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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련(등인, 망경대산 자연명상원 원장)
1) 관정 법사님과의 만남
나무아미타불!
2000년 6월 13일 경기도 분당 약사암에서 큰스님을 처음 뵙고 받은 인상이다.
등원 스님이 열흘 전 경주 백운암에 가서 중국에서 오신 스님을 친견했는데, 극락을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큰스님을 한 번 내가 직접 뵙고 싶으니 안내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여 찾아갔던 것이 첫 만남이었다.
이와 같은 나의 인상은 그 뒤 입적하실 때까지 여러 차례 만나고 가깝게 접하면서 늘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평소 사람들 만날 때 보면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 같고, 격의가 없지만 막상 법석에 앉으시면 전혀 달라져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추시고, 오래 수하여 낡고 해진 가사장삼도 일단 법석에 서면 법의에서 광채가 발산되어 드높은 수행력이 그대로 드러나신다.
참으로 법도와 위의가 몸에 자연스레 배이신 분이다.
다음해인 2001년 가을 큰스님께서 강원도 영월군 망경대산 높은 곳에 위치한 오지에 있는 우리들의 은둔 수행처를 찾아오셨다.
당시 5~6명이 조용한 곳을 찾아 수행터를 조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큰스님 오실 때는 마침 그곳에 선방으로 쓰일 공간인 다용도 수행공간을 완성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큰스님을 바로 임법당에 딸린 방사에 모셨다. 우리가 수행시설을 마련하여 맞이하는 첫 손님이 바로 큰스님이었다.
큰스님을 모시고 온 등원 스님이 나를 소개했다.
“새로 짓는 절의 창건주입니다.”
나는 큰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그러자 절을 한 번씩 올릴 때마다 큰스님은 가르침을 내려주셨다.
특히 덕담 가운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속히 서두르십시오.” 라는 말씀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을 뒤흔들었다.
‘그렇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부터 내 마음 속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큰스님의 가르침이 깊이 자리 잡았다.
큰스님을 모시면서 지금까지 해오던 수행법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수행이란 당연히 참선이었다.
그런데 일생을 참선수행을 해오시던 관정 큰스님이 극락을 다녀오신 뒤 ‘정토선’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였다.
2) 화두참구와 염불의 회통
나는 젊어서부터 참선과 명상을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작은 사무실을 내서 작품 생활을 시작하였다.
나는 늘 꿈에서 오색으로 빛나는 연꽃을 보았는데, 바로 꿈에서 본 연꽃을 만들어 부처님 전에 올리는 일이었다.
주거지 가까이 있는 절에 새벽기도를 나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 절에서 기도하는 스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그런 식의 기도보다는 전생부터 하던 참선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나는 처음에는 ‘화두’가 무엇인지도 몰라 불(火)을 머리(頭)에 이는 것인 줄 알았다.
스님의 간곡한 설득 때문에 어느 날 나는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았다. 스님은 나에게 참으로 긴 화두를 주셨다.
“깊고 깊이 잠들어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거나 듣지도 못할 때 내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 긴 화두를 자꾸 잊어버려 그때마다 스님께 묻고 또 묻고 묻기를 거듭하였다.
나는 우선 그 긴 화두를 외우는 데 신경을 썼고 어쩌다 밤중에도 잊어버리면 스님께 전화로 물었다. 그때마다 친절히 알려주셨다.
이렇게 묻고 답하여 완전히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몇 달이나 결렸다.
나는 하루 종일 온통 화두만 생각했다. 길을 가다가 앞사람 발뒤꿈치를 보는 순간 화두는 앞사람 발뒤꿈치에 치어서 도망가 버려 이쪽저쪽 찾다가보면 어느새 입안에 들어와 있곤 하였다. 이처럼 들락날락하던 화두가 한 덩어리가 되는데 몇 개월이 걸렸다.
그 뒤엔 공 같은 화두덩어리가 내 몸에서 드나드는 모습이 환하게 보인다.
나를 가르쳤던 스님은 일절 책을 보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다른 화두가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주인공이 어디에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고 하였던 것이 지금 보면 의심 덩어리였던 것이다.
그 덩어리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나는 얼마나 화두를 쫓아다녔는지 모른다.
다만 끊임없이 쫓아다니며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당시 교통수단이 전철이었는데 한 번 화두에 몰입하면 지하철 종점까지 갔다 다시 다른 쪽 끝까지 가는 일이 허다했고, 어찌하여 내려서도 집을 찾아가는 방향조차 찾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화두가 확실히 들려지기 시작하니 그것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하였고, 내 삶 전체에 대해 저절로 진참회가 시작되고 나라고 했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화두가 파고 들어가면 업이 드러나며 저절로 참회되고, 업에 대한 원인 또한 알게 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렇게 하나가 된 화두는 나의 모든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할 때도, 남과 이야기 할 때도 온종일 화두와 함께 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뭉게구름처럼 뼈 속을 타고 돌고 돌아 손바닥으로 나간다.
어떤 때는 얼굴의 피부 껍데기를 벗겨 내는 것 같고, 머릿속에는 가는 실 같은 것이 이리저리 엉켜있어 작은 개미가 다 뚫어 주는 것 같고, 회음부 밑은 시원한 바람이 받쳐주면서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고, 손짓발짓 몸놀림이 몸속에서 나오는 리듬대로 움직이며 말의 속도도 또한 그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님께서 나타나 다짜고짜 내 입속으로 깊이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깨끗한 척해도 찾으면 나온다.”
입으로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찾으시던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님께서는 마침내 발끝까지 찾아내려가 온힘을 다해 끄집어내기 시작하였다.
몸의 끝은 구렁이 같은데 몸통은 용 울음소리가 우렛소리로 ‘크르렁’ 대며 그 반동이 굉장하였다.
결국 두 보살님께서는 나오지 않으려는 것을 잡아 빼어 칼로 베어버린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고 나는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시체처럼 벌렁 넘어졌다 일어났다 하고 속에는 무엇인가 가득차서 위로 밀고 올라왔다.
머리 뚜껑이 터져버릴 것처럼 쉼 없이 밀고 올라와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상태가 3일정도 지속되었다.
‘이게 터져버리면 어떡하나?’
내심 불안하고 염려되었다.
하지만 계속 밀고 올라와 마침내 밀고 올라오던 것이 ‘뻥-’하고 터져 버리면서 내 입에서 ‘관세음보살’이란 말이 천지를 진동하는 듯 큰 우렛소리로 튀어나왔다. 큰 압력으로 밀려올라오는 것을 화두가 막고 있었는데 세상이 터져버리듯 “관세음보살”이 뻥- 터지면서 어느새 화두도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 순간 세상이 다 터져버린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남 없이 그대로였다.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편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나의 몸도 변화가 왔다.
몸이 넘어졌다 일어나며 뒤집어지는 일도 없어졌으며, 동시에 하단전에 모여 있던 것들이 온 몸으로 다 퍼져 하나가 되었다.
세상에 대한 일도 부딪히면 저절로 이치를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 속에 들어있던 아상(업)이 그렇게 컸던 것이다.
나는 처음에 관정 큰스님을 만나고도 한참 동안 염불을 하지 않았다. 그저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2002년 이후 관정 큰스님이 수차례 한국에 오셨는데, 오실 때마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우리 여래선원에 오셔서 머무셨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여래선원으로 큰스님을 친견하러 오셨는데, 관정 스님은 친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염불을 가르치실 때 늘 목탁 대신 손으로 무릎을 치며 ‘남모 아미 따~포’라고 크고 긴 소리로 선창을 하신다.
이런 염불이 계속되는 어느 날 무심코 보니 어느 사이에 내 하단전에는 관정 스님의 염불소리가 들어와 있었다. 염불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마치 관정 스님 전체가 하단전에 들어와 염불을 하고 있었다.
몸속에서 염불하는 자리를 관하며 계속 참구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 그 염불이 무성음으로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 소리는 나지 않는데, 염불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 수행법의 일부 과정과 관정 큰스님을 만나면서 생긴 변화에 대하여 대충 표현해 보았지만 어디까지나 표현의 한계가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지금은 언제든지 의도에 따라 행주좌와 어묵동정은 압축되어 볼록렌즈에 빛이 모아지듯 결국 한 점으로 모아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호흡도 또한 미세해진다. 모든 것이 한 점으로 귀착되어 시간이 가는지, 아픈지, 어떤 것인지 모든 것을 떠나지만 그 경계를 해제하면 현실이 된다.
정토선 정의의 무념(無念)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 일념(一念)의 단계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3) 관정 큰스님으로부터 수계
2002년 여름 큰스님이 오시게 되어 인천공항에 마중 나갔다.
한 달 전 중국에 간 한국 대표단이 ‘음력 8월 15일 한국에서 큰 법회가 있으니 참석해 달라고 초청해서 왔다’고 하셨는데 공항에서 보여주신 메모로 그 즉시 초청하였다는 한국사찰 연락처에 알아 본 바 그런 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국 불자들의 중국 방문 시 현지에서 통역의 오해에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갑자기 한국에 오신 큰스님을 망경산사에 모셨지만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갑자기 그날 오후 늦게 큰스님은 다음날 오전에 나에게 수계를 하시겠다고 하였다.
당시 나는 구족계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국내 종단에 모든 수속을 다 밟아놓은 상태인데 큰스님이 갑자기 수계를 하시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게 되지만 무슨 인연인지도 모르면서 큰스님이 처음으로 수계의식을 베풀어 주시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다음날 새벽부터 도량은 몹시 분주해졌다.
원래 오전 중에 수계의식을 하기로 했었는데, 이른 새벽부터 큰스님이 벌써 가사장삼을 수하시고 먼저 법당에서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이것을 안 스님들이 부랴부랴 수계의식을 준비하여 의식이 진행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큰스님이 좀 흥분된 상태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통역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수계를 한 번만 하지 않고 두 번을 잇달아 하는 것이었다.
수계의식이 끝나고 차분한 상태에서 통역을 통해서 무슨 연유로 그렇게 하셨는지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큰스님은 반드시 초저녁에 잠자리에 드시고 자정 무렵 기상하시어 선정에 들어가신다.
그날도 일찍이 주무시고 자정 무렵 기상하시어 참선하시며 선정에 들었는데, 커다란 용이 한 마리 나타나서 “화상이시여, 오늘 저에게도 수계를 해주십시오!” 라고 간절하게 청했다고 한다.
큰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엄청나게 커다란 용은 색이 좀 거무스름했다고 한다.
큰스님이 기이하게 생각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은 자기도 처음 수계를 받을 때 허운(虛雲) 노화상이 똑같은 꿈을 꾸고 자신에게 계를 주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큰스님이 허운 노화상에게 계를 받은 것은 1939년과 1941년이니 2002년에서 보면 60년이 넘은 옛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스승과 똑같은 일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놀랍고 흥분이 되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곧바로 가사장삼을 갖추고 법당에 들어 수계를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수계할 때도 나에게 두 번 계를 주었는데 한 번은 나에게 한 번은 용에게 주느라고 두 번 잇달아 수계하셨다는 설명이었다.
수계의식을 마친 후에 큰스님은 품속에서 허운 노화상 사리 2과를 꺼내서 주셨다.
평소에 큰스님께서 은박지에 싼 스승의 사리를 몸에 지니고 다니셨는데 작은 구슬처럼 생겨서 누런 빛을 띠고 있었다. 당시 통역하는 강거사님도 놀랐다. 큰스님께서 스승인 허운 노화상의 사리를 간직하고 다닌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후일 한국에 다시 오셨을 때 내게 가사를 내려주셨고, 수계의식 때 전해주신 사리에 대한 증명서도 써 주셨다.
날짜는 다가올 음력 추석 명절에 맞춘 것으로 실제와 다른 것이다.
4) 큰스님의 원적
나는 속가에서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 분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 큰스님이 오시면 늘 아버지를 본 것 같았다.
그런데 2005년부터는 큰스님을 한국에서 모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가깝게 모시던 제자들부터 정토를 하는 고승들까지 모두 큰스님을 부정하는 분위기였다.
극락 다녀온 이야기는 가짜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큰스님 자체도 가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큰스님의 드높은 수행력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부정적 시각과 비난에 대해 초연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에 큰스님을 전처럼 자주 한국에 초청할 수는 없었다.
2005년 초 큰스님은 한국에 오시려고 여러 번 연락을 주셨으나 결국은 오시지 못하고,
6월에 들어서자 큰스님 병환이 위중하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큰스님 병문안을 갔다.
샤먼 공항에 내려 선유현 삼회사에 다다르니 큰스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큰스님은 병고가 심하셔서 기력이 현저히 저하 되었고 걷는 것도 불편해서 사가에 내려와 투병을 하고 계셨는데 우리가 온다고 하니 예의를 갖추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삼회사에 나오셔서 우리를 맞이하셨다.
어느 날 꿈에 큰스님과 함께 만경사 불사 회향식 때 함께 참석하셨던 만봉 스님 큰따님이 만봉 스님을 업고 우리 절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만봉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꿈에서 관정 큰스님을 아주 깊은 산속에서 만났다.
그런데 큰스님이 한국식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아버지 같았다.
그곳은 사방이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수미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큰스님을 이쪽으로 모시고 와야 하겠는데, 이곳과 그곳에 사이에는 큰 호수가 있고 늪지대가 있었다.
나는 큰스님을 업고 그 늪을 걸어서 건너왔는데, 너무 너무 힘이 들어 이쪽에 다다르자마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북경의 홍거사를 통해서 양력 8월 1일 0시에 큰스님이 원적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관정 큰스님 조카가 연락을 했는데, ‘관정 큰스님 사리와 가사를 한국의 홍련(宏蓮ㆍ등인)제자와 대만의 굉재(宏財)에게 전하라’는 유언을 하셨다.”
그때 마침 하안거 백중기도 중이었기 때문에 이지역의 옥동천 하얀 모래를 깨끗하게 씻어서 부처님 앞에 올리고 ‘나무아미타불’ 정토선 염불과 ‘광명진언’을 했다.
백중 법회를 마치고 중국을 향했다. 이때는 등원 스님과 큰스님 입적하시기 전 찾아가 한 달간 시봉했던 등공 스님도 함께 갔다.
8월 20일, 복건성 하문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선유현 삼회사로 직행했다.
큰스님 영정이 모셔진 삼회사에 다다르니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이 치고 비가 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운 남방의 더위지만 다비식 때 세워둔 꽃다발이 아직도 치워지지 않고 있어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위패단의 영정에 참배하고 나오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었다.
큰 스님 연탑이 있는 운거산 맥사암사 입구에 들어서니 또 갑자기 맑은 하늘에 구름이 몰려와 소낙비가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나는 중국 본토에서 삼단대계를 받기를 원했지만 그러하질 못하고 대만에서 삼단대계를 받았는데, 그 수계첩을 연탑에 올려놓고 일행 모두 정토선 염불을 하였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국에서 백중기도 기간에 기도한 모래를 부도탑전과 주변에 뿌려드리며 ‘한국 제자들의 훈기를 받으십시오!’ 라고 나직이 말씀드렸다.
참배 시에는 다행히 비가 멎었다.
이어서 인창 주지 스님의 차로 큰스님 다비를 한 선문사로 자리를 옮겼다.
선문사에 다다르니 또다시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내렸다.
참배하고 나오니 바로 비가 그쳤다.
함께 간 홍거사를 비롯하여 우리는 모두 ‘큰스님 환영방식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킴의 안내로 선유현에 있는 큰스님이 마지막 투병을 했던 방과 침실 등도 둘러보았다.
옥상에는 허름하지만 따로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조그마한 법당이 있어 우리는 정성껏 예를 올렸다.
큰스님 49재 때를 기약하고 이번에는 인사만 올리고 돌아왔다.
2007년 9월 11일 큰스님 49재 날에 맞추어 다시 큰스님을 찾았다.
이때는 등원 스님과 해인향 보살이 함께 갔다.
삼회사에서 모신 49재에 함께 간 해인향 보살이 공양한 꽃이 참 장엄했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13일 보전(莆田)에서 큰스님의 조카인 허국은(許國恩)거사로부터 큰스님 사리 5과를 전해 받았다.
큰스님의 가사를 가지고 왔는데 한국에 가져와 늘 수하시던 가사가 아니었다. 나는 거의 다 낡은 큰스님의 가사가 큰스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차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늘 수하시고 다니시던 가사를 모시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가사가 아니어서 받지 않았다.
2010년, 3년 탈상할 무렵 다시 큰스님을 찾았다.
중국에는 3년 탈상이라는 습속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마치 아버지를 모시는 상주처럼 3년상을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해인향 보살과 등원 스님이 함께 갔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현지에 갔는데 불현듯 큰스님 부도에 꽃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부용(木芙蓉)을 사가지고 큰스님 부도탑에 이르니, 또다시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한국에 오시면 늘 돈 때문에 비난을 많이 받았던 것을 생각하며 가지고 간 돈을 일부 소지해 드렸다.
등원 스님은 옛날 큰스님이 보시 받아서 여러 사찰의 사람에게 나누어 주듯이 참석한 사람들에게 모두 준비해간 중국 돈 100위엔짜리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나는 내려오면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제 제자로서 상주 임무를 끝냈습니다.’
5) 큰스님 사리탑을 세우고
2002년 수계 시 큰스님으로부터 받은 허운 화상의 사리 2과와 2007년 큰스님 조카가 전해준 관정 큰스님의 사리 5과는 늘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 2002년 받은 사리 2과는 어느 날 조그마한 사리 한 과가 더 늘어나 있었다.
사리가 늘어난다(增顆)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가 직접 모시고 있는 사리가 늘어날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했는데 이제는 증과를 믿지 않을 수가 없다. 2007년 5과를 받아 귀국한 뒤 큰스님을 늘 존경하고 가장 깊이 믿는 서방사 등정스님에게 2과를 나누어 드렸다. 그런데 뜻밖에 사리와 함께 받은 큰스님 염주 알 구멍 속에서 사리 2과가 더 나와 또 다시 5과가 되었다.
등정 스님은 이미 2009년 그 사리 2과로 사리탑을 세웠다.
‘이 사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큰스님 일대기를 쓰는 서길수 교수님이 이런 의견을 냈다.
“나도 3년 공부할 때 모시고 공부하라고 대만에서 준 허운 화상 사리 1과와 관정 큰스님 사리 1과를 공부가 끝난 지금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중국 복건성에 있는 관정 큰스님 연탑(蓮塔)에 대해서 알아보니 그 안에는 사리가 1과도 없고 사리가 모두 대만과 한국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리를 큰스님 연탑에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하고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3년 공부를 마치고 하산한 서길수 교수님이 복건성 연탑과 대만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자료를 더 수집한 뒤 돌아와서 말했다.
“중국 가서 담당 사원 주지하고 상의하니 아킴하고 상의해야 한다고 하더니 답이 없습니다.
별로 관심이 없고 그 참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만에 사리를 가지고 있는 제자에게 가서 상의해 보았지만 중국에 있는 제자들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큰스님의 뜻과 수행법을 잇는 한국 제자들이 사리를 모시는 것이 순리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렇게 하기로 했다.
허운 화상 사리를 물려주시면서 ‘맡아두고 대대로 널리 전해 공양하기를 바란다(保管代代流傳供養)’고 하시지 않았는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2달 뒤인 2015년 5월 14일 망경산사 뒤뜰 아주 양지바른 곳에 큰스님이 전해 주신 허운노화상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탑과 관정 큰스님의 사리탑을 함께 모셨다.
서길수 교수님 부부와 연당 보살만 온다고 했는데 뜻밖에 법선 스님(7년간 큰스님 통역)과 강재원 교장선생님(宏雄, 큰스님 제자)이 오셨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조계사 신도들이 여러 명 찾아와 제법 성황을 이루었다.
조계사 신도 가운데 어떤 보살이 이런 감격을 이야기 했다
“이틀 전 꿈에 도반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큰스님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인을 받고 있었습니다.
나도 사인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작은 쪽지를 준비해서 내밀었는데 그 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작은 쪽지 가지고 무슨 사인을 받느냐?’ 라고 말씀하셔서 마침 신심명(信心銘) 책을 가지고 있어, 그 책에 써주시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큰스님은 그 책에 4가지를 써주시다가 ‘한 가지가 생각이 안 난다.’고 하시며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인을 다 해주시고 나서 나에게 ‘이제 생각이 났다.’라고 하시면서 한 가지를 마저 써 주셨습니다. 그 한 가지는 ‘정진’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아! 지금 간화선 세계
수많은 큰스님들이 오시려고 이런 꿈을 꾸었나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중국의 유명한 두 큰스님의 사리탑 제막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참 눈물 나게 감사합니다.”
6) 큰스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큰스님은 정토선을 한국에 뿌리내리게 하려고 노력하셨다.
큰스님의 정토선정의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수행이란 마음을 닦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자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공부가 마음 밖으로 벗어나 무턱대고 닦고, 멋대로 수행하다가 한 평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나기(生死解脫) 위해서는 정신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것(流出)을 바꾸어 안으로 흘러들어오게(流入)해야 합니다.‘
지난해 망경산사 법당 중수 불사를 하며 문틀 버팀목과 함께 그 위 벽돌이 한꺼번에 내려앉았을 때 나는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인간 세상에는 의지처가 없다는 것을!
지난 이른 봄에 처음으로 인도 네팔 부처님 유적지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보리수나무 아래 금강좌 앞에서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불자가 부처님 가는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관정 큰스님을 처음 만나 삼배를 했을 때 나에게 주신 덕담이 조용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처럼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속히 서두르십시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극락 다녀온 관정스님과 극락 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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