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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 (요한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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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묵상글(강론글)
01시 4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프란치스칸인 입장에서 공유하는 것이오니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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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3일 수요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 (요한16,12-15)
제1독서 <‘알지 못하는 신’> (사도17,15.22-18,1)
15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 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22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9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32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
33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18,1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복음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16,12-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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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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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6,12–1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너희에게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한 번에 다 받아안을 수 없을 만큼
진리가 깊고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몰아붙이지 않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성령 안에서 자라 갈 수 있는 만큼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신비가
한 번에 다 파악되는 대상이 아니라
기도와 겸손, 성령의 인도 안에서
점점 더 밝혀지는 빛이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그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말할 때에도
인간의 언어가 하느님을 다 담아낼 수 없음을 알았고,
바로 그래서 더 겸손히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진리는 소유물이 아니라
참여하는 빛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움켜쥐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령이
예수님과 분리된 또 다른 길을 제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를 우리 안에 깊게 열어 주시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성령은 새로운 유행의 영이 아니라
주님 안에 이미 주어진 생명을
더 분명하고 더 깊게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는
혼란을 키우기보다 중심을 세우고,
과장을 부추기기보다 본질로 돌아가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조급함도 다독여 줍니다.
우리는 자주
당장 다 알고 싶고,
당장 결론 내리고 싶고,
당장 확실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꾸짖음이 아니라 돌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영혼의 속도를 아시고
무리하게 짐을 지우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걸음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십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무엇을 아껴야 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성급한 판단을 아껴야 하고,
함부로 단정하는 말을 아껴야 하며,
내가 다 안다는 착각을 아껴야 합니다.
아낌은
진리를 가볍게 소비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요란한 지식의 과시보다
깊고 맑은 분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아낌은
진리를 향한 겸손의 훈련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신다는 말씀은
일치의 길에도 큰 빛이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주장으로 일치를 만들 수 없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더 깊이 이끄실 때
비로소 교회도, 공동체도
조금씩 하나 되어 갑니다.
일치는 의견의 획일화가 아니라
같은 성령 안에서
같은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진리를 배우려 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소유하려 하는가?
나는 성령의 인도보다
내 확신과 내 속도만 앞세우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다 아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배우고 더 들으려는 사람으로 서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십니다.
주님,
제가 조급히 단정하지 않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진리를 소유하려 하기보다
진리에 이끌리게 하시며
덜 중요한 소란을 아끼고
더 깊은 본질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령 안에서
맑고 겸손한 일치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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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연히 유튜브에서 ‘시니어 지킴이’라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우리를 영적으로 이끌어줍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중에도 인류와 역사 앞에 큰 울림을 주었던 말씀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두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나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게 된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삶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진리를 찾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서양철학에서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찾았습니다. 정치가에게 정의를 물었습니다. 군인에게 힘을 물었습니다. 예술가에게 아름다움을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물었지만, 참다운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안다고 하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많다. 소크라테스는 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는 어쩌면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것인지 모릅니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을 전하는 것을 막으려는 재판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예수님처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을 보면서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리가 있다면 스승이 억울하게 죽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양철학 합리론의 기본이 되는 ‘이데아론’을 이야기합니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세상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진리’를 망각한다고 합니다. 마치 동굴에서는 그림자만 볼 수 있는 것처럼, 동굴을 나와야 비로소 밝은 빛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육체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진리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플라톤에서 진리는 ‘개념’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진리는 ‘관계’입니다. 화가의 마음에 있는 작품이 그림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진리는 진리인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처럼 탐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플라톤이 했던 것처럼 개념으로 정의를 내려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좋은지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유혹이 있어서 그렇고, 나약해서 그렇고,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을 알고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나를 악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진리인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굶주린 백성을 측은하게 보셔서 빵을 나누어 주는 길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모범을 보여 주시는 길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던 겸손의 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던 지혜의 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몇몇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만나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환한 미소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기다리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 함께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가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에게 차선을 양보하면 그 사람은 지금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이렇게 관계 안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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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학창 시절에 ‘수포자’, 곧 ‘수학을 포기한 자’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수학 교과서는 수준이 높고 내용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학생들의 학습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진도만 나가니 학생들이 배우기를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본당 특강도 수준이 너무 높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듣기를 포기하고 졸게 됩니다. 좋은 선생님은 제자들의 수준을 잘 고려합니다. 너무 어려워 처음부터 포기하지 않게 하고, 너무 쉬워서 흥미를 잃지 않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제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하는 좋은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의 완급을 조절하실 줄 아십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처럼 완급 조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의 완급을 성령을 통하여 조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히브리 말로 ‘루아흐’입니다. 이 말은 ‘숨’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루아흐가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를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라고 말해 주는 듯도 합니다.
밤을 새워 모든 것을 내가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물러날 줄 알고, 쉬는 법을 알 때 성령의 바람이 다시 우리에게 진리를 따라 살아갈 힘을 주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일상생활에서 완급 조절 없이 바쁘게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성령의 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숨을 쉬고자 교회에 모입니다.
성령의 숨을 쉬고, 예수님의 진리를 쉬엄쉬엄 세상에 전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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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로,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로,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르 1,10). 또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고 표현됩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에 성령이 약속됩니다.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루카 24,49)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는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이나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4,16-17).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말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14,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15,26).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16,8).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16,13)
이는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그 계시 역시 서로의 일치 속에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14)
이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계시하고 예수님의 구원행위를 계속함으로써,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요한 13,31-31;17,1-2 참조). 곧 아들에게서 들은 것을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이기에 아들의 것은 동시에 아버지의 것이며(요한 16,15), 성령께서는 이를 받아 알려줍니다.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의 관계를 드러내줍니다.
오늘 우리는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기억해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정원에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시고,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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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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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13 04:47
- 바오로 사도에게서 무얼 배울까?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아다니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나는 선포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사도행전 속의 사도 바오로가 되어 묵상도 하고 나눔도 해볼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역사적인 아테네 입성을 결행합니다.
아테네란 곳이 어떤 곳입니까?
철학이나 문화나 신화나 정치 모든 면에서
아테네와 헬레니즘은 당대 최고였잖습니까?
저 같으면 그곳에 가기도 전에 졸아들었을 겁니다.
당연히 긴장도 많이 하고 망설임도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그곳에서도 다른 데서나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도로 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갔기에 아테네가 지닌 우수함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심을 얘기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의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도 모든 진리의 한 부분
곧 하나의 진리를 갖고 있다고 인정과 존중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처럼 유일신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종교와 문화는 미신과 우상 숭배의 전형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신들의 전쟁과 사랑의 서사가 아닙니까?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선포할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도 분명히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이 지닌 좋은 종교심 하나를 찾아내고
거기에서부터 자기의 장엄한 복음 선포를 풀어나갑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지닌 훌륭한 종교심이란
여러 신들을 얘기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신’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한 지혜로운 소크라테스의 민족답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할 때 거기에는
네가 모르는 것들도 있음을 알라는 뜻도 있지만
모르는 것이 있는 너임을 겸손히 인정하라는 뜻도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르는 것이 있는 나임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면서 동시에 지혜지요.
어쨌거나 바오로 사도는 그 ‘모르는 신’을 자기가 알려주겠다며 선포를 시작합니다.
그 ‘모르는 신’이 실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모든 경계를 정하신 분이라고
얘기하며 이어서 제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언표를 합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저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는 말씀에 크게 깨침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알건 모르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존재인데 그것을 모르는
자는 고기가 바닷속에서 살면서도 계속 갈증을 느끼고 방황하듯 방황하는 데 비해
그것을 아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관상하고 풍성히 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술집에서도 거기 계신 주님을 관상코자 합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서 기도해도 죄책감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 있어도 실은 주님 안에 있는 것임을 느끼려고 합니다.
어쨌거나 모든 종교와 문화 안에서 진리와 하느님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바오로 사도에게서 서로 존중하고 공존하는 지혜와 행복을 배우는 오늘 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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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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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 삶의 길을 이끌어 주시는 성령을 의식하는 삶!~~~
영어 격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뒤돌아보면(뒤늦은 깨달음은) 언제나 20/20 시력처럼 선명하다."(Hindsight is always twenty-twenty.) 그러나 뒤돌아봄(hindsight: 뒤늦은 깨달음)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단순한 사실의 문제에서는 뒤돌아봄이 쉽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거나 잘못된 말을 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나 잘못된 말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 뒤돌아봄이 느린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인내심 있는 내적 스승으로서, 이미 세상에 오신 빛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서서히 열어 주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곧 하느님에 대한 모든 진리를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성자는 성부를 드러내셨고, 이제 성령께서는 성자를 드러내심으로써 성부를 드러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앎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배우고 아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앎입니다. 이런 앎은 우리가 그 존재 안에 깊이 일치함으로써 알게 되는 참여적 앎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내적 생명으로 끌어 들이시어 그분을 경이롭고 신비롭게 알게 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성령의 일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성령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참여케 하시고 일치하게 하신다 하여도 우리는 이 앎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인격적 만남을 통한 앎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만남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누군가와 참으로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지식으로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그 만남을 실제로 경험해 보았을 때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격적인 만남이란 이러저러한 겁니다." 하고 아무리 설명해 보았자, 그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을 이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길(hodos)을 안내해 주시는데(hodegeo), 예수님이 바로 그 길 자체이시며, 참으로 진리 자체이시기에 성령께서는 '길이며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요한 14,6)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해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 가능해지는 마음과 마음의 이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만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뒤돌아봄을 가질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를 보여줍니다.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은 곧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에는 예수님을 단지 놀라운 사람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사건을 겪고 난 이후에 그들은 그분이 참으로 누구이신지를 점차로 깨달아 가기 시작했고, 결국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게 됩니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뒤돌아봄을 통해 서서히 참된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렇게 이끌어 주시는 성령께 마음을 열고 영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은 이런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의 제자들이든 성령의 인도 없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의 만남 없이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분을 그저 "놀라운 사람"으로만 보고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세상에서의 지식 정도로 그분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19세기 유럽에서는 예수님의 "도덕적 탁월성"과 관련한 지루한 글들이 많이 쓰였다고 하는데, 이는 그분을 단지 바리사이들과 같은 수준에 머물게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를 예수님의 마음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열어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성령을 의식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먼저 성령을 통해 우리를 만나러 와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깨어 우리 삶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곁에 오시어 그들의 여정을 함께 걸으시며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셨기에 그들이 서서히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삶의 여정에 우리와 함께해 주시며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내'가 어떤 지위나 상태에 있든 상관없이, 또 '나'의 선업이나 공로와는 아무 상관없이, 심지어는 '나'의 죄의 경중 정도와도 아무 상관없이 그분은 '내' 삶의 여정에 늘 함께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결국 이렇게 함께 걸어가 주시는 분을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내어 주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이러한 예수님의 우리와 함께하심을 증거해 주는 성사이며 우리가 그분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성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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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한 신비주의자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현실 속으로 온전히 들어감으로써, 율리안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만났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노리치의 율리안나: 보편적 신비주의자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한 신비주의자
2026년 5월 12일 화요일
신학자 매튜 폭스는 노리치의 율리안나를 오늘의 시대를 위한 신비가로 묘사합니다. 그는 율리안나 흑사병(페스트)을 겪으며 살아간 것처럼,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그녀의 저술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팬데믹이 가져오는 위기와 혼란의 때는, 무엇보다도 우리 조상들의 깊은 지혜를 불러내야 하는 때입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참된 지혜가 죽음과 심오한 변화의 시기에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때에 우리는 단순히 "정상"(the normal)이라 기억하는 가까운 과거로 돌아가라는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와 새롭게 거듭난 인류, 더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문화, 그리고 심지어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다시 그려내도록 초대받기 때문입니다.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 오늘 우리를 부르는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 한 분입니다…. 율리안나는 놀라운 사상가이자 심오한 신학자이며 신비주의자로서, 깨어 있는 여인이며, 21세기 구도자들에게 나눌 위대한 비전을 지닌 탁월한 안내자입니다…. 율리안나는 "은수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은수자, 곧 평생을 작은 공간 안에 벽으로 둘러싸여 살아가는 이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율리안나는 팬데믹의 상처를 견뎌낼 수 있는 영성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연의 혼란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에도, 율리안나 영적·지적 평정을 지키며, 생명과 창조, 인류의 선함에 대한 믿음에 굳건히 서 있었고, 분명한 어조로 다른 이들도 같은 길을 따르도록 초대하였습니다. [1]
율리안나는 현실을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안으로 온전히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하였습니다:
율리안나가 자기 시대의 팬데믹에 응답한 방식은, 그녀의 두 저술에서 알 수 있듯이 놀랍도록 생명 사랑과 감사에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도하였으며, 주변에 가득한 죽음의 체험과 그리스도의 잔혹한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면서—그것을 단지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적 사건으로 해석하며—그녀의 환시가 주어졌습니다….
그녀의 삶과 가르침에서 놀라운 점은, 절망이나 비난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과 창조의 선함을 깊이 탐구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이러한 선함의 감각과 은총과 자연의 성스러운 결합, 곧 "자연 안에 계신 하느님"의 체험 위에 자신의 세계관 전체를 세웠습니다. [2]
율리안나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 시대를 위한 격려입니다:
우리의 자매이자 신앙의 선조인 율리안나는 오늘 우리에게 단순히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지만 강하게 외치며 우리를 깨우고 깊이 들어가 어둠을 직면하며 그 속에서 선함과 기쁨, 경외를 찾으라고 초대합니다. 또한 "어머니 지구"와 그 모든 피조물을 지키기 위해 힘쓰며, 인종차별·성차별·국수주의·인간 중심주의·종파주의—인간의 참된 존엄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생명의 성스러움과 연결되도록 부름받습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리처드 신부와 틱낫한 같은 오늘날의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노리치의 줄리안 같은 더 오래된 신비주의자들의 글을 읽고 들으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저는 설명하기 어려운 우울증을 겪어왔는데, 특히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조용히 앉아 호흡하며, 내 생각을 "하느님의 신성한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현존 안에 앉아 있으면, 어둠으로 기울던 내 마음이 빛과 일치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때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찹니다. 저는 오랫동안 약을 복용해 왔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음도 깨닫습니다.
—Daniel K.
References
[1] Matthew Fox, Julian of Norwich: Wisdom in a Time of Pandemic—and Beyond (iUniverse, 2020), xvii.
[2] Fox, Julian, xix.
[3] Fox, Julian, xxxviii.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yuhei Inoue, untitled (detail), 2020,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빛은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고요한 계시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온전히 담아내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혜와 힘으로 빛을 받습니다. 그 빛은 평화로운 때든 위기의 순간이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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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마리 어여쁜 나비 같은 진리!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이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사전적 의미로 진리란? 조금 아리송합니다.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을 의미합니다.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을 말합니다.
그런에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 안으로 들어오면 그 의미가 더 풍요로워집니다.
진리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겠지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로서 그분으로부터 파견되신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뵙는 것이 곧 하느님을 뵙는 것이라는 진리, 그분 안에 하느님에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라는 진리, 그분 손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진리, 그분은 모든 율법과 계명 전체를 수렴하고 완성하신다는 진리, 그분은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이유라는 진리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수록 눈물겹고 감사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하느님이시라는 진리,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고 챙기신다는 진리, 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윤곽이 잡히지 않는 멀고 먼 당신이 아니라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진리,
오늘도 내 바로 등뒤에 서계시면서 나를 바라보시고 나와 함께 움직이신다는 진리, 내가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항상 나를 떠받치고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결국 영원불변한 최종적인 진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그분과 하나이신 예수님이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절친한 친구보다도 더 살갑고 다정다감하신 분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어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매일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대자유를 만끽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는 웬만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포착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산들바람 같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고, 잡으려고 다가서면 도망가는 한 마리 나비 같습니다.
특히 우리가 세상사에 푹 빠져 살아간다면, 우리의 시선과 안테나가 오로지 돈이나 명예, 자리에만 쏠려있다면 진리를 찾기란 요원합니다.
따지고 보니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매일 동고동락하는 가족들이나 동료 인간들 안에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시니 그렇습니다.
때로 그들의 입을 통해 진리가 선포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천박한 물질만능주의, 경제 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문화 속에 깊이 빠져들어 살아가다 보니 진리고 뭐고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입만 열면 돈돈! 하고 외치다 보니 돈의 노예가 되어 진리와는 완전 담을 쌓고 살아가는 짐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생산력이 있든 없든, 건강하든 환자이든, 청춘이든 노인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존재 자체로 주님께서 살아 숨 쉬는 성전으로 여기며 존중해드리고 배려해드리는 사람이야말로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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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령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2-15).”
1)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지금은 나의 십자가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 자신들의 말로 바꾸면,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 당시에는 그 일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가르쳐야 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해서 ‘보충 설명’을 더 하고 싶으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아무리 잘 설명해도 당신의 부활 전에는
당신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19-21ㄱ)”
사도들과 신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고 예수님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메시아이신 분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셨는가?” 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 ‘실망감’과 ‘이해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는 심정’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의 수준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부활 전이었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이야기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메시아의 고난을 설명해 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뒤에,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해서 가르침의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말씀도 아니고, 가르치는 일을 성령께 넘기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부활 체험을 하게 되면 모든 진리를 깨닫고 이해하게 될 텐데, 그 과정에서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과 성령을 받은 일을 별개의 사건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입니다(요한 20,22).
오순절 날 일어난 일은, 성령을 받은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받은 일입니다.>
3)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와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는, “더 이상 새로운 계시는 없다.” 라는 뜻입니다.
‘공적 계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끝났고,
새로운 가르침과 계시는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이 성령을 받을 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들을 배우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께서 이미 주신 가르침들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일입니다.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는 것들을 말하거나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들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이단’입니다.
‘사적 계시’는 ‘공적 계시’를 보조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4)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부활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부활로 이어진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어도, 그래도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무슨 비결 같은 것이 있을까? 없습니다.
힘들어도 끝까지, 꾸준히 걸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쉬지 않고, 꾸준히 걸어갈 때, 성령께서 분명히 도와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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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3. 부활 제6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6:30 추가.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 그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시인이 쓴 <지금 알고 있는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입니다. 철 없던 시절에는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자신이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며 대충 넘어가거나, 그런 일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나중으로 미루곤 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그렇게 미루고 넘긴 것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 때 이렇게 할걸’하고 후회해보아도 때는 이미 늦습니다.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보다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식별하고 즉시 실천한다면 나중에 후회할 일도, 허투루 흘려보낸 아까운 시간을 아쉬워 할 일도 없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구원의 진리’란 그렇게 거창하거나 복잡한게 아니지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양심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그분 뜻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미루지 않고 지금 즉시 하는 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고집과 편견 때문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듣지 못하고, 우리 욕심과 집착 때문에 그분께서 알려주시는대로 따르지 못하니,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은 그런 ‘가라지’들을 깨끗하게 걷어내고 하느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즉시 따르도록 이끌어 주실 거라고 하십니다. 그런 삶을 통해 우리는 참된 기쁨과 보람을 얻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게 되지요. 그러니 쉽고 편한 길만 쫓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신앙의 길을 충실히 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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