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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로 8,000m 지대, 즉 ‘죽음의 땅’을 무산소로 도전했던 산악인들은 1922년 영국 제2차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참가했던 순수 알피니즘 신봉자, 노턴 소령-조지 말로리 조와 모시드-솜머벨 박사 2개 조였다. 그러나 노스콜(7,010m)을 출발하자마자 모시드가 등반을 포기했고, 노턴, 말로리, 솜머벨 3명은 북릉의 8,225m 지점까지 진출하고 북동릉까지 진출할 시간이 부족해 퇴각했다.
그들은 에베레스트 주변의 봉우리들, 즉 창체(7,550m), 푸모리, 걍충캉(7,922m), 초오유(8,186m) 정상보다 더 높이 올랐다. 노턴 소령은 영국의 유명 산악인 알프레드 윌스의 손자이며, 조지 말로리의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었다.
며칠 후 핀치-제프리 브루스 대위(등반대장 브루스 장군의 조카) 조는 셰르파들이 ‘영국 공기’라고 부르는, 군사 작전용 산소를 이용해 에베레스트 북릉 8,321m 지점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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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나푸르나 1봉의 주봉, 중앙봉, 동봉(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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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영국 제3차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브루스 장군은 캐러밴 도중에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노턴 소령이 등반대장 직무를 대행했다. 노턴 소령과 솜머벨 박사는 무산소로 북릉의 제6캠프(8,169m)를 출발했다. 그들은 북동릉 상의 난코스 세컨드스텝(Second Step)을 우회하기 위해 옐로밴드(Yellow bands) 위쪽으로 북벽의 상부를 트래버스(나중에 ‘노턴 트래버스’라고 명명)했다. 솜머벨 박사는 북벽 8,534m 지점에서 등반을 포기했고, 노턴 소령은 단독으로 노턴 걸리(Norton gully : 그레이트 쿨와르)에 도달해 무산소로 8,580m 지점까지 진출하는 등반 기록을 수립했다. 얼마 후 조지 말로리-어빙 조는 산소를 사용하며 북동릉의 8,500m 지점을 등반 중인 것이 목격되고 나서 실종됐다(1999년 에베레스트의 퍼스트스텝 아래 북벽 8,160m 지점에서 말로리의 시신이 75년 만에 발견됨).
1933년 영국대의 해리스-웨이저 조는 제6캠프(8,351m)를 출발했는데, 해리스는 북동릉 퍼스트스텝 부근의 슬랩에서 9년 전 실종된 어빙의 피켈을 발견했다. 그들은 세컨드스텝 밑에서 ‘노턴 트래버스 루트’로 전진해 너비 15m의 ‘그레이트 쿨와르(Great Couloir)’ 상부에 도달한 후 8,580m 지점까지 진출하고 퇴각했다.
2차 공격조 프랭크 스마이드-에릭 십튼 조도 무산소로 정상을 향해 제6캠프를 출발했다. 그러나 십튼은 퍼스트스텝 아래에서 고산병으로 등반을 포기했고, 스마이드는 단독으로 노턴 트래버스를 지나 50도 경사의 그레이트 쿨와르에 도달하고 8,580m 지점에서 시간부족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버드 산악부 출신 작가, “에르조그의 <안나푸르나>는 픽션” 주장
1939년 미국대의 비스너-셰르파 파상 라마 조는 K2(8,611m) 아브루치능선 상의 제9캠프(7,940m)를 출발해 얼음 쿨와르(보틀넥) 좌측의 암릉, 즉 아브루치 스퍼(일명 아브루치 버트레스)로 등반해 8,367m 지점에 도달했다. 비스너는 날이 저물어가자 야등을 해서라도 K2 정상을 밟기를 희구했지만, 어둠 속에 악령이 숨어 있다는 미신에 사로잡힌 파상 라마가 등반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들은 제9캠프로 퇴각했다. 퇴각 중에 파상 라마의 배낭에 매달아 놓은 크램폰이 절벽으로 떨어져 분실했다.
다음날 그들은 등반을 재개해 아브루치 상부의 얼음 쿨와르, 즉 ‘보틀넥(Bottleneck)’ 아래 도달했다. 전날 크램폰을 분실한 그들은 400개 정도의 스텝을 깎아야 돌파할 수 있는 얼음 쿨와르로 등반에 나섰으나 너무 버거워 다시 퇴각했고 등반은 중단됐다.
프랑스산악회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에 점령당하는 수모로 인해 저하된 프랑스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해 1950년 히말라야 등반대를 파견했다. 등반대장은 철두철미하게 애국심으로 무장된 아마추어 산악인 모리스 에르조그가 맡았다. 그들의 애초 목표는 다울라기리(8,167m) 북벽이었으나, 현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안나푸르나(8,091m)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는 수천 만 명의 전 세계 청년들을 감동시킨 자신의 등정기 <안나푸르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은 프랑스 청년들을 위해 마음속에 조국을 품고 안나푸르나의 빙벽을 올랐다. 우리가 빈손으로 찾아간 안나푸르나는 평생 의지하고 살아갈 보물로 둔갑했다. 인생에는 수많은 다른 안나푸르나가 있다.”
프랑스대는 고산병이나 고소적응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안나푸르나 북벽의 시클 빙하(Sickle Glacier) 중간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횡단하고 북벽 7,500m 부근에 제5캠프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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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셔브룸 1봉(히든 피크)의 북서벽 (8,000m 봉우리 중에서 최초의 알파인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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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오전 6시 에르조그 대장과 루이 라슈날 대원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정상을 향해 거대한 설원을 대각선 방향으로 등반하기 시작했다. 라슈날은 1948년 테레이와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을 두 번째로 등정한 유능한 가이드 출신이었다.
그는 등반 도중 발가락에 감각이 사라지자 동상의 공포로 등반을 포기하려고 했다. 자신의 생업이 ‘바위 주름을 더듬으며 살아야 하는’ 등산 가이드였기에 안나푸르나 정상이 자신의 발을 동상으로 희생시킬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산 친구인 스위스 가이드 레몽 랑베르(Raymond Lambert : 1952년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에베레스트 남서릉의 8,595m 지점까지 진출)가 몽블랑산군의 디아블(Diable : 악마)능선의 동계등정 중 동상에 걸려 모든 발가락을 절단했던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 에르조그 대장은 단독등반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자세였다고 한다. 라슈날은 등반 대장 에르조그를 사지에 홀로 남겨 둘 수 없어서 등반을 계속해 등정했다고 주장했다. 이 등정은 8,000m급 14개봉 중 첫 번째 등정으로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등반의 하나로 평가됐고, 모리스 에르조그의 등정기 <안나푸르나>는 산악 명저로 부상해 수십 년간 수백만 권이 팔려 전 세계 청년들에게 산악인이 되도록 영감을 불어 넣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안나푸르나 등정은 나중에 등정 의혹에 휩싸였다. 등반대장 에르조그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전 대원들에게 안나푸르나 등정에 관해 5년간 함구하겠다는 강제 서약서를 받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등정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등정자 라슈날은 만취상태에서 친구에게 자신은 안나푸르나 정상을 밟지 못했다고 실토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게다가 라슈날은 스위스의 한 산악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안나푸르나 정상의 지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죽마고우, 스위스의 산악인 쿠르츠에게 자신이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행한 활동을 전혀 기억해 낼 수 없다고 말했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 테레이에게도 자신이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어떻게 하산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다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프랑스의 유명 일간지 르몽드지도 안나푸르나 등정 의혹에 가세했다. 이 신문은 에르조그가 피켈 끝에 프랑스의 삼색 국기를 매달고 서서 찍은 안나푸르나 등정사진의 배경에 가파른 설릉이 나타난 이유는, 이 등정 사진이 정상 부근에서 촬영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에르조그는 카메라의 왜곡현상 때문이라고 설득력 없는 대답을 했다.
에르조그는 그의 책<안나푸르나>에서 정상에서 하산 중에 장갑을 잃었기 때문에 제5캠프에서 지원조 테레이와 가스통을 만났을 때, 자신의 손이 동상에 걸려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고 진술해 놓았다. 자신의 다른 저서<안나푸르나 회고록(Un Autre Regard)>과 <다른 안나푸르나>에서는, 자신이 제5캠프에서 동료들과 하산 중에 폭풍설을 만나 크레바스 속에서 비박했는데, 그때 눈 속에 파묻힌 자신의 신발을 찾아 내고, 이어서 희생정신을 발휘해 동료들의 신발을 찾아 주다가 동상이 걸렸다는 날조된 영웅담을 만들어 내는 등, 말 바꾸기를 계속해 불신을 자초했다. 이 사실에 관해 후에 질문을 받게 되자, <안나푸르나>는 객관적 진술이고, <회고록>은 주관적 진술이기 때문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1955년 라슈날이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다가 크레바스에 추락사한 후, 에르조그는 라슈날의 <안나푸르나 일기>의 원고를 넘겨받아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상당부분 삭제하고 1956년 간행했는데, 1996년 이 책이 삭제 없이 재간행되어 에르조그의 여러 거짓말이 들통 났다.
라슈날의 <안나푸르나 일기>와 가스통 레뷰파의 전기를 참조하면, 에르조그의 <안나푸르나>의 내용은 상당부분 미화(美化)되고 왜곡되어 등반대장의 무능과 우유부단, 대원들 간의 불화, 포터 1명의 추락사, 라슈날의 날카로운 비판 등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하버드대학 산악부 출신으로 유명 작가인 데이비드 로버츠는 에르조그와 라슈날의 친구들, 안나푸르나 등반대원들의 미망인들을 찾아다니며 수년간 인터뷰하고 <안나푸르나, 진정한 정상(Annapurna, True Summit)>을 저술했다. 이 책의 결론에 의하면 에르조그가 저술한 <안나푸르나>는 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픽션(Fiction)이라고 했다. 이에 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에르조그는 항변했다.
“등정이 명확하게 입증되지 못하더라도 등정자의 말은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등정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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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그 스코트대의 강첸중가 북서벽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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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언이설로 동료 속이고 이룩한 이탈리아 대의 K2 등정
1952년 스위스 대는 에베레스트의 남쪽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그들은 영국의 에릭 십튼 정찰대의 진행을 좌절시켰던 웨스턴 쿰 입구의 거대한 크레바스를 로프 브리지(rope bridge)로 건너고, 웨스턴 쿰에서 제네바 스퍼(Geneva Spur)를 오르고 사우스 콜(South Col)에 도달했다. 레몽 랑베르 대원과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가 남동릉의 8,595m 지점까지 진출하고 퇴각했다.
1953년 영국대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가 남동릉의 최종캠프(8,500m)에서 에베레스트를 초등했다. 이때부터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들이 완등될 때까지 정상 공격조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물론 등정은 그들의 업적만으로 이룩되지 않았다. 수많은 동료대원들, 그리고 셰르파들의 헌신정인 등로 개척, 난코스의 고정 자일 설치, 짐 운반 등 지원활동을 했기 때문에 최종 캠프가 구축되고, 등정의 위업이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등반 대장은 대원들 중에서 가장 유능한 대원들을 정상 공격조에 투입했다.
1953년 독일대의 헤르만 불과 오토 켐프터가 낭가파르바트(8,125m) 북릉 제5캠프(6,900m)를 출발했다. 뒤따르던 오토는 정상 플라토(7,500m)에서 고산병으로 등반을 포기했고, 헤르만 불은 단독으로 수평거리 1.6km, 수직고 500m를 돌파하고 무산소로 등정에 성공해 영웅이 되었다.
1954년 이탈리아의 K2(8,611m) 등반대는 고산병과 대원들의 탈진으로 인해 대원들의 지원활동이 마비상태에 빠지는 난관에 직면했다. 정상 공격용 산소통 2개는 제7캠프(7,500m)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공격조 콤파뇨니는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는 제8캠프(7,700m)에서 등로 개척에 나서면서 보나티 대원에게 제7캠프에 있는 산소통 2개를 제9캠프(8,150m)까지 운반해 준다면, 건강상태가 나쁜 자기 대신 보나티를 정상 공격조에 투입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보나티가 고소 포터 마디와 함께 사력을 다해 8,000m 지점까지 산소통 2개를 운반했을 때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런데 콤파뇨니와 사전에 약속했던 장소에 가보니 제9캠프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보나티는 어둠 속에서 고함을 질러댔다. 아브루치 스퍼 뒤쪽 어둠 속에서 라체델리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산소통 운반여부를 확인한 후, 보나티에게 즉시 제8캠프로 하산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고소 포터 마디는 라마교 신자로 어둠 속에 악령이 있다는 미신 신봉자로 하산을 거부했다. 보나티는 고함을 쳐서 이 상황을 공격조에게 알렸다. 그러나 공격조는 묵묵부답이었다. 보니티는 침낭과 텐트도 없이 8,000m 지대의 눈밭에 피켈로 얕은 구덩이를 파고, 자일을 깔고 앉아 마디와 부둥켜안고, 밤새도록 눈보라와 혹한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고 나서 새벽에 하산했다.
등정에 성공한 후 공격조는 이 상황에 관해 일언반구도 없었고, 또한 한마디 사과의 말도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콤파뇨니와 라체델리를 K2의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1954년 10월 19일 오스트리아 소규모 등반대의 티히 대장과 이외흘러(Jo"chler) 대원, 셰르파 파상 다와 라마가 초오유(8,201m)를 초등했고, 1955년 5월 15일 프랑스의 테레이와 쿠지는 세계 5위 고봉 마칼루(8,463m)를 등정했다. 같은 해 5월 25일 영국대의 조지 밴드-브라운 조, 다음날 하디-스트리더(Streather) 조가 캉첸중가(8,586m) 남서벽을 초등했다.
1956년 5월 9일 일본대의 이마니시-셰르파 기알첸 노르부 조, 이틀 뒤 가토-히게타 조가 북동쪽에서 마나슬루(8,163m)를 각각 초등했다. 같은 해 5월 18일 스위스 대의 루흐징거(Luchsinger)와 라이스(Reiss) 조가 서벽으로 로체(8,516m)를 초등했다. 그해 7월 7일 오스트리아 대의 라흐(Larch), 빌렌파르트(Willenpart), 모라벡(Moravec)이 가셔브룸2봉(8,035m)을 초등했다.
1957년 6월 9일 오스트리아 소규모 대의 슈무크(Schmuck)-빈테레슈텔러(Wintersteller) 조, 헤르만 불-디엠베르거 조가 브로드피크(8,047m)를 초등했다. 그들은 고정 캠프 3개를 설치했지만 고소 포터를 고용하지 않았고, 산소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등반을 주도한 헤르만 불은 자신들의 이 등반 방식을 ‘웨스트알파인 스타일’이라고 명명했는데, 알프스에서 가이드 없는 등반이 시작된 것처럼, 히말라야에서는 고소 포터, 즉 셰르파와 산소가 없는 등반이 시작되어 히말라야에서 알파인 스타일 방식의 효시(嚆矢)가 되며, 등반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1958년 7월 4일 미국대의 쇠닝(Schoening)-가우프만(Kauffman)조가 남동릉으로 가셔브룸1봉(8,068m·히든피크)을 초등했다.
1960년 대규모의 중국대가 에베레스트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그들은 노스콜-북릉-북동릉, 즉 ‘영국 루트’로 등반을 시작, 류렌만, 왕푸주, 콘부(콘파), 주인화는 산소장비를 휴대하고 최종 캠프(8,500m)를 출발했다. 주인화가 동료들의 어깨를 발판으로 북동릉의 세컨드스텝 위로 어렵사리 올라섰다. 그들이 높이 3m의 슬랩을 돌파하는 데 3시간이 소요되었다. 팀장인 류렌만은 탈진으로 뒤에 홀로 남겨졌다.
세 사람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심설 속으로 기다시피 등반하여 8,830m 지점에 도달했을 때, 산소가 다 떨어졌다. 그들은 등반을 시작한 지 19시간 만인 새벽 4시 20분에 기어서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았으나 밤중이라 등정 사진을 촬영할 수 없었다. 그들이 8,700m 지점까지 하산했을 때 날이 밝아 정상을 향해 몇 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영국 산악인들은 이 등정으로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자국의 유능한 산악인들이 이 루트에 총 투입되었지만 등정에 실패했는데, 등반 기술이 미진한 중국대가 이 위업을 달성하자, 이 사실을 공산주의 선전쯤으로 치부하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 보닝턴이 등반대장과 장시간 인터뷰했고, 1933년의 영국대 등반대원 웨이저가 중국대가 8,700m 지점에서 촬영한 사진을 감정한 후 사실로 받아들여 후에 중국대의 등정이 인정받게 되었다.
1960년 5월 13일과 23일 스위스 대의 포레, 쉘베르트, 파우커, 웨베, 오스트리아 산악인 디엠베르거, 독일 산악인 디에너, 셰르파 니마도르지, 나왕 도르지가 무산소로 다울라기리(8,167m)를 초등했다.
1964년 5월 2일 중국대 대원 10명이 북서벽과 북릉으로 시샤팡마(8,046m)를 초등함으로써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14봉이 완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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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①K2의 남남서릉 (매직 라인). ②쿠쿠츠카-피오트로프스키의 K2 남벽 루트. ③토모체센 루트(숄더까지 올랐다고 주장 했으나 나중에 거짓임이 발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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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릉~남동릉 횡단은 에베레스트 등반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1963년 미국 에베레스트 등반대가 에베레스트에 또 하나의 신 루트를 추가했다. 토마스 혼바인과 윌리 언솔드 두 대원들은 지원조 일행들과 함께 에베레스트 웨스턴 쿰의 전진캠프(제2캠프·6,507m)에서 서릉 상의 웨스트 숄더(West Shoulder) 7,150m 지점에 올라 제3캠프를, 시속 120km의 강풍이 몰아치는 서릉 상의 7,650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했다. 에베레스트 서릉은 사우스콜을 빈번하게 넘나드는 제트 기류의 영향을 받아 시속 120km 이상의 강풍이 맹타하는 악명 높은 난코스 능선이다. 그들 앞에는 서릉 상의 최대 난코스, 암벽지대의 거대한 침니(난이도 V급, 나중에 서릉을 직등한 유고대가 ‘만프레다 침니’라고 명명했음)와 가파른 바위 스텝(Step) 지대가 서릉의 직등 루트를 가로막고 있었다.
혼바인은 이 난코스들을 피하기 위해 좌측 북벽으로 트래버스해 옐로밴드를 가르고 있는 거대한 쿨와르(후에 혼바인 쿨와르로 명명됨)로 우회하는 변형 루트를 찾아냈다. 그들은 북벽 쿨와르의 아래쪽 8,306m 지점에 2인용 텐트로 제5캠프를 구축하고 비박했다.
그들은 체온을 보존하기 위한 에어 포켓(air-pocket)을 만들 작정으로 망사(網紗) 내의를 착용했다. 그들은 그 위에 두 겹 내복, 모직 셔츠, 상하 깃털 내복, 모직 등산 바지를 차례로 껴입었다. 그들은 등반 활동에 장애를 주지 않기 위해 얇은 방풍복을 입고, 동상 예방을 위해 두꺼운 모직 양말 두 켤레를 껴 신고 순록 가죽 등산화의 펠트 깔창에 깔창 하나를 더 깔아 착용했다. 거기에다 모직 벙어리장갑 위에 깃털 장갑을 꼈다. 그들은 산소 헬멧 위에 발라클라바 모자(balaclavas, 눈만 내놓고 귀까지 덮는 털모자)를 쓰고, 그 위에 파카 후드를 썼다. 그들은 짐 무게를 줄이기 위해 텐트와 침낭, 여분의 식량을 최종 캠프에 남겨 놓았는데도, 산소 장비를 포함해 각자 20kg의 짐을 짊어져야 했다.
경사 50도 정도 되는 쿨와르는 폭이 3~4m에 달했다. 쿨와르 속의 설벽은 겉이 단단하게 얼어붙었지만, 속은 과립상(顆粒狀)의 알갱이 눈 상태여서 크램폰 발톱이 자꾸만 빠져 나와 미끄러지는 바람에 피켈을 이용해 갈지자로 스텝 커팅(step-cutting)하며 등반하느라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설벽에 5cm 깊이로 박은 피켈을 정신적 확보물로 간주하며 조심스럽게 등반을 이어갔고, 쿨와르 측면에서 암벽을 발견하면 암벽등반도 불사(不辭)했다.
언솔드는 기어가다시피 느린 속도로 신중하게 등반을 진행했는데, 피켈로 빙벽을 찍을 때마다 얼음 조각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려 후등자 혼바인을 괴롭혔다. 옐로밴드 위에 형성된 얼음 틈바구니를 통과하자 쿨와르는 사람 어깨 너비로 좁아졌다. 그들은 등반이 까다로운 지역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무거운 짐을 짊어진 상태다보니 4시간 동안 고작 120m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쿨와르의 좁은 설벽 끝은 18m 높이의 바위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즉, 쿨와르는 이 절벽에 의해 위 아래로 나뉘어 있었다.
혼바인이 선등을 교대하여 절벽의 한가운데 잘 부서지는 설벽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그가 짊어진 무거운 짐이 지붕 널빤지 같은 경사의 푸석푸석한 암벽 밑으로 그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그는 크랙에 피켈을 박고 자루를 잡은 후, 핸드홀드를 더듬어 찾아 움켜잡으며 안간힘을 썼지만 크램폰 밑에서 바위 조각들이 계속 깨져나가 절벽 등반에 실패했다. 이어 언솔드가 절벽의 코너(corner, 다이히드럴, 이면각)로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10분 후 벽을 올라 피톤을 설치했다. 그의 크램폰이 무른 암벽을 문지르자 발밑에서 낙석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이렇게 어렵사리 장벽을 넘고 위쪽 쿨와르에 들어섰다. 그들이 높이 30m의 옐로밴드의 황색 슬랩을 돌파하고 8,504m 지점의 원형극장 같은 장소에 도달했을 때 오후 1시가 되었다. 언솔드는 베이스캠프의 위태커와 무선 교신을 하며 이 쿨와르는 ‘사향 고양이(bearcat),’ 즉 억센 짐승과 같은 난코스라고 평가했다.
그들이 아래쪽의 푸석푸석한 바위 장벽을 넘어 단단하게 얼어붙지 않은 쿨와르 속의 가파른 설벽으로 안전하게 하산하려면 자일하강을 위한 피톤 설치가 필수불가결한데, 이곳 쿨와르의 내부 측벽 무른 암벽에서 크랙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지점에서 유일한 탈출로는 오직 위쪽 정상, 즉 죽음의 지대를 향해서만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래 인간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마치 ‘돌아올 수 없는 다리(bridge of no return)’를 건넌 형국(形局)이었다.
위쪽으로 정상 설원과 잿빛 벽과 검푸른 하늘만이 바라 보였다. 그들이 8시간 동안 등반하고 쿨와르를 벗어나 정상 설원에 도달했을 때 시계 바늘은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에베레스트의 북동릉으로 곧장 이어지는 직등 루트와 벽을 우측으로 가로질러 서릉으로 되돌아가는 두 개의 루트가 있었다. 혼바인은 북동릉으로 이어지는 설벽 직등루트를 선호했는데, 선등자 언솔드는 암벽지대를 지나 서릉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부서지는 이판암 슬랩을 지나 설벽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크램폰이 다시 암벽을 긁었다.
그들이 한 피치를 더 오르고 서릉 마루에 도달했을 때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122m 아래 지점이 나타났다. 시속 96km의 강풍이 그들의 몸을 능선에서 날려 보낼 태세였다. 그들은 네 피치의 암릉을 오르자, 다시 칼날 설릉이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그들은 강풍과 악전고투를 계속하며 정상아래 12m 지점에 도달했다. 3주 전 미국대의 위태커 대원이 남동릉으로 등정하고 정상에 꽂아놓은 성조기가 강풍에 펄럭였다.
두 사람은 오후 6시 15분 북동릉과 남동릉의 합류지점, 즉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았다. 그들은 이제 에베레스트의 소유가 되었고, 에베레스트 또한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들이 서로 포옹했을 때 왈칵 쏟아져 흘러내리는 눈물이 혹한에 의해 곧 얼음으로 변해 얼굴 위에 얼어붙었다. 언솔드는 정상에서 베이스캠프로 미국의 유명 서정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를 무선기로 낭독했다.
“나에게는 잠들기 전에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걸어가야 할 먼 먼 길이 있다.”
정상에는 남동릉으로 2차 등정조인 미국 산악인 저스태드와 비숍의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들은 정상에서 20분간의 시간을 보내고 남동릉으로 하산을 시작해 7시 15분 남봉(8,763m)에 도달했다. 7시 30분이 지나자 사방이 암흑세계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암흑 속에서 남봉 아래를 엉금엉금 하산하던 중 탈진 상태로 하산하는 저스태드와 비숍을 만나 자정 무렵 8,534m 지점에서 텐트와 침낭도 없이 한데서 비박했다. 혹한을 극복하기 위해 두 사람씩 껴안고 밤을 지새웠다. 이때 언솔드는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나중에 발가락 10개의 끝을 모두 절제 수술했다.
혼바인과 언솔드는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로 서릉에 신 루트를 개척하고 남동릉으로 하산하는, 에베레스트의 두 개 능선 트래버스에 성공했다. 영국의 유명한 산악인 더그 스코트는(Doug Scott)는 이 미국인들의 위업을 에베레스트의 등반 사중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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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베레스트의 북릉-북동릉 루트. 그레이트 쿨와르와 혼바인 쿨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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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m 14개 고봉 초등 이후 더욱 모험적인 등반 이어져
1970년 영국대의 돈 윌란스와 듀걸 해스턴은 안나푸르나(8,091m) 남벽의 최종캠프(7,315m)에서 등정에 성공해 히말라야에서 벽 등반 시작을 알렸다. 또한 그해 6월 27일 독일 대의 라인홀트 메스너와 그의 동생 귄터는 낭가파르바트 루팔벽(남벽) 7,350m 지점에 위치한 최종 캠프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70도 경사의 메르클 걸리를 돌파하고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귄터가 고산병에 시달려 상대적으로 루팔벽에 비해 경사와 난이도가 약한 디아미르벽(서벽)으로 하산했으나 귄터는 눈사태로 실종되고 말았다.
1975년 5월 27일 중국대의 9명의 대원들(중국인 후센푸 외 8명의 티베트인들, 여성대원 판토그 포함)은 에베레스트 북동릉의 최종 캠프(8,680m)에서 출발해 세컨드 스텝에 알루미늄 사다리를 설치하고 등정에 성공했다.
1975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 두 사람은 카라코룸의 가셔브룸1봉 북서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자신들의 힘으로 등반하려고 했다. 그들은 8월 8일 아브루치빙하 상의 베이스캠프(5,100m)를 출발, 가셔브룸빙하(5,900m)에서 첫 번째로 비박했다.
이튿날 그들은 텐트를 짊어지고 25발자국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북서벽의 하부 빙벽을 프런트포인팅으로 돌파하고 록스텝(rock-step) 아래 도달했고, 이후 걸리, 침니, 리지, 설벽, 슬랩 등으로 등로를 바꿔가며 6,900m 지점부터 7,100m 지점까지 계속되는 가파른 스텝 지대를 돌파했다. 그들은 자갈밭(7,100m)에 텐트를 설치하고 두 번째 비박을 마친 후, 다음날 오전 8시에 출발해 설벽, S자형 걸리, 바위 립과 걸리를 돌파하고 정상 벽 밑에 도달했다.
그들은 200m마다 선등을 교대하며 정상 능선에 닿았고, 드디어 죽음의 지대(8,000m)를 넘어 정상 스노돔(Snow-dome·8,086m)에서 감격의 포옹을 했다. 그들은 늦은 오후에 제2 비박지로 무사히 귀환했다. 다음날 그들이 하산을 준비할 때 강풍에 그들의 텐트가 찢겨 날려갔다. 그들은 벽을 마주보고 빠른 속도로 하산했다. 그들은 베이스캠프에서 폴란드 여성 산악인 반다 루트키에비치의 축하를 받았다.
1975년 영국대의 듀걸 해스턴과 더그 스코트는 9월 23일 에베레스트 남서벽의 최종 캠프(8,321m)에서 남봉을 거쳐 등정에 성공했다. 그들은 하산 시 남봉(8,760m)의 설동에서 침낭도 없이 혹한과 사투를 벌이고 최종캠프로 귀환했다. 26일 피터 보드만과 셰르파 페템바가 2차로 등정했다. 미크 버크도 혼자 등정하고 실종되었다.
1978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는 오스트아아 대가 설치한 고정 캠프를 이용하며 에베레스트의 남동릉을 무산소로 등정하는 역사적인 쾌거를 이룩했다. 1984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카머란더는 가셔브룸1봉(8,068m)과 2봉(8,035m)을 트래버스해 8,000m급 봉우리 2개를 연속 등정했다.
같은 해 폴란드의 쿠쿠츠카와 쿠르티카는 브로브피크산군 북봉(7,550m)의 서릉 밑 5,400m 지점과 6,000m 지점에서 비박했다. 그들은 다음날 고난도의 암벽등반과 빙벽등반으로 서릉의 6,800m 지점에서 비박하고 북봉을 등정한 다음, 북봉과 중앙봉(8,013m) 사이의 콜(Col)로 하산하여 비박했다. 다음날 그들은 중앙봉을 등정하고 중앙봉과 전위봉(8,030m) 사이의 콜에서 비박했다. 다음날 그들은 브로드피크의 정상에 올라 ‘하늘 능선 종주’를 완성했다.
1984년 스페인의 카탈로니아 산악인 닐 보이가스와 엔릭 루카스는 안나푸르나 1봉(8,091m)의 중앙봉을 향해 남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돌사태의 소나기 속에서 등반을 계속해 7,150m 지점의 록밴드 밑에서 세 번째 비박을 하고 세락(빙탑) 밑 7,300m 지점에서 네 번째 비박을 했다. 그들은 높이 160m, 난이도 V+의 화강암 벽을 돌파하고 7,800m 지점에서 5번째 비박을 했다.
다음날 10월 3일 중앙봉과 동봉 사이의 능선에 도달한 다음 낮 12시에 중앙봉(8,051m) 정상을 밟았다. 그들이 주봉(8,091m)을 등정하려면 높이 100m의 수직벽을 자일 하강해야 했다. 탈진 상태인 그들에게는 무리였기 때문에 하산을 선택했다.
1984년 포스트 몬순에 스위스의 로레탕과 유스 노르버트는 안나푸르나 동봉(8,010m), 중앙봉(8,051m), 주봉(8,091m)을 트래버스하는 위대한 등반을 실행했다. 그들은 7.5km 길이로 까맣게 허공에 뻗어 있는 안나푸르나의 동릉, 즉 하늘과 땅 사이의 칼날능선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0월 23일 검은 바위 봉, 록 누아르(7,485m)를 출발해 9시간 만에 콜을 거쳐 동봉(8,010m)을 등정했다. 그들은 강풍에 시달리며 동봉과 중앙봉 사이의 콜로 내려와 퇴적한 적설 속에 설동을 팠다. 그들은 설동 속에서 밤새 강풍과 혹한과 사투를 벌이고 10월 24일 오전 10시 중앙봉 정상을 밟았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2개의 피톤을 높이 100m의 낭떠러지에 아낌없이 설치하고 수직 벽을 자일 하강했다. 그들은 주봉을 등정하고 북벽으로 하산했다.
1986년 폴란드의 쿠쿠츠카와 피오트로프스키는 K2 남벽의 6,400m 지점과 7,200m에서 비박했다. 그들은 중앙 립으로 등반을 계속해 ‘하키 스틱’이라는 걸리에 도달했다. 그들은 걸리 속의 7,800m 지점에서 비박 후 8,200m 지점 100m 높이의 록밴드 밑에서 다시 비박했다. 쿠쿠츠카가 최고난도 V+등급의 30m의 높이의 록밴드를 돌파하며 루트를 개척하는 데 하루 종일 걸렸다.
다음날 7월 8일 그들은 나머지 록밴드와 눈처마를 돌파하고 아브루치능선의 상부에 도달했다. 그들이 등반을 계속해 빙탑을 돌아 올랐을 때 K2 정상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들은 등정 후 아브루치능선으로 하산하여 밤늦게 록밴드 상단의 설릉에서 비박했다. 다음날 그들은 화이트아웃 속에서 아브루치 스퍼(Spur)로 하산해 길을 헤매다가 숄더(7,900m) 위쪽 눈밭에 도달해 비박했다. 다음날 빙벽을 하산할 때 피오트로프스키의 아이젠 양쪽이 벗겨져 그는 남벽으로 추락사했다.
1986년 8월 30일 스위스의 로레탕과 트루아예가 에베레스트 북벽의 혼바인 쿨와르를 오르고 서릉 상부로 에베레스트를 순수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했다. 그들은 고정캠프도 설치하지 않고 셰르파 지원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들은 텐트나 침낭, 로프도 휴대하지 않았다. 오로지 설동을 설치할 삽 한 자루를 휴대하고 야간에는 등반을, 주간에는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39시간 만에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고, 한 시간 휴식을 취한 다음 글리세딩(눈밭에서 미끄럼 타기)으로 3시간 만에 전진 캠프로 귀환했다.
1990년 스위스의 로레탕, 장트루아예, 폴란드 산악인 쿠르티카는 초오유 남서벽에 신 루트를 개척했고, 시샤팡마(8,046m) 서봉과 중앙봉 사이의 콜로 이어지는 신 루트를 3일 만에 개척했다.
1991년 프랑스의 피에르 베겡과 프로피는 K2의 북서릉을 알파인 스타일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서릉에서 40일간 폭풍과 사투를 벌이며 7,000m 지대를 6번 진출하고 퇴각하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8월 14일 K2 북서릉 7,000m 지대를 돌파하고 북서벽으로 트래버스해 북릉 7,950m 지점에서 허공으로 솟아오른 바위 레지(Ledge) 위, 즉 ‘독수리 둥지’에 도달해 비박했다.
그들은 다음날 8,100m지점에서 좌측 설벽, 즉 판상 눈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200m를 횡단한 다음 쿨와르 밑에 도달했다. 그들은 쿨와르를 사다리 삼아 오르고 8,500m 지대의 가파른 가루눈 지대를 통과했다. 그들은 좌측으로 우회해 정상 능선에 붙었다. 그들은 강풍과 영하 35℃의 혹한과 사투를 벌이며 때로는 기어서 등반을 계속해 등정했다.
1996년 러시아의 페트르, 발레리, 그레고리는 에베레스트의 북동릉과 북릉 사이의 제2 북벽에 위치한 가파른 암설 쿨와르를 돌파하고 북릉의 8,250m 지점에 도달했다. 그들은 북동릉으로 등반을 계속해 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