다고 하였다. 한 걸음 나아가 바울은 ‘이전에 유익하던 것을 지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라고까지 말했다. 전에는 그렇게 소중하여 잃어버리지 않고 품고 살았던 것들이 이제는 소중하지 않고 무관심할 뿐더러 앞으로는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해로 여긴다’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 유익하던 것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해만 될 뿐이요, 오직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만이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에 좋아하던 것을 아낌없이 버리고, 그리스도로 인한 유익만을 최고로 즐기며, 충성을 다 할 때에 바로 이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결론으로 이러한 삶을 산 몇 사람을 본다.
1. 삭개오(눅 19:5-10) /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자 삭개오를 보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삭개오야! 빨리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무르겠다.' 6)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7) 그러나 군중은 `그분이 소문난 죄인의 집 손님이 되시다니' 하고 투덜거렸다. 8) 삭개오는 주님 앞에 일어서서 말하였다. `선생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세금을 누구에게 더 부과한 것이 발견되면 제 돈으로 네 배를 갚겠습니다.' 9-1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이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의 자손중의 하나이다. 나, 인자는 이와 같은 이들을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
2. 모세(히 11:24-26) / 모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애굽 왕의 손자로 불리는 것을 거절한 것도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잠시 동안의 쾌락을 위해 죄에 빠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26) 애굽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장차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큰 상을 더 바란 것입니다.
3. 믿음의 사람들 / 하나님을 위하여 거절할 것은 거절하고 택할 것은 택한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기 위하여 왕의 술과 포도주를 거절했다. 느헤미아는 무너진 조국을 생각하면서 왕의 진미를 거절했다. 요셉은 순결하게 살기 위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거절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호의호식을 거절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얻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주후 2세기, 서머나 감독 폴리캅은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 되기 위해 스스로 화염속에서 순교했다. 3세기, 안토니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집트의 깊은 광야에서 54년을 살았다. 14세기, 아시시의 성 프란치코는 청빈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포목상 아버지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나병병자의 친구가 되었다. 16세기, 독일의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법관이 되기 위해 다니던 법과대학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7세기, 영국의 땜쟁이 존 번연은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 12년을 살다가 나와 또 전도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18세기, 미국의 벤쟈민 프랑클린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기 위해 매일 10가지를 버리며 살았다. 과음, 나쁜 말, 낭비, 헛된 시간, 게으름, 화, 분노, 그는 자기 전에 매일 하룻동안 무엇을 버렸나 점검했다. 20세기, 한국의 손양원은 예수 그리스의 사랑에 붙잡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아들로 삼아 죽을 때까지 사랑했다. / 20230101 사도행전 3:1-10을 보면서(3) 무엇을 가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