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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시편 84:1~4, 10~12)
2024년 11월 10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하미요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84:1~4)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0~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시편 말씀인데, 제가 항상 감동을 받는 말씀입니다. 애잔하게 제 마음을 깊이 파고들어서 어떤 천상의 느낌을 갖게 하고,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하게 했던 그 말씀을 오늘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여기에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우리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여호와’라고 돼 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여호와’라고 기록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 ‘로드(LORD)’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느냐 하면, 원래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 않습니다. 부를 수가 없습니다. 뭐라고 불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원래 그분이 이름이 있어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혹 그 이름을 알더라도 이스라엘의 정서는 절대 부르면 안 된다고 해서 기호로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신’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뭐라고 부를지 몰라서 어느 세월엔가 ‘주님’으로 부르는 것으로 그냥 제한이 되었습니다.
다만, 원래 하나님을 ‘YHWH’로 이렇게 표기를 했는데 모음이 없어서 뭐라고 발음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우리는 그냥 ‘로드(LORD)’로 부르자.” 한 것입니다. ‘주’, 우리의 ‘아도나이’,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로드(LORD)’로 하면 되는데, ‘YHWH’가 ‘아도나이’ 모음이 합쳐져서 고서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그걸 읽었습니다. 읽으면 안 되는 것인데, 발음을 그냥 로드(LORD)로 했어야 됐는데, 조금 눈치 없게 눈에 보이니까 그것을 입으로 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가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셨다 가셨으니 그럼 안 계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는 다시 오십니다. 그가 우리를 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시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여호와’가 아니라 그분이 사실은 로드(LORD)입니다.
신약성경에 ‘여호와’란 말이 따로 없습니다. 첫 자부터 ‘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볼 때, 이스라엘 역사 내내 ‘여호와’, ‘여호와여’로 부르다가 예수 오신 다음부터는 ‘여호와’는 ‘여’ 자도 안 나오고 ‘주여’로 바뀐 것 같은데, 원래가 그냥 ‘주’입니다. 주님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말이 나오면 ‘우와, 고전! 감독님이 고전을 좋아하는가 보다!’ 하는데, 옛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정말 주님을, 주님의 그 나라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표현돼 있습니다. ‘내 평생에 악인의 집에서 천일을 있는 것보다 주님의 궁정에서 단 하루만 있어도 좋다.’ 했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주님의 따뜻한 품이 그렇게, 실존적으로 그가 계신 곳에 함께 있기를 얼마나 소망하고, 이 세상에 얽매여서 고통받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딱 내 마음이고, 우리 성도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주님의 품에 빨리 가고 싶고, 이 괴롭고 악한 세상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나날이 견딜 수 없는 억울함은 점점 불어나고 쌓여져 가지만, 복수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는, 더욱 그날을 사모하는 그런 마음이 잘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또 하나님의 교회를, 또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그 영적 영역을 잘못 이해하면 이 모든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가 버려야 될 오해가 한 가지 있는데, ‘교회의 시스템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다 하니까 ‘아, 나 교회 다니지. 침례도 받았고, 교회를 한두 달 다닌 것이 아니라 10년도 넘게 다녔으니까 나는 당연히 구원받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제도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그냥 교회의 체제입니다. 교회 시스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사도들 통해서, 또 사도들의 제자들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양육하는 어떤 하드웨어일 뿐입니다. 우리는 소프트웨어가 개인적으로 다 완성이 돼야 됩니다. 교회 시스템은 사람들 양육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구비해 주신 물리적인 장치일 뿐입니다. 거기에서, 그 훌륭한 환경 속에서 거기에 맞게 우리를 준비해야 됩니다.
전에 우리 교회는 누가 말씀을 전하면 ‘저 목사, 말씀 잘하나 안 하나 보자. 아유, 정말…’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목사가 나오면 ‘한번 보자.’ 하는 식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100날이 있어도 하나님 말씀 못 듣습니다. 그런 사람은 수십 년 이곳에 있어도 하나님 말씀을 한 번도 못 들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유명한 사람이 설교한다 하면, ‘거기는 뭐가 있겠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선지자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많이 죽임을 당하고, 무시당하고,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이 핍박받을 것에 대해 불쌍히 여기시고 잘 기억하고 계십니다.
교회 시스템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교회 시스템에서 우리가 겸손하게 거기에 맞출 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시스템은 하나님께서 발을 내 딛으실 때 그 발을 받쳐드리는 바탕과 같은 것입니다. 그 주님을 영접하는 자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기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교회의 시스템 안에 있으면 구원은 이미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목사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령이 죄에 대해서는 믿지 않음으로 책망하신다고 하니, 믿기만 하면 다 된 것이라 여깁니다. “너 믿어 안 믿어.” “나 믿는데?!” “아, 그러면 된 거야.” 이렇게 단정해버립니다. 그리고 목사들이나, 다른 성도들을 보니 다들 “할렐루야! 구원, 구원~” 하고 있으니 ‘그럼 나도 구원되는 거구나.’ 하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서로서로 의지해서 신앙의 수준이 다같이 점점 잠수해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신앙의 어떤 수준이나 도덕심이 낮아져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이 게으름 피우느라고, 자기 할 일을 쉽게 하느라고 수준을 낮추고 그렇게 해석을 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물론 누구도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만큼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부족한 것을 주께서 도와주시려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로 채워 주시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안 되고 있습니다. 목회자고 일반 성도들이건 간에 이미 자기 속에 이기심이 가득합니다.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입니다. 목사면 목사, 평신도면 평신도, 직분자면 직분자 할 것 없이 다 그렇습니다. 다들 마음속의 넘버원 생각은 ‘누구에게도 꿀리지 마. 누구도 너를 무시하게 하지 마.’ 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무서워. 손해 보지 마.’ 하는 식으로 교회 와서도 자기가 눌리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과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매사에 ‘나의 성공’, ‘나 잘되는 것’에 대한 이기심이 계속 발동돼 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말씀드리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께 속한 그 지식에 의하면, 그런 태도를 갖고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구원 안 받은 것입니다. 구원은 자기 이기심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자기 나라를 위해 한 사람이 목숨을 바쳐서 나머지 모두를 살리듯, 우리 각각이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모두를 구하기 위해 어떤 한 사람이 희생하는 명장면들이 있습니다. ‘야, 가야 돼! 빨리 가야 돼!’ ‘아니야, 아니야. 내가 남을 게!’ 우리 모두가 그렇게 돼야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얻는 사람은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을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다 내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자녀가 될 사람은, 주의 자녀가 될 사람은 주의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비워져 있어야 되거든요? 원래는 그 안에 이기적인 것이 완전히 빠져야 합니다.
‘신앙은 믿고, 안 믿고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라고 하는 식의 생각은 60년대, 70년대 부흥시대 때나 했던 말입니다. 신앙을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의를 행하느냐, 안 하느냐로 따진단 말입니다. ‘믿느냐, 안 믿느냐’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말 의를 행하는 사람이냐 아니냐로 결정 짓게 됩니다.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믿는 자는 의를 행하는 자인 것입니다. 자기의 이기심, 세상의 것, 자기 죄에 속한 것을 버리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자는 곧 의를 행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적인 행위들은 다 하는데 그 속은 간사하고 거짓되고, 아주 악의가 가득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악의’ 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 간다? 속에 악의가 가득하고, 가증스럽고, 이기적인데 다른 성도들을 가르칩니다. 성도들과 어우러져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처럼. 근데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을 전혀 안 합니다. 오히려 ‘나를 괴롭혀? 복수다!’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한 다음부터 그런 악의를 가진 사람들과 자주 부딪히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이런 쪽에는 빛으로 쓰시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믿는 것으로 다 끝났다!’ 이렇게 판단하지 마세요.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교회를 참으로 사랑합니다. 물론 그렇게 온 세상을 다 사랑하진 않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원하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 형제자매는 한 단위로서 우리 안에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 나 이런 교회 싫어.” 교회를 어디 헬스클럽 다니다가 옮기듯이 다른 교회로 옮겨 갑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운명입니다. 나의 운명 가운데 내가 가진 것도 없고, 불행하고, 뭐든지 세상에서 안 된다고 해서 그로 인해 좌절할 것이 아니라, ‘공평하신 하나님이 내게 주실 것이 많이 있구나.’ 오히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 뭐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교회를 내가 그냥 확. 아유 그냥 뭐…’ 이렇게 교회를 깐보지 말고, ‘내가 주께 할 일이 많구나.’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목회자고 성도고 속이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왜 예수를 믿는 것이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데. 하나님이 당신 마음에 있다면, 당시 심령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주인입니다. 물론 아무도 매사에 100% 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100% 신자는 없습니다. 다 안 됩니다. 수적으로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여기서는 최고의 신자라도 하나님 마음을 50프로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50프로 정도 된다 해도 제 생각에는 굉장히 훌륭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부족할지라도, 저는 우리 심령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있어서 그 양심이 자기 전체를 컨트롤하고 있으면 좋은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욕심 낼 수도 없다.’
신앙생활이 뭔지 아십니까? 젊은 영혼들도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교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줘야 되니 잘 들으세요. 하나님이 이 현장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어디 다른 데 계시다가 예배 시간에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의 행동반경, 하나님께서 주로 계시는 곳이 어디일까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10)
여기 ‘폐’라는 말이 나오는데, ‘폐부’라는 것은 생각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내장. 사람은 마음의 정서적인 모든 활동을 몸의 내부에서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이 세상에 수백만 가지의 것들이 있는데, 심장만큼, 사람의 마음만큼 부패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이 타락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했는데, 교회에는 성직자고 일반인이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타락해 있는 데에서 탈출해 나와야 했어야 할 자들이었는데 탈출을 안 했습니다. 탈출을 아주 조금밖에 안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싹 다 빠져나오진 못하더라도 ‘내 운명은 주 안에 있습니다.’ 하고 이것으로 자기를 드려야 되는 자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아프게 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지금도 사태로 가뜩이나 어려운데, 그렇게 교회를 아프게 하는 자들과 손잡고 정보를 주고받는 자도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베풀고 도와주었지만, 그가 더이상 욕심을 내지 못하게 제한하자 악한 자들과 손잡고 나를 괴롭게 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려는 그들의 계획은 하나도 헛되지 않고 제 속에 고통으로 뚫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저에게 고통을 주면 ‘뭐 마음대로 하시오!’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그대로 다 당해서 아픕니다. 총알을 다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수하지 않습니다. 복수는 하나님만 하시는 것입니다. 보응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27절에 보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고 다닙니다. 감찰하시다가 보니 어떤 영혼을 위해 성령이 하시는 것을 함께 듣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사람을 돕고 계시기 때문에.
또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너희 사람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중심을 본다(삼상 16:7).[2]’ 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만 보고 모든 걸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또 역대상 28장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영역이 맞지 않으면 버림을 받습니다.
아무리 교회 시스템 안에 있어도 주를 위해서, 주의 교회를 위해서 주의 목자를 돕는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가 일한 대로 다 보응이 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행실의 결과로 판단한다(계22:12).[4]’ 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말씀이 수없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일한 대로 상도 주십니다. ‘주님, 내 교회 사랑하느라 많은 아픔을 당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은 안 했지만, 모든 게 다 아픕니다.’ 그 사람이 일한 대로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누가 내 마음을 보랴? 하나님께 생각이 있으랴? 하나님에게 생각이라는 기능이 있으랴?’ 합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는 주님께 이것 저것 다 잘 해 드린 줄 알고 있었는데 주님이 “너는 내가 아플 때, 내가 피곤할 때,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내가 굶주렸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이 필요할 때 이 사람은 거기 전혀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내가 필요할 때 너는 내 곁에 없었느니라.” 이 사람은 자기가 욕심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를 옮겨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한 곳에서는 그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겉으로만 찬송하고, 겉으로만 말씀하고, 교회는 다니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여전히 옛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지막 날, 어떤 사람이 주의 나라로 갈까요?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면 다 주의 나라로 갈까요? 민주주의식으로 교회를 다루고, 교회가 조금 잘못하면 세상을 법정을 불러옵니다. 이는 교회가 대 위기에 몰려 있는 것입니다. 천국 갈 사람은 몇 백만 분의 한 명 정도의 꼴로 굉장히 들어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교회에 대해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 심령을 구원하십니다. ‘구원’이란 것이 뭡니까? 행위뿐 아니라 내 마음으로는 악한 것이 자꾸 나옵니다. 그러나 정죄 받은 우리 심령이 ‘주여, 당신이 도와주십시오.’ 할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갖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심령을 강건하게 주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나 혼자는 죄를 벗기 어렵습니다. 난 그분이 항상 필요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아마 죽기 두 시간 전가지도 죄를 범할 것입니다. 나로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주님의 끝없는 긍휼과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고의로 ‘주님, 저리 가세요!’ 하고 범죄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평생 주께서 이 어두운 골짜기에서 나를 구원해 가십니다. 내 인생이 지금부터 40년 남았으면, 40년 동안 날 구원해 가시는 것입니다.
구속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구속을 오해하지 마세요. 구속은 무엇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죄를 그가 가져가신 것, 죄를 위해 그가 값을 치른 것입니다. 다만, 이제부터는 주님이 나를 보호하셔야 합니다. 이제 옛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옛사람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감시를 받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하늘의 영광입니다. 오늘 주님이 내 주인 되시고 내일은 나와 함께 계신 주 예수는 우리의 형 같은 분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민주주의식입니다. 이 세상의 인식으로 구원을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이렇게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다 지옥에 넣으시랴?’ 왜 못 하실까요? 하나님은 온 세상을 홍수로 멸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전체를 한 가정만 빼놓고 유황불로 태우신 적도 있으십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 마음의 할례를 받고, 마음이 회개한 사람을 하나님이 그나마 돌보시고 그를 용서하시고 그를 이끄십니다. 교회에서 제멋대로 해서 하나님께 범죄하는 자가 없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간과하고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오늘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혼란이 없기를 바랍니다. 혼동하지 마세요.
우리 젊은 영혼들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시고,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시기 바라겠습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런데 교회만 위하다 보면 저는 손해 보는 것 아닙니까? 저도 어느 정도의 이기심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제가 손해 보잖아요?’ 맞습니다. 여기에 ‘어느 정도 선’이란 것이 없습니다. ‘이만큼은 양보하고, 이만큼은 너의 것을 생각해라. 한 25% 너를 위해, 그리고 75%는 주의 교회를 위해 써라.’ 이렇게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요구하십니다. ‘너 90프로 내게 달라.’ ‘너 20프로 내게 달라.’
다만 ‘내 이기심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마음은 주님 앞에 전부 깨져야 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자기의 삶의 의미를, 삶의 바탕을, 삶의 발판을 깨 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머리에 붓고, 그 삶을 깼습니다. 그가 한 일은 단지 ‘귀한 걸 드렸다’는 의미를 넘어 ‘주님, 내 삶은 여기서 끝입니다.’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제부터 내 생명입니다.’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속을 보시는 하나님을 무시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고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의 참 구주, 진정한 주님, 오늘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또 내 삶 속에 계시면서 긍휼로 나에게 베푸시는 내 하나님, 나는 한시도 견딜 수 없이 그분 안에 있기 원합니다. 천날을 악한 세상에 있기보다 한날을 주님 안에 있길 원합니다. 주여, 우리의 부족한 것을 아시오니 우리를 너그럽게 봐 주시되, 감당할 수 있도록, 오직 당신의 품 안에만 있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품에서, 주의 궁정에서 한날이 있더라도 내게 행복이오니, 주여, 우리에게 당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들은 대로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을 향한,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안에 있는, 또 그를 기쁘시게 하는 정말 진정한 삶을 살도록 우리 성도 모두를 도와주시옵소서. 거짓되고, 가증하고, 죄로 있던 우리에게서 한번 깨져서 빠져 나왔어야 될 우리가, 그렇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빠져나오고, 이제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신앙의 그 마음이 온전히 되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마 8:27)
[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3]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4]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출처] 20241110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시편 84:1~4, 10~12) 성락교회 주일연합 김성현 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