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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선을 행하되 겸손해야 합니다!
참고말씀: 고후6:1,2; 벧전5:5,6
읽을말씀: 눅14:1-35
주제말씀: 눅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첫째, 항상 선을 행하되 겸손해야 합니다(1-14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예수님은 안식일에 누구의 집에 청함을 받으셨습니까? 한 바리새인 지도자입니다. 그 자리는 어떤 자리였습니까? 식사자리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1절 상) 그 자리에는 어떤 이들로 가득했습니까?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3절 상)
겉으로 보면 단순한 식사자리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어떤 자리였습니까?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시험과 올무의 자리입니다.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1절 하) 마침 그 자리에 누구도 함께 있었습니까? 수종병 든 한 사람입니다.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2절) 그도 청함을 받았던 것입니까? 아마도 청함을 받지 못했으나, 예수님께 고침을 받겠다는 일념 하나로 염치 불구하고 나아온 자 같습니다. 그 사람처럼 우리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를 힘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처음부터 다 아셨습니까?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당신을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무엇을 물으셨습니까?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 하냐 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 하) 왜 이 같은 질문을 하신 것입니까? 그들의 편협한 생각을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예로 들면서 그들의 생각이 그릇되었음을 알려주셨습니까?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건져내는 관례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5절)
또한 예수님은 청함 받은 자들이 높은 자리를 택하는 것을 보시면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7절)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차라리 끝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8,10절)
어째서입니까?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수밖에 없으나, 자기를 낮추는 자는 반드시 높임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
아울러 자기를 청한 자에게는 따로 무슨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잔치를 베풀려거든 벗이나 형제, 친척,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그리할 것입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12,13절)
어째서입니까?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상급이 되고 후일에 갚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업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4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항상 선을 행하되 겸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항상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교만하면 낮아지고 겸손하면 높아지는 영적인 원리를 깨닫고 항상 겸손하기에 힘쓰고 있습니까?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둘째, 기회 있을 때에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15-23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4:23)
식사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고 말하자,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15절) 예수님은 어떤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까? 큰 잔치 비유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면서 그것을 사양하고 거절하면,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8-20절)
다시는 그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을 친히 교훈해주시고자 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23절) 이 기회는 고스란히 누구에게로 넘어갔습니까? 처음에 청함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 즉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입니다.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1-23절)
여기서 먼저 청함을 받았던 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유대인들입니다. 나중에 청함을 받은 자들, 강권하여 데려온 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유대의 소외된 자들과 유대 지경 밖의 이방인들입니다. 결국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대인들이 거부한 하나님 나라를 이제는 강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자들 및 이방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아직 기회 있을 때에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단단히 붙잡고 있습니까? 지금은 은혜의 때임을 깨닫고 그 기회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셋째, 자기 부인의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25-35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누가 함께 했습니까? 수많은 무리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25절 상) 예수님은 돌이켜 그들을 보시면서 무엇을 말씀해주셨습니까?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하고,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26절)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인의 자세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절)
26절은 실제로 자기 부모나 처자, 형제, 자매 등을 미워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미워하지’(헬, 미세이)는 ‘조금 사랑하다’는 뜻으로 실제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는 덜 귀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누구보다 덜 귀히 여겨야 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을 자기 부모나 처자, 형제, 자매보다 더욱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이 아닙니까? 맹목적인 추종입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합니까? 제자가 되는 길을 먼저 충분히 헤아려본 후에 단단히 각오하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마치 건축을 하는 사람이 그 비용을 충분히 계산해본 후에 건축을 진행하며,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28-30절)
왕이 자신의 병사들로 쳐들어오는 적국의 병사들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지를 충분히 따져본 후에 전쟁을 할지 화친을 청해야 할지를 판단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31,32절)
물론 이 말은 무엇이 아닙니까? 이것저것 다 따져보면서 제자의 길을 걷는 것이 참으로 고되고 힘든 일이니 미리 겁먹고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을 계산기 두드리면서 차일피일 미루거나 멀리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허면 무엇입니까? 충분한 각오와 굳은 결단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며 제자의 길을 걸으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
끝으로, 주님의 제자는 어떤 일꾼이 되어야 합니까? 소금처럼 쓸모 있는 일꾼입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34,35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자기 부인의 자세와 굳은 각오로 주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그러한 각오와 자세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먼저 충분히 헤아리고 미리 각오한 연후에 끝까지 제자의 길을 걷고 있느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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