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 세 개
김 순 이
새벽이 되자 사람들이 부스럭거린다. 복도를 향한 문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간호사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여섯시에 일어나 간단히 씻고 여덟시가 되기 전 수술실로 가는 이동용 침대에 옮겨 탔다. 두려움을 안고 자리를 뜰 때 누군가 귤을 주었다. 금식이라며 사양했더니 사십대의 인상 좋은 남자는, 아내가 퇴원하니 나중에 먹으라며 감귤 세 개를 침대 머리맡에 두고 갔다.
항상 속 썩히던 허리디스크가 갑자기 내려앉았다. 문제는 생각보다 컸다. 이미 여러 가지 복합증세를 보여 간단하지가 않았다. 내과, 일반외과, 정형외과의사 등이 공동 집도하기 때문에 수술은 여덟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장기를 건드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이쯤 되면 환자는 마음을 비우고 의사에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멈췄다. 드디어 수술대위에 옮겨졌을 때 차가운 쇠붙이의 섬뜩함이 등짝으로부터 전해왔다. 조금 후 간호사가 팔목에 링겔 주사를 꽂고 또 다른 주사약을 주입했다. 금새 코 안이 싸해지더니 기억을 잃었다.
누군가 자꾸만 어깨를 흔들어댔다.
“일어나세요. 정신차려야 돼요. 오래 자면 안 좋아요.” 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파, 아파’ 하는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잠시 전 눈을 감았을 뿐인데 밤중처럼 천장의 형광등이 밝아보였다. 눈을 뜬 걸 확인한 간호사가 숨을 크게 쉬라고 하더니 코에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냈다.
그날 정신이 들어 병실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일곱 시경이었다. 열이 올랐지만 물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해서 타는 갈증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간병인이 수시로 물에 적신 거즈를 입술에 대주었지만 입속은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타 들어왔다. 새벽이 되자 간병인은 한쪽에서 잠이 들었다. 목은 타들어 왔지만 피곤에 절어 자는걸 보니 거즈를 갈아달라고 하기가 미안했다. 참기가 힘들 즈음, 간병인을 깨웠다. 시원한 거즈가 다시 입술에 닿았을 때 바늘처럼 가는 한줄기의 물기가 입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시원한 꿀맛이었다.
하지만 시원한 감촉도 이내 열기에 밀려나고 다시 목이 타들어 갔다. 지루한 또 하루가 지나갔다. 다른 환자들과 달리 내겐 이틀 후 정오쯤이 되어서야 물과 미음이 허락되었다. 제일먼저 정수기로 가서 미친 듯이 물을 마셨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모르게 2% 부족했다. 냉수를 마셔도 여전히 갈증은 남아있었다.
저녁엔 미음도 넘어가질 않아 하릴없이 누워있는데 머리맡에 무언가 손에 잡혔다. 잘 시간이라 침대주변엔 커튼이 내려져 있었고 한곳에 남겨진 희미한 전등이 아니더라도 감촉만으로 나는 그게 뭔지 이내 알아차렸다. 귤이었다. 며칠 전 남자가 준 세 개의 감귤이 그대로 머리맡에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하나씩 까서 먹기 시작했다. 달콤하고 새콤하고 꿀맛 같던 감귤 세 개. 아, 나는 그때까지 그토록 맛있는 감귤을 일찍이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것들은 내 손에 잡히는 대로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고, 나는 이내 아쉬운 듯 허물처럼 남겨진 껍질을 바라보며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도 나를 괴롭히던 갈증이 어느새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귤 덕분인지 모르지만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입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루저녁은 음식이 당기지 않아 한술 뜨고 말았더니 밤에 배가 고팠다. 진통제 효과로 통증이 사라질 무렵이면 지난번 맛있게 먹었던 귤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남편에게 귤을 좀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저녁, 남편은 제일 비싸고 맛있는 걸로 골랐다는 생색을 내며, 아예 귤 한 박스를 메고 왔다. 병실 환자들에게 나눠준 다음 귤을 침대위에 펼쳐놓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여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작정하고 먹기로 한 귤은 몇 개 집어보지 못하고 물러야 했다. 그냥 보통 귤 맛이었다. 시고, 썩 달지도 않고, 별로 시원한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먹어봐도 요전에 먹었던 그 맛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똑같은 귤 맛이라지만 내게는 천지차이였다. 끊임없던 갈증을 해소시켜주고 입맛을 돌게 한 밀감, 그건 웬만한 영양제보다 났다고 느꼈던 과일이었는데 무엇이 다른 걸까?
이후에도 가끔씩 시원한 귤이 생각날 때면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귤을 사왔다. 하지만 별다른 맛은 없었다. 제주에서 직접 배송된 싱싱한 한라봉도, 산지에서 바로 따서 배달되어 상큼하다는 사과도 그때의 귤 맛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가끔은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그날 먹었던 감귤은 이브의 동산에서 몰래 훔쳐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똑같은 과일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내 생애에 그렇게 맛있는 감귤을 또 먹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평소 신 음식을 싫어해서 귤은 별로 좋아하지 않던 과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들어보니, 감귤은 다른 과일 못지않게 좋은 기능을 함유하고 있었다. 신맛을 내는 구연산은 식욕을 증진시키고, 베타 클립토키산틴이란 성분은 암 예방과 면역증강, 그리고 우리몸 안에서 항산화 작용을 한다. 과거보다 사람들이 장수하고 젊음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섭취할 수 있는 환경적 요소의 혜택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외에도 피로회복과 피부미용, 만병의 근원인 감기예방 등 체질개선에도 좋으며 칼슘과 비타민이 많다고 하니 즐겨먹을 만하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해도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처럼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삶의 풍족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배가 덜 고파서라는 것이다. 그때의 귤 맛도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사막에서 물을 찾아 땀 흘린 자만이 진정한 오아시스의 샘물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귤피차를 마시고 건강을 되찾았다는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귤피차는 귤껍질을 깨끗이 씻어 말렸다 뜨거운 물에 우려내어 마시는 것인데 겨울철에 부족한 비타민을 차로 보충하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무조건 비싼 보약만 찾을 것이 아니라 적당한 운동과 자연의 음식을 섭취해서 건강을 되찾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때 이후로 나는 감귤을 비롯해 겨울에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과 친해지게 되었다. 지난날의 맛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과일이 아니던가? 어릴 적에는 먹고 싶어도, 때가 아니면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과일이 냉장고와 저장 기술의 발달로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얻었던 감귤처럼, 병실에서 또는 어려운 여건에서 병고와 싸우는 사람에게 나의 감귤도 전해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감귤을 까서 입에 넣는다.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감각이 혀끝을 감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