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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茶유적지를 찾아서>
-다정 김규현 연재, 강원일보발행 월간지『태백』연재분(1989.1~1990.6)
12-梅月堂의 발길 따라 가보는 茶香어린 金剛山 Ⅰ
“필설(筆舌)로는 다 그릴 수 없는”, 아름다운 금강산
고려땅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았으면 하는 것이 옛날 중국사람들의 소원중의 하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압록강을 넘어와 그 그림운의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는 어떤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두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그곳을 가보지 못한지가 벌써 반세기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가끔은 정치권의 입장에 따라 가끔은 가까워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북풍이란 바람으로 멀어지는 금강산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 모두에게 그리움만 쌓이는 금강산!
사실 필자는 해방 후 세대이고 또한 북쪽에는 일가친척부치가 한명도 없는 처지이기에 북녘땅에 대한 특별한 한이나 감회는 없는 편이지만, 그러나 요산요수의 기질은 타고난지라 금강산이나 백두산 같은 명산에 대한 동경마져 없는 것은 아니였다. 그렇기에 월간 『월간 태백』에 강원의 차유적지순례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쌓여가는 자료들- 주로 시와 기행문 중에서 금강산에 얽힌 차에 관한 기사- 이 제법 부피를 더해가자, 언제부터인가 금강산이 부쩍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비록 가보지도, 가볼 수도 없는 곳이지만, 옛 강원도 땅이란 핑계거리를 내세우고 고전속에 난 희미한 옛길을 더듬어가며 금강산 순례를 떠나보기로 한다.
길 떠나기 전의 설렘이 두렵기까지 한 것은 방대한 양의 고전 속에 난 숲길이 희미할 것이라는 점 이외에 시공의 문제, 즉 때는 조선조 초기이고 장소 또한 가본적도 없는 곳이기에 더욱 그렇고, 더욱이 우리의 길라잡이 매월당 또한 범상하지 아니한 이력의 소유자이기에 더 더욱 그러하리라….
매월당의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뜬구름 같은 인생길을 허허롭게 살다간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다가 또한 필자도 여러 차례 소개한바 있기에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없겠지만, 다만, 왜 이 글이 “매월당의 발길따라” 라는 타이틀을 택하게되었나 하는 점에 대해서는 사족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그 첫째 이유는 매월당과 강원도와의 인연관계에 있다. 김시습하면 대채로 경주 금오산(金烏山)이 생각나지만, 시실은 그는 강릉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며 원성왕의 아우인 김주원으로 신라말기에 강릉에 자리를 잡은 사람이다. 그 외에서 매월당은 가원도내의 여러 산-설악산, 오대산, 청평산- 등에 오래 머루른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 사실은 그가 강원도를 고향으로 여겨 각별히 사랑했던 증거이기에 그가 강원도 사람이란 것은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사실은 그의 시구절,
늙은 병이 찾아들어 3년이나 예맥(濊貊)에 머물었지만,
금년에는 어는 곳에 머물 것인가?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조각 뜬 배라네.
에서 보다시피 그는 예맥 땅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둘째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차인으로서의 새로운 그의 모습의 조명이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필자가 그의 문집 전체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가 차에 대한 읊은 차시는 무려 80여수나 된다. 이 정도의 분량이면 우리나라 최고의 차인임에 틀림없다. 물론 차시의 분량으로 최고의 차인으로 꼽는 것은 무리가 따르지만, 그의 차시는 그 품격 또한 최고의 경지이기에 그를 최고의 차인으로 꼽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 차문화의 최고봉으로서의 모습은 금강산에서 더욱 빛나 보일 것이다.
이상의 배경으로 매월당의 발길을 따라 우리들도, 비록 필설로는 다 그릴 수 없다는 그 금강산으로 길을 떠나 그곳에 서려있는 차향기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매월당의 금강산순레는 그의 문집 <매월당집>의『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후기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나라는 비록 좁다고는 하지만 산수가 수려하여 달인, 군자가 흠모하는 바이어서, 공자도 “구이(九夷)에 가 살고 싶다” 하였고, 시속 말에도 “원컨대 고려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았으면” 하였음은 산수가 수치스러운 가슴을 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관서(關西)로부터 관동으로 들어가 금강산과 오대산에 놀면서 명승지를 찾아 다녔는데 산 형상은 기이하고 시내빛은 영롱하였다.
여기서 잠시 간략하게나마 그는 왜 한참의 나이에 산수 간에서 소요하지 않으면 안 되었나 하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관서에서 놀다’ 뒤에,
어느 날 홀연히 감개한 일은 만나, 늘 산수에 방랑하고자 하던 뜻을 결단하고 중의 모양으로 나그네 길을 떠나 송도(松都)로 항했다.(중략) 내 만일에 벼슬살이를 하였던들 이 아름다운 경치를 어찌 즐길 수 있었으며, 또 이렇게 마음껏 노닐 수 있었으리요. 오호라! 천지사이에 나서 한갓 명리에 얽매여 생업에 허덕인다면 이 몸의 괴로움이 어찌 저 뱁새가 등초를 그리워하고 표주박이 나무에 매달려 있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이렇듯, 21살의 젊은 나이에 떠난 첫 번째 방랑길인 관서유람에서 이미 그는 세상을 등지고 평생 방랑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는데, 그렇기에 일단 한양에 돌아온 그는 곧 두 번째 방랑길을 떠나 금강산으로 발길을 향하여 3년간의 걸친 관동지방 유람을 시작한다. 그때 그의 나이 24살, 때는 세조 6년(1458) 가을이었다.
매월당의 금강산 순례길에는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44~1492)과 기타 일행이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동봉(김시습의 또 다른 아호)이 금강산으로 유람을 가려 할 때 하루 전날 추강을 비롯한 친구들이 그의 거처인 산수정(山水亭)으로 찾아왔다. 동봉은 함께 이야기 하다가, 돌연히 일어나 창밖으로 몸을 던져 떨어졌다. 여럿이 달려가니 심히 다친지라 자리에 뉘고 다들 말하기를 “이렇게 다쳤으니 내일 어찌 길을 떠나겠는가?” 그러자 동봉이 말하기를 “몸조리를 해 차도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달려가야지”하였다. 이튿날 여럿이 누각에서 기다리려니 동봉이 벌써 와서 다친 곳이 없는 듯이 자약하였다. 추강이 말하기를 “자네가 이렇게 술수를 써 사람을 속이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하였다.
위의 일화를 통하여 같은 ‘생육신’(生六臣)의 일원인 매월당’과 추강은 동지애적인 우정으로 맺어진 막역한 사이라는 것과 방랑길의 동반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매월당의 기록은 추강의 『금강산기』와는 연대의 오차가 많다. 일단 이 문제는 다음 달의 ‘매월당과 그의 벗들’편에 다루기로 하고 금강산으로 발길을 옮겨 놓기로 하자.
지팡이 짚고 풍악산(楓嶽山)을 향해
한양을 떠나 매월당과 일행은 임진나루를 건너 강 언덕에 있는 정자에 올라 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바라보며 시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포천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하루 숙박을 하며 금강으로 향하는 나그네의 설렘을 한잔 술에 타 마시며 이런 시를 읊는다.
표연히 지팡이 짚고 풍악산을 향해 가니
아득한 산과 구름 눈에 들어 멀리보이네.
흥이 일어남에 또한 어지 좋은 술이 없을쏘냐?
즐거이 한 수 읊어 밤을 지새우네.
외로운 등잔불, 날아가는 기러기 소리
작은 집 울타리 밑에서 쥐불을 바라보네.
이웃 집 개는 꽃그늘 아래서 짖어 대는데
길손의 마음은 소슬하고 무료하네.
<포천의 인가에서 자며>
다시 매월당일행은 길을 재촉하여 김화, 창도를 거쳐 “산은 거듭 물은 겹겹, 길 역시 빙빙 돌아” 회양(淮陽)땅 내금강 입구 단발령(斷髮嶺)을 넘어 드디어 장안사(長安寺)에 도착한다.
여기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금강산에 대하여 개괄적이나마 소개함이, 직접 가보지 못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리라.
금강산은 대개 내, 외, 해, 신금강으로 나누는데, 정상인 비로봉(毘盧峯, 1638m)을 중심으로 백두대간(白頭大간) 즉 태백산맥의 분수령 서쪽을 내금강으로, 동쪽을 외금강으로, 또 외금강의 동남쪽 계곡은 신금강으로, 금강의 산자락이 바다에 잠기면서 생긴 고성의 삼일포(三日浦)부근의 아기자기한 바닷가를 해금강이라 부르는데, 특히 이 해금강은 기과한 바위, 바다, 호수가 묘한 조화를 이루어 상쾌함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고대의 전설로는 아득한 옛날에는 ‘8금강’이 있었는데 지각변동으로 7금강은 바다에 잠겨 버렸고, 해뜨는 부상(扶桑)의 나라 해동의 금강, 즉 우리의 금강만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비교하여 논 할 때 내금강은 여성적인 단아한 아름다움을, 외금강은 기암절벽의 솟구치며 비상하는 남성미를 꼽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며 또 계절에 변화에 따른 금강산의 변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금강의 모습이다.
봄에는 다이아몬드처럼 찬연하여 금강산, 여름에는 삼신산의 하나처럼 그윽하고 신비하여 봉래산, 가을에는 온통 빨갛게 물든다 하여 풍악산, 겨울에는 옷을 홀딱 벗고 기암괴석만이 하늘을 찌를 듯 한다하여 개골산이라 하는 것 등은 다 그런 변화무쌍함에 기인함이리라. 또 지달산(枳怛山)과 열반산(涅槃山)의 별칭도 추가되니 이름만도 여섯 개나 되는 셈이다.
이런 세계적인 명산 금강산이 예부터 문인, 묵객의 유람처로, 승려들의 살아 숨쉬는 수많은 ‘담무갈보살’의 순례처로 이름 높았음은 당연한 일이리라.
금강산을 읊은 시문은, 그간 필자가 수집한 것도 상당한 분량인 것을 감안하면, 실로 방대한 양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면 형편상 다 소개할 수는 없기에 기행문을 남긴 이들의 이름만 나열해 보고 다 길을 재촉하기로 하겠다.
먼저 금강산 유람의 선두주자로서 자주 나타나는 사람은 삼국초기의 사선(四仙)이지만 그들은 이름 두 글자씩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고 다음은 고려 축숭왕 때의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기)』가 있고 다음은 조선조 초기 세조 임금의『어가동순록(御駕東巡錄)』, 성련(成俔)의 『동행기(東行記)』남효온(南孝溫)의 『금강산기』 이이(李珥)의 『풍악행(楓嶽行)』 이정구(李廷龜)의 『유금강산기』 정곤수(鄭崑壽)의 『금강록』, 이명한(李明漢)의 『유풍악기』 이경석(李景奭)의 『풍악록』 김창협(金昌協)의『동유기』 석법종(釋法宗)의 『유금강록』 이상수(李象秀)의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 』등이 있다.
차향(茶香)어린 장안사
장안사 객실에 바랑을 푼 매월당은 차연기 날리는 장안사를 이렇게 읊는다.
소나무 그늘 속의 옛 도량에 내가 와서 조용히 선방(禪房)을 두드리네.
노승은 선정(禪定)에 들어 흰 구름만 잠겼는데
학이 옮겨와 깃을 트니 맑은 운치 길구나.
새벽에 해 떠오르니 금빛 전각 빛나고
차연기 날리는 곳에 서린 용이 날개 치네.
청한한 경계를 두루 유람하면서부터
영욕)을 마침내 둘 다 잊어버렸네. <장안사에서>
여기서 우리는, 한양을 떠날 때의 객기 어린 행동을 하던 매월당의 심정이 많이 안정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 한수, <뜻이 한가로워>에서는,
따뜻한 햇볕이 창호지에 비추니 상위의 벼룻물을 녹이는구나.
차) 달여서 좋은 손님 맞이하고 게송() 읊어 선승을 대접하누나.
스스로 세상의 그물도피한 뒤로는 모든 일이 더욱 새롭기만 하구나.
늦가을 한양을 출발하였던 매월당은 흰 눈 쌓인 개골산의 아늑한 품에서 겨울 한철을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매월당은 선승으로서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세상의 감개한 일등일랑 잊어버리고 좌선삼매(坐禪三昧)에 들어 그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 것이 그것인데, 이때 그에게 ‘차를 끓이는 일’은 밥을 먹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다반사(茶飯事)’란 말 그대로 일상적인 소일거리였다.
물론 매월당은 유명한 술꾼이었으므로 ‘술마시는 일’도 그에게는 생활의 한 부분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무애자재 하였던 매월당이라 할지라도 객승으로 산사에 머물 때 만큼은 술대신 차로써 마실거리를 대용한 수 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다음 몇 편의 시에서 우리는 그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 먼저 산중 생활의 소박함에 대하여,
절인 나물, 거친 밥으로 나날이 배 부르고 벌떡 누워 또 다시 잠에 든다.
깨어나면 차을 마시고 편한 대로 살리라.
또,
무우를 푹 삶고 오이도 구워서 형편에 따라 먹는 산중 밥,
차도 끓이네. 배는 부르지도 고프지도 않아, 한가로이 누웠으니
이제야 알겠네, 뜬 뗏목 같은 신세인 것을!
오랜 방랑생활과 산중생활의 반복을 통하여 깊은 자기성찰과 새로운 양생법의 일상화로 늘 그의 가슴속 깊이 잠재해 있던 세상과 자신에 대한 멍울들이 무디어져 감으로써, 그는 철저한 자유인으로 또 달관한 초인으로서의 풍모를 지니게 되는데, 이런 모습들은 계속 그의 시의 구절구절 마다 나타난다.
<까닭 없이 짓다>라는 시에서는 “차마시고 밥 먹는 것 편한 대로 함이라” 라고 읊기도 하고, <새벽>에서는 “부엌에서 기장 밥 지어놓고서 나더라 차 끓임이 늦다고 전하네” 라고 읊기도 하였다.
또 “생애를 점검해도 구속될 것 없나니 한 솥의 새 차와 한줄기 향뿐이네()”라고 읊기도 하고, 화로의 재 눈 같으나 불빛은 뻘겋구나. 남은 일 있다면 돌솥에 차 한 잔 끓이는 일 뿐.()“이라고 읊기도 하는 등 차 마시는 일이 하루 생활의 중요한 소일거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작설차(雀舌茶)에 대하여도 여러 수를 남겼는데,
작설차의 향기로운 싹 손수 달이니 그 사이의 재미가 도연하여라.
누구라 사해(四海) 위해 바빠할 사람이랴
나는 평생에 제 멋대로 사는 사람이라.()
‘눈보라 치는밤 등잔 아래서 매월당, 그림자 바라보다()’
차솥에서 물 끓는 소리를 이른바 다도(茶道) 또는 다례(茶禮)에서는 ‘솔바람 소리’로 표현한다. 또 물이 끓을 때 생기는 기포를 해안(蟹眼), 어안(魚眼) 그리고 연주(聯珠)라고 부르기도 하며, 물이 100℃근처에서 끓기 직전 상태를 등파(騰波), 고랑(高浪)이라 하여 이 때를 넘겨 한참을 지나야, 순숙(純熟), 결숙(結熟), 경숙(經熟)의 단계가 되어야 비로소 차를 넣을 수 있는 탕수(湯水)가 된다고 한다.
설명이 좀 길어졌지만 이처럼 차인들은 물 끓는 소리를 솔바람 소리에 비유하여 매우 멋스럽게 생각하는데, 사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혼자 앉아 차를 마실 때, 차솥에서 들리는 물 끓는 소리는 맑고 고요하면서도 어떤 울림이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천뢰(天籟)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포은(포은) 정몽주의 유명한 시, “즐겨 듣는 것은 돌솥에 차물 끓는 소리()>” 비록하여, 옛 차인들의 물 끓는 소리에 대한 예찬의 시구절이 많음도 이런 이유에 기인함이며 또 서산대사(西山大師)도 유점사(유점사)에서도 주석하면서 금강산 <향로봉에 올라>란 유명한 시에서,
달 맑은 창가에 청허(淸虛)가 누웠으나 차물 끓는 솔바람 소리 고르지 않네()“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매월당 역시, 한겨울, 눈보라 치는밤, 물 끓는 소리, 등잔불, 겨울의 산사, 등의 이미지로 연결되는 시를 어찌 읊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월당은 차물이 여의치 않을 때는 눈을 녹여 차를 끓이기도 하였었는데, 글자 그대로 설록차(雪綠茶)인 셈인데, <밤눈>이란 시에서 이렇게 읊는다.
어제 늦게 흐린 구름 컴컴하더니 오늘 밤에 상서로운 눈 퍼붓는다
솔가지 덮어 수북하더니 대나무 때리면 우수수 떨어진다.
촛불 심지 자르니 아늑한 시정 이루고 기울어진 평상도 꿈에 들기는 넉넉하다. 눈 한 그릇 녹여서 차물에 섞으면 달이는 데 지경이 조용해진다.()
그러나 겨울 산사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시의 백미는 역시 다음의 <등잔아래서>라는 시가 아닌가 한다.
등잔 아래 차물끓는 소리 들리는데 성성이 앉았노라니 나무 등걸과 같구나.
이내몸은 물거품과 같고 이 내 그림자는 희미하여라
밤눈이 창을 두드려 냉랭한데 산 구름은 땅을 덮어 없어지는구나.
등잔 불꽃 잠시 밝더니 이내 스러지고 방구들 따뜻해 이불을 걷는다.
눈보라 치는 겨울의 산사에서 차물 끓는 소리 들으며 등잔 밑에 오롯이 앉아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다보는 매월당의 초상! 마치 한 폭의 그림이 아니겠는가? 필자, 본업이 그림쟁이고 또 평소 좋아하는 인물, 분위기여서 한 폭 그려보았다. 독자들의 눈이나 어지럽히지나 않았는지…
13. 梅月堂의 발길 따라 가보는 茶香어린 金剛山 Ⅱ
장안사에서 표훈사(表訓寺)로
내금강의 기점인 장안사에서 방랑의 발길을 머물고 추운 겨울 한철을 보낸 매월당, 즉 사문(沙門) 설잠(雪岑)의 심정은 한양을 떠날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청한한 경계를 두루 유람하면서부터 영욕을 마침내 둘 다 잊어버렸네” ’라는 시 구절에서 엿볼 수 있듯이 세조의 ‘왕위찬탈’사건이라는, 그의 생애를 가르는 큰 사건 뒤의, 그의 분기어린 충의지사적 심정은 산수 간에서의 오랜 방랑 속에서의 자기성찰로 인하여 마침내 마음의 평정에 이르러 수도자로서의 틀을 잡게 된다.
이런 그의 심정의 분수령 격이었던 ‘차연기 날리는’ 장안사를 떠난 그의 발길은 금강산 깊숙한 곳으로 향하게 되는데 <탕유관동록>에 의하면 먼저 도착하게 되는 곳은 표훈사가 된다.
이 표훈사는 금강산의 ‘4대사찰’의 하나로 장안사에 버금가는 큰 절로써 신라 문무왕때 표훈대사에 의하여 창건된 고찰로 본당인 반야전에는 금강산의 주처보살인 법기보살(法起菩薩)이 안치되어 있다. 매월당은 이 표훈사의 봄날 밤 풍치를 이렇게 읊고 있다.
영롱한 누각이 맑은 시내 위에 솟아 있는데,
학이 깃든 나무 가지 끝에 달 그림자 낮게 걸렸네.
한밤중에 두견새 울어 단 꿈을 깨치니,
소리마다 늙은 느티나무 서쪽에서 들리는구나.<표훈사에서 밤에 읊다>
자료에 의하면 위의 시를 재음미 해보면, 영롱한 누각이란 ‘능파루’(凌波樓)란 이름의 전각이며 맑은 시내란 함영교(含影橋)밑을 흐르는 시내를 말함이고 매월당이 머물렀던 객사는 개풍영빈관(開楓迎賓館)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늙은 느티나무 가지에 새벽 달은 걸려 있는데 새벽 선잠을 깬 매월당이 시내물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처량한 두견새 소리에 다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정경이 보이는 듯한 매우 아름다운 시라 하겠다.
다시 정양사(正陽寺)로
표훈사 후원을 나와 구절양장같은 산길을 십리 쯤 가다보면 방광대(放光臺)의 산 중턱에 정양사가 나온다. 이 신라시대의 고찰은 반야전 앞의 고탑, 거탑리의 것과 신계사(新溪寺)의 고탑과 더불어 금강산 3대고탑의 하나로 유명하다. 또 사내에 있는 헐성루(歇醒樓), 일명 진헐대(眞歇臺)는 내금강 제일의 전망대로 더욱 유명하여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가히 ‘천하제일경’이었던지, 예부터 문객들의 단골로 시를 짓던 곳이었다.
금강산에 관한 시문집을 엮은 책 중 제일 방대한 것으로 꼽는 『신민(新民)』40호(1928년도), 금강산 특집호’에만도 이곳 정양사와 진헐대에 대한 시를 한수 이상 남긴 옛 시인들의 이름이 무려 80여인이나 되는 것을 보면, 거기에 무명시인들의 것까지 합친다면 그 숫자는 더 많으리라 추정된다. 예를 들면 우리의 주인공 매월당은 금강산에 관한 시를 80여수 남겼고 이곳에서도 두수를 남겼는데 위의 80여인 속에는 누락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당대 유명시인들의 한결같은 말은 단 한마디 뿐, ‘시도금강불감시’(詩到金剛不敢詩)‘ 즉 의역해보면 “시의 형태로 금강을 그릴 수는 있지만 그러나 시는 감히 되지 못한다.” 즉 “필설로는 다 할수 없다”라는 말이 된다. 그 만큼 금강의 아름다움은 절대적이라는 뜻이 아닐는지…
각설하고, 매월당은 이곳에서 발길을 머물고 정양사와 진헐대라는 시를 읊었다.
가람은 높고도 또 크고 넓은데 수많은 나무들은 하늘로 길게 뻗었구나.
대중 속에는 지원(支遠)같은 이도 있으니 이곳이 바로 보리도량이라네.
내가 방장(方丈)에 앉아보니 봉우리와 산굽이는 엄연하고 상쾌하구나.
자태의 빼어남은 일백층의 죽순같은데 아침 햇빛 어찌 그리 밝기도 한가?
개가 맑게 개이기 시작하니 기고하여 형용키 어렵구나.
또 진헐대에서는,
진헐대에서 참으로 쉴만한 것은 티끌자취를 깨끗이 쓸어냄이라.
일천봉은 굽어서 움킬 수 있고 모든 내는 흐름이 호탕하여라.
산새가 푸른 산기운에 말을 하니 사람의 심경을 넓게 하누나.
내 평생의 회포를 씻어 버리고 나의 십년 닦은 도로 나아가리라.
별하고 제각기 나뉘어 가니 작은 길에 찬 안개 자욱하구나.
<동자승은 찬 샘물에 달을 길어와 산차를 달여 주네>
매월당의 발길은 다시 백천동()을 거쳐 모든 시냇물이 모여든다는 만폭동()에 이른다. 여기서 계곡미의 극치라는 만폭동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된 『신민』<금강산특집>에 실린 기사를 현대문으로 고쳐 인용해 보도록 한다.
표훈사로부터 계곡을 따라 청학봉밑의 금강문이라는 석문(石門)을 지나면 이로부터 절벽이 계곡 양쪽에 가파르다. 이곳은 만폭동의 본류인 마하연쪽에서의 계류와 태상동, 내원통암 쪽에서의 계류가 만나는 곳으로 만폭승경을 밟는 제일보이다. 이곳에 내금강의 대표적 승경이라는 천변만화를 감춘 팔담(八潭)이 있고 또 수십 장(丈)에 달하는 반석에 봉래선자 양사언(楊士彦)의 필체로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란 여덟 자가 천겁의 풍우에도 스러지지 않을 듯 뚜렷이 새겨져 있다. 또 그 옆에는 ‘바둑바위’가 있는데 이는 옛적 선인들이 노니던 자취라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좌우의 절벽은 더욱 가파르다. 바위들은 철광석 색깔을 띠어 붉은색이며 계곡물은 더욱 급해져 마치 절벽에 떨어지는 듯하다.
이곳에서 대개의 금강산 탐승 코스는 보덕굴(普德窟)을 거쳐 마하연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나 우리의 매월당은 이곳에서 왼쪽의 태상동(太上洞)으로 접어들어 내원통암(內院通庵), 진불암(眞佛庵)으로 향하였다.
“지팡이를 걸어 놓고 하룻밤을 머무니 소나무에 걸린 달이 선담(禪談)을 도와 주는 구나” 라는 시구절을 내원통암에 남긴 매월당은 진불암으로 다시 발길을 옮겨 다시 붓을 들어 진불암의 시정어린 정취를 담은, 글자 그대로 주옥같은 시를 읊는다.
바위 덩어리를 참 부처라 이름 했지만 암자 안에는 노승이 살고 있다네.
길은 일천봉아래 돌아서 가니 사람들도 오색구름 가까이 있네.
수석이 좋아 마음에 티끌이 없는데 안개 속의 경치는 절로 곱구나.
동자승은 찬 샘물에서 달을 길어와 산차(山茶)를 달여 주네.
예부터 달과 술은 그 풍기는 이미지의 풍류적 유사점으로 인해 많은 시인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예를 들면 ‘경포호수의 달’ 운운할 때의 ‘술잔에 뜬 달’ 같은 표현을 말함이다.
그러나 술과 차는 사정이 다르다. 물론 간접적, 즉 차를 마시는 분위기 조성면에 있어서는 달은 자주 등장하였으나 위의 시귀절처럼 직접적으로 “샘물에 뜬 달을 길어다 차를 끓인다” 라는 표현은 필자의 과문탓인지는 몰라도 그 예를 찾기 어렵다.
위의 시 구절을 음미해보고 있노라니 문득 경기도 광주 땅에 시냇가에다 예쁜 집을 ‘급월당’(汲月堂)이란 당호의 현판을 걸고 도자기를 굽고 사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우인이 갑자기 생각나서 당장 달려가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달이 뜬 샘물을 길어다 말이다…
보덕굴 벽에다 쓴 <보덕굴기(普德窟記)>
다시 내금강의 주 계곡인 만폭동으로 내려온 매월당의 발길은 팔담(八潭)을 거쳐, 너무나 유명한 보덕굴에 다다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보덕굴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만폭동 안에 있다. 관음각이 있는데,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 구리기둥를 밖에 세워서 작은 방 3칸을 그 위에 짓고, 쇠줄로 묶어서 바윗돌에 못 박아 놓았는데, 공중에 떠있어서 사람이 올라가면 흔들린다. 그 안에 부처를 모신 불함(佛函)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곁에 철망을 둘러서 손으로 만지지 못하게 하였다. 전하는 말에는 고구려 안원왕(安原王)때 보덕에 의해 창건되었다 한다.
이 인공이 가미된 절승지 보덕굴에 매월당의 발길은 잠시 머물러 다음의 시를 남긴다.
구리기와(銅瓦)에 이끼 끼고 구리기둥 높으니
처마 밑의 풍경소리 쟁쟁도 하구나.
보덕산의 바위굴은 몇 자나 솟았느냐?
안개의 파도는 밤새도록 요란하네.
쇠사슬은 공중에 걸려 흔들리며 울어대고,
구름사다리(雲梯)를 절벽에 놓으니 움직여서 시끄럽네.
분향하고 절을 하니 마음이 편안하여,
선궁에 자라(鰲)타고 가는 듯하네.
난간에 기대어 먼 곳 바라보며 시름을 더니,
보살에게 예 올리자 머리카락 곤두서네.
경계와 영대는 속되지 않고,
산과 함께 보덕굴은 더욱 높아 보이네.
무지개가 만폭동에 드리우고 우렛소리 장엄한데,
학이 삼천(三天)으로 날아감에 깃 그림자 커다라네.
흰 돌과 푸른 솔이 서로 비치는 곳,
어렴풋이 동부(洞府)에 신선이 있는 듯하네.
이 인공이 가미된 선경 보덕굴에 매월당은 발길을 머물고 벽에 금어(金魚) 허주(虛舟)의 불화에 <보덕굴기>를 적어 넣었다고 역시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매월당의 벗인 추강(秋江)은 그의 『금강산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굴안에 관음보살의 소상을 안치했다. 또 승사를 지어 승려가 거처하게 하였다. 또 승사의 서쪽 관음굴의 위에 누각을 한 채 지었는데 이름하여 ‘보덕대’라 하였다. 보덕이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전한다. 내가 먼저 승사에 들어간즉 고인(故人) 동봉 청한자(東峯靑寒子)가 벽에 글을 쓰고 허주 지정(虛舟持正)이 단청을 한 불화가 있었다.(중략) 다시 시내를 따라 내려오는데 흰 돌이 매우 미끄러워 맨발로 기다시피 하여 수건암(手巾岩)에 이르렀다. <동봉기>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미인으로 화하여 세수하고 수건을 이 바위에 걸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잠깐 붓을 멈추고 우리는 이 원고의 전편 『태백』1990년 1월호 에서 필자가 지적한 매월당의 금강산순례의 동반자로서 추강 남효온을 꼽는 것에 대하여 상기할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이 문제에 대한 추정은 매월당 자신의 『탕유관동록』의 후기에 기술한 “동반한 사람들에게 이끌려”라는 기사와 월강(月江) 윤근수(尹根壽)의 <동봉낙상조>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저은 『탕유관동록』에는 특정한 인명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반면 추강의 『‘금강산기』라는 장문의 기행문에는 운산(雲山)이라는 사람과 동행이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고 있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9살이란 연령의 차이이다. 둘은 비슷하게 세상을 떠났고 그리고 만년에는 둘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던, 동지애적인 우애를 가진 벗이었을지는 몰라도 매월당이 금강산을 향해 방랑의 발길을 돌렸을 때 추강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으므로 동지로서는 너무 어렸다는 것도 넘겨볼 수 없는 점이다.
그러나 세 번째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기의 출발 연도가 나타나 있는 점이다. 매월당은 1460년에, 추강은 1485년에, 금강산을 다녀왔는는 것이다. 바로 25년의 연대차이가 나는 셈이니 둘의 동반여행은 더더욱 무리한 추정인 셈이다.
그렇다면 매월당 자신이 적은 “동반한 사람에게 이끌려”라는 기사는 누굴 말하는가? 라는 구절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셈이다. 그러나 필자의 사견으로는, 그의 시구절마다 풍기는 처절한 외로움에서 느껴지듯이 어쩌면 그는 혼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오히려 천하의 방랑자 매월당다운 자유스러움이 아니었겠는가?
용녀의 차공양 전설 깃든 불정대(佛頂臺)
금강산의 명당자리 곳곳에 자리 잡았다는 108암자!
그윽한 풍경소리에 섞여 차연기 날리지 않는 곳이 없었겠지만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봉우리 불정대에 얽힌 차공양(茶供養)의 전설은 매우 이채롭다. 다시 추강의 『금강산기』로 돌아가 보자.
성불암에 이르러 동해바다를 바라보니 비가 갠 후라 전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객승이 마침 있어 나를 위해 밥을 지어주었다. 식사 후에 객승과 같이 산을 올라 얼마 전에 불에 타 폐암이 된 불정암터를 지나 불정대에 올랐다. 객승이 말하기를 불정대에 구멍이 있고 산 아래 깊은 연못이 있는데 옛적에 용녀가 있어 이 구멍에서 나와서 불정조사(佛頂祖師)에게 차공양을 올리곤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누각 아래에는 청학이 있어 해마다 알을 낳아 키운다고 한다.
전설로 남아있는 불정조사에 대하여는 인적사항을 더 살펴볼 수는 없지만 위의 차공양의 전설은 강원도 오대산의 신라태자의 문수보살 차공양의 그것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경주 삼화령 미륵세존 앞에서의 충담의 멋스러운 차공양의 기사도 모두 일련의 ‘육법공양(六法供養)의 일례인 것이다. 어찌 보면 용이 여인으로 변해 수도하는 스님에게 차를 대접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기는 하나 그것이 설화적 세계이기에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대화라는 과정에서 유일신적인 종교의 영향으로 많은 우리의 귀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설화와 전설의 세계도 그중 하나이다. 그러기에 위의 불정대 용녀의 차공양 기사는 매우 의미 깊은 것이리라.
그리고 오대산 문수보살 차공양 기사중의 우통수(于筒水)-지금도 면면히 흘러 넘쳐 한강의 시원으로까지 된 샘터-와 상통하는 것에, 유점사의 오탁수(烏啄水)가 있는데 사적기에 의하면 이 샘터에 대하여 이런 전설이 전해온다.
유점사(楡岾寺)의 능인보전(能仁寶殿)에는 53금불상이 있는데 향나무로 조각되어 천축의 코끼리와 함께 안치되어 있다. 보전 앞에는 13석탑이 늘어서 있는데 돌색깔은 청색이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또 보전의 뒤에는 ‘오탁정’(烏啄井)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샘이 없었는데 불전에 공양할 정수가 없자 여러 까마귀가 일시에 달려들어 돌을 쪼아내자 거기에서 신령스런 샘이 솟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의 살아 숨 쉬는 수많은 전설 중에 차에 관계된 불정대와 오탁수의 전설은 이런 면에서 이채를 띤다 하겠다. 그리고 이 불정대 아래에 서식한다는 청학에 대하여 우리의 주인공 매월당은 이렇게 읊고 있다.
푸른 벼랑 위 학이 깃들인 곳에는 노송 한 가지가 늘어졌구나.
향초가 없을 적에는 원망을 하고 지초가 우거진 곳에서는 기뻐하는구나.
천년토록 의연한 모습 변치않고 만리창공을 언제나 생각하네.
<학이 깃들다(巢鶴)>
또 읊기를,
만리에 구름없어 산과 달만이 밝았는데 한마디 울음으로 인정을 움직이네.
모래 맑고 물 푸른 삼청(三淸)의 골짜기에서
몇 번이나 바람타고 옥경(玉京)에 올라갔나? <한가로운 학(閑鶴)>
우리는 위의 시구절에서 신선세계의 표상은 청학을 바라보는 매월당의 동경, 즉 삼청의 맑은 물가에서 학을 타고, 학처럼 살고 싶은 그런 것을 엿볼 수 있는데, 그러기에 더욱 그의 외로움이 우리에게 가득히 전해오는 것이 아닐런지…
매월당! 그가 제 아무리 무애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더라도 그도 역시 지친 몸뚱아리 하나 주체 못했던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다시 그는 발길을 옮긴다. 동경어린 눈길로 청학을 바라보면서...
14. 梅月堂의 발길 따라 가보는 茶香어린 金剛山 Ⅲ
* 천하의 명당, 마하연(摩訶衍)
금강산의 골짜기와 봉우리와 암자들을 두루 돌아다니던 매월당의 발길은 천하에 이름 높은 ‘마하연’에 이른다. 언제까지나 다하지 앟을 것 같던 내금강의 주 계곡 -만폭동()이 끝나가고 최고봉인 비로봉()이 우뚝 막아서는 지점에 천하의 명혈(), 마하연(해발 846m)이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는데, 역대 금강산 탐승객들이 ‘동천외동천()’이란 요약된 구절로 표현한 이 마하연의 품격은 이들이 한결같이 내금강 ‘최고의 명당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하연()의 뜻은 한자의 의역()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왜냐면 마하연은 ‘대승’()이란 뜻의 범어()이기에 음()만을 빌어 온 ‘마하연’으로는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튼 대승()이란 듯이 의미하듯이 이 명당터는 산수() 즉 음양을 모두 중화하여 천지인()이 하나 되는, 그런 명당자리로 예부터 이름 높았다.
신라말의 ‘마의태자’를 비롯하여 이곳에 자취를 남긴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우선 우리의 주인공 매월당이 남긴 시귀절부터 감상하기로 하자.
‘나연된 만 오천의 황금 불상()이/지금도 그 영상이 이곳에 남아있네./우거진 노송은 일산을 받쳐든 듯,/솟아오른 봉들은 신선이 둘러선 듯/몇백 겁()을 두고서 원을 세운 건/평생에 단한번 여기에 와보는 것뿐./나는 묘법을 듣고 마음 깊이 존경하는데/바위 숲과 계곡도 차례로 선양하네.(마하연에서)’
이 금강산에서 가장 깊은 곳에 축대를 쌓아 처음으로 정사()를 지은 이는 신라 문무왕 때의 ‘의상조사’()인데 앞에는 ‘담무갈보살’()의 석상()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하연에는 이초() -천축에서 왔다는 ‘지공화상()의 전설이 있는- 와 커다란 계수()가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시문 속에 자주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또 고려말에는 나옹화상()이 주석하면서 인근의 ’묘길상‘()의 ’대석불‘()을 조각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이런 마하연의 사적을 근대의 문인 위당() 정인보()는 ’관동해산록‘()에서 시조로ㅆ 이렇게 읊고 있다.
‘삼한을 통합하신 문무대왕 즉위초에/이땅에 이 절 짓고 비시던일 뚜렷하다./그 정성 자최업고여산천 다시 보여라’
‘우거진 저 숲속에 어느 풀이 지공초()요/뜰 계수()벤 원님 욕심 많다 뉘 이르뇨/거짓에 싸여온 분을 남게 풀려 함이니’
‘나옹 예배석()이 예런드시제로 향해/법기봉 앉은 모양 인간 세월 모르는 듯/백운이 뜰앞에 차니 익제()생각 나더라’
‘중향봉 나린 맥에 첫 명구()가 마하연이로다./옥룡자() 풍수설을 잠깐 제처 두고라도 용턱 밑 제일 구슬은 여기런 듯 하여라.’
다음으로는 이곳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이율곡()이다. ‘매월당집’ 서문을 써 매월당과 인연이 깊은 대 유학자의 차인()으로서의 모습은 필자가 <?? 89. 5월호>에 밝힌 바 있지만, 어머니를 잃고 인생무상에 빠져있던 젊은 율곡의 발길이 닿은 곳은 바로 이곳 마하연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 참선과 독경으로 일년 간 머물게 되는데 이때 남긴 시가 ‘산승은 찻물을 길어 돌아가는데/저편숲 끝에는 차연기()가 일어나누나’라는 유명한 ‘산중’()이란 시와다음의 차시이다. 재 인용해보면,
‘비구름에 깊은 산속 어둡고.산사에는 고요함만 가득하도다./차를 마시고 나자 그나마 일도 없고.시를 이야기 하다가 선정()에 들게 되네./.내일 아침 승경을 찾을까 하는데/검은 기운 밤 사이 맑게 개였으면...()’
또 이곳에 차시를 남긴 문인은 청계() 양대업()이 있다.
‘천화()의 경계 속에 들어오니/그윽한 방()은 맑기도 하구나./뜰 앞에는 계수나무가 늙었고/창 밖에는 돌샘()이 우는데,/태사()는 공()을 논해 파하고/새 차() 보여 객에게 달여주네./산색은 해거름에 더욱 좋고/저녁해는 앞 기둥에 걸려 있구나.<() ’마하연‘에서>’
중향성()과 배궁ㄴ대()를 뒤에 업고 앞에는 시내를 사이하여 법기봉(), 혈망봉(), 관음봉()ㅇ르 병렬하고 오른쪽에 법륜봉(), 사자암(), 촛대봉()을, 왼쪽에는 칠성봉(), 석가봉()등의 수많은 봉우리가 떨어지는 저녁 햇살을 받아 역광()의 그림자를 드리운곳 -금강산의 화심()같은 그 곳의 정경이 눈에 보이는 듯한 시이다.
그 마하연 선실()에 앉아, 그 기둥에 걸린 석양속에서 달여 마시는 한잔의 차의 맛과 향내음을 무엇에 비길수 있을까? ‘시도금강불감시()’라지만, 필설로는 다할 수 없다지만, 마음으로야 그 철통같다는 철조망쯤이야 뭐가 문제되리.
이미 우리는 그 곳에 가 앉아 매월당이 손수 달여주는 한잔의 작설차()를 마시고 있는 중인 것을...
석각()에 어린 매월당 전설
위당의 ‘관동해산록’ 만폭동 부분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가 있는데, 인용해 보면,
‘버들개울이 있으니 가로되 백룡담()이다. 옛 길은 좌편 절벽을 돌아다니던 것이 지금은 우편으로 가게 되었는데, 옛길로 가다보면 다래덤불 뒤엉킨 속에 암면석각()이 보인다.
<<요산요수()는 사람의 상정()이라. 그런즉 내가 산에 올라 곡()하고 물가에 임해 곡() 함이라. 요산요수하는 마음이 어찌 이처럼 곡을 함을 끓이게 할 수 있겠는가(?) <슬픈 사내>()가 기축() 한여름에 44세 때에 금강에 들어와 쓰다()>>
이 서각은 전하되 매월당 김시습의 유적이라 한다.
라고 문헌의 인용없이 적고 있으며 그 문제점 까지도 지적하고 있다. 또 ‘산정무한’()이란 기행문으로 유명한 정비석()도 ‘금강산’이란 수필에서,
‘그러기에 ’해동의 백이‘()라고 일컬었던 생육신의 한분인 매월당 김시습도 금강산을 두루 구경하다가 만폭동에서는 <요산요수()는 인지상정()이라. 그런즉 내가 산에 올라 웃고() 물가에 임해서는 울고()...> 운운하여 너의 무궁한 조화에 감정의 갈피를 못차릴 지경이 아니었던가(?)’
라고 역시 출전의 밝힘 없이 적은 것은 같으나, 정인보는 ‘등산이소’()라는 점은 다르게 적혀 있다.
‘웃었느냐, 울었느냐’의 규명은 필자가 13편에 달하는 조선조 이전의 금강산 기행문과 막대한 한시를 눈에 진물이 나도록 살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고 아울러 합방이후의 근대의 6편의 관련기행문도 살펴보았지만 역시 진부를 가릴 수 없었다. 이 의문점은 추후 밝혀지리라 본다.
그보다 중요한 점은 과연 위의 석각()이 매월당의 진적()이냐 하는 문제이다. 내용상으로 보면 가장 매월당 다운 문체이지만 우선 ‘기축(), 44세’란 간지가 매월당의 연보()에 맞지 않는다. (매월당은 24세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다음으로는 앞서 지적한 대로 조선조 이전의 기행문, 기타 자료에서, 특히 보덕굴에 남아있는 매월당의 족적을 기록한 추강()도 -매월당과 특수관계에 있는 그 마저도- 석각에 대하여만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전() 매월당작()’이라는 기록은 전적()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구전()되어 오는 것을 채집한 것이 아닐는지(?) 글쎄, 바위에 얽힌 ‘매월당의 통곡’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뭐 어떠랴!
해동()에 누가 있어 감히 산에 올라 울고 물가에 임해 울수 있었겠는가?
매월당 이 외에는....
이에 관하여 본인 자신도 ‘슬프고 슬프다()’ 라는 제목의 시를 남겨 위의 전설을 밑받침 하고 있는데,
‘슬프고 또 슬픈 그 세상 일을/말하려면 더욱 더 눈물이 나네./백세토록 남을 위해 심부름 하다가/나이 늙어 누()에 끌림을 다하네./제 분수에 편안한 줄 알지 못하면/어디가서 나의 세상 즐길 것인가?/그냥 해본 말을 그 누가 귀 기울이나/슬픔을 안고서 나무를 맴도네,. ()’
끝으로 정인보가 남긴, 매월당에 대한 추모의 정이 가득한 시조 3수 적어보고 다시 발길을 돌려 정처없이 떠나 보자.
‘그제도 싫다셨건 이제 드면 어떠시리/반()내산 삭임우에 다래덤불 걷지 마소/글씬들 창상잔겁()을 보셔 무엇하리오.’
‘오세()에 맺히신 정 그대로도 천수로다./무단()히 느껴우니 뵙는 듯도 한저이고/노릉()은 한 없으셔라 우룸끼처 두시니.’
‘산 올라 우셨다니 산 보시면 설더니/물 당해 우셨다니 물 보시면 설더니까/님 보신 산과 물이야 그대 설다 하리까.’
내무재령()의 찻집()
마하연에서 묘길상을 지나 사선교()를 건너면 산길이 갈라지는데 왼쪽은 비로봉으로, 오른쪽으로는 왹므강의 유점사로 가는 길목이 된다. 다시 급경사를 타고 십리정도 오르면 비로봉에서 차일봉()으로 뻗어내린 산맥의 말잔등()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내·외금강의 분수려()인 유명한 ‘내무재령’이다. 국토의 등줄기, 즉 태백산맥을 동서로 가르므로 안개가 많이 껴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장안사 남족 황천간() 건너에는 ‘외무재령’()이 마주하여 뻗어 있기도 하다.
속칭 ‘안무재’라고 하는 이곳에 대해 우리의 매월당은 시를 남기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근대에 와서는 월탄() 박종화()는 다음과 같은 차향기 물씬 풍기는 장편시를 남겨 내무재령의 찻집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전해주고 있다.
(1)
내무재() 고개는 안개만 서리는 곳/높고 높아서 보랏빛 도라지 꽃도/오시시 추위에 떨며 웃는다./천년 묵은 전나무 박달나무 백엽()나무/도끼와 낫을 들이지 않은 엄천한 밀림의 숲은/마루마루 하늘을 찔러/햇빛을 가리우고/빨강이/하양이/주황빛/이름도 모를 고산식물 꽃/동화처럼 화여하게 꿈을 사룬다./그러나 이곳은 안개만 서리는 곳/높고 높아서 나비조차 못오는 곳.
(2)
한찾이언만.어리친 강아지 새끼 한 마리도 없는/텅빈 다정()에/우리는 깨어진 찻종으로/작설차()를 기울인다./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멍둥그르르한 차맛/파파 센 머리로 외롭게 찻집을 지키는 할망구 같이 을씨년스럽다./호랑이 무섭지 않소? 하는 물음에 할망구는 주름잡힌 쪼그라진 얼굴을/해죽이 웃으며/멀리 건너편 산신당의 기립()을 가리킨다./신앙에 사는 마음/모옥() 한칸과 같이 호젓하구나.
(3)
내무재 고개는 무인지경 사십리/오르고 내리면 안개속 팔십리/솔바람 빗소리 속에/태고()에 들다./오호 바다!/나무바다()/푸르다 못해 검은 장엄한 신비여!/골골마다 아름드리 거목은/세로 가로 유해()처럼 쓰러지고/운명()한 나무 밑에는/표고 능이 송이 국수/가을 버섯이/호젓이 향기롭다./내무재 고개는 무인지경 사십리/오르고 내리면 안개속 파릿ㅂ리/길이 벅차서 초군도 안오는 곳.
안개 자욱한 고개 마루, 호젓한 찻집의 늙은 할미와 깨어진 찻잔, 멍둥그르르한 작설()의 차맛, 마치 한폭의 그림이 아니겠는가?
정처없는 발길
다시 매월당의 발길은 암자에서 계곡으로 다시 봉우리로 정처없이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만 간다.
원적암(), 만회암(), 송라암()에서는 청한한 경계를 다음과 같이,
‘산중에서 제일가는 깊은 곳이라./묘한 경계 그림같아 볼만 하구나/송락()은 천척이나 드리웠는데/산 구름은 반칸에 가득히 있네’ 노래하기도 하며, ‘장사()는 연라()속에 있는데/다시 지은 세월이 오래 되었구나/작은 정자엔 송개()가 덮어 누웠고/작은 섬돌에는 이끼만 끼어 있구나.’라고 읊기도 하고 또 ‘옛 슬픔이 구름 속을 지나는 새와 같은데/선창()에는 밤이 더욱 길어가누나’ 라고 한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봉우리 -망고대(), 만경대(), 국망봉()에 올라서는 호연지기를 발산해 답답한 그의 심정을 씻어내기도 한다.
위태한 곳 더위잡아 최고봉에 오르니/끝없이 기이한 봉우리 눈 밑에 펼쳐 있네./만폭동 속에서는 구슬이 떨어지고/백천동 벼랑 밑에 옥이 부서지는 구나./화룡()은 공중 향해 춤을 추는 듯/현학()은 보굴()따라 돌아오는구나./세상에서 보기 어려움은 이같은 경계이니/옆 사람아! 괴롭게 또 재촉하지 마시오. (만경대에서)
이렇게 그는 운수행각()을 계속한다. 한 조각 구름처럼, 한줄기 시내처럼.
그러나 어느 하루 문득 그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여 다시 세상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는데, 이 때의 심정이 잘 나타난 시가 있어 우리에게 그의 갈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역시 공(空)을 파악함이 없이 앉았으니
먹물 옷(緇衣)으로 한 몸을 그르쳤구나.
인간에선 도리(道理)가 없어져 버렸고 세상에서는 군친(君親)을 배반했으니
가슴엔 삼생의 일이 막히고 머리엔 백척이나 티끌이 덮였네.
세속사람되어서 보통 그대로 하나의 궁한 백성 되기만 못하여라.
여기서 우리는 매월당의 극단적 양면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편으로서는 단종의 찬탈에 대해 나라를 걱정하는 배운 선지의 도리로써 울분에 찬 충신지사적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또 다른 한 면으로서는 세상을 피하여 산속에서 참선도리에 몰두하여 해탈하려는 초원적 면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상반된 현실 속에서 그가 얼마큼 외로워했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끝내 이런 갈등 속에서 금강산을 떠나게 된다. 그 때가 세조 8년 庚辰년(1460년)인데, 바로 『탕유관동록』 후기를 쓴 해로, 어찌 보면 아직 약관의 청년으로써의 나이 26세로 그가 금강산을 입산한지 3년되는 해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에 금강산 이외도 관동유람기간도 포함되어 있으니, 정확하게 금강산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계산할 수 없지만, 사시사철의 금강산이 묘사된 점으로 본다면 최하 1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다시 단발령에 올라서
이제 우리도 매월당과 헤어져야만 할 때가 되어간다. 누구나 문득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방랑길을 떠나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매월당 그는 우리 가슴 속의 영원한 자유인이라 존재로 각인되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금은 그와 헤어져야만 한다.
매월당은 무인년 가을에 넘어 왔던 금강산의 길목인 단발령을 넘어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 이런 작별시를 남기고서…
고개마루에서 머리 돌려 바라보니 벡옥같은 능선이 몇 층이나 쌓였는가?
기쁘게도 티끌없는 세상만 남으니 마음 스스로 기쁨을 이길 수 없었네.
시내는 맑아서 담담하고 산 기세는 높아서 늠름하구나.
순례길이 끝나면 다시 여기로 와 또 한 번 올라보려 한다네.<後登斷髮嶺>
단발령에서 매월당이 자신이 한 다짐을 지켜서 다시 금강산을 들어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그의 금강산순례의 전 일정 중에는 몇가지 의문이 남는데, 먼저 후기를 읽어보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자.
한이 되는 것은 동행인에게 이끌려 국도(國島), 삼일포, 총석정 등을 거슬러 올라가며 유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일 다시 유람하게 된다면 꼭 먼저 이곳을 들려 봄으로써 나의 오늘의 회포를 만족하게 한다면 여한이 없겠다. 이른바 뜬구름 같은 종적이라 이렇게 된 것이리라. <경진년 가을에 청한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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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가 가보지 못한 곳은 분명히 해금강 일원이었면, 외금강은 어찌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시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족적은 모두 내금강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3년이나 머문 금강산에서 비로봉을 넘어 아름답기로 더 이름 높은 외금강을 그가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만약 그랬다면 스스로 후기에다 해금강과 같이 외금강도 밝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설을 제기할 수 있다. 추강의 말대로 “매월당이 남긴 시편은 수 만여 편에 이르지만, 거의 흩어지고 그 일부만 세상에 전한다.” 라고 한다면 그의 외금강순례 시편은 통째로 유실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설득력이 적기는 하지만 성립될 수는 있다고 보인다. 그 일례로 <마하연시편>은 본집이 아니라 속집에서 나왔으니까 말이다. 결국 이 문제와 동행인이 누구였는지는 전문학자들의 화두를 남기고 우리는 여기서 그와 헤어져야만 한다.
차향어린 금강산에 그리움만 남겨놓고 매월당과 함께 우리도 떠나야만 한다.
수 많은 전설이 살아 숨쉬는 금강산에 또 하나의 전설을 보텐 매월당 김시습!
옛적 한 많고 울음 많은 사내가 있어 산에 올라가 울고 물가에 임해서도 울었다고 하더라.
첫댓글 이럴게 귀한 글을 이제야 봅니다. 1989년 이라면 ~~와우 아주 오래전 글이네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샘~~ 원문을 좀 복사를 해주실 수 있나요?
산은 시인묵객들이 있어 더 아름다워집니다.
전면 복사를 히용할 수는 없구요. 우수회윈 이상의 회원에 한해서 열어 놓겠습니다
눈보라치는 山寺에서 茶물 끓는
소리~~~ 그 차맛은? 어떤맛일까?
등잔밑에 오롯이 앉아 자기 그림자보며 차마시는~~
이런 그림을 그리셨다구요?
보고싶네요~~ 남은 사진은 없는지요?
넘 귀한글 잘읽었습니다~
거의 일년반 동안 연재하신 귀한 글인데요~
우리차를 좋아 하시나 봅니다.ㅎ
글쎄요 그때 그린 그림들은 수리재 물난리 불난리통에 모두 없어져 버렸겠지요
아마 태백 잡지에는 남아 있겠지요?
역시 다방면으로 無不通達 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