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 대포를 마시며
사랑돠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을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1979)
[작품해설]
김광규의 시는 대부분 평이한 언어와 명료한 구문(構文)으로 씌어진 일상시(日常詩)이면서도 그 속에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 그는 흔히 난해시에 식상한 독자와의 통교(通交)를 회복시킨 시인으로 평가된다. 이 시 역시 일상적 삶에서 얻은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쉬운 표현 방법을 통해 중년기 사내의 소시민적 의식 구조를 명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는 화자가 중심이 된 간단한 줄거리가 담겨 있다. 4.19가 일어나던 무렵, 젊은 혈기와 ‘때 묻지 않은’ 순수로 살던 화자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어느 ‘세밑’, 중년의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옛 추억이 서린 곳에서 동창들을 만난다. 그들은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기’고 전화번호가 달라진 만큼, 각 분야에서 어느 정도 부와 지위를 얻은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중년이 되어 있다. 월급이 대화의 전부가 되고, 물가가 고민의 주종을 이루는 소시민의 중년이 되어 버린 그들은, ‘늪’같은 일상적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옛사랑’을 오래하던 젊음을 떠올려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포커’나 ‘춤’으로 대표되는 향락적 세계를 즐길 뿐이다.
그러므로 행여 누가 들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 그저 ‘살기 위해 살고 있’는 소시민적 생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에게 순수와 젊음을 반추시켜 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만 ‘플라타너스 가루수’만이 간신히 남아 그들을 밤겨 주지만, 그들은 더 이상 ‘하얀 입김 뿜으며 /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없는 자신들을 확인할 뿐이다. ‘부끄럽지 않은가’ 라며 꾸짖는 것 같은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기’는 화자의 무거운 발자국에서, 우리는 유수 같은 세월 속에 젊음과 열정, 순수와 이상을 잃어버리고 거의 맹목적일 만큼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중년의 소시민적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작가소개]
김광규(金光圭)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독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5년 『문학과지성』에 시 「시론」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81년 제1회 녹원문학상 수상
1981년 제5회 오늘의작가상 수상
1984년 제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독문과 교수
시집 :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 『반달곰에게』(1981), 『아니다 그렇지 않다』(1983), 『크낙산의 마음』(1986), 『서울의 우울편』(1987), 『좀팽이처럼』(1988), 『아니리』(1990), 『희미한 에 사랑의 그림자』(1995), 『가진 것 하나 없지만』(1998), 『처음 만나던 때』(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