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살아온 삶의 터전 연평도. 그러나 이제 주민들에게 연평도는 아늑한 고향땅이 아니다. 북한의 연평도 공격 이후다. 26일까지 주민의 대부분인 1300여 명이 배를 타고 도망치듯 인천으로 빠져 나왔다. 이들은 “불안해서 못 살겠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고향땅을 등지지 못하고 연평도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정 때문에, 가족 때문에 남기로 결정했다. 떠나가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사연을 들어봤다. 편집자
연평도 떠나겠다
“돈벌이와 처자식 목숨 못 바꿔”
이진구씨
“50평생을 살아온 터전인데 쉽게 버릴 수 있나. 하지만 이제는 떠날 채비를 해야 할 것 같다.”
25일 낮 12시30분 인천에서 연평도로 가는 배에서 만난 이진구(51)씨. 연평도에서 꽃게잡이 어선 4척을 갖고 있는 이씨는 24일 해경 경비정을 타고 아내와 피신했다가 옷가지를 챙겨 나오기 위해 다시 섬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씨의 가장 큰 걱정은 바다에 던져 놓은 어구. 그는 9월 초 꽃게를 잡기 위해 집과 배를 담보로 수협 등에서 2억여원을 빌렸다. 9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100여 일간은 연평도 주민들의 주 소득원인 꽃게잡이 철. 선원 20여 명을 고용했고 선용금으로 2억원이나 줬다. 하지만 북한군의 공격으로 선금을 떼일 처지에 놓였고 바닷속 어구는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빌린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게 됐다.
사태가 진정되더라도 배를 몰고 나갈 선장과 선원을 구하는 것도 어렵게 됐다.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목숨을 담보로 일을 하겠다고 들어오는 선원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배 한 척을 운영하는 데는 4~5명의 선원이 필요하다. 대부분 육지에서 건너온 사람이거나 외국인 근로자다. 조업을 하려면 어구도 다시 사야 한다. 적어도 2억원가량은 필요하다. 빌린 돈이 2억원이나 되는 데 또 2억원을 빌려야 한다. 막상 조업을 하더라도 꽃게잡이 철이 지나면 올해 농사는 다 망치게 된다. 그는 “사실상 연평도의 올해 꽃게잡이는 끝난 셈”이라고 힘없이 말했다.
24일 밤 인천의 한 찜질방에서 부인과 하루를 보낸 이씨는 “아내는 물론 인천에서 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들이 이사를 나가자고 했다”며 “섬에 돌아와도 먹고살 길이 막막한데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씨는 “아내는 밤새 ‘무서워서 더 못 살겠다.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뭍으로 나오자’고 몇 번이나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이씨는 배를 타고 연평도로 가는 동안 내내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걱정을 했다. 태어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웠던 고향을 떠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이다. 막상 떠나자니 마땅한 대안도 없다. 바다에서 태어나 고기 잡는 것 말고는 이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는 “포격 당시를 생각하면 두 번 다시는 연평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돈벌이가 되지만 가족의 목숨과는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이씨는 당분간 인천에 머물며 남을지, 떠날지를 결정할 계획이다. 하지만 ‘떠날 때’라는 생각을 정했다.
오후 3시30분쯤 연평도에 도착한 이씨는 부둣가에 세워놓은 차를 몰고 집으로 달려갔다. 이씨의 집은 폭격이 집중된 남부리. 다행히 집은 유리창만 깨치고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베란다와 방의 창문은 모두 부서졌다. 이씨는 섬에 머무는 1시간30분 동안 부인과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이씨는 가방 하나에 짐을 챙긴 뒤 서둘러 인천으로 향하는 여객선에 다시 몸을 실었다.
연평도=신진호 기자
최후까지 남겠다
“아들·동생 남겨두고 섬 못 떠나”
이기옥씨
섬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건 가족이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자식은 부모 때문에 섬을 떠나지 않는다. 3대가 함께 사는 이기옥(50·여)씨의 가족이 섬에 남기로 한 것도 가족 때문이다.
이씨는 아버지(이유성·83)와 어머니(강선옥·82)를 모시고 산다. 부모는 59년 전 1·4후퇴 때 북에서 내려와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동생 기환(44)씨는 물론 아들 성기림(23)씨 모두 연평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고향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씨는 “바지락과 굴·소라 등 자연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만하다”고 말했다. 다섯 식구가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 바로 이곳, 연평도다.
이씨의 집은 뒷마당에 포탄이 떨어진 수협에서 50m 거리에 있다. 주변의 집들이 방패막이를 해준 덕분에 파편이 거의 날아들지 않았다. 그러나 귓전을 때리던 폭발음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포탄에 맞아 폐허가 된 동네를 보면 그날의 공포가 되살아난다.
“일할 것도 없고, (무서워서) 몸이 떨려 일할 수도 없어. 스물세 살에 연평도에 온 뒤로 변고도 이런 변고가 없었지.” 이유성 할아버지가 말하는 동안 강선옥 할머니는 곁에 앉아 두터운 솜이불을 꼭 틀어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25일 아침 주민대책회의가 열렸다. 주민들은 “곧 있을 한미연합훈련 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나가자”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이날 대부분 육지로 가는 배에 올랐다. 이웃들은 이기옥씨에게도 나가자고 권유했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형제들도 “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나오라”고 채근했다. 그러나 이씨의 가족에게는 남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군무원인 기환씨는 군부대에서 전기설비를 책임지고 있고, 성기림씨는 연평면 예비군중대에서 상근예비역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다. 이씨는 “동생이 벌써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지만 한동네에 있으니 걱정은 안 한다”고 말했다. 아들은 두 달 뒤면 전역한다.
“늙은이가 제 몸 아끼자고 군에 있는 아들, 손자 녀석 내팽개치고 도망갈 순 없는 노릇이지. 여기서 나간들 하루라도 발 뻗고 잘 수 있겠나 이 말이여.” 이 할아버지만의 고집이 아니었다. 관절염 때문에 움직임이 불편한 강 할머니도 “그건 부모된 사람의 도리가 아녀”라고 거들었다. 이 할아버지는 26일까지 남아있는 주민 30명 중 가장 나이가 많다. 이씨는 “우리라도 남아 있어야지 저놈(북한)들이 허튼 짓을 못한다. 이래봬도 내가 여성예비군 사격 훈련에서 일등을 했다. 지금이라도 나가 싸울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이씨의 가족은 오랜만에 찾아온 육지 손님을 보곤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이씨는 “취재하러 돌아다닐 때 타고 다니라”며 낯선 기자에게 선뜻 자동차 키를 내줬다. 강 할머니는 “다 나가서 머물 곳이 없을 테니 여기 짐을 풀고 밤에 오라”고 했다. 마당에 있는 백구가 주인의 마음을 아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연평도=유길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