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과 같은 모자를 나는 무식 하게도 맥고모자(麥藁帽子-straw hat)라고 혼자 그렇게 알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검색 해보니 정글 탐험 모자라고 되어 있다. 일본은 파나마 모자와 맥고모자가 유행하자 다른 나라에는 없는 나까오리 모자를 만들어 팔았다. 중절모(中折帽)라고도 하는 “나까오리”는 “나까오리 보시 (나까오리ナカオリボゥシ-中折り帽子)”의 줄인 말로 모자 상단 부분의 가운데를 일자로 접는다는 뜻이다. 이때에 재빠르고 뛰어난 일본 상혼을 엿본다.
정글 모자는 정글도 아닌 우리나라에도 한때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바로 사변 직후인 1950년대 초이다.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고 꽤나 멋쟁이요 형편이 괜찮은 부류의 신사들이 쓴 것으로 기억된다.
1954년 어느 여름이던가? 중학교 3학년 때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구에 온다고 예외 없이 학생들이 동원 되었다. 이 대통령은 대구 앞산 비행장 활주로에 헤리콮터로 도착했다. 길게 도열해 태극기 흔들며 열광하였던 그 시절 대통령은 지금 이북 김정은의 독재 형식에 버금가는 독재 시절 이었다. 비록 이 대통령 자신의 의도하는 바가 아닐지라도 어린 학생들이 수업을 전폐하고 동원 되어야 할 일은 아니어야 했을 것이다. 별 구체적 영문도 모르는 채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데 대통령이 도착한 것이다. 학생들과 같이 인솔한 선생님들 역시 딱한 처지였다.
이 대통령의 헬리콮터가 지상에 착륙하는 순간 시끄러운 굉음과 함께 소용돌이치는 헬리콮터 푸로펠러 바람에 주산 부기 선생님이셨던 이달생 선생님의 바로 그 모자가 휭 날라 가버려 그 모자가 헬리콮터 바퀴에 짓눌려 망가져 버렸다. 그때 그 낭패해 하시던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사변 후 어렵던 시절 중학교 교사의 신분으로 갖추기 힘들었을 법도 한데 멋을 낸다고 어렵게 구한 것 이라고 상상이 간다. 어린 눈에도 안쓰러움이 자극 되었던가, 해서 저녁에 가친께 그 말씀을 드렸다. 가친께서는 “마침 내게 두 개가 있으니 하나 갖다 드리라”고 하시어 이튿날 이달생 선생님께 가친의 뜻을 전하고 드렸더니 무척 감격해 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가친도 떠나시고 이달생 선생님도 떠나시고 무상한 세월에 나도 나이 80이 다 되었다. 대통령이 이렇듯 국민위에 군림하던 시절, 학생동원 같은 행패가 있어왔다. 서울 같은 곳 에서는 앞산 비행장 같은 곳에 대통령이 헬리콥터로 착륙하는 곳에 학생동원 할 일 없을 터이고 수업 폐지하고 학생 동원에 교육자인 선생님들이 제 궤도를 이탈하는 불쾌감을 토로 하지 못 한 채 끌려 나오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오지에 학생 동원하면서까지 대통령이 행차할리도 없을 터이다. 별것 아닌 일 같지만 그 중학교 교사가 어렵게 구한 모자가 대통령 환영에 끌려가서 대통령이 타고 온 헬리콥터의 바람에 날리어 구겨져 버린 억울한 사연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 시절부터 그렇게 익숙해진 국민과 대통령간의 생각관계 들이었다. 사변직후 어찌 되었건 피난으로 전국 학생들이 다 모인 것이 대구를 위시한 경상도 남단이었다. 그때 환영 나간 학교 중 경북중이 있었고 그 중학에서 중학교 국가고시 2연속 최고 득점자가 배출 되었다. 첫 번째는 38회 김해도 선배이고 그 다음이 39회 정암 정성진 형이다. 그 정암과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서 건강한 교유를 하는 영광과 행복을 함께하고 있다. 38회 김해도 선배는 이미 작고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스포츠는 종류별 대회가 있어 1등을 가려내지만 공부 성적 1등의 어려움은 일반 스포츠 대회의 일등과는 비교가 안 된다. 스포츠는 종류가 많지만 공부 성적으로 등위를 매기는 경우는 그 숫자에서 스포츠 보다 더 치열하다.
그 1등을 한 수재가 우리함께 있다는 뜻이다.
그 학생동원 환영 이후 그 경북고가 예의 이승만 정권의 학생동원 버릇을 고치고 나라 뒤 없는 역사 전환의 봉화를 든 학교다. 그것은 최고의 학생모임이고 영리하고 용기 있는 학생들의 집합처가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요. 전국에서 1등이 2연속 나타나듯이 그런 상징적 자존심과 선두주자의 강한 책 무감 같은 신선한 의지의 발현이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
1960년 2월28일 일요일 야당 지도자들 수성 천변 유세계획을 방해하려고 관권으로 학생 등교를 강행하자 급기야 학업성적 우수했던 학교 학생들답게 학생회장 이대우는 김영기 교장께 일요일 강제 등교를 항의한다. 차마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한 교장을 뒤로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의 데모가 대구 여타의 학생들 에게도 파급되고 마산의 김주열 학생의 죽음으로 4.19가 발발한다. 그 리더 격인 우리 동문 윤식이 등장한다. 세월호 사건 때 대통령의 7 시간을 운운 하는데 6.25 나고 이승만은 어디가고 백성들만 서울에 남게 되고 임진왜란 나니 선조 먼저 도망친 사실들을 다 지난 일들이라 잊어야 하나? 어쩌면 학생들 동원시켜 환영시킨 사례나 태연하게 받아들여 권좌에 앉아있던 대통령은 먼저 간 애국지사들 미안 하지도 않았던가? 그 무렵 국회 난입한 무술경찰들의 정치 폭력조차 잘 보아온 나로서는 그때 그 이달생 선생님의 불평 없이 낭패한 모습을 떠올리며 연쇄적으로 떠오른 상념들을 적어본 것이다. 국회 난입한 무술 경찰들 중 주로 전라도 쪽은 문을 부수고 경상도 쪽은 주로 들어 메치는 역할을 했다던가? 나는 그 국회 난입 무술 경찰들을 사범으로 무술을 수련한 씁쓸하고 고약한 숙명의 기억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