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강가
가을이 점차 깊어가고 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불붙기 시작한 단풍은 밤에도 쉬지 않고 남녘으로 번져 내린다. 우리 지역 근교 산들도 곧 울긋불긋 물들면 가을은 절정으로 치달을 것이다. 가을을 대표한 자연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파란 하늘, 황금 들판, 코스모스, 구절초, 쑥부쟁이 등등 다양하지 싶다. 억새와 갈대도 빠지지 않는다.
곡식도 아닌 것이, 꽃도 아닌 것이 억새고 갈대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산마루로 가면 억새를 보고, 강가나 늪지로 가면 갈대를 본다. 여름날 물이 한두 번 잠기는 냇가로 나가면 물억새도 볼 수 있다. 억새를 구경하러 산을 오르려면 별도 틈을 내어야 해도 갈대나 물억새는 마음만 먹으면 쉽다. 추석 연휴 때 북면 수변공원으로 나가 이제 막 이삭을 드러내는 물억새를 본 적 있다.
학교에서 정기고사 마지막 날인 시월 셋째 금요일이었다. 오전에 고사 감독을 하고 점심은 국어과 동료들과 학교 바깥으로 나가 들었다. 시내 횟집을 찾아 점심을 들고 나도 오후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문득 가을 정취를 두 발로 걸어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집으로 가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오긴 번거로워 아침 출근길 옷차림 그대로 상남동에서 30번 녹색버스를 탔다.
30번 녹색버스는 충혼탑을 돌아 명곡 교차로를 지났다. 도계동에서 용강고개를 넘어 용잠삼거리에서 주남저수지 방향으로 들었다. 봉강을 지나니 승객은 혼자였다. 강변마을인 본포를 지난 상옥정에서 내렸다. 그곳은 북면에서 한림 간 도로를 확장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강둑으로 나가 자전거 길 따라 걸었다. 본포다리 밑을 지나온 강물을 너울너울 수산 방향으로 흘렀다.
자전거 길이 지나는 강변 언저리는 연보라 쑥부쟁이가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상옥정에서 수산다리 사이 너른 강변 둔치는 4대강 사업 때 삽질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둔 유일한 지역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변여과수 취수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창원의 식수원은 강물을 원수 그대로 끌어와 정수하지 않고 모래밭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를 퍼 올려 정수시켜 수돗물로 공급한다.
모래밭 취수정은 수십 개에 이른다. 거기서 퍼 올린 지하수는 대산정수장에서 수돗물이 되어 시내로 보내져 각 가정으로 간다. 둔치 모래밭에는 원시 상태 그대로라 갈대와 물억새가 많이 자란다. 허연 이삭이 나와 가을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상류로부터 떠내려 온 기름진 모래땅이라 풀들이 아주 무성하게 자랐다. 갈대와 물억새 말고도 생태계 교란종인 박가시덩굴이 많이 번져갔다.
자전거 길에는 평일인데도 라이딩을 나선 동호인들이 더러 지났다. 둔치 저만치 흘러가는 강물은 아주 검푸른 색을 띄었다. 강 건너 벼랑 언덕 곡강마을은 처마 밑에 붙은 제비집 같았다. 가을 하늘은 파랗게 드러나고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일어났다. 강물은 수산을 지나 삼랑진으로 흘러갔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에 천태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금정산성 꼭뒤 고당봉이 아스라했다.
강 건너편은 밀양이었다. 공직에서 은퇴 후 예림서원 곁에서 텃밭을 일구고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넣었더니 들깨를 털어 놓았다고 했다. 콩도 수확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내가 대산 강둑으로 나왔다니 얼굴을 한 번 보자고 했다. 나는 수산다리를 향해 걸어가고 지인은 차를 몰아 길을 나섰다. 이십여 분 후 지인이 먼저 수산다리 근처 강둑 정자에 나타났다. 우리는 모처럼 해후였다.
정자에서 앉아 시간을 보내기엔 아쉬움이 있어 대산 들녘을 지난 가술로 옮겨갔다. 국숫집으로 들어 파전과 곡차를 시켰다. 지인은 운전을 해야 하는지라 한 잔만 권하고 나머지는 내가 다 비웠다. 은퇴 후 소일거리와 교류가 있는 주변 사람들의 근황도 알게 되었다. 언제 틈이 날 때 운문산 산행을 가자고 약속했다. 날이 저물기 전 나는 시내로 복귀하고 지인은 밀양으로 돌아갔다. 17.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