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의 생전에 특별한 임무를 맡기려고 부르실 때에는 그에게 또한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하늘의 은사와 은총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섭리로서 그 사람에게 일생의 사명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구도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프랭크 더프의 삶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1913년 10월, 24세의 나이일 때 프랭크 더프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가입하였습니다. 이 행동은 그의 내면생활과 외적인 활동에 있어 대단한 변화를 가져다준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재미있는 일, 특히 운동에만 온통 빠져 있었습니다. 운동이라면 무엇이든지, 예를 들어 수영, 달리기, 자전거와 테니스 등 닥치는 대로 다 해보았습니다. 이런 운동을 하느라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썼습니다.” 몇몇 공무원 동료들이 그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가입시키려고 시도하였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빈첸시오회에 가입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한다는 생각은 전혀 흥미를 끌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극히 평범한 세속적인 젊은이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많은 수의 빈첸시오 회원들과 친하게 되었고 그들을 좋아했지만 그들의 가입 권유에 넘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처에서 일하는 동료 중에 잭 오 캘러건Jack O. Callaghan이라는 사람이 그를 빈첸시오회에 데려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프랭크 더프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그가 성공시켰는데, 그 이유는 제가 그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가입 동기가 100%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형태의 동기이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후에 교본에서도 레지오 단원의 첫 번째 과제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는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레지오의 사도직 활동은 친교를 통한 사목 활동입니다.
그 회의 회원으로서 첫 회합부터 그는 거기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진지함으로 영성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이틀 밤 정도만을 그 활동에 투자했습니다. 하루는 회합에 참석하고 하루는 배정된 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곧 일주일 모두를 그 사도직 활동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완전히 빠져들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당시 극도의 빈곤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누구도 그때의 빈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때 발간된 통계에 의하면, 9만여 명의 더블린 주민이 단칸 셋방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여러분은 더블린 인구의 대다수가 비참한 조건 아래에서 생활한 것을 다소나마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가족이 한 방에서 지냈고, 우리 창설자가 말하기를 방 하나에 13명에서 14명까지 사는 사람들도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빈곤과 불황, 여러 질병, 과도한 주벽과 잦은 범죄, 때로는 폭력 등의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레지오가 창설되고 그 후 몇 년간 프랭크 더프가 이러한 빈곤에 처한 수천 곳 이상의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전까지 이런 상황은 수년간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창설자에게 가장 뜻 깊고 영구적인 교육이 되었고, 이를 레지오에 접목시켜 교본에 담긴 위대한 원리 안에 서술되었습니다. 레지오의 초기는 창설자의 경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일례로 프랭크 더프가 만일 가정 방문을 레지오의 주요 활동으로 표명했다면, 그것은 그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가정 방문으로부터 사도직 활동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물질적인 지원을 제한하고 동시에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의 영성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애쓰라는 것 또한 순전히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얻은 많은 교훈들을 올해의 훈화에서 다룰 계획입니다.
프랭크 더프의 새로운 삶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활동을 급격히 늘려 나간 것만이 아니라, 그의 사도직 활동과 병행하여 그리고 그 활동 안에서 자신의 영성적인 삶을 엄청나게 성장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회에 가입하고 맞게 된 사순시기 동안, 그는 매일미사에 참석하여 영성체를 하였고 이후 남은 생애 동안 이를 꾸준히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묵주기도와 성모칠고 묵주기도(Seven Dolors Rosary : 성모칠고를 묵상하며 7단 묵주를 사용)도 바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직장에서의 점심시간에는 ‘보상자補償者인 마리아 수녀원the Convent of Marie Repatrice’에서 ‘성시간聖時間’을 지냈고, 일이 끝나면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바로 성당으로 가서 또 한 시간의 성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또 성모소일과Little Office of Our Lady를 바치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라틴어로 된 성무일도Divine Office를 바쳤으며, 죽을 때까지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하루에 총 4∼5시간을 기도하는데 썼던 것입니다. 그는 또 영성 서적, 특히 성인들의 삶에 대한 독서를 위해서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피정도 자주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매년 락 더그Lough Derg에서 피정을 하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질은 과연 영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하게 기도에 전념하고 적극적인 사도직 활동을 수행했다는 것은 프랭크 더프가 받은 성령의 은사를 증명해 주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기도와 사도직 활동 수행, 둘 다 커다란 재미를 주고 끝까지 호의를 보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적이고 수수한 방법으로 즐겁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목적으로 특별한 자선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일생에서 영혼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주요한 관심사와 목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몇 개월에 걸쳐 우리의 창설자에게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끼친 영향을 밝히는데 시간을 더 들여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