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저는 안 돼요? 특임에.'
'여기가 네 한 풀어주는 데인 줄 알아?'
시즌1 방영 당시, 러브라인 없는 이 드라마에 느닷없이 미묘한 썸이 주어지면서 헤테로 커플파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황시목과 한여진.
또 다른 하나는 황시목과 영은수.
그리고 현재 2020년, 시즌2까지 완결 난 지금은 영은수의 안타까운 부재로 인해 팬들이 (이승 한정으로) 지지하게 된 헤테로 커플은 강제적으로 하나로 통일되었다.
그래서 지금 이 화두를 들고 오는 게 다들 의아할 것이다.
영은수가 부재하기에 한여진은 되고 영은수는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영은수가 현재 시점까지 생존해있었다고 한들 영은수와 황시목의 캐릭터 설정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한, 영은수와 황시목은 한여진과 황시목 같은 사이가 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오피셜로 주어진 황시목의 캐릭터 설정과 러브라인이 없다는 드라마 설정에 충실히 따르자면, 황시목은 한여진이든 영은수든 둘 모두에게 '연애감정'은 없다.
그렇다면 한여진과 영은수는 황시목에게 있어서 왜 다를까.
처음은 다르지 않았다.
황시목은 확실히 한여진과 영은수, 둘 다에게 싹바가지 없었다.
그렇지만 황시목의 위치는 한여진과 영은수에게 너무 달랐다. 황시목은 영은수에게 선배였고,
한여진에게는 경계대상 1호 검사 정도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여진은 황시목을 용의선상에서 올려놓고 있었으며, 의구심을 품은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여진은 황시목이 아무렇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맹세코 연애감정이니 미묘한 썸이니 마음이 터럭 따위도 없었기 때문이며, 사실상 황시목이 용의자로 좁혀지면 체포해버리면 그만이었고 그게 아니더라고 사건을 더 깊숙이 파기 위해 계속 찔러볼 대상 정도였다.
한여진에게 황시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두달 전, 사건현장에서 한번, 그리고 두달 후 몇 번 본 게 전부였기 때문에 한여진은 황시목이 어떤 성격인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파악도 못 하고 있었다.
한여진은 사회적 거리를 몹시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건 황시목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감정이 없니, 외골수니, 머리가 좀 이상하다느니 같은 건 하나도 모른 채로 그냥 딱딱한 사람정도겠거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는 채로 한여진은 황시목 차에 불쑥 올라탔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코로나가 없는 세상에서도 코로나가 횡행하는 세상만큼이나 확고하게 두고 지키는 황시목의 바운더리에 한여진이라는 사람이 불쑥 침범한 것이다.
참 당황스럽긴 한데, 현재로서는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목적지로 갈 거기 때문에 황시목은 정색하면서 차에서 내리라든가, 지금 뭐하냐는 둥의 일갈은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건 시간낭비, 자원낭비니까.
이 드넓은 우주와 은하에 외계생명체가 없으면 그야말로 공간낭비가 아니겠냐는 논리로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 황시목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영은수는 어떠한가.
상당히 도발적이고 영리한 이 후배는, 선배를 몹시 잘 알고 있었다. 최소 반년에서 일년. 황시목 방에서 온종일 황시목과 붙어있어야만 했던 그의 시보가 바로 영은수였다.
황시목의 뇌수술 이력 같은 건 영은수도 알지 못한다. 다만 영은수가 아는 거라곤 이 무뚝뚝한 선배가 무뚝뚝함을 넘어서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군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테면 감정 신경계 같은 게 말이다.
따돌림을 당해도 화나거나 슬픈 기색조차 없고 드러내놓고 기수열외를 당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기수가 밥 먹여주는 군대같은 이 검찰에서 황시목은 외골수 그 자체다.
영은수는 황시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황시목 역시 영은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점이 황시목에게 있어, 한여진과 영은수를 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황시목은 한여진이 제 차에 불쑥 탔을 때처럼 영은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봤다.
그러나 황시목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영은수는 제가 지레 선수쳐버린다.
'가다가 내려주시면 되잖아요.'
영은수가 저때 김태균을 따라서 무작정 트럭 위에 올라타고 여기까지 이동했다는 사실을 황시목은 모르지 않았으므로, 영은수가 눈치보지 않고 당당히 태워달라 소릴 했어도 거기다 대고 내리라든가, 너 알아서 가 따위의 매너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은수가 황시목을 너무 어려워했다.
술 한 번 같이 마셔주지 않는 치사한 선배 황시목이, 영은수한테는 너무 귀한 존재였다.
황시목은 이 법조계에서 이창준 라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
몇 개월을 애써도 잘했다는 칭찬 한 번 해주지 않는 이 비뚤어진 선배가, 영은수에게는 너무 유일했다.
황시목은 윗선에 아부하지 않고 자기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사건을 가장 깊이 꿰뚫고 있으며, 똑똑하고, 한조쪽 사람이 아니며, 공명정대하기에 영은수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하며 그 존재가 유일하고 따라서 몹시도 귀한 존재였던 것이다.
근 일 년을 매일같이 얼굴 보고 하루종일 같은 방에서 일을 한 사이였음에도 영은수는 황시목 집의 초인종조차 쉽게 누르지 못한다.
그리고 황시목이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영은수에게는 황시목이 너무나도 절실했기에.
연애감정으로 절실했느냐, 비즈니스적으로 절실했느냐 묻는다면 (필자는 비즈니스적인 것으로 보지만) 주관적인 답이 아니라 객관적인 피셜로 답하기는 좀 애매하다.
오피셜로, 작가와 감독은 연애감정을 배제하면서도 시목과 은수가 남녀간의 섹스텐션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애썼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러브라인. 짝사랑. 시청자들로 하여금 시목과 은수가 그렇게 보이도록 애썼다는 얘기다.
그래서 황시목과 영은수가 어떤 사이였냐고 작가와 감독에게 묻는다면 그 둘은 답하지 않고 '시청자 분들이 보시고 느낀 나름의 해석'을 강조한다. 시청자가 둘이 남녀사이라고 느꼈다면 그런 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다.
작가와 감독의 애매모호한 열린 해석에 비해, 배우의 해석은 조금 다른데
배우는 은수가 시목에게 절실했던 건 오로지 '한조 일가를 응징하기 위한' 것 때문이었으며, 시목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짝사랑 때문이 아니라 근 일년을 함께 하면서도 (사수가 아닌 서동재는 오다가다 힘내라 잘한다 등의 감흥없는 소리라도 해주는데) 칭찬 한 번, 인정 한 번 해주지 않고 같은 동료 검사인 저를 햇병아리 보듯 하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했다.
그럼 이제 다시 그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영은수가 특임에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던 그 부분으로.
드라마가 중반부를 넘어선 시점에서 황시목은 이창준을, 나아가서는 이윤범까지 한조 일가 전체를 용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모두가 용의자 같은 이 드라마에서도 이창준-이윤범-이연재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건 서동재나 영은수 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서동재와 영은수는 이미 어느정도 시목의 용의선상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그러니 영은수가 특임에 안 되는 이유는 용의선상에 있는 용의자여서가 아니었다.
'여기가 네 한 풀어주는 데인 줄 알아? 나가.'
황시목은 자신이 한조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는 만큼, 그들을 범인으로 심증 굳히지 않도록 자신을 잘 조절해야 했다. 그러니 영은수는 안 될 일이었다. 영은수를 특임에 넣는다면 영은수는 자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한조 일가가 범인인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가져올 사람이었다. 범인을 먼저 내정해놓고 수사한다? 그건 시목에게 당연히 안 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영은수는 특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맨 처음 설명했던 이유와 같다.
황시목은 영은수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황시목은 제 하나뿐인 영은수를 아꼈으니까.
이 '아낀다'는 말이 보통의 기준과는 좀 다른데, 우리 후배 잘한다 영특하다 부둥부둥하고 예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를 테면, 강원철이 윤세원에 하듯 챙기고 어깨를 두들기고 꼭 제 새끼 감싸고 도는 것 같은 아낌과는 거리가 먼, 다른 아낌이다.
황시목은 한조 일가를 거의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유력 용의자들이 그간 숱하게 제 의심을 흔들어놨어도 한결같이 황시목은 '그렇다면 나는 왜 계속 이창준일까' 되뇌며 이창준을 제1용의자에서 결코 아랫순위로 내려두지 않았다.
그러니 제 예상대로 이창준이 범인이라면, 박무성이 죽고 김가영이 죽을 뻔했고 서동재가 이창준이 무서워 벌벌 떨던 것처럼, 영은수 역시 위험하다는 얘기가 된다.
영은수는 아버지 영일재에게 씌여진 누명을 벗기는 데에 목숨까지 걸 정도로 무모하고 무서운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박무성, 김가영. 그 다음은 영은수라는 계산이 선다.
영은수를 특임에 넣어서 한조를 집요하게 추적하면, 영은수는 신변이 위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황시목은 어떻게 해서든 영은수를 이 사건에서 배제시켜야 했다.
이게 황시목에게 있어서 후배 영은수에 대한 내리사랑이었으며 잘해주고 있는 거였고 아낀다는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영은수한테 잘 좀 해줘요, 하는 말에 잘 해주고 있는데요. 하고 대답한 황시목에게는 이게 최선이고 진심이었다.
비록 그 진심이 당사자에게 가닿지 못했지만.
전하지 못한 진심은 황시목에게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후회로 되돌아왔다.
죄책감이 되었고
부채감이 되었으며
미안함만이 남았다.
어쩌면 영은수는 이때부터 황시목에게 있어, 황시목조차 스스로 알지 못하는 '버튼'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황시목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황시목은 시즌2에서 또 한번 동료를 잃을 뻔한 고비가 있었고 영은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여러 번 이명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이번에는 동료를 희생없이 구해냈고 그때야 비로소 영은수를 보낼 수 있던 것이다.
소위 '천국씬'이라고 불리는 이 씬은 황시목의 꿈이고 무의식인데, 시즌1에서 영은수를 잃고 황시목은 영은수가 통한의 피눈물을 흘리는 악몽을 꿨다.
어릴 적 그렇게 무서워하고 싫어하던 소음같은 뻐꾸기 시계소리와 같은 무서운 악몽.
그리고 시즌2에서 황시목은 서동재를 잃지 않고 또 한번 꿈을 꿨다. 이번에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야 영은수가 황시목을 떠난다. 영은수라는 이름이 황시목에게 더는 짐처럼 남지 않게 된 순간이다.
출처: 비밀의숲 물어보세요 답해드립니다
p.s: ㄱㅆ 사족을 덧붙이자면, 영은수가 한조와 겪은 사건이 없었다면, 그래서 황시목이 영은수에게 조심스럽고 유일하고 귀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황시목과 영은수의 관계는 아마 엄청 달랐을 거라고 생각함.
차라리 한여진처럼 아무 바탕없이 이해관계없이 그저 선후배로만 만났다면 조금 더 밝고 서동재처럼 으르렁대거나 틱틱대거나 하는 관계는 될지언정, 이렇게까지 나름 서로 위하고 생각하면서 서로에게 진심 전달이 안 되는 슬픈 서사를 가지지 않았겠지.....
첫댓글 은수ㅠㅠㅠ
아슬아슬한 게 관계인 게 더 좋음
ㅅㅂ.. 은수야 ㅠㅠㅠㅠ
아씨 눈물나 ㅜㅜㅜㅜㅜ 나는 사실 여진이는 시목이에게 가족 같은 감정 은수는 시목이가 느끼지는 못했지만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이 글 읽고 이 감정선이 너무나 더 슬프게 다가온다 ㅜㅜ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