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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편지(26)
사랑스럽지 않은 모습까지도 사랑하라
사랑이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삶과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도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게 한다.
상대방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스럽지 않은 부분까지도 사랑한다.
우리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강렬한 사랑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 '공생'이 불가능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리감이 상대방의 어두운 모습을 덮어버리게 한다.
사실 공간적인 친밀감 때문에 더욱 쉽게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누군가 가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일상적인 습관이나 복잡한 내면까지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처음 사랑할 때 나타내는 표지를 거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흔히 우리는 첫번째 표지가 최종적인 신호인양 착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착각은 현재 진행중인 사랑을 식어버리게 하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상대방에 대해 좋은 말만 하게 된다.
상대방의 의도를 금세 알아듣고 칭찬하기 위해서만 입을 연다.
칭찬은 내면을 드러낸다.
칭찬은 상대방 안에 숨어 있는 선함을 드러낸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말을 신비가 루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은 무한한 바다다.
그 바다가 비추어 주는 하늘은 파편처럼 흩어져 내리는 물거품마냥 보인다.
사랑의 파도가 하늘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것을 아는가.
이 세상에 사랑이 없으면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이 없다면 어떻게 나무가 잎과 꽃을 피워낼 수 있겠는가?
식물까지도 생명(영)을 얻으려고 자신을 버리지 않는가!
성모님은 성령의 향기로운 손길로 아기 예수를 잉태했다.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영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각 생명체(원자)는 완전함에 매료되어 그 완전함을 좇아간다.
그렇게 좇아가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한다.
-‘길에서 만난 행복‘중에서 /루이스 알렉산드레 솔라누 로씨 지음
누가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인가?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의 이 말씀을 이야기한다.
한번 누가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는 시체를 예로 들어 말하였다.
“시체를 들고 당신이 좋아하는 어느 곳에 갖다 놓아 보시오.
그럴 때 그 시체는 옮겨진 데 대해 반대하지 않고
어디에 놓여지는가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고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도 항의하지 않음을 볼 수 있지 않소.
그것을 왕좌에 놓으면 그것은 위로보지 않고
아래로 내려다 볼 것이오.
또한 당신이 그 시체에다 왕의 옷을 입히면
그것은 전보다 더 창백하게 보일 뿐이오.
이와 같은 사람이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오.
그는 그가 어디에 놓여있든지 꺼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보내지도록 애쓰지도 않소.
만일 그가 성직으로 직책이 높아지면 그는 자신의 겸손을 지니며,
그가 존경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그는 자신을 가치없는 존재로 생각할 것이오.”
(보나벤투라, 대전기 6.4b)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
성전은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순례자들은 과월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희생 제사를 바치러 오는 사람은
자연히 희생제사의 제물을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희생제물은 레위기의 기준에 의해 검사와 판정을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갖가지 등급의 희생동물을 사고 파는 거래가 활기를 띄었다.
양과 비둘기 장사꾼들은 점차적으로 성전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와서
성전으로 통하는 통로를 막히게 하였으며, 마침내 일부 장사꾼들,
특히 안나의 자손들은 솔로몬 현관입구에 들어와서
비둘기와 가축을 팔았으며 환전장사를 하였다.
축일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전 경비를 조달하기위해 반 세켈을 바쳐야 했다.
요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외국돈은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안나의 자손들은 높은 이윤을 붙여 환전 사업을 벌였다.
성전주변에서는 티로와 시리아, 에집트, 그리스와 로마의 갖가지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환전 장수들 사이에는 암시장이 성행하였다.
당시 상황은 너무도 부패해서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도둑의 소굴" 이라고 부르실 정도였다.
주님께서는 기도소리와 장사치들의 불경스러운 시그러운 외침소리가
뒤범벅이 되고 있으며 짤랑거리는 동전소리와 울부짖는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정신이 없는 무질서한 상황을 보시고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게 되셨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요한2,17)
주님께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성전구역은 이방인 구역 동편으로
솔로몬회랑이라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2,19)
사실 주님게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거주하시는 곳이다.
너희는 역사 깊은 성전을 더럽혔다.
그러나 이제 도 하나의 성전이 있다.
나는 부활하여 모든 민족이 새로운 성전을 차지하게 하겠다.
주님께서는 당신 몸을 가르켜 이렇게 말씀하신것 같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의 성전이었으며,
하느님게서 그리스도 안에 육체적으로 온전히거하셨다.
이들은 사십육 년이나 걸려 세운 조로바벨의 성전을 두고 말하였을 것이다.
이 성전은 기원전 559년 치루스랑 재위 원년에 시작해서
다리우스왕 9년인 기원전 513년에 완공되었다.
그들은 이 성전을 성 금요일에 파괴하게 될 것이며,
이 성전이 파괴되는 순간 지성소에 걸려 있던 휘장이 위 아래로 찢어질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육체의 휘장도 갈라지면서
참된 지성소인 하느님 아들의 성심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 다른 기회에 바리사이파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똑같은 성전의 비유를 사용하신다.
"잘 들어라,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마태오 12,6)
그리스도의 몸 만큼이나 조직적으로 파괴된 성전은 일찍이 없었다.
성전 지붕인 주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었으며,
성전의 기초인 주님의 발은 못으로 뚫렸으며,
성전의 좌우 날개 부분인 주님의 손은 십자가 모양으로 벌려졌으며,
지성소인 그분의 심장은 창으로 꿰뚫었다.
-출처, 빛과 소금에서
죄와 함께 자비를 「자비를 구하는 기도
오, 주님. 큰 스승 니느웨의 이사악이 말했습니다.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이 죽은 이를 일으키는 사람보다 훨씬 크다.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한 시간 울 수 있는 사람이
온 세상을 가르치는 사람보다 크다.
오, 주님.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저지른 범죄 행위에 갇혀 죄악으로 가득 찬 제 진면목을
외면하는 것은 당신 자비와 만남을 회피하는 수단임을 압니다.
당신 자비를 경험하지 못하면 저는 여전히 저의 죄에서 달아나는
것입니다.
오소서, 주님. 오시어 제 안의 불안과 근심,
두려움과 죄의식의 두꺼운 껍질을 부수어
저의 죄와 더불어 당신 자비를 보게 하소서.”
-「살며 춤추며」에서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개구리의 기도 가운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거지 한 사람을 식사에 초대했다.
기도를 마치자 그 거지는 하느님을 들먹이는 건
질색이라며 저주를 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은 화가 치밀어서 그 불경스런 말을 하는 자를
밖으로 내쫓았다.
밤에 기도를 할 때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50년 동안 나를 저주하고 욕했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날마다 먹을 양식을 주었다.
그런데 너는 단 한끼도 그를 참을 수가 없었더란 말이냐?"
사랑과 침묵과 기도의 사순절에
주님,
제가 좀 더 사랑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사랑을 새롭히는 사순절이 되면
닦아야 할 유리창이 많은 듯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제 삶의 일과표엔 언제나
당신을 첫자리에 두고서도
실제로는 당신을 첫자리에
모시지 못했음을 용서 하소서
<올해에도 우선 작은 일부터 사랑으로>
이렇게 적혀있는 마음의 수첩에
당신의 승인을 받고 싶습니다, 주님.
성당 입구에서 성수를 찍거나
문을 열고 닫거나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저의 조그만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은 끊임없이 찬미 받으소서.
식사하거나 이야기하거나
그릇을 닦거나 걸레를 빠는 것과 같은
일상의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제가 좀더 침묵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침묵을 배우는 사순절이 되면
많은 말로 저지른 저의 잘못이
산처럼 큰 부끄러움으로 앞을 가립니다.
매일 잠깐씩이라도 성체 앞에 꿇어앉아
말이 있기 전의 침묵을 묵상하게 하소서
제가 다는 헤아리지 못하는
당신의 고통과 수난
죽음보다 강한 그 극진한 사랑 법을
침묵하는 성체 앞에서
침묵으로 알아듣게 하소서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익히는 사순절이 되면
잔뜩 숙제가 밀려 있는 어린이처럼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성서와 성인전을 머리맡에 두고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새롭히는 계절
제가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던
가까운 이웃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세상 곳곳에서 기도를 필요로 하는
수많은 이웃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 번도 제대로 기도를 못한 것 같은
절망적인 느낌 속에서도 주님,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주소서
제 안에 사제로 살아 계신 당신이
저와 함께 기도해 주심을 믿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제가 먼 광야로 떠나지 않고서도
매일의 삶 속에 당신과 하나 되는
즐거운 사순절이 되게 하소서.
-이해인
진심으로 바라볼 때 기쁨이 찾아온다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스승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기대했던 호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호수를 둘러싼 거대한 평원을 바라보고 있는 스승을 발견했다.
그의 눈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고,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보였다.
행복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은 선물을 받고 마냥 기뻐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스승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한데,
내 얼굴에는 왜 이토록 황량함과 슬픔뿐인가?
똑같은 현실 앞에서 왜 그토록 다른 감정이 드러나는가?
호수와 그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평원은 누구한테나 같은 것이 아닌가?'
스승 앞에 이르자마자 나는 질문을 던졌다.
"주변의 모든 것이 황량하고 추하기만 한데
스승님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유명한 호수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 순간 스승은 지평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나는 저 작은 구름조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이 네 손바닥만 한 크기일 때부터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저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저 구름은 이 지역을 온통 덮어버리는
크고 당당한 구름으로 바뀌고 생명을 가져오는 비를 뿌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들판을 쳐다봤을 때 들판은 온갖 빛깔로 가득 찼고,
꽃들은 그 특유의 향기를 뿜어냈다. 나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판을 뛰노는 짐승들의 떠들썩한 소리를 들었다.
내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기쁨과 행복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우리는 흔히 내면의 것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단지 겉으로 드러내는 것만 바라본다.
그러나 진심으로 바라볼 때 기쁨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황량하게 보일 때조차 변화의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갖가지 형태의 바라봄이 있는데, 오직 한 가지만이 현실을 변화시켜
영혼 안에 행복이 흘러넘치게 한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스승과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스승이 산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 안에서도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의 샘이 솟아올랐다.
스승이 산을 향해 걸어가는 길을 따라 노랗고 파랗고 붉은 장밋빛 꽃들이
봉오리를 터뜨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비를 맞으며 새로운 지평을 찾기 시작했다.
그 만남이 가져다 준 메시지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저 작은 구름조각이 내려와 생명의 비를 뿌려줄 때
우리는 비로소 메마른 삶을 극복할 수 있다.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비를 맞으며 새로운 지평을 찾기 시작했다.
그 만남이 가져다 준 메시지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저 작은 구름조각이 내려와 생명의 비를 뿌려줄 때
우리는 비로소 메마른 삶을 극복할 수 있다.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길에서 만난 행복‘중에서 /루이스 알렉산드레 솔라누 로씨 지음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성체성사의 예수님께서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울고 있는 우리에게 이 사랑어린 부르심을 되풀이하고 계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11,28)
참으로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 (욥7,1)이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 세상의 정령들" (콜로2,20)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4,13) 라는 말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요한1,3)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의 종 루도비카 M. 클라렛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무슨 궁핍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세상을 떠받치고 계신 분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성혈이 제 혈관 속에서 돌고 있습니다. 오, 나의 영혼이여! 아무런 두려움도 가지지 말라. 우주의 주인께서 너를 당신의 품 안으로 데라고 가서 쉬게 해주고자 하신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성 빈첸시오 드 폴은 그의 선교 사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셨는데, 무슨 희생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성 빈첸시오 페레리오는 박해의 피해자가 되어 2년 동안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었으면서도 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이유는 미사성제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와 같은 용기와 기쁨은 성녀 잔 다르크가 화형대로 향하기 전 성체성사의 예수님을 모실 수 있도록 허락되었을 때 그녀를 가득 채웠다. 그녀가 갇혀 있던 어두운 감옥 안으로 성체의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을 때 성녀는 쇠사슬로 묶인 몸을 꿇고 예수님을 모셨으며 기도에 몰두하였다. 그녀는 화형대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걸어가면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화형대에 올라가서도 자신의 영혼과 육신 안에 들어와 계시는 예수님과의 일치 속에서 불길에 싸여 숨을 거두었다. |
사순시기 치유를 위한 기도
차라리 이방인처럼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습니다.
차라리 당신을 몰랐더라면 좋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제 완고한 마음에,
메말라버린 제 마음에 당신은 물을 길어 부어주셨습니다.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었던,
갈증이 가실 날 없던 제 영혼에 주님께서는 샘을 솟게 하십니다.
진리의 샘입니다.
평화의 샘입니다.
참된 기쁨의 샘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나의 잔을 마시는 샘입니다.
그 서늘한 물가에서 나는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래도 차라리 당신을 몰랐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알게 되고부터는 편할 날이 없습니다.
당신을 알고부터 나는 내가 죄인인줄을 알게 된 까닭입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이 죄인줄 알았는데
지금은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온갖 작은 마음까지도
다 죄인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제 맘대로 사는게 제일인줄 알았는데,
당신을 알고부터는 주님 뜻을 모른 척 하는 것이
무엇보다 큰 죄인줄 알겠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한시도 당신에 얼비추인 내 모습이 마땅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 떠나고 싶습니다.
떠나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려 할수록 주님께서는 먼저
내 앞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그래서 한 발짝도 당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내어놓지 않으셨습니다.
떠나려 했던 어리석음을, 떠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우둔함을
주님 용서하소서.
내가 당신을 떠날 수 없음은
오로지 당신이 나를 떠나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는 저를 용서하소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당신을 받아 모시고도
아무렇지 않게 악한 일들에 마음 쏟았던 저를 용서하소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도 짐짓 못들은척 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 당신이 나와 함께인 것처럼 나도 당신 안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니 도와주소서.
당신이 듣고 계심을 알지만
나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계심을 알면서도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길이신 주님, 길을 밝혀 주소서.
나의 모든 능력이 당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의 능력을 봉헌하게 도와주소서.
당신이 나를 감싸주시고 자유롭게 하시지만
이다지도 참을성이 없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쓰러질 때,
내가 사람들을 외면할 때,
내가 나 자신에게 사로잡혀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할 때
그 모든 순간에 주님,
당신이 움직이시고 저는 침묵하게 하소서.
향기로운 당신 사랑만이 나의 기쁨인 것을 알고서 주님,
당신께 드릴 것이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나의 하찮은 재능을 드리고,
당신이 제게 주신 시간을 봉헌하고,
당신이 명하시는 희생을 실천해도, 주님,
당신 사랑에 갚을 길 없습니다.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재능과 시간과 희생을 다 바치더라도
정작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정작 주님께서 받으시길 원하시는 것은 다름아니라
나의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죄를 짓기도 전에 이미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내 죄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내가 죄와 허물과 실수투성이일지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분노하시는 당신이 아니시며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용서하시기 위해서
먼저 나의 죄를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없이 당신께 나의 죄를 봉헌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원하시던 나의 죄입니다.
당신 아드님을 바쳐셔까지 용서하시고자 하는 나의 죄입니다.
나의 죄는 용서하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내가 바쳐드리는 예물입니다.
이제는 당신께 황금과 몰약과 유향이 아니라 죄를 드립니다.
제가 어찌할 수 없었던 지난 시간의 어두움들을 당신께 드립니다.
십자가에서 한없이 흘러내리는 그 사랑이
나를 말끔하게 닦아 줄 것을 믿습니다.
† 주님,
불안하기 짝이 없던 나의 꿈, 계획, 그리고 잡다한 모든 것에서
나는 벗어납니다.
당신께서 손을 내미시어 덧없는 것들에서 벗어나
당신만을 바라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계시고, 그래서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나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낮의 밝음도,
한 밤의 어두움도 삶도, 죽음도
모두가 당신 손 안에 있습니다.
주님,
나의 어두움에 빛이 되어 주시고,
저물지 않는 하루의 태양이 되어 주소서.
당신은 나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루의 바쁜 일과 중에서도 당신 안에서 누리는 평정과 침착함을
잊지 않게 하시고,
이 시간이 다하는 그 어느 날엔가
그리워하던 당신을 마주 뵈옵게 하소서.
뉘우치는 사람에게 무한한 은총을 내려주시는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당신에 힘입어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신에 힘입어 이제는 내가 하느님의 귀한 아들, 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내가 멸망하지 않을 것임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아니시면 영원한 삶도 필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삶의 희망도 당신이 주시겠노라 약속하셨기에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청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기꺼이 들어주시는 주님,
세상 끝날까지 항상 나와 함께 있어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주시는 주님,
바로 지금이 그 시간 당신이 저와 함께 머무시는 시간임을 듣고
또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올 주님,
당신께서는 모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당신 뒤를 따르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지우시지 않았고,
우리로 하여금 나의 십자가만을 지면 된다고,
그러면 생명으로 나아가리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이제 십자가를 질 준비를 마쳤습니다.
마음 든든합니다. 당신이 함께 하심을 믿고 있으니,
아무런 거리낌도 없습니다.
주님 사랑만이 나를 지켜 줄 것이기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 길이 찬미받으소서.
- 남상근(라파엘) 신부님
사제를 보호하는 우리들
어느 성인께서 환시를 보셨다.
환시 가운데서 사제관 두개를 보았는데,
사제관에는 마귀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첫 번째 사제관에
신자들이 계속 화살기도를 보내주니 마귀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두 번째 사제관을 위해서는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마귀들이 점점 더 달라붙어 나중에는 조그만 틈을 타고 마귀가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환시에서 성인이 확신한 것은 본당신부가 성인이 되느냐 아니냐는
신자들의 기도에 99.9%가 달려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사제가 예수님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사제 한 분에게서는 예수님의 한 조각만을 보자.
예를 들어, 다른 것은 못하지만
가정 방문을 잘 하는 신부님에게서는 그것만을 보고,
면담을 잘 해주시는 분에게서는 또 그것만을 보자.
어떤 신부님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어떤 신부님은 말씀으로,
또 어떤 신부님은 한없는 선함을 보여 주신다.
도화지에 그 조각조각을 모자이크 해 채워보자.
그러면 비로소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 만들어 질 것이다.
내가 피정에 다니면서 제일 가슴 아픈 얘기가
서품 받은 지 얼마 안 된 신부들이 환속했다는 소식이다.
요즘은 점점 더 많아진다.
사제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데...
신학교의 온실 속에서 이제 막 나온 보좌신부들을 신자들은
기도의 벽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사제들이라고
왜 약점이 없겠으며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부분이 왜 없겠는가?
신학교에서 10년 공부했다고 100% 인격적으로 성숙이 되어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이것저것 겪으면서 체험을 하는 건데,
어렵고 약점이 보일 때 마다 그것을 내리치면 사제는 기댈 데가 없다.
사제가 아무리 사목이 힘들어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날 위해 기도해 주는
마리아 할머니가 계시겠지!'하는 생각을 하면 신이 나는 것이다.
-미주 가톨릭 다이제스트에서 김웅렬 신부님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는 노자성체
성 빈첸시오 드 폴의 생애에서 우리는 다음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하루는 성인이 자기 수도회의 사제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물었다.
"오늘 미사성제를 바치셨습니까?"
모두들 "예"라고 대답했다.
성인이 계속해서
"그러면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비신자들에게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여러분의 나라와
가족과 친지들을 떠나 낯선 나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자,
거기 있던 모든 사제들은 즉시 예수님으로 충만하여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 위험한 선교에
자신들을 기꺼이 봉헌하였다.
성체를 모시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힘을 주신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성체는 영웅들에게 힘을 주었고, 순교자들을 지탱시켜주었으며
임종을 맞는 영혼들을 위로해주었다.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개신교 신자들의 오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한 음식은 묵상만 하라고 애써 만든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빵, 천사들의 빵도
흠숭과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만 봉헌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고 강하게 하기 위해 이 음식을 먹으러 갑시다."
성사
프랑스의 고도(古都) 리옹에 비탈리스, 마우르, 그리고 히야신스라는 세 친구가 살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열심히 하느님을 찾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그들은 리옹을 떠나 유명한 영적 스승인 앤터니 수도원장이 이끄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수도원장이 그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수사가 되려 하시오?"
세 친구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수도원장은 약간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하느님께서는 리옹에 계시지 않던가요?"
셋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비탈리스가 대답했다.
"아니오. 리옹에는 세상과 그 유혹밖에 없어요. 우리는 거기서는 하느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수도원장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해할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하느님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온 그대들을 환영하는 바이오.
하지만 그대들이 하느님을 발견했을 때 제대로 그분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적당한 안경을 구해야 하오."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들은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수도원장 자신은 안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불쑥 그런 질문을 던질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우르가 물었다. "어디로 가면 그런 안경을 구할 수 있습니까?"
수도원장은 종이 쪽지에 무언가를 적으며 대답했다.
"리옹에 가면 리누스라는 내 친구가 하는 안경점을 찾을 수 있을 거요.
이 쪽지를 가져가서 그 친구에게 보여 주면, 그대들에게 알맞은 안경을 골라 줄 것이오.
그러고 나서도 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이곳으로 돌아와도 좋소."
그렇게 해서 세 친구는 수도원을 떠나 리옹으로 돌아왔다.
원장이 말한 대로 안경점을 찾을 수 있었고, 그
곳의 리누스라는 사람에게 원장의 쪽지를 보여 주었다.
리누스는 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성스러운 노인이었다.
동시에 앤터니 수도원장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신비주의자이기도 했다.
뜨거운 목욕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는 선행과 뜨거운 목욕이 최고라고 한다.
토마스 데 아퀴노가 이미 뜨거운 목욕의 효과를 서술한 바 있다.
이 위대한 신학자에 의하면, 슬픈 사람은 목욕을 하라는 것이다.
이 말 뒤에는 근원적인 체험이 숨어 있다.
욕탕은 자궁과 비슷하다.
우리는 따뜻한 욕탕에 들어가 있을 때,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낀다.
그때 우리는 모태 안에서 느꼈던 편안함을 다시 느끼게 되며
그것은 우리의 슬픔을 달래 준다.
선행과 목욕은 이렇게 비교될 수 있다.
목욕은 안전함을 제공하지만 선행은 나를 세상으로 데리고 간다.
선행은 나로 하여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내 기분은 잠시 접어 두고
당장 눈앞에 있는 급한 것, 옆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실천하도록 요구한다.
선행은 자기 안에 갇혀있는 나를 해방시킨다.
내가 선행을 통해 활기를 얻게 되면, 나의 우울함은 사라진다.
우울함은 삶의 결핍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울함 속에서는 나를 느끼지 못하지만, 무언가 좋은 일을 하게 되면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무엇인가가 나에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의 선행을 기뻐하면 나의 기쁨은 두 배가 된다.
자신의 우울함에 너무 몰두하는 사람은 점점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고 우울을 억누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우울을 인지해야 하며 동시에 내 영혼에 이로운 일을 해야 한다.
일단은 뜨거운 목욕을 하거나 기분 좋은 일을 하도록 나에게 허락한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내가 이롭게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활기와 삶의 기쁨을 선물할 것이다.
- Buch der Lebenskunst ‘삶의 기술’ 안셀름 그륀 지음/ 안톤 리히테나우어 엮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등불
하나뿐인 아들이 반에서 1등을 했을 때 너무나 기분이 좋겠지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게 무엇일까요? 전화하는 거지요.
동네방네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고 다니기에 바쁩니다.
어르신들 거의 다 이런 경험 있으시지요?
또는 내가 바라던 일이 오랜 노력 끝에 이루어졌을 때
그 모습은 자연스레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소문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지금 성당에 모인 우리들 역시
자랑할 것과 좋은 소문으로 전해질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당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 사랑과 공동체 안에서 받는
감사한 일들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 사랑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받은 용서와
미사를 통하여 새로이 난 그 깨끗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받은 사랑은 나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주고
봉사해주며 친절히 대해주는 마음 따뜻한 이들의 모습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등불입니다.
즉 등불이란
우리가 미사와 공동체를 통해 받고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느님에 대해 눈으로 보이는 특별한 상징이나 은총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고 있는 참된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는 잘 깨닫지 못하는 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미사와 성사를 통하여 사랑과 용서를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이웃들을 통해서는 그들의 마음에 나눔과 친절을 채워주시어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를 잘 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느님의 사랑과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을
내 안에 가득 받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미사와 기도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은총을 자주 청하시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청해보십시오.
특히 사랑 가득한 미사와 공동체가 되도록 열심히 청하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사랑의 등불이 우리를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사랑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바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내어맡김 그것은 역시 기도와 미사 안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느님이신 분이 나약한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크신 사랑을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사랑이 마음 안에서 불타오르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이 불타오르기 위해 우리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린 현명한 다섯 처녀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닮으려는 마음으로 기도와 미사 안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이웃들과의 만남 안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지 못한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면 분명히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충만히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등불은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자랑을 제대로 해야지요.
어둠 속에 있던 우리들에게 등불, 예수님의 사랑이 전해졌으니
등불은 숨기는 것이 아닌 환히 밝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등불은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이기에
온 세상을 환히 밝히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이 등불을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하라고 불리움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활활 타오르는 등불이 된 우리는 평소에 어렵게 느꼈던
용서와 희생, 봉사들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는 만큼 더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 타오른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더 힘차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의 모습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서
예수님을 드러낸다면 이것보다 더 큰 자랑이 어디 있을까요?
오늘 하루 그동안 해오지 못했던 작은 사랑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밝혀보았으면 합니다.
마더 데레사가 말한 하루에 다섯 번 웃기도 좋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을 떠올리며 기도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도 좋습니다.
또한 본당의 청소년들을 위한 기도와 희생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오늘 베푸는 친절과 사랑, 기도 하나하나가 온 세상을
사랑으로 비출 하느님의 등불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돌아와 보실 때에 깨어 있는 종!
주님께서는 온갖 좋은 것을 그에게 맡기시리라.
- 웃음이 너무 멋진 어떤 부제님의 강론글
너는 하느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길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생의 모든
갈림길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으로 깨달은 것을
행하셨다. 따라서 베드로가 그분을 하느님의 길에서 인간의 길로 이끌려고
했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고 엄격한 태도를 취하셨다.
예수님은 불가피하게 십자가의 길이 된 당신의 길을 하느님께 대한
무조건적 충실로 걸으셨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분의 잃음은 승리였다.
-「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에서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충실로 우리 길을 가자. 그 길은 종종
쉽지 않을 것이고 이따금 지치겠지만, 그 길은 하느님이 계신 정상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 성공의 길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우리는 주님의 길에 걸림돌은 아닐까요?
성체를 모시는 올바른 방법
여기 두 할머니의 식사 모습을 통해 성체를 모시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한 할머니는 깨끗한 환경에서 식사하길 원하지만 늘 파리가 날아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파리를 쫓아내고 식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파리를 따라다니다 보면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밥을 먹으려 했던 목적도 잊어버린 채 정신없이 파리만 쫓습니다.
하지만 날쌘 파리는 둔한 할머니의 손에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파리만 쫓아다니다 밥을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할머니는 파리가 가까이와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파리가 또 날아와도 할머니는 식사에만 열중합니다.
이렇게 날아오는 파리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식사를 잘한 할머니는 건강을 유지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열심하다고 하는 신자들은 분심·잡념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고 싶어 합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분심·잡념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분심·잡념을 없이하는 것에만 열중하면 오히려
첫 번째 할머니처럼 성체를 올바로 모실 수 없습니다.
날아다니는 파리에 연연하지 않은 채 여유 있고 기분 좋게
식사를 다 하는 두 번째 할머니처럼 분심·잡념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지나가도록 기다리는 여유를 가지고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해꾼으로 등장하는 분심·잡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오히려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빵으로, 살아 있는 빵으로 내게 오시는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 여유로운 마음으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성체를 올바로 모시는 방법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세영 수녀님(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그리스도와 성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삼겹으로 줄을 꼬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전도4,12)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고린 13,13)
믿음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6)
오늘날 환시나 계시를 하느님께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께만
눈길을 쏟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분명 이렇게 대답하시리라.
"이는(그리스도)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유별난 가르침을 바라지 말라.
그에게 나는 다 말했다. 그 안에서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나는 그를 네 형제, 스승, 벗, 속죄
그리고 보상으로 주었다."
매사에 그리스도와 성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무지와 영적
나약함을 고치는 약이 있다.
그 가르침은 바른 길을 걷는 자에게
주어지고 온갖 악을 예방하는 약이 된다.
이 길을 떠난 사람은 호기심의
죄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기 스스로 나타낸다.
초자연적 방법으로 보여진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직자들의 견해와
일치되지 않는 한 결코
진리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
계시를 원하는 것은 적어도 소죄이다.
이런 소망을 부추기거나 동의하는
사람도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 지향이 좋다 해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그런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행동 하는 데는 인간의 이성과
복음의 가르침으로 넉넉하기 때문이다.
계시를 원하는 영혼은 믿음 가운데
쌓은 성덕을 점점 잃어 간다.
그것은 악마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악령은 영혼이 바라는 계시와 비슷하게
제시하여 참된 계시인 양 교묘하게 속인다.
성인들의 예지란 하느님의 법규와 복음적
권고를 깔축없이 실천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견고히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줄 아는 것이다.
- 십자가의 성 요한
내 아들, 사제를 지켜다오
"내가 사랑하는 아들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사제들의 말을
배척하지 말고 순종하여라.
사제들에게 너무 가까이도
가지 말고 그렇다고
멀리도 하지 마라.
항상 기도로써 사제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도와주도록 하여라.
사제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여라.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나의 은총을 내려준다.
너무 많은 사제들이
사제직을 떠나고 있다.
사제 없이는 성체성사를
진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악의 세력들이 나의
사제들을 떨어뜨리고 있다.
너희들이 사제들에게 너무나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사제들을 헐뜯고 비난하지 마라.
사제가 잘못을 할 때는
조용히 기도하여라.
내가 사제들을 다스릴 것이다.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다.
사제들을 존경하여라.
사제들은 예수님의 대리자이다.
함부로 대하지 마라.
그리고 존경심을 가지고 사랑하여라."
- 가슴에 새기는 하늘의 소리
서둘러 판단하지 말라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루카 7,39)
어떤 사람이 술 취한 것을 보았더라도 그 사람이 술 취했다고 보고하지 말라.
그 사람이 심지어 간음 현장에서 잡혔더라도 그렇게 말하기를 삼가라.
한번의 행위는 그 사람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부족하다.
태양은 여호수아가 전쟁에서
이기게 하기 위해 한번 멈추었고, 구세주의 승리를 위해 어두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태양이 멈추어 있고 어두워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노아는 한 번, 룻은 두 번 술 취했다.
그러나 그들이 술주정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베드로는 불경스러운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를 불경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어떤 타이틀을 얻으려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한번 본 것에 근거해 누군가를 성미가 급하다거나 도둑놈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심지어 누군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 해도 그를 그런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몬은 막달라 마리아를 죄인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얼마전 까지는 확실히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다.
진실하게 회개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녀의 편을 들어 주셨다.
하느님의 선하심은 관대해서 성품을 변화 시킨다.
하물며 어떻게 우리가 어제 죄인이던 사람이 오늘도 죄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결코 어제에 근거해서 결론을 내리지 말라.
우리가 지켜야할 법칙이 있다.
죄를 책망할 때, 그 죄를 짓는 사람을 가능한한 용서해 주는 것이다.
교만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파렴치 하고 악명 높은 죄인과도
터 놓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재미있어 하지 말아야 한다.
- 프랜시스 살레 / 경건한 삶 (The Devout Life)
천사가 우리의 발걸음을 세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사성제에 참례할 수 있을 때마다 이를 큰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귀중한 미사 참례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불편함이나 희생이 요구된다고 하여도
이를 핑계로 미사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주일과 여러 축일에는 미사 참례를 해야 할 중대한 의무가 있으며 이를 궐할 경우
대죄를 범하게 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181조).
성녀 마리아 고레띠는 주일 미사에 참례하기 위하여 성당까지 24 km를 걸어서 갔다.
산띠나 캄빠나는 고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사에 갔다.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건강이
너무 나뻐서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동료 수사가 붙들고서 미사성제를 드렸다.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출혈을 하며 고열이 있는 중에서도 미사를 드렸다.
병으로 인하여 성인들이 미사성제에 참례할 수 없었을 때에는 그들은 최소한 정신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성당들에서 미사를 드리는 사제들과 일치하였다.
예를 들면, 성녀 벨라데따는 오랜 기간 자기 방에만 있어야 했는데, 동료 수녀들에게,
"매 시간 세계의 다른 곳들에서 미사가 바쳐지고 있습니다.
나는 자신을 그 미사들과 일치하며, 특히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때 그렇게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미사성제를 다른 어떤 좋은 것들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성 벨라도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전 세계로 순례를 다니는 것보다
한 번 정성껏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더 많은 공을 세우게 됩니다."라고 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한 번의 미사가 가지는 무한한 가치를
지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르스의 신부는 말하기를 "미사성제에 비하여 순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 하면, 순교에서는 인간의 희생을 하느님께 바치지만, 미사에서는 인간을 위하여
천주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허비하게 하며 우리의 영혼에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오락들보다 미사성제를 더 귀중히 여겨야 한다.
프랑스 국왕 성 루이 9세는 매일 여러 번의 미사에 참례하였다. 한 장관이 불평하기를
왕이 국사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를 들은 성왕은
"내가 미사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의 두 배를 사냥 등의 오락에 사용한다 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귀중한 미사에 참례하기 위하여 관대하고도 기쁘게 희생을 하자.
성 아오스딩이 신자들에게 말하기를,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하느님께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아르스의 신부도 말하였다.
"미사에 참례하러 가는 영혼을 동행하는 수호천사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 성체 성사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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