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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능(정토촌 자재요양병원 원장)
1) 몸소 찾아오신 노스님
2003년 3월 5일 이른 아침 뜻하지 않는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저희들은 극락을 다녀오신 중국의 관정 큰스님을 모시고 다니는 상좌입니다.
큰스님께서 아침에 일어나시자마자 정토마을에 가자고 하시는데 방문이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큰스님이나 그 행적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아는 것이 없었으나 스님들이 오신다는데 못 오게 할 수가 없어 오시도록 하였다.
정토마을에는 언제나 누구든지 아무 때나 올 수 있는 곳이지만 내가 이처럼 잠시라도 초청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나서야 대답한 것은 그 당시 그만큼 아주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로부터 6개월 전 우리 병원에 입원한 한 에이즈 환자를 돌보다가 실수하여 에이즈 환자에게 놓았던 주사바늘로 간호사와 내가 찔리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엄청난 사고에 우리는 망연자실하여 곧바로 관계당국에 신고를 했고 보사부에서는 ‘에이즈 감염보균대상자’로 특별 관리에 들어갔다.
보사부의 감염보균대상에 대한 처방은 이렇다.
➀ 보사부가 지급하는 약을 50일간 철저하게 먹어야 한다.
➁ 아울러 5일에 한 번씩 피를 뽑아 검사한다.
이렇게 하여 50일 안에 양성으로 판정이 나면 에이즈 환자로 분류되고, 50일까지 피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오면 감염이 안 된 것으로 판정이 된다는 것이다.
두 달이 안 되는 이 50일은 우리에게 사활이 걸린 저승사자 같은 기간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접고 보사부의 지시에 따라 충실하게 약을 먹고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 약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두 사람 모두 혀가 갈라지고, 나는 간이 나빠지고 간호사는 신장이 상해 일을 못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5일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 지정병원에서 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것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이처럼 서울을 올라 다니고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독한 약을 먹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바로 ‘에이즈에 걸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참을 수 없는 공포였다.
나는 그러한 공황상태에서 기댈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한 가지 부처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법화경을 계속 독송하면서 부처님에게 매달렸다.
“부처님 저는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제가 한 발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살려주십시오.
아니,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간호사만이라도 꼭 살려 주십시오.”
보름쯤 온 정신을 다 쏟아 기도를 했더니 부처님의 응답이 있었다.
역시 부처님은 자비를 가지고 기도에 응답하셔서 가피를 내려 주셨다.
그때부터 나의 마음은 많이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특히 간호사에 대한 것은 보장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토화된 상태에서 50일간을 기진맥진하게 지내고 바로 내일, 그러니까 11월 1일 생사를 가름하는 최종판결이 나는 날이다.
그러니까 사형선고냐?
무죄냐?를 선고 받아야 하는 하루 전날에 관정 큰스님이 오신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아침에 연락 왔는데 오후 2시쯤 정토마을에 들어오셨다.
거제도 오송암 등정 스님과 통역을 맡은 연변 출신 강거사 등 제자들을 이끌고 대문을 들어오시는데 멀리서도 뵙자마자 굉장히 친근감이 느껴졌다.
분명히 이승에서 처음 만나는 노스님인데, 내가 중국의 스님을 어디서 만났을 리가 없는데, 마치 옛날 모시던 노스님을 다시 만나는 것 같은 친근감을 느꼈다.
분명히 정토마을에 처음 들어오시는데 처음 같지 않고 수 십 년을 같이 산 것 같았고, 허리가 꾸부정하신 노스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하게 내 앞으로 걸어오시면서 손을 내미시는데 마치 노스님이 어디 갔다 들어오시면서 “야야” 하고 부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아시고 이 산골짜기까지 찾아오셨을까?’
너무 궁금하면서도 마치 손주 같이, 오랜 제자 같이 대해주시는 노스님에게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말이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외국 스님이라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어떻게 내 방을 알았는지 내 방으로 쑥 들어가셔서 묻지도 않고 내 침대를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셨다.
“나 여기서 자겠다.”
여러 분이기 때문에 스님이 오시면 다른 방을 드리려고 준비를 해 놓았는데, 묻지도 않고 두 문 가운데 내 방문을 정확이 열어 작은 쪽방으로 들어가셔서 행장을 푸시고 그곳에서 주무시겠다고 하니 나는 한 동안 어안이 벙벙하였다.
오후에 한 숨 주무시겠다고 하시면서 누워서는 나에게 다리를 좀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옛날 노스님을 주물러드리듯 관정 큰스님의 다리를 주물러드렸다. 그런데 그 두 시간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계속 노스님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살까요.”
“왜 나만 이 일을 해야 합니까.”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우여곡절을 큰스님께 털어놓으면서 중국어냐? 한국어냐? 하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노스님도 마치 다 알아듣고 계시는 거처럼 살며시 미소를 지으시면서 가끔 ‘하오’ ‘하오’라고 하시면서 나의 긴 이야기를 다 들어 주셨다.
그리고는 일어나셔 나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하오’ ‘하오’ 라고 하시면서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2) 가족 천도
저녁 공양이 끝나고 7시가 되자 통역과 나를 들어오라고 하셨다.
“내일 새벽 6시 천도재를 지낼 터이니 △△△을 준비해라.
내가 천도 한다고 해도 여러 명이고 가 있는 곳이 다 다르기 때문에 100% 다 천도된다고 보장을 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천도를 해보자.”
우리는 준비하라는 것을 갖추고 위패도 쓰는 등 밤늦게까지 준비를 마쳤다.
나는 에이즈 때문에 심정이 착잡하여 하소연은 했지만 에이즈 문제는 말씀도 드리지 않았는데 어찌 되었든 총체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주변 정리를 해주시려고 한다고 믿었다.
새벽에 법당에 들어가시면서 아무도 들어올 필요 없이 당신 혼자서 하시겠다고 하였으나 모두 참석하였다.
6시 반에 시작된 재는 무려 3시간 반이나 걸려 아침 10시까지 계속 되었다.
나중에 통역에게 들으니 내가 전화를 받느라고 밖에 나와 있는 사이 천도재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 갑자기 큰스님이 앉아서 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무 불쌍하다.
저것 봐라. 목매 죽은 사람, 농약 먹은 사람 …”
그리고는 정말 정성을 다하여 하나하나 천도를 해 나가셨다고 한다.
재가 막바지를 달릴 때 9시가 넘어 나는 전화를 받으러 사무실로 나와 있어야 했다.
아침 출근을 하면 에이즈 검사에 대한 마지막 판결이 나오기 때문이다.
지난주 마지막 피를 뽑아 검사할 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에는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결과는 전화로 통보하겠습니다.”
그런데 ‘오지 마라. 전화로 통보하겠다.’는 말 자체가 잔인하게 들렸고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의사들이 사형선고 할 때 어려운 처지를 피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지난 일주일은 50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
출근시간이 꽤 지나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야 대학병원 담당의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동안 걱정 많이 하셨죠?
두 분 모두 음성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음성이라는 것은 에이즈 바이러스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부처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세상에 태어난 기쁨에 가득 차 있을 때, 10시가 되자 3시간 반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천도를 하신 노스님께서 법당을 나오셨다.
1924년생인 노스님은 당시 2003년이니 만으로 80살이시고 우리 나이로는 81살이 되셨는데 그렇게 강행군을 하신 것이다.
“너의 조모는 왕생이 되었다.
세 사람이 왕생했고 대부분 사람과 천상에 태어났다.
다만 아직도 사람이나 하늘에 태어나지 못한 분들이 있으니, 이 분들은 앞으로 네가 열심히 수행해서 천도해 드리도록 하여라.”
경황이 없었지만 내 기억에 할머니의 왕생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내가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아버지와 다른 한 분도 말씀하셨는데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머리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다.
‘이게 뭘까?’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큰스님은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와 주셨을까?’
‘무슨 인연으로 그 좁은 쪽방 침대에서 이틀을 주무시고 노구에 나를 위해 6시 반부터 10시까지 3시간 반 동안 천도를 해주실까?
새벽부터 아침 공양도 하시지 않고 천도재를 다 마치고 나서야 공양을 하셨다.
그야말로 바람같이 나타나셔서 모든 분위기를 확 바꿔버리는 느낌이 할아버지 노스님이 살아오셔 위기에 찬 손주를 꼭 집어 건져내주시는 것 같았다.
3) 여기가 극락이구나!
오후에는 청원 정토마을 호스피스센터가 있는 주변 땅을 다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극락과 이 땅하고 참 잘 어울린다.
여기가 염불하기엔 참 좋은 땅이다.
정말 극락이구나, 수행하기 참 좋은 곳이구나.”
나도 평소에 늘 느끼는 것이지만 평화로운 골짜기에 들어가면 정말 번뇌가 없어진다.
풍경소리도 맑고, 하늘의 별도 맑고, 공기도 맑고, 땅도 맑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가면 바로 밝아진다.
큰 스님이 이런 정토마을을 정말 좋아하셨다.
내가 아랫녘에 땅을 마련하여 좀 더 큰 병원을 세우려고 모금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당신도 중국에서 17곳이나 불사를 하셨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곳에 가서 보살행을 하여라.
그러나 나중에 수행할 때는 꼭 돌아와서 이곳에서 염불수행 하여라.
여기가 염불수행하기 좋은 곳이다.”
청원 정토마을 작은 법당에 모셔진 아미타불 불상을 보시고도 덕담을 잊지 않으셨다.
“상호가 원만하구나.
그리고 네가 점안을 여법하게 참 잘했구나.
부처님 잘 모시고 꼭 수행하여 무념을 이룩하여라.”
그리고는 오후 내내 호스피스센터 주변 땅 전체를 한 곳도 빼지 않고 골고루 다 밟으시고 나서 다시 말씀하셨다.
“참으로 좋은 땅이구나.
크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염불수행하면 모두 왕생하겠다.”
하시면서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시간을 내서 나 혼자만 법당에 들어오라고 하시더니 특별히 마정수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나서 대중들 들어오라고 해서 차례로 마정수기를 해 주셨다.
큰스님께서 물으셨다.
“염불 어떻게 하느냐?
한번 내 앞에서 해봐라.”
내가 늘 하는 염불을 시작하니, 큰스님은 눈을 꼭 갚고 깊은 선정에서 나의 염불을 들어 주셨다.
“염불에도 품에 따라 다르다.
네가 하는 염불은 중생중품 염불이다.”
나는 당시 이것이 무든 뜻인지 정확히 몰랐다.
“내가 보급하는 정토선 염불은 모든 품을 포괄해서 다 통하는 염불을 가르치는데, 너는 꼭 내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지금 하는 것처럼 해도 된다.”
4) 이 은혜를 어찌 갚을 것인가?
비록 2박 3일의 짧은 시간이고 직접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80 노구를 이끄시고 열심히 천도해 주시고, 마정수기 해주시고, 정토마을 땅 전체를 밟아 악귀를 몰아내고 축복을 해 주시고, 내가 하는 염불법의 주소를 명확히 짚어주시고, 앞으로 보살행 이후 내 수행까지 모든 지침을 내려주시는 자비를 베푸신 노스님에게 어떻게 대접을 해드릴까 걱정이 되었다.
당시 정토마을의 경제사정이 어려울 때지만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녁에 다시 내방에서 둘이만 만났을 때 작은 촌지를 드렸다.
그러나 극구 사양하시며 뭐라고 중국어로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자네가 곤경에 처해 있어서 내가 왔는데 다 괜찮다“ 고 하시며 갑자기 허리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시더니 말씀하셨다.
“이 돈주머니에 든 돈을 정리하여라.”
당시는 5만 원짜리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만 원짜리였다.
십만 원씩 모아 다시 열 개를 합쳐 100만원 다발을 만들면서 문득 생각하니 ‘옛날에도 이처럼 노스님 쳐다보며 돈을 정리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아주 익숙하게 스님 돈을 내 돈처럼 정리하였다
100만원 다발이 2개가 되고 나머지는 80만원이 되었다.
노스님은 280만원을 몽땅 들어서 나에게 불쑥 내미셨다.
“네가 병원을 짓는다는데 작은 돈이지만 보태 써라.”
통역은 없었지만, 큰스님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몸짓을 통해서 나는 큰스님의 마음이 읽어 졌다.
‘중국에서 혼자 17개의 절을 지으신다면 얼마나 많은 자금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한국에서 받으신 용채를 몽땅 내 병원에 쾌척하시다니.’
‘우리가 중국을 도와도 모자랄 판인데, 이렇게 중국 스님의 돈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순간 쓸데없는 분별망상이 일어났지만 거역할 수 없는 위엄에 나는 염치없이 그 돈을 받았고 속으로 감사를 드렸다.
‘큰스님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큰스님의 크신 자비심까지 합쳐 죽어가는 중생들을 위해 위해 쓰겠습니다.’
그 뒤 병원 짓는 일에 집중하여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큰스님의 은혜를 제대로 갚을 기회가 없었다.
어렵게 오셔서 큰 가르침을 주신 스님에게 용채 한 푼 못 드리고 거꾸로 도움만 받은 것이 못내 죄송하고 안타까워 꼭 중국에 한 번 가서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었고, 정말 어렵고 힘들 때는 찾아가 옛날처럼 눈물 펑펑 쏟으며 하소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며 지내던 어느 날 노스님이 원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스님에게 죽음이 뭐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극락에 가셔도 되고 아니면 다시 태어나 보살행을 하실 터이니 큰스님의 원적에 대한 한은 큰스님의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것이었다.
그리고 큰스님의 조용하면서도 바위처럼 묵직한 말씀이 가슴에 몰려든다.
“병원 다 짓고 수행하게 될 때는 지금 이 곳(청원 정토마을)에 와서 해라.
크게 깨닫고 깨달은 만큼 크게 펼 수 있다.”
중국은 물론 미국,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제자들에게 큰 가르침을 펴신 스님의 법력을 따르려면 하늘과 극락을 한 생각에 오가는 큰 법력을 갖추어야 하고, 그러려면 언젠가는 반드시 깊이 염불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마지막 사자후가 천둥소리처럼 내 가슴을 친다.
5) 온 누리에 염불수행의 꽃이 피어나길 빌며!
2003년 10월 큰스님께서 처음 우리 정토마을에 오셔 모든 장애를 물리쳐주시고 종자돈을 주시고 가신 뒤 10년, 2013년 8월 드디어 낫기 어려운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울산(언양)에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을 개원했다.
개원 초기 2년쯤 병원을 정상화시키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으나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기 때문에 짬을 내서 불교인들에게 염불수행을 펴기 위한 첫걸음을 옮겼다.
21세기 염불수행의 문화가 온 누리에 퍼져 꽃 피울 수 있도록 작은 힘을 보태는 것도 나의 서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불자들에게 강의를 통해 불교의 유토피아인 극락정토에 대한 기본 소양을 갖추도록 하고, 아울러 극락가려고 원을 세운 불자들에게 극락에 갈 수 있는 쉬운 염불법을 보급하며, 근기가 높아 자성염불을 하는 불자들에게는 일념과 무념단계를 체득하여 깨달은 뒤 인류를 위해 회향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 우선 실현 가능한 작은 모임부터 시작하였다.
작은 씨앗이 온 누리에 꽃 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부처님께 기도드리나이다.
극락 다녀온 관정스님과 극락 간 사람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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