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덕(福德)의 성품이란?
수보리언 심다세존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 여래설복덕다
須菩提言 甚多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 如來說福德多
수보리가 여쭈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오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오니
그래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 금강경 -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해서
많은 중생을 잘 살게 해준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부처님이 물으시는 말씀에 대해, 수보리 존자는 이렇게 사뢰었다.
“참 많습니다. 기가 막히게 복이 많을 것입니다[甚多].
세존이시여, 제가 많다고 말씀드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금은 칠보를 대천세계에 가득 채워서 나누어 주자면
아무래도 한 해 두 해가 걸려도 못 나눠 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몇 만 년 안 죽고 살아서 끝없이 많이 보시하고
내가 죽어 다시 태어나서 또 보시하고 하여 천생 만 생 해도 다 못 나눠 줄 정도이니
그렇게 복만 지으면 대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찬물 한 그릇 떠주고 큰 부자 되는 사람도 있다.
찬물 한 그릇이 사람 살리기도 하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런 찬물이 있다.
밥 한 그릇으로도 그럴 수도 있는데
엄청나게 복을 많이 진 이런 사람의 복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저렇게 큰 복을 엄청나게 많이 지었으니 가령 억만 겁 드나들면서
전 세계 화폐를 혼자 다 차지할 만한 그런 복을 지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런 큰 복을 지어 놓으면 제가 돈을 일일이 벌어 쓰는 게 아니다.
자기한테 신세 진 사람들이 형제 부모 되어서 다 돈 벌어 놓으면
그런 집에 태어나 돈 공짜로 막 쓴다.
가령 상속법이 없다 하더라도 그런 재산이 또 돌아오고 복을 지어 놓으면
설사 돈을 쫓아내 버려도 쫓아낼 수 없이 소낙비 오듯이 막 퍼부어 밀려온다.
무엇을 해도 엎어지나 자빠지나 잘 된다.
반대로 복을 못 지어 놓으면 엎어져도 뒤통수가 깨지고 안 되는 사람은
온 시민이 도와줘도 안 되고 대통령이 따라다니며 밀어줘도 그것 때문에 병이 나서 죽는다.
그 돈이 없어질 때까지 병이 난다.
배가 아프고 온갖 데가 다 아프다. 또 돈이 떨어지면 병이 낫는다.
진주 논산이란 곳에 농사를 스물다섯 섬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해서 친구들이 돈을 막 대준다.
그런데 양식을 스물다섯 섬만 사 놓으면 마누라가 앓든지 자식이든지 부모든지 병이 난다.
스물다섯 섬을 다 잘라 먹어야 병이 낫는다. 그래서 스물다섯 번을 스물다섯씩 해 봤다.
동네에서는 하도 신용 있고 부지런하고 똑똑하니 자주 뒤를 대주고
나중에는 장사 밑천도 대주어서 또 장사하고 돈 모으느라 애를 쓰고 그러는데
그러면 꼭 병이 나고 그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날그날 벌어먹고, 살다 죽는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런데 여래께서 이 사람에게 복이 한 없이 많다고 하시는 데는 참 이유가 있습니다[是福德].
그것은 이런 물질적 복덕은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卽非福德性].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것, 참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是故如來說福德多].”
이렇게 말씀하시는 수보리 존자의 뜻은 무엇인가.
수보리 존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부처님 따라다니며 법문을 들어 다 아시지만,
그러나 지금 세상의 우리는 좀처럼 그 뜻을 해득(解得)하기 어렵다.
여기서 복덕성(福德性), 곧 복덕의 성품이라고 한 것은 마음을 가리킨다.
마음은 곧 복덕을 지을 수 있는 주체성이고 성품이 되므로 <복덕성>이라 한 것이다.
재물을 아무리 많이 보시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한계가 있고 끝이 있는 상대적 복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십억 세계에다 칠보를 가득 채워서
그것을 여러 수천만 년을 두고 보시하면 복이 많긴 많지만,
마음 깨쳐 우주 전체를 깨치는 것에 비하면
태평양 가운데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많다고 했느냐 하면
그것은 불보살의 경계에서는 복이 많다는 말은 곧 복이 적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고,
정말 큰 것은 크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크다는 말은 작은 것을 상대로 해서 성립되는 말이고
이것보다 작은 저것하고 비교해서 이게 크다는 말이 된다.
사바세계 중생들은 복덕이 아주 적기 때문에 그런데 비교하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극락세계나 불보살 세계의 복력(福力)에 비교한다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 아니라
그것 몇억만 배의 복으로 비교한다고 하더라도 견주어 볼 가치조차도 없게 된다.
그것은 이 마음자리인 성품의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덕 지을 수 있는 마음자리, 곧 복덕의 근본 자리인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생각도 지식도 신앙심도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닌데,
그게 깨끗이 살아 있으니 거기 들어서서 원대 복귀하면
우주 전체가 <나>다. 허공도 현상계도 나고 내 마음에 그게 다 나타난 것이다.
‘복덕을 지을 수 있는 이 마음은, 곧 복덕성은 우주 전체를 차지하는 것인데
그까짓 십억 세계 한두 개 차지해 봤자 그게 얼마나 되겠느냐.’ 그런 뜻이다.
이런 때는 뜻이 참 어렵다.
큰 대학자끼리 만나서 사십 년이나 불법을 들었으므로 이렇게만 얘기해도 알아들었지만,
지금처럼 불교에 대한 기초도 없는데 이런 말을 내놓아 봤자 깜깜하다.
‘이 사람 복덕이 많으냐. 안 많으냐.’
‘네, 많습니다. 복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는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로만 따라다니면 무슨 말인지 말이 안 되고
날마다 금강경을 봐야 뭘 설명한 것인지 평생 해도 모른다.
‘이 복덕은 주체성이 아니기 때문에,
많다 적다 하는 것을 초월한 마음을 깨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 사람 복이 참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새겨야 그 뜻이 풀어진다.
-무비 스님- 금강경 강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