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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적(김지수,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 천난만험(千難萬險)과 천신만고(千辛萬苦)의 삶
다 전생에 지은 업연(業緣)에 이끌려 벌어진 일이리라! 꿈결 같고 영화 같은 한바탕 살림살이가!
일본에 돈벌이도 나가고 일제 징용에 끌려 중화민국 본토까지 다녀오신 선친(先親)한테 국민학교 때 한두 자씩 한자(漢字)를 익히다가, 중학교 들어가 처음 한문을 배우는데 흥미가 일었고, 전주고등학교에서는 한문에 류창하고 호방하신 박시중 선생님께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며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며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 등을 원문으로 온전히 배워 외우면서 한문에 묘미를 느끼기 시작한 듯하다. 판사가 되겠다는 청운에 꿈을 품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건만, 운명에 나부끼는 바람결은 호락호락 내 맘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입학 한 달 남짓 지나 선친께서 별세하시자, 나는 ‘젊은 베르테르에 슬픔’을 안고 마음이
방황하며, 고시(사법시험)를 위한 법학공부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고향에 있던 아우는 사춘기 질풍노도에 격정을 참지 못하고, 생선행상으로 어렵사리 생계를 꾸리느라 가뜩이나 힘든 어머님의 업장해소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 나는 2학년 겨울방학 때 사법시험 1차 준비를 딱 보름 해보고는 기력이 탈진해 내 길이 아님을 직감하고, 과감히도 혼자서 선뜻 중문학 부전공 길을 선택했고, 그때 돌린 키는 내 인생항로를 확 바꿔놓았다.
황금 같은 대학 3학년 때 1년간 오롯이 한문학에 골몰하면서, 한국고등교육재단에 한학연수장학생으로 3년간 사서삼경을 배운 인연까지 겹쳤으니, 아예 전공을 바꿔 대학원 중문과에 진학하려고 맘먹었다. 허나 운명에 바람은 또 한 번 심술궂게 헤살을 부린 모양이다.
전주고 선배이신 중문과 이병한(李炳漢) 교수님이 적극 만류하시어, 법학 전공과 부전공 한문을 함께 살려 한국법제사를 전공하고자 법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고향에 있던 어머님과 아우를 무작정 서울로 이사시켜 신림동에 단칸 셋방살이하면서,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뒤져 세종 때 개척한 사군(四郡)‧육진(六鎭)에 사민실변(徙民實邊)한 정책을 뒤이어 펼쳐진 “조선조 전가사변률(全家徙邊律)”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조교 업무까지 겸하느라 과로로 만성간염을 앓으며 3년 만에 힘겹게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 전통법을 연구하려면 전통 중국법을 알아야 했다. 만성간염 상태가 더욱 나빠져서 재검으로 병역까지 면제된 나는, 입원료양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중국 전통 법제사와 법사상을 깊이 탐구하기 위해 독단(獨斷)으로 1987년 8월 하순 대만대학 3년 유학(遊學) 길에 올랐다.
중국어도 익고 한문 문리도 더욱 트이면서 중국 전통법에 대한 공부도 제법 깊어졌는데, 금상첨화로 3년차 마지막 학기에는 중일전쟁 당시 도교(道敎)의 성지 화산(華山)에서 8년간 은둔수행하신 함정(涵靜) 로인(老人) 부처(夫妻)님을 만나 본격 수행에 입문하였다.
유불선(儒佛仙) 삼교합일에 전통을 이어받아 우주를 집으로 삼고 천하대동과 종교회통에 큰 뜻을 품은 흉금회포가 평소 내 바람과 맞아, 마지막 제6학기는 등록만 하고 책과 수업을 모두 내려놓은 채 대중현(臺中縣) 소재 천제교(天帝敎) 천극행궁(天極行宮) 도량에서 6개월 은둔수행에 돌입했다.
기약한 3년이 끝나 귀국해 박사과정에 복학했고, 이듬해 여름방학 남투현(南投縣) 뢰력아(鐳力阿) ‘뢰(鐳)’는 화학원소 라듐의 중문번역글자로서, ‘뢰력(鐳力)’은 ‘레이리’로 읽으며 ‘방사능’의 뜻이다.
도량에 가서 폐관수련에 동참하고 귀국했다.
1990년부터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면서(非僧非俗) 스님 같은 속인으로 완전 채식하며 학문과 도업을 병행해온 길에는, 천구만한(千仇萬恨)의 업장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지, 천도만과(千刀萬剮)를 방불케 하는 천난만험(千難萬險)의 마장(魔障)과 천산만수(千山萬水)의 마련(磨鍊)이 끊임없이 몰려와, 그동안 겪은 천신만고(千辛萬苦)는 천언만어(千言萬語)로도 이루 다할 수 없다.
(물론 허운(虛雲) 화상이나 관정 법사가 겪은 중일전쟁、국공내전、문화대혁명이나, 또는 우리 조부모、부모、스승 세대가 겪은 일본강점식민지배나 6.25 민족상잔의 한국전쟁동란에 비하면, 내가 겪은 고초는 분명 천만분에 1도 되지 않을 ‘새발에 피(鳥足之血)’에 지나지 않으리다. 허나, 윗세대가 다함께 겪은 전란과 혁명에 고난은 누구도 피하기 어려운 공업(共業)이었는데, 내가 수행에서 겪어온 고난은 개명천지 평화시대에 오직 나 홀로 치른 별업(別業)이기에, 상대적 대비효과가 극명해 주관적 감수 고초는 그 못지않았다고 여겨진다.)
2) 휘황찬란한 생명 진리의 빛 『인광대사가언록』
우여곡절 끝에 1994년 2월 박사학위를 받고, 1996년 모교에 지도교수 후임 공채에 두 번 미끄러지면서, 실망과 좌절로 분노와 원망이 끝까지 북받쳐, 1997년 새해 벽두에 나는 그때까지 모은 책들로 금자탑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소신공양(燒身供養)하려 결연히 맘먹었다.
(기묘하게도 1997년 2월 관정 법사님이 한국에 처음 방문하셨단다.) 허나 곧바로 태고종 종정을 지낸 충담 화상께서 소신공양하셨다는 소식이 전파를 타고 들렸고, 사촌형님이 음독 자진하신 불행이 닥쳤다.
‘수행자의 일념이 우주법계에 금세 메아리치는구나!’ 순간 어리석은 번뇌망상을 일깨우는 불보살님의 경종으로 직감하고, 즉시 그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돌파구를 찾아 유학시절 채식식당서 집어온 인광대사가언록을 집어 들어 펼쳤다. 오래된 갱지에 조그만 납판활자로 잉크마저 번진 조잡한 글씨가 빽빽이 찬 볼품없는 책이다.
허나 표지를 열면 우선, 눈과 얼굴이 눈부시게 빛나고 후광까지 찬란한 진영(眞影)과 여섯 접시에 가득한 수많은 사리(舍利) 사진이 눈길을 온통 사로잡았다. 그뿐 아니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자 볼품없는 글자에 담긴 법문에서 정말 상상할 수 없이 휘황찬란한 생명 진리의 빛이 왕창 쏟아져 나와 마음에 눈, 지혜에 눈을 번쩍 뜨이게 해주었다.
당시 내 마음 식신(識神)이 온통 칠흑 같은 암흑동굴에 갇힌 상태라서, 인광 대사 법문에서 쏟아지는 부처님 자비광명이 더더욱 휘황찬란하게 눈부셨을 대비효과도 컸겠지만, 어쨌든 그때 느꼈던 주관적 인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이 몹시 강렬하였다.
몇 십 일이나 걸렸을까? 통권을 꼼꼼히 정독하고 나니, 이제 암흑동굴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듯하였다.
감로 같은 진리의 젖(법유法乳)을 마시자, 비로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된 내 마음 식신이 원한의 주술에서 풀려날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법문과 이런 세계가 있었나싶어 깜짝 놀랐고, 이런 소식을 나 혼자 읽고 말 수는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렇게 좋고 훌륭한 복음 법문을 한글로 옮겨 한국에 인연 있는 불자들한테도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원망(願望)이 맘속에서 저절로 일었고, 그러지 않으면 불보살님과 3년 유학에 크나큰 빚을 질 것 같았다.
결과론으로 지금 회고하면, 바로 인광대사가언록과 료범사훈, 불가록 등의 법문을 만나러, 나는 치성한 만성간염을 안고 법학도로서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대만 유학(遊學)을 갔었나 보다.
말하자면 불보살님께 이끌려 나도 모르게 구법려행(求法旅行)을 한 셈이다.
인광대사가언록은 첫 장을 열면 바로 정토법문이 수승함을 지극히 찬탄하는데, 화두선 일변도의 한국 불교 상황에선 맨 처음부터 소개하기 어려울 듯싶었다.
그래서 직감으로 판단해 먼저 중간에 인과응보 법문을 골라 조금 번역한 뒤, 전화번호부에서 불교잡지를 찾아 눈에 띄는 불광지에 전화를 걸어 원고를 보냈다.
한 달이 다 되도록 전혀 소식이 없어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바빠서 깜박 잊고 있었단다.
곧바로 글을 읽어본 편집장이 흔쾌히 싣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인광 대사 법문을 련재하기 시작한 인연으로 적잖은 독자들의 반향이 이어졌고, 강진 백련사에 선용 스님이 련재 내용을 모아 편집해 법공양하고 싶다고 연락이 오기도 했다.
마침내 불광출판부에서 독자들의 렬렬한 호응에 단행본 출판을 결정하고 요청해와 완역을 진행하면서, 한때는 원고를 들고 잠실 석촌호수 건너편 불광사에 몸소 찾아가 광덕(光德) 스님을 열반 2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친견하기도 했다.
3) 관정 스님과 첫 인연(2000년 5차 한국 순회법회)
그런데 1999년 11월 중순 강진 백련사 서래(선용) 스님이 관정 법사 극락세계유람기 한글판을 한 권 보내와서 답신을 올렸다.
“관정 대법사님 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관정 스님에 대한 소개나 번역한 분 신상 소개가 전혀 없어 일반 독자들이 궁금할 것 같습니다.
극락세계유람는 내용이 좀 빠진 듯하기도 하고, 문장이 이왕에 좀 더 잘 다듬어졌더라면 더욱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도 좀 남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훌륭한 법문을 옮겨 그것도 무료 법보시(法布施)하는 법연(法緣)에 존경과 찬탄을 아낄 수가 없습니다.
인광대사가언록은 출판이 다 되면 법공양(法供養)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00년 2월 하순에 선용 스님이 다시 정토선 책을 보내왔는데, 가언록 초판이 발행되기 직전인 5월 하순에는 마침내 선용 스님이 전화로 중국에서 극락세계 다녀오신 관정 스님께서 래한해 백련사서 법회를 가지는데 한번 내려오라고 권청해왔다.
당시 운동 삼아 이틀에 한번 꼴로 관악산에만 다니고, 이따금 곡성 성륜사 청화 스님 정기법회에나 나다닐 뿐, 그밖에는 거의 두문불출하던 나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특별한 려행으로 5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강진까지 내려가, 고려시대 만일념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던 백련사에 들어가 관정 스님을 친견하였다.
법회에도 참석하고, 5월 28일 밤1시간과 이튿날 아침 2시간 동석하였다.
관정 스님께 인사드리고 인광대사가언록 한글번역 불사를 여쭙자, 스님은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뻐하시며 법담을 들려주셨다.
내가 중국어를 조금 해 말이 통하는지라 더욱 반겨하시며 어린애처럼 천진미소를 연신 보이셨다.
더구나 당신 사진을 특별히 나한테만 한 장 꺼내주셨는데, 내가 기념으로 서명을 부탁하자 흔쾌히 응해 주셨다.
(그 사진은 나중에 서래 스님이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드렸다.)
대화 내용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여러 스님이 궁금해 묻는 질문에 몇몇이 전생에 아라한이었다고 말씀하셨던 내용이다.
5월 28일 밤 백련사에서 관정 스님과 법담
5월 28일 관정 스님이 법당으로 들어가신다. 오른쪽 두 번째가 필자
거기서 하루 밤 묵고 서울에 올라온 뒤, 인광대사가언록 책이 나오자마자 바로 책을 들고 광주로 내려가 누나집서 하루 묵고 목욕재계한 다음, 6월 11일 맨 먼저 무안 혜운사(慧雲寺)로 청화 스님을 찾아뵙고 3권을 법공양 올렸다. 내가 정토념불법문의 홍포(弘布)를 위해 청화 스님과 관정 스님이 상견해 법담을 나누시면 좋겠다는 바람을 맘에 품었더니, 청화 스님이 내 마음을 아시고 관정 스님의 스승이신 허운(虛雲) 화상 법문말씀을 해주시면서, 가언록 제목이 화두선을 배격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아쉬움을 지적하셨다.
큰스님의 기력 소모를 념려한 주지 스님의 당부로 시간이 촉박하고 기회를 놓쳐, 두 스님의 회동 념원은 끝내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혜운사에서 예정에 없이 하루 묵고 이튿날 청화 스님을 따라 완도 범혜사를 방문한 뒤, 무안 약사사 돌부처님을 뵙고 관정 스님을 뵙기 위해 바로 상경했다.
다시 이튿날(13일) 분당 약사암에서 열린 관정 법사 법회에는 불광출판부에서 가언록을 직접 갖고 나와 불자들에게 보급하였는데, 나는 자친(慈親)을 모시고 참석하여 관정 스님께 마정수기도 받고 늦은 해거름에 책을 법공양 올렸다.
14일에도 약사암에 가서 법사님을 뵙고 기념촬영도 했다.
6월 13일 밤 관정 스님께 가언록 헌정
6월 14일 분당 약사암
약사암서 마정수기 받는 어머님
법사님이 화두 놓고 염불하세가 무슨 뜻인지 물으시길래, 내가 “放下話頭而念佛”이라고 말씀드리자, 즉각 “화두선을 배격하는 게 아니냐?”고 강렬히 반문하셨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두 분께서 하루걸러 약속이나 한 듯이, 한결같이 책 제목이 마치 화두선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며, 볼 사람(참선수행자)도 제목 때문에 거부감이 일어 아예 표지조차 열지도 않을 수 있겠다고 념려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간곡한 노파심으로 미욱한 중생심을 일깨워주셨다.
특히 청화 스님은 념불선을 주창하셔서 여태껏 화두선 일변도의 조계종에서 이단처럼 따돌림 당하신 피해자(?)인데도, 보문(普門) 회통의 정신을 올곧이 지켜 솔선수범하신 것이다.
이 아니 감동이랴?!
6월 15일 안동 봉정사 법회는 못 가고, 16일 상주 석문사(속리산 동쪽)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는 버스 시간표를 확인해 홀로 청주를 거쳐 옥양동 골짜기까지 찾아갔다.
여전히 환히 맑고 밝은 얼굴로 맞이해주시는 관정 스님을 뵙고, 그날 밤 대주 스님이 자리 반쪽을 특별히 내주어 스님 틈에 끼어 자는 영광(?)을 누렸다.
비록 부처님이 가섭한테 반자리 나눠주시고 법화경에서 다보탑이 출현해 다보여래께서 석가여래한테 반자리 내주어 함께 앉은 반좌(半座: ardhāsana)나 분좌(分座) 같은 동등(同等) 병좌(竝坐)의 의미는 아니었지만, 승속(僧俗)의 차별상이 삼엄한 작금에 우리 불교 현실에서 이만큼 특별히 수승한 인연은 관정 스님 덕택에 비좁은 절간 형편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참으로 길이 찬탄하고 감사할 일이다!
이튿날 석문사서 천도법회를 여시고, 관정 스님이 그 다음날 출국하신 걸로 적혀 있으니, 나는 또 홀로 귀경했을 것이다.
사실 좀 더 따라다니고 싶어도, 시자 스님과 통역 일행이 한 차로 스님을 모시고 다니기 때문에, 나는 따로 혼자 대중교통으로 쫓아다녀야 하는데, 차도 없고 수입도 없고 체력까지 따라주지 않는 박복한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기만 했다.
게다가 청화 스님을 따르던 법연(法緣)과 량립(兩立) 병행하기 어려운 미묘한 부조화가 느껴지면서 심리상 부담도 제법 컸던 듯하다.
가언록이 나온 뒤 한동안 여기저기 지인과 인연 도량에 책을 드리거나 보내느라 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느라 7월 2일 첫째 일욜(음력 6월 초하루) 성륜사 정기법회도 못나갔다.
1일 새벽꿈에 청화 스님과 시자 스님 대여섯 분 뒤에 내가 따라가는 꿈을 꿨다.
내가 의례 법회참석하리라 기대하신 스님의 부촉으로도 느껴졌지만, 책 내고 법공양 올린 인사를 받기가 겸연쩍고 쑥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여러 분이 고맙다고 격려의 전화나 엽서를 보내오셨다.
근데 3일 월욜 아침 청화 스님 시자인 정륜 스님이 전화를 걸어와, 전날 법회 때 큰스님께서 가언록 번역을 칭찬하며 나를 찾으셨는데, 다만 제목이 좀 마음에 걸리신다는 전갈이었다.
화두선 일변도인 우리 불교계에서, 고려 말 이래 교류가 거의 끊기다시피 한 우리나라에, 명청 시대 흥성한 정토념불법문을 처음으로 본격 번역 소개한 가언록에, 권두법문으로 염불선 주창하시는 청화 스님 법문을 버젓이 실었으니, 비판과 성토의 화살이 청화 스님께 빗발칠까 저어하는 제자 스님들의 우려가 다분히 느껴졌다.
(나중에 10월 중순 금타 화상 탑비 제막식 때도, 태호 스님은 나를 보자 대뜸 “화두 놓고 염불하세 책 제목을 바꾸라”고 직설로 분부하기도 했다.)
4) 『정토선 정의』 번역과 현몽 감응
한편, 6월 28일부터 정토선정의를 한글로 옮기기 시작해서 7월 20일 초고를 마쳤는데, 7월 5일 천관산 탑산암 박(朴) 주지님이 래전(來電)하여 나랑 같이 지리산 가고 싶다고 권청하기에, 내가 지금 관정 법사님 글을 번역하고 있어서 당장은 운신하기가 좀 어렵겠다고 답했다.
근데 바로 그날 밤(6일 새벽) 꿈에는 내가, 관세음보살 성지인 보타산이 있는 절강(浙江)인지, 아니면 관정 법사님 고향인 복건(福建)인지, 동남 해안에 바짝 맞닿은 도량에 가서 엄청 큰 법당 안에 엄청 큰 와불(臥佛)과 함께 관정 법사님을 뵈었다.
처음엔 부처님인 줄도 모르게, 내 키만큼 높은 발바닥만 눈에 보이더니, 바로 관정 스님이 나타나 나와 함께 한참 법담을 나누는 모습을 몽견했다.
참고로 당시 일기를 다듬어 옮겨 적는다.
“7월 6일, 목(木). 오늘 새벽꿈엔, 내가 대륙 복건인지 절강인지 동남쪽 해안 바닷물이 제방에 직접 맞닿는 어떤 사원(도량)에 가서, 아주 엄청나게 크고 텅 비어 마치 무슨 동굴처럼 느껴지는 큰 법당(法堂) 문안에 들어서니, 바닥에 아주 엄청나게 큰 부처님이 누워계시는데, 문 쪽에 큰 발을 뻗고 있어 내가 눈으로 뵌 모습은 발뿐이었다. 그 발바닥 너비가 사람 키만한 정도였다. (옆으로 오른쪽 갈비 옆구리를 대고 머리는 동북쪽으로 향하셨나?)
그렇게 거대한 와불(臥佛)을 꿈속에서 부처님 열반상으로 인식한 것 같은데, 깨어 생각하니 아미따불(阿彌陁佛) 법계장신(法界藏身)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1990년대 초반 천인대동서당서 고전 강의할 때 유교경을 42장경과 함께 한역본으로 강의한 적이 있는데, 2009년 번역본을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란 제목으로 하늘북에서 펴냈다.]
그런데 그 법당 안에서 관정 대법사님을 정말 뜻밖에 만났다.
그 절은 관정 법사님이 주석하는 절은 아닌데, 무슨 일로 특별히 들르신 것 같았다.
내가 꿈속에서 관정 법사님께 중국어로 반가운 인사를 드리고 대화를 나누는데, 꿈속에서도 관정 법사님 말씀은 사투리가 심해 현실에서처럼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꿈속에서 신통자재력이 발동했는지 말뜻 내용은 즉시 알아차리는 게 참으로 신기하고 묘했다.
도량 분위기가 너무 좋아 좀 와서 머물면 좋겠다는 상념이 일어 그렇게 말씀을 여쭙고, 절 주인이 누군지도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나중에 좀 와 있고 싶으면 관정 법사님께서 추천서를 써달라고 요청하자, 스님께서는 아마 내가 신청서를 써오면 당신이 좀 손질해주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듯하다.
그리고 나서 거기보다 조금 북쪽에 있는 당신 절로 가시려고 법당 밖으로 나오는데, 바로 곁에 넘실거리는 푸른 바닷물이 너무 인상 깊었고, 또 남쪽 바다 쪽으로 조그만 산이 있어 보였다.
꿈속에 그 산이 보타산(普陀山)이 아닌가 여겨졌다.
그러면 와불(臥佛)은 관세음보살님이실까?
그런데 사원에 정원(뜨락)이 전혀 없는 게 이상했다. 혹시 그러면 극락정토 련지해회(蓮池海會)는 아닐까? 관정 법사님이 거기 계셨는데, 자기 절이 아니고 들르러 왔다고 하셨고, 극락유람기에서 처음에 부처님 발밖에 못 뵈어, 부처님인 줄 모르고 무슨 기둥인 줄 알았다는 내용도 그렇고….
어쨌든 꿈속에서나마 열반상이든 와불(臥佛)이든 부처님 발바닥이라도, 그것도 관정 법사님과 함께 친견했으니, 이 어찌 환희 찬탄할 수승한 법연(法緣)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관정 법사님이 밖에 나와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한테 온 한국인 남자‧여자 각 한 분이 제대로 잘하지 않는다는 투로 걱정을 하셔서, 내가 ‘그러면 안 되는데’라고 응대했다.
그러면서 꿈은 끝난 듯.”
사흘 뒤 9일에는 다시 극락왕생을 상징하는 듯한 꿈을 꾸기도 했다.
이 모두 관정 법사님 인연으로, 특히 정토선정의를 한글로 새로 번역하는 법연으로 나타난 불보살님의 자비(慈悲) 가피였으리라!
5) 『화두 놓고 염불하세』 제목에 대한 물의
당시 기록을 확인하니, 사실은 책이 나오기 직전에 성륜사로 청화 스님께 두 번 쯤 서신을 보내 문안드리며 제목에 관해 스님께 자문(諮問)을 여쭈었으나, 당시 스님께서 법체 기력건강이 여의치 못해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는지, 통 답변이 없어서 그냥 혼자 령감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허나 제목에 대한 두 스님의 노파심과 주변에 들끓는 물의(物議)가 보통이 아님을 직감한 나는, 출판사에 전화도 하고 몸소 찾아가기도 하면서 제목을 변경하자고 여러 차례 간곡히 권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용과 판매 효과를 고려한 출판사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조직의 타성 장벽에 부딪쳐 절망감에 공포감마저 엄습해서, 나는 차라리 얼른 극락왕생하고 싶다는 비원(悲願)이 일면서, 미국 포스터가 작곡한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오’ 곡조에 맞춰 ‘내 고향으로 날 데려가소’라는 가사를 스스로 지어 관악산에서 크게 목 놓아 부르기도 했다.
출판사에 영향력을 부릴 만한 저자 두어 분께 측면지원 도움을 간청하는 전화를 걸어, 소천(韶天) 선사의 제자인 권경술 선생한테는 “벼룩 서 말을 조복시키기는 쉬워도, 선방 수좌 셋을 조복시키기가 더욱 어렵다.”는 속담을 전해 듣기도 하고, 이남덕 선생한테는 요즘 우리나라 화두선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뜻에서 정한 제목 그대로 밀어붙이라고 격려말씀을 듣기도 했다.
7월 13일에는 광주에 내려가, 14일 선용 스님을 만나 정영민 거사 택시로 함께 성륜사 청화 스님을 찾아뵙고, 제목에 관련한 그간 사연과 변경이 어려운 현실을 소상히 여쭙고 참회‧사죄를 올렸다.
화두선 수행자들이 성토할까 저어하는 우려는, 청화 스님의 본의라기보다 제자들의 효심으로 느껴졌고, 선용 스님이 가언록 중 핵심만 발췌해 선방 수좌들한테 법공양하겠다는 의향을 여쭈어 흔쾌히 동의하심으로 대강 일단락되었다. 그날은 무거운 업장을 녹이느라 두터운 먹구름에 세찬 비가 오래도 퍼부었다.
어쨌든 나는 두 큰스님의 뜻을 받들어 제목을 바꾸려고 아주 로심초사해 동분서주하며 나름 무진 애를 쓰고 대안도 사유했으나, 끝내 출판부에서 난색을 고집해 체념하고, 결국 2쇄 발행 때 특별히 두 분 스님의 지적을 겸허히 적고 참회‧사죄하는 말씀을 덧붙이는데 그쳤다.
6) 관정 스님 6차 한국 순회법회(2000. 9.)와 『불광』 대담취재 통역
한편, 관정 스님을 뵈면서, 스님이 구술하신 극락세계유람기와 정토선 법문의 원본(중국어본)도 얻어 본 뒤, 한글 번역이 거칠고 오역이 더러 눈에 띄어, 내가 새로 번역하고픈 마음이 일었다.
선용 스님도 적극 권하기에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6월 28일 바로 정토선정의부터 한글로 옮기기 시작해서 7월 20일 초고를 마친 뒤, 일부러 백련사에 내려가 스님과 교정의견을 나누었다.
그런데 9월 20일 선용 스님한테 전화가 왔다.
9월 25일 관정 법사님이 다시 래한해서 한 달가량 순회법회를 가지실 예정이란다.
그래서 불광에 홍보요청을 드리라고 권하고, 이튿날(21일) 다시 서신을 적어 보냈다.
“서래(西來) 스님께
귀의삼보(皈依三寶)하옵고, 관정(寬淨) 법사님의 법회 주비(籌備)가 일체 순리 원만히 진행되길 기원합니다.
홍보선전에 필요하시면 불광 총무국장이나 특히 편집부장한테 직접 연락해 도움이나 자문을 요청하시면 괜찮을 듯싶습니다. 불광의 대외(업무)관계와 편집부장‧총무국장의 인간관계가 아주 폭넓고 영향력 있는 걸로 압니다.
서울 지역(길상사 등) 법회도 잘 주선되면 좋겠습니다.
특히 정토념불법문(淨土念佛法門)의 홍양(弘揚)이 중요한 만큼, 관정(寬淨) 법사님의 례우(禮遇), 특히 금전상의 사례비에 되도록 초연하게 자비(慈悲) 법보시(法布施) 차원에서 폭넓게 펼쳐지길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께 간절히 기도 념원(念願)합니다.
법회 일정이 잡히는 대로 순리 진행되어 지이다!
경진(庚辰) 팔월(八月) 입사(卄四)일 관음재일 2000.9.21.목
보적(寶積) 합장”
아울러 불광출판부에도 전화로 소식을 전하며 홍보를 권청하고 서신으로도 넌지시 재청했다.
“불광 편집부장님께
전법(傳法) 홍도(弘道)에 여념이 없으실 불광출판부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찬탄과 격려를 보내드립니다.
료범사훈(了凡四訓) 출판이 제가 기대한 것보다는 너무나 늦어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불광의 바쁜 사정을 대강은 알고 있지만, 늦어도 시월 첫째 주(7일 土)까지는 책이 나와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돈 될 전망이 별로 없어 보이더라도, 조금만 신경과 정성을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한테도 직접 경제적 보탬이 우선 당장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부처님과 정법(正法) 진리(眞理)의 자비광명(慈悲光明) 가피가 불광과 함께 저에게도 두루 미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법공양판 회향문 1쪽을 새로 보냅니다. 본래 여름 수련대회에 회향하려고 간단히 문안 작성한 게 거기에 있을 텐데, 가을 하늘 찬바람 이는 시절이 되어 세 사찰의 불사(佛事) 성원에 회향하기로 바꾸었습니다.
회향문도 함께 타자(漢文 그대로 살림)하여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0월 15일(日) 성륜사에서 금타 화상(金陀和尙) 비탑(碑塔) 제막식 및 만등불사가 성대히 치러질 예정입니다. 또 관정(寬淨) 법사님이 9월 25일 다시 래한(來韓)하시어 한 달가량 체류하며 순회 법회도 가지실 모양입니다. 아무쪼록 많은 불자들의 마음에 부처님 자비광명의 등불을 더욱 훤하게 밝힐 수승한 법연(法緣)이 되길 기원하오며, 혹시 불광출판부(특히 영업부)에도 참고가 될까 하여 미리 알려드립니다.
관정 법사님 정토선(淨土禪) 수행법 번역문과 건강장수의 보감: 성욕의 허(虛)와 실(失) 번역 원고를 조만간 E-mail로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전자(前者)는 불광지에 발췌 편집하여 련재하실 의향이 있는지, 한번 보시고 판단‧결정해 주십사고 참고자료로 보냅니다.
되도록 련재나 출판 여부를 일찍 결정‧통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태풍으로 말미암은 폭우 강풍의 피해가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영그는 알찬 결실의 기쁨에 자연스레 녹아들길 기원하며, 불광의 알찬 정진과 수확도 함께 기원합니다.
경진(庚辰) 중추(中秋) 관음재일[2000.9.21.] 보적(寶積) 합장”
서신을 보낸 그날 밤(22일 새벽) 꿈에는, 내가 어느 높은 루각(樓閣)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데, 훌륭한 분이 나타나 맞이해주면서 옆 분께 내 머리에 마정수기를 해주도록 분부하시는 모습을 보고, 내가 누군가에게 왜 정토념불법문을 수행,전파해야하는지 설하기도 하였다.
헌데, 5시쯤 깨었다가 다시 잠들어서는, 갑자기 험난한 시련이 닥쳤다. 누군가 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추궁、압박하기에 그를 피하기 위해 번지점프 하듯 허공에 몸을 날려 사뿐히 지상에 내렸는데, 또 다시 누가 무기를 들고 나를 공격해 뒤쫓는 모습을 몽견하였다.
9월 말쯤이나 10월 초인 듯하다.
과연 월간 불광에서 특별 취재하기로 결정하고, 나한테 통역을 위해 관정 스님이 머물고 계신 강릉 백운사로 함께 가자고 요청해 흔쾌히 응락했다.
남동화 편집부장이 윤명숙 사진기자와 업무출장으로 김포-강릉행 비행기로 가면서, 나도 공식 통역이니 표를 마련해주겠다고 청하는데, 나는 관정 스님 법회홍보를 권청한 인연도 있고, 또 직무가 아니라 도덕수행으로 스님을 뵈러가는 길인지라, 불광의 호의를 사양하고 따로 버스 편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이는 당시 내가 주고받은 서신 및 일기에 적힌 전화 통화내용을 바탕으로 적은 것이다.
한편, 기록에 없는 기억에 따르면, 내가 스님 일행을 동행하여 강릉 시내 은행서 관정 스님 법회 시주금을 두 시좌 스님 명의로 중국에 송금하는 일을 직접 목격한 듯한데, 강릉 백운사에 다녀와서 10월 4일 주지 스님한테 보낸 서신 내용에 따르면 관정 스님이 백운사에 열흘 가량 머물다 이때 이미 백운사를 떠나신 걸로 적혀있으니, 9월 25일 입국하자마자 바로 강릉으로 직행하신 게 틀림없다.
그러면 이때는 송금할 시주금이 아직 모이기 전일 테고, 어쩌면 지난번 석문사 법회 마치고 귀국 직전에 송금하러 은행에 들르실 때 내가 잠깐 동행하며 본 것이, 기억의 착오로 나타난 것일지 모르겠다.
당시 일기를 좀 더 자세히 적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관징과 보적의 맑은 대화(불광)
어쨌든 백운사 순례는 지금 회고해도 단순한 대담취재 통역 이상으로 매우 훌륭한 법연이었다.
아주 호젓이 고요한 깊은 산사에서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순수한 영아행 도인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라라하게 뵈올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큰 자비광명 가피가 또 어디 있으랴?
어수선한 법회 없이 가족처럼 도반같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서 뜨락을 거닐며 질문을 전하고 답변을 옮겨주면서, 나는 희유한 감로(甘露) 법유(法乳)를 흠뻑 들이마실 수 있었다. (대담 내용은 월간 불광2000년 11월호 제313호 참조. 거기에 스님과 내가 대담하는 사진이 실렸는데, 당시 분위기가 그대로 잘 나타난다.)
그날 저녁 례불이 끝나고 두 스님(한 분은 선용 스님)과 함께 나도 법당서 참선을 하였는데, 관정 스님은 방안에서 선정에 들어 우리를 관조하신 모양이었다
. 참선을 마치고 우리 셋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여 격려하는 말씀도 흔연히 해주셨다.
또 나는 뜻밖에도 스님의 천안통 안테나에 잡힌 인류 미래에 관한 청사진도 한 토막 엿들을 수 있었다. 공상과학영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인데, 내 기억에 따르면, 스님은 우리 인류가 로봇 발명을 계속 발전、진화시키다가, 어느 순간 로봇의 인공지능이 사람을 따라잡으며 인류와 한판 정면대결을 벌이게 되고, 마침내는 인류가 져서 로봇한테 지구의 주인자리를 내주는 운명이 될 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2015.6.10.월. 아침 KBS 제1라디오 경제세미나에 한국IBM 김원종 총괄이사장 강연을 들으니, 현재 사람의 좌뇌 기능을 인지컴퓨팅으로 로봇에 적용해 눈부시게 급속 발전하고 있으며, 여기에 우뇌 기능을 엣지 데이터로 결합시켜 발전시킨다는데, 과연 머지않은 미래에 관정 법사님 예견대로 로봇이 사람을 정복하고 인류는 지구를 내주고 떠나야 할 운명이 닥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한테만 당신의 스승이신 허운 화상께 물려받은 정법안장(正法眼藏) 원본도 보여주시고, 내가 7월 9일 꿈에 본 극락왕생 상징성을 적확히 일깨우는 법담도 해주셨다.
당시 법담을 록음했더라면 정말 훌륭한 기록이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거기서 나는 첨으로 자연산 새 송이를 맛보았다.
또 우선 스님이 나와 법담 중에 관정 스님과 청화 스님 회동을 주선해보라고 권하기에, 내가 그 자리서 성륜사에 전화 걸어 시자 스님께 뜻을 여쭈었으나 소극적 답변을 들었다.
하루 밤 묵은 뒤 좀 더 머물 수도 있으련만, 우선 스님이 나온다고 하기에 같이 따라나서기로 말을 해버려 그냥 떠나오는데, 오호라! 귓가에 청아한 념불소리가 조그맣게 들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관정 법사님 정토선정의에 적힌 ‘자성념불’ 소리가 귓가에 아련히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더 머물렀더라면 그 소리가 이어지며 더욱 커졌을 텐데, 아쉽게도 세속에 나오니 금방 소음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떠나올 때 주지 법안 스님이 나한테도 차비를 주셔서 어쩔 수없이 받았는데, 서울에 온 뒤 곧 불광출판부를 찾아가 가언록 발췌본 법공양을 스님께 보내드리도록 부탁하고, 10월4일 바로 스님께 감사 서신을 올렸다.
“백운사(白雲寺) 법안(法眼) 주지 스님께
관정(寬淨) 큰스님의 정토념불법문(淨土念佛法門)을 인연으로 대관령을 세 번째로 넘어 백운사를 처음 방문한 불초(不肖) 속인에게 지나치게 관대(寬大)
하고 후덕(厚德)하신 대접을 해주시어 송구스러울 정도로 감사합니다.
깊은 산속, 아늑하다 못해 때로는 적막하고 고즈넉할 도량에서 30년 이상 수도(修道)와 수덕(樹德) 생활을 묵묵히 해 오신 법력(法歷)이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괴롭고 힘든 수행은 극락왕생의 발판이 될 게 분명합니다.
천하에 어려운 인신(人身), 출가, 정토법문의 수승한 인연을 차례로 다 만나고 큰 선지식까지 만나셨으니, 이제 만년(晩年) 여생(餘生) 차분히 념불(念佛) 수행과 홍법(弘法)에 전심 진력하시어, 인연 있는 도반들과 다함께 극락왕생의 믿음과 발원을 실행 성취하시길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그동안 지나친 심려(心慮)와 고행으로 건강도 다소 쇠약해지신 듯하던데, 너무 세심하게 신경 쓰시지 말고 좀 무심(無心)하게 내려놓으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모든 걸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내맡기고 마음 편히 지내시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관정 법사님께서 열흘 가량 머무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만큼 떠나신 뒤 텅 빈 허전함의 여운도 크리라 생각됩니다. 고독은 인생과 수행자의 본질일진대, 로스님의 마음에 무슨 새삼스런 물결이 일기야 하겠습니까?
밥값도 제대로 못했을 불청객 속인에게 려비까지 주셔서, 제가 몹시 송구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불광출판부에 가서 그 돈으로 단박에 윤회를 끊는 가르침을 좀 보내 드리라고 부탁했습니다.
불광에서 특별히 감사한 마음으로 20권을 보내고, 공항까지 차 태워준 김윤수 거사님께 드리라고 화두 놓고 염불하세 1권과 새로 나온 료범사훈(了凡四訓) 2권(주지 스님 1권, 김윤수 거사님 1권)을 함께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청련화 보살님께도 작은 책 1권 드리고, 감사의 말씀 전해 주십시오,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말씨와 분위기에서 청정한 념불 수행에 정진하시길 기원합니다.
서울 보적 거사(寶積居士) 공경합장(恭敬合掌)”
한편 강릉 백운사에서 돌아온 뒤 다시 관정 스님 법회를 찾아가며 지난 9월22일 꿈에 본 장면이 현실로 나타났다. 정확한 날짜는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10월 13일 당시 경찰대 교수이던 정기웅 거사와 함께 청화 스님을 친견하러 성륜사 내려가서 15일 금타 화상 탑비 제막식까지 머물렀으니, 10월 5일에서 12일 사이일 걸로 여겨진다.
먼저 우이동 조그만 가정집 같은 절에 유난히 비좁은 느낌의 방안에서 마정수기를 베푸시는 법회에 동참하였는데, 특히 스님께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꼬고 뒤집어서 우리는 도저히 흉내 내거나 따라할 수도 없는 기묘하고 특이한 밀교(密敎) 수인(手印)을 지어 보여주신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지금 같았으면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록화해서 재현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튿날인지 이어 대전 시내 2~3층 양옥 도량에서 마정수기 법회를 하는 데까지 따라가 잇따라 마정수기를 받았다.
근데 그 뒤에 꿈속에 보았던 험난한 마장이 드디어 나타났다.
굴골사에선가 승가무술인지 선무술(禪武術)인지 한다는 름름한 무인 거사가 나를 한쪽으로 불러내더니, 자기가 관정 법사님의 법력을 관찰하기 위해 몇 군데 죽 따라다니면서 유심히 관찰했는데, 자기 눈에는 특별한 법이 없어 보인다고 잘라 말하면서, 내가 단정치도 못한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우이동서부터 마정수기 받으러 따라다니는 꼬락서니가 영판 눈에 거슬려 단단히 혼내주려고 별렀다며, 험상궂은 낯빛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한참 엄포 속에 훈계를 듣고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물러나왔다.
그때 나는 관정 스님의 현신설법 무대에서 내 배역이 다 끝났으며, 바로 퇴장할 때라고 직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마정수기’라는 선법(善法)에 집착하는 내 마음을 불보살님께서 경책하시고자 보낸 금강력사한테 금강저(金剛杵)로 몇 방 얻어맞은 듯한 느낌인데, 도고마성(道高魔盛)을 실감케 하는 현신설법이었던 듯하다.
우이동에선지 대전에선지 분명하지 않으나, 내가 배역을 완성하고 퇴장할 무렵, 당시 통역으로 스님을 수행하던 조선족 강(姜) 거사님이 나 같은 불자한테 줘야한다면서, 내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님께 특별히 청해 “南無阿彌陀佛” 친필 휘호와 관세음보살 그림 한 폭씩을 얻어 기념으로 주어, 감사한 마음으로 표구해 서울 자친 댁에 모시고 있다.
어머님 댁에 모시고 예배‧공양하는 관정 법사님 휘호와 관세음보살도
7) 청화 스님과 관정 스님의 회통합일
10월 9일 한글날 료범사훈(了凡四訓)의 한글번역판 운명을 뛰어넘는 길이 불광출판부에서 ‘법공양’ 시리즈로 나와 성륜사와 변산 실상사 등에 널리 배포했다.
10월 13일엔 정기웅 교수와 성륜사 내려가서 예약도 없이 해거름에 청화 스님 뵙겠다고 한바탕 소동과 우여곡절(주지 스님과 법거량?)을 치른 끝에, 큰스님께서 자비롭게 맞아주셔서 한참 친견 법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내가 며칠 전 백운사에서 전화로 관정 스님과 청화 스님의 회동을 권청한 일을 념두에 두신 듯, 당신께서 먼저 허운(虛雲) 화상과 관정 스님을 또 언급하셨다.
이에 내가 결례를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자, 청화 스님께서는 서너 차례 이어진 귀찮은 성가심에도 평정(平靜)과 자비(慈悲)를 놓지 않고 당신의 뜻을 완곡한 어조로 간명히 말씀하셔서, 더 이상 말이나 뜻조차 필요 없음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그리고 금타 화상 탑비제막 및 만등불사 법회에 동참하기 위해 이틀 밤을 성륜사에서 묵었는데, 14일 새벽꿈엔 관정 스님을 또 뵈었다.
지난번 선용 스님과 함께 친견한 때인지 이번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청화 스님 법담 중에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내용은, 극락정토의 념불방법이 어떻게 관정 스님의 념불가락(곡조) 하나로 정해져 있겠는가라는 지적과, 자칫 혹세무민할 우려가 있을 수 있다고 간곡히 타이르신 일깨움이다.
물론 나는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두 분 법문의 시비나 법력의 고하우열을 가리거나 따지려고 한 적은 없다.
그냥 그런가 보다고 들었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저 두 분 말씀과 경지 모두, 서로 어긋나거나 해치지 않고 함께 온전히 옳을 것이라고 믿는다.
부처님의 도(道)와 법(法)은 상대 현상세계 잣대로 시비선악을 분별하고 재단하는 모순대립에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는 초월적 절대 경지이기 때문이다. 사구(四句)의 말장난이나 시비선악 희론(戱論)에 빠지면 이미 궁극에 절대 진리 제1의제(義諦)가 아니지 않은가?
헌데, 불보살님의 가피인지, 참 희한한 법연(法緣)이 펼쳐졌다.
11월 초순 동산반야회 초청 청화 스님 법회 소식을 전하려고 시립대 김창민 교수한테 전화했더니, 김재광이 솔과학에서 ‘청화 스님 외’ 명의로 편집한 아미타불 수행법책이 나왔다고 알려왔다.
이에 ‘여시아문’ 책방에 가서 확인하니, 정가 7,500원에 11월 15일 자로 조금 앞당겨 펴냈는데, 맨 앞에 청화 스님 정토삼부경 해제를 싣고, 중간에 념불요문을 실은 다음, 관정 법사 정토선정의와 극락세계유람기 일부를 싣고, 마지막에 금타 화상 「보리방편문」과 「삼신일불 도표」 및 「극락왕생 발원문」을 실었다.
정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참으로 기묘한 시절인연이었다.
성륜사 본연 스님한테 전화해 소식 전하고 여쭈니, 사전 동의 없이 임의 출판한 뒤 법공양으로 몇 권 보내와서 주지 스님이 성질을 내셨는데, 한번 낸 거 어찌하겠냐고 자비(慈悲)로 용인했다고 한다.
백련사 선용 스님한테 전화 거니 역시 비슷한 어조로 말하면서, 관정 스님도 판권독점을 원치 않고 인연 따라 널리 펼쳐지길 바라셨으니, 이제 어쩌겠냐고 묵인하는 눈치다.
그때 나는 두 스님의 정토법문을 합친 편집본 발행이, 나를 비롯한 많은 불자들의 꾸준한 념원에 따라 불보살님의 가피로 나타난 감응일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두 분 스님이 미욱한 중생들의 분별망상을 저어하여 유형세계에서 몸으로 직접 만나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무형법계에서는 함께 회동하여 정토념불법문의 홍양(弘揚) 포교(布敎)를 위해 마음과 뜻이 통한 결과로 느껴졌다.
화신(化身)의 상견회동이 끝내 무산(霧散)한 뒤에, 법신(法身)의 회통(會通) 합일을 알리는 화현(化現)으로 찬란한 무지개가 뜬 것이었으리라!
8) 번역 물의와 마지막 만남
한편, 선용 스님은 그래서라도 얼른 정확한 번역이 나와야 한다며, 나한테 극락세계유람기 미번역 부분을 옮겨달라고 재삼 요청해왔다.
허나 관정 스님 법회를 대여섯 차례 따라다니며 동참하면서, 도가 높은 곳에 마장도 높아짐을 눈과 맘으로 직접 실감한지라, 시자 스님 사이에 팽팽히 긴장감 도는 줄다리기 위에서 외줄타기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시 내 일기에 따르면, 그때 통역수행을 한 대주 스님과 나는 선용 스님이 보는 앞에서 번역 분담을 언약하였으며, 내 몫인 정토선정의는 이미 초역을 마쳐 선용 스님과 교정토론까지 해 넘긴 상태였다.
게다가 출판부 측이 불교서적은 필자가 재가거사보다는 스님일 때 훨씬 더 잘 나간다는 이유로, 스님과 공역(共譯) 명의로 내기를 강력히 원했다.
정직과 정명(正名)을 중시하는 수행자의 본분에서 매우 난감한 문제였다.
관정 스님께 한글번역본의 공식출판에 대해 여쭙자, 역시 인광 대사처럼 불법(佛法)은 영리나 독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특히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널리 열려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확실히 말씀하셨던 사실을 상기하며, 나는 그 뜻을 선용 스님과 출판부에 전하고 공식출판 명의에서 빠지기로 했다. 세속법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번역자 명의(명예) 하나를 위해서, 아직 저자가 살아계신데 저자의 명백한 의사에 어긋나는 출판을 감행하여 저작권법을 위반하고 불법(佛法)까지 어길 만용(蠻勇)의 엄두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미 번역한 정토선정의 원고는 선용 스님한테 넘겨주며 알아서 하시라고 맡겼다.
극락세계유람기는 한동안 교수공채 응모 준비로 바빠 좀 쉬다가, 12월 3일 번역을 시작해 2001년 1월5일 초고를 일단 마쳤는데, 12월 27일엔 한해 인연을 결산하며 새해축하를 겸하여, 선용 스님께 장문에 서신으로 질직심(質直心)의 수행도량을 진솔히 적어 올렸다.
언론의 영향력이 막강함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맙게도 불광에 대담 기사가 나간 덕택에 다른 불교신문잡지도 잇따라 보도하면서, 불보살님의 가피로 2001년 이후 관정 스님은 렬화 같은 초청에 호응하여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으로 로구(老軀)를 이끌고 래한을 거듭하여, 전국을 누비며 순회법회를 절찬(絶讚)리에 성황리에 여신 모양이다.
헌데 아쉽고도 안타깝게도 나는 2001년 3월 1일 전남대 전임강사에 부임한 뒤로는, 교학 및 연구 업무가 바빠져 내 배역을 도저히 찾지 못하고, 4월 관정 스님 래한 때는 소식도 못 들어 뵙지도 못하였다.
그나마 그해 가을 래한 때는, 청주 강재원 선생이 10월 15일(월)에 ‘지금 관정 법사님이 강진 백련사로 가신다.’고 전화로 연락해 왔다.
강 선생은 내 책의 첫 애독자이시다.
나는 일찍이 1992년에 어떻게 살 것인가-인생지남(人生指南)을 써서 자비로 출판해 법공양으로 돌렸는데, 1997년에는 여기에 료범사훈 번역본을 합쳐 발행한 법공양판을 전국에 대학、고등학교 및 국공립 도서관에 널리 배포 기증했었다.
강 선생이 그 책을 학교 도서관서 보고 연락해와, 나와 처음으로 애독자 법연을 맺은 것이다.
그 뒤 내가 가언록을 번역해 불광에 싣기 시작하면서 강 선생한테 불광정기구독을 권청했는데, 강 선생이 구독하다가 관정 법사님 대담 취재 기사를 보고 석문사 법회에 참석해 귀의하고 법명까지 받았으며, 그 부인은 중화인민공화국에 관정 법사 도량까지 다녀오기도 했단다.
그런 강 선생이 나한테 관정 법사님 래한 순회 소식을 제때 전해주어, 나는 바로 전주 승정(勝淨) 거사한테 연락했더니, 오후에 보살과 함께 내려와 여생(如生) 거사랑 동행해 백련사로 갔다.
먼저 저녁공양하고 기다려, 관정 법사님이 오셔서 잠시 친견하고 곧바로 귀가했다.
사흘 뒤 18일 새벽같이 나 혼자 버스를 타고 다시 백련사를 찾아갔으나, 관정 스님은 이미 떠나시고, 관정 스님 법문집 번역과 관련해 선용 스님 마음에 서린 서운함을 풀어드리러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오후 귀교했으니, 그때가 이생에서 관정 스님과 마지막 만남이었나 보다.
관정 스님께서 한국에 와서 현실설법을 펼친 장장 16막 100여장(場)의 대하 연극에서, 나는 불과 2막 5장에 잠깐 조역으로 출연하였고, 막간에 중요한 대담 및 인사를 1번씩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배역은 참으로 귀중하고 보람찬 법연이었으며, 좀 더 진지하게 혼신(魂神)의 정렬을 다 바치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여운을 드리운다.
그때는 스님과 함께 너무도 천진스런 동심(童心) 미소로 마음과 말씀을 나누면서, 정작 스님이 백련사 첫 만남 때 선뜻 내주신 사진이며, 허운 화상한테 직접 전해 받으신 ‘조동종(동운종)’ 정법안장을 강릉 백운사 사석에서 마치 귀중한 보물을 꺼내듯 보여주신 것도 그냥 무심히 받고 보아 넘겼었다.
헌데, 81 도인행(道人行) 가운데 으뜸이라는 영아행(嬰兒行)을 몸소 보여주신 스님의 뜻을 이제사 어렴풋이나마 조금은 느낄 것 같다.
아마도 스님께서 이러한 시절인연을 내다보고 짐짓 무심히 보여주시지 않았을까?!
그 뒤로 관정 스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간접 소식은 한두 번 더 들렸다.
월간 불광 1999년 8월호 ‘선지식 탐방’란에 소개한 정읍 석탄사 청소 스님이 매일 ‘阿彌陀佛’ 10만독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흠모하여, 2000년 3월 5일 서신을 올린 적이 있었다.
교수가 된 뒤 여생 거사와 함께 직접 찾아뵙자, 청소 스님이 (대전 관음암 법회에 참석해) 관정 스님과 상견해 필담을 나누셨는데, 관정 스님이 청소 스님의 법력이 더 높다고 존경、찬탄하셨다는 말씀을 하신 걸로 기억한다. 당사자 일방한테 전해 듣고, 구체 상황맥락이나 필담 문자를 직접 보지 못했으니, 관정 스님의 본의가 어떠했는지는 잘 알지 못하겠다.
다만, 료범사훈(了凡四訓) 넷째 편 ‘겸덕(謙德)의 효험’에도 자상히 나오듯이, 고래로 중국 고승대덕이나 홍유(鴻儒) 명인(名人)들은 겸손이 일상생활 말과 글에 습관으로 배어 저절로 나오는지라, 초면에 외교상 언사일 수도 있으나, 청소 스님의 수행이 높다고 하니 진실한 담론일지도 모르겠다.
[관정 스님 일대기에도 자주 나오듯이, 관정 스님은 친필 휘호나 서신에서 제자들한테도 ‘현도(賢徒)’라고 존칭하고 자신은 ‘우사(愚師)’라고 겸칭하심을 알 수 있다.]
그 뒤로 종로3가 아미타사나 종로5가 위강원 한의원에 들러 법담을 나누던 인연인지(2003년), 아니면 아미타사서 개설한 아미타정토 불교대학 강의에 초청받은 인연이지(2006년), 관정 스님이 신촌 봉원사 만봉 스님을 례방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을까?
생각나고 말도 나온 김에 전병롱 거사와 함께 단 둘이 택시를 타고 만봉 스님을 찾아뵙고, 탱화 작업 현장도 둘러보며 법담을 들었는데, 관정 스님이 만봉 스님한테 오래 사시겠다고 축수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듯하다.
9) 참으로 특별하고 미묘한 시절인연
참으로 특별하고 미묘한 시절인연이었다.
요즘 서양 심리학에서도 ‘동시성의 원리’를 말하기도 하던데, 불교에서 말하는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의 소식일 게다.
1996년 두 차례에 걸쳐 모교 교수 공채에 연거푸 실패한 충격으로, 1997년 새해 벽두에 나는 그때까지 모은 책으로 금자탑을 쌓고 올라가 소신공양하려 했는데, 정토삼부경을 번역하신 충담 화상의 소신공양 소식이 홀연히 들려왔다.
이에 수행자의 일념이 곧장 우주에 공명을 일으키는 무서운 감응을 절감하고, 이내 망상을 놓고 정신을 차려 돌파구 인연을 찾다가 인광대사가언록을 펼쳐 읽어 정토념불법문을 알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관정 법사님이 정토법문을 펼치려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그해였다!
이듬해 1998년 가언록을 번역해 연재할 무렵 동산대학 념불만일회가 결성되고, 관정 법사님은 한국에 정토선을 펼치려 세 번째 래방하셨다.
그리고 가언록이 막 나올 무렵, 2000년 6월6일에는 청계산 정토사에서 청화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고 정토학회와 함께 만일념불 결사법회를 열어 나도 동참하였고, 그 직전(5월 하순)에 다시 래한한 관정 스님을 처음 친견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냉대 받던 청화 스님의 념불선 법문도 함께 떨치길 바라는 마음에서 스님께 법문을 청해 권두법문(서문)으로 실었는데, 과연 그 뒤로 청화 스님의 수행도력과 법문이 점차 인정받게 된 듯하여 적잖은 기쁨과 보람이 되었다.
또한 그러한 여러 법연이 한데 어우러져, 화두 놓고 염불하세와 발췌본 단박에 윤회를 끊는 가르침은 운명을 뛰어넘는 길(료범사훈)과 함께 한동안 잘 나가는 불교서적(베스트셀러)이 되었고, 지금도 꾸준히 애호 받는다(스테디셀러)고 한다.
한편, 청화 스님과 관정 스님의 회동이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인연은, 당시에 미욱한 나로서는 아쉬움이 컸지만, 이제 사연을 정리하는 마당에 곰곰이 사유해보니 충분히 그럴 만한 리유가 있었던 듯하다.
불경에 보면 한 불국토마다 한 부처님이 주석하시는데, 서로 상대방 불국토를 거울에 비친 듯 가까이 들여다보거나 서로 시자를 보내 문안하시긴 해도, 두 분이 몸소 찾아가 상견하지는 않는다는 평상적인 비범한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그렇다! 유가에서도 하늘에 두 해가 없고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없으며 한 집에 두 아버지가 없다고 했듯이, 불국토마다 바로 한 부처님만 계시는 유일무이의 무상(無上) 존재성 때문이리라!
그것은 부처님마다 다 같이 진리(道法)의 본체를 원만히 깨달아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셨지만, 당신이 화현하신 국토와 중생들 인연에 따라 몸(佛身)의 크기나 수명 등 정보(正報)와 온갖 주변 환경인 의보(依報)가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을 텐데, 만약 두 부처님이 함께 나란히 만나신다면, 지견이 얕고 철없는 제자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모습만 보고서, 알게 모르게 두 부처님을 나란히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는 분별심(중생심)을 일으킬 수 있겠다.
이는 실로 부처님께 대한 커다란 불경이요, 수행 과정에 있는 보살이나 성문、중생 자신에게는 틀림없이 막대한 손해와 업장이 될 것이다!
[실제로 경전에 보면 장래 하생 미륵부처님의 몸이 석가부처님보다 훨씬 커서 대비되는 장면에서, 특별히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일깨움이 나온다.]
그러니 두 스님이 직접 만나지 않은 인연은, 정토념불법문의 순수한 온전함과 장래 홍포를 위해서 참으로 다행인 셈이다.
하마터면 두 분 다 상처를 입고 정토법문도 불신과 비방을 살 위험에 빠질 뻔했던가?
오히려 안도에 한숨을 내쉬어야 할 판이다. 초지보살조차 2지보살이 어떻게 발을 디디는지도 모른다고 정녕 일깨운 경전 말씀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구나! 청화스님의 자비로운 인내와 포용에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참회와 찬탄과 감사를 바친다.
하여 현재와 미래에 극락정토 왕생을 발원하며 념불하는 수행자들은 이점을 특히 류념하여, 정토법문의 큰 틀(大同)에 공명동조하면서 서로 수희찬탄하고 격려、부축할 뿐이며, 혹시라도 개별 수행방법상의 조그만 차이에 시비고하를 따져 서로 폄하、비난、비방하거나 옥신각신 흠집 내는 어리석음은 결코 범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나아가 불교 전체로도 화두선이니 념불이니 그 어떤 수행법문도 마찬가지로 서로 같은 큰 뿌리를 공감하면서, 자잘한 구체 방법론에 차이는 천차만별의 중생 근기에 따른 처방약으로 리해하고,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관용과 배려에 힘쓰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불교 승가의 명실상부한 대동 ‘화합’ 정신일 테고, 또한 ‘관정(寬淨)’ 스님의 ‘너그럽고 맑은 마음’이자, ‘청화(淸華)’ 스님의 ‘세계는 맑은 꽃 한 송이’의 상징이 아닐까?
당신께서 한국에 인연 있는 불자들을 제도하러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듯이, 관정 스님은 참으로 당신의 고국인 중화인민공화국(中共)이나 중화민국(대만)、홍콩、싱가폴、미국 등, 그 어느 곳에서보다 우리나라에서 정토념불법문 전파에 마지막 생명의 정렬과 숨결까지 다 바치셨단다.
이제 청화 스님도 관정 스님도 극락정토에 돌아가시고, 보정(普淨) 거사님이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관정 스님의 저술집과 일대기를 펴내면서, 스님이 펼친 법연들을 찾아다니며 수고와 애로를 마다 않더니, 마침내 보잘것없는 나까지 찾아와 연유를 설명하며 인연담을 정리해달라고 정중히 권청해왔다.
참으로 미묘하고 신비스런 시절인연이다!
일찍이 공자도 “덕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有德者, 必有隣.)”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관정 법사님은 기라성 같은 고승대덕이심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든다.
보정 거사 같은 ‘다크호스’가 나타나 생전 발자취와 숨결을 샅샅이 찾아 귀중한 력사를 기록으로 정리하다니 말이다!
그 집념과 정렬에 탄복하면서, 이에 꿈결 같이 흘러가버린 지난 15년 전의 옛 기억을 더듬고 일기와 서신 기록을 찾아, 법의 력사철학을 전공하는 학자이자 수행자로서 력사를 기록하는 마음가짐으로 최대한 정직한 사실을 정중하게 적으려고 애썼다.
보정 거사의 정성에 감동하여 옛 자료를 찾아 정리하면서, 나도 덩달아 가피를 입었는지, 참으로 오랜만에 관정 스님을 몽견하였다.
2015년 올해 3월 27일 금욜 보정 거사의 전화를 받고 29일부터 함께 2박3일간 관정 스님의 발자취와 체취를 찾아 순례한 뒤, 관정 스님과 만났던 법연담(法緣談)을 기초하면서 관련 일기와 자료를 읽고 수첩도 찾으며, 정토선정의(淨土禪精義) 파일이 없어 연구보조원한테 초고를 타자하라고 부탁했다.
근데 딱 2주 만인 4월 10일 금욜 새벽꿈에 관정(寬淨) 스님이 참 오랜만에 정말 현현(顯現)하신 것이다.
무슨 큰 고급 한식(韓食)집 같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 법회를 갖는다고 나도 참석했다.
우선 남자 거사들만 따로 안쪽 차분한 방에 들어가 마정수기(摩頂授記)를 받는다는 듯. 7~10명가량 소수만 방안에 들어가자 관정 스님이 나타나셨는데, 선 채로 두 손을 크게 벌려 허공에 자유자재로 휘저으며 중국어로 ‘소우스’라고 말씀하시길래, 꿈속에서 무슨 말인지 생각해보니 곧 ‘수세(手勢)’로 느껴져 ‘수인(手印)’의 뜻으로 감득했다.
근데 바로 옆에서 내 아우 거사를 스님이 데리고 가까이 와서 손으로 몸을 가벼이 쓰다듬으며, ‘마정’은 아닌데 특별히 치유 축복을 해주시는 모습이었다.
그밖에는 별 말씀 없이, 나와는 눈길도 직접 마주치지 않은 듯하다. 그 무렵 법학개론 강의안을 출력하다가 usb에 바이러스가 옮아 치료하느라 한참 애썼지만, 아마도 관정 스님 법연담을 기초하는 인연으로 한바탕 도고마성(道高魔盛)의 헤살로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나왔다.
관정 스님이 꿈에 나타나 아우한테 치유에 축복을 해주신 자비에 감사할 따름이다!
꿈결 같고 쏜살같은 인생 이제 얼마나 남았으랴?
더 늦기 전에 얼른 자성을 돌아보고 본래회포를 잊지 말라고 일깨우시느라, 불보살님과 극락에 돌아가신 관정 스님께서 보정 거사를 통해 희유한 불법(佛法)의 인연을 펼치시는 게 틀림없다.
수승한 정토념불법문을 만나게 이끌어주신 불보살님과 인광 대사、청화 스님、관정 스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공경、찬탄을 바치며, 관정 스님 수행비서나 통역으로 시봉하며 법회를 열어 나를 비롯한 수많은 불자들이 감로법유(甘露法乳)를 마시게끔 법연 자리를 펼쳐주신 선용、대주 스님 및 강 거사님을 비롯한 관계자 제위께도 깊이 감사드리고, 앞으로 인연 있는 불자들께 조그만 참고와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동안 적어둔 일기와 서신, 비망록을 바탕으로 기억을 되살려 대강 기초한 초고를 부처님 오신 날에 때맞춰 마무리 손질한다. (2015.8.6.목.15:50.보충; 9.10.목.최종교정)
원왕생극락정토 나모아미따부처님! 나모관세음보살님! 나모대세지보살님!
나모청정대해중보살마하살님! 나모마하반야바라밀다!
보적(寶積) 김지수 공경합장 _()_
추신(追伸) : 2015.8.19.~9.7.에 걸쳐 관정 스님 일대기-極樂과 淨土禪 편집본을 글쓴이의 권청에 따라 최종 교정 차 정독하면서, 그간 잘 모르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정토선 념불법문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신 관정 스님의 보살행 진면목을 좀 더 절실히 느끼게 되어, 한편으론 새삼 기뻐 감탄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나 자신 업장 두텁고 박복한 인연에 안타까운 탄식을 금하지 못해 참회의 눈물이 글썽거립니다.
그저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최고인양 여겨, 그토록 보기 드문 선지식과 만나기 어려운 시절인연을 그냥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범상히 보아 넘기고 말았으니, 언제 어디서 또 그러한 훌륭한 법연(法緣)을 만날 수 있을는지요?
당시 번역출판 문제만 잘 풀렸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텐데, 내 원칙과 고집이 관정 스님을 둘러싼 인연 및 법연에 오래토록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친 듯하여 특히 미안하고 아쉬운 여운이 진하게 감돕니다. “도가 높으면 마장도 높다.(道高魔盛)”는데, 그 당시 한꺼번에 몰아닥친 온갖 마장들을 헤쳐 나가지 못하고 나약(懦弱)한 정보(正報)와 박복한 의보(依報)를 탓하며 현실에 안주해버린 나 자신의 업장이자 허물일 뿐입니다.
기독교 성서에도 “선지자(先知者: 善知識)는 제 시대 제 고향에선 대접받지 못한다.”는 명언이 있는데, 참으로 어렵고 힘든 때와 곳에 태어나 고난의 보살행으로 중생계에 널리 회향하고 온 법계를 장엄하신, 극락정토 연꽃 같은 스님의 마음에 깊은 존경과 찬탄을 바칩니다. 극락정토 왕생하신 관정 법사님께서 머지않아 사바예토에 중생을 제도하러-특히 중국 본토에 정토선 념불법문을 펼치러- 다시 돌아오시리라 믿으며, 앞으로 인연 따라 정토선(념불선) 법문을 널리 펴는 데 한 마음 보태고자 합니다.
2015.9.9.수.
극락 다녀온 관정스님과 극락 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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