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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훈의 생활복지편지(21)
필리핀 코피노(KOPINO)에게 희망을
채수훈
한국사회복지행정연구회(한사연)에서 국제교류사업 일환으로 추진한 ‘필리핀 세부 어린이재단과 봉사활동’에 사회복지직공무원 20명이 11월 7일부터 11월 11일까지 3박 5일간 다녀왔다. 이 사업은 “한사연의 국제적 교류와 함께 조직의 위상에 부합하는 활동영역 확대를 통해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코피노에 대한 이해와 지원책을 강구”하고자 3년째 실시되고 있다.
당초 연수 기간은 5일 이었다. 앞뒤 출국과 귀국 일을 빼면 실제 일정은 3일밖에 되지 않았다. 둘째 날(11.8)은 초대형 태풍 ‘하이옌’ 영향으로 방콕(방에 콕 쳐 박혀 있다)에서 삼삼오오 모여 얘기하거나 피곤에 지쳐서 잠을 청했다. 텔레비전과 핸드폰과 이별하고 낯선 땅 침대에 누워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되자, 왠지 청승맞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베란다의 의자에 앉아 이국적 풍경에 젖어서 독서를 하는 것도 나름대로 ‘힐링’이 되기도 했다. 어쩌겠나, 태풍과 함께 섬에 상륙하게 되었으니까 함께 벗하면서 여름밤을 지낼 수밖에 별도리가 없어 보였다. 셋째 날(11.9) 아침이 밝았다. 열대 숲 사이로 태양이 작열하며 하늘은 맑고 쾌청하였다. 반가워서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까 눈이 부셨다. 입가에는 웃음이 배시시 묻어났다. 모두 처녀지 연수가 자칫 태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아쳐 갈 뻔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때를 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하룻밤 사이에 일비일희(一悲一喜)하는 순간이었다. 원래 첫날 기관과 가정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태풍 때문에 가정집들이 파손되어 부득이하게 넷째 날(11.10) 기관방문이 가능하다고 세부 어린이재단에서 연락 받았다. 전체가 회합을 한 후 내린 결론은 3일 일정을 2일로 축소해서 셋째 날에 가볍게 자연문화탐방을 실시하기로 했다. 넷째 날에 재단과 코피노 가정을 방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야속한 태풍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그래도 호텔을 나서는 발걸음은 다들 상쾌해 보였다.
귀국 후 신문을 보니까 필리핀은 태풍 때문에 인명피해, 주택 파손 및 이재민이 속출하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필품을 얻기 위해 약탈이 자행되고 있었다. 가족들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참으로 위험스러운 고비를 넘기며 무사히 다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등잔 밑은 항상 어두운 법이다.
< 세부 코피노 어린이재단 앞에서 >
드디어 11월 10일 월요일에 세부시에 자리 잡고 있는 ‘세부 코피노 어린이재단’을 방문했다. 연수단원들은 윤지현 회장의 안내로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약10평 규모의 작은 공간이었다.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세부시 지도에는 이 재단에서 후원하는 19가구의 아이들 사진과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23명의 코피노 자녀들은 영유아와 초등학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재단이라는 명칭이 왠지 친숙하여 윤 회장에게 한국어린이재단과 연관성에 관하여 묻자 “코피노 모자가정을 돕기 위해 한인 후원회로 시작하여 개인이 설립한 재단이다”고 했다. 필리핀은 1인당 국민소득이 4,300불밖에 되지 않아서 정부 차원의 사회복지제도가 미약한 수준이었다. 당연히 코피노 가족뿐만 아니라 어린이재단도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재단은 사업가인 윤 회장의 사재와 교포들의 비정기적 후원으로 근근이 운영되고 있었다. 직원은 필리핀인 여성 1명이 전부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다음 카페 “세부 코피노 어린이재단”을 운영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방문해 볼 것을 권한다.
당초 연수단 사회복지직공무원들이 7팀으로 나누어 코피노 어린이재단에서 후원하는 모자가족을 방문하여 우리나라에서 준비해 간 의약품, 과자류, 수건 등 선물꾸러미를 23가구에 전달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풍 피해 때문에 도로가 일부 단절되고 집 파손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가정만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20명이 한 번에 우르르 찾아가자니 참으로 면목이 없고 계면쩍은 방문이었다. 하지만 그 실태를 좀 더 살펴봐야 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애써 자위하면서 윤 회장과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집을 찾아가듯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방문한 집은 4살 된 남자 아이 ‘리벤스 붕붕 페르난데스’의 집이었다. 벽돌담의 함석지붕 집이었는데 이웃집들과 연이어 붙어 있었다. 주변 환경은 매우 지저분하여 우리나라 1970년대 농촌 풍경을 연상 시켰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우리나라 아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인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아이 사진만 가지고 우리나라에 가서 아빠를 찾는다 해도 손쉽게 찾을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이 아이는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연세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방안에만 계셨다.
엄마가 유흥업소에서 일하다가 우리나라 관광객과 하룻밤을 보내고서 ‘붕붕 페르난데스’를 낳았다고 했다. 아이 아빠에 대해서는 한국인이고 미스터 최라는 것 밖에 모른다고 하였다. 그 성씨도 거짓말로 알려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친척들이 보여준 사진첩에는 젊었던 시절의 엄마 사진이 끼어 있었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애틋하게 다가왔다. ‘붕붕 페르난데스’ 엄마는 마닐라로 돈 벌기 위해서 떠난 후 어느 날 호텔에서 엽기적인 살해 사건으로 시신이 불타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아이는 수줍음을 타는지 아니면 고아가 된 슬픔과 아빠에 대한 증오심이 내재된 탓인지 시종 말이 없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곤 했다. 우리 일행이 관광버스에 승차 할 때 한 아주머니가 ‘붕붕 페르난데스’를 데리고 배웅을 나와서 인사하라고 팔을 흔들어도 이내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모습이 매우 안쓰러워 보였다.
우리나라였다면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조손가정 등 정부의 기초생활보장과 각종 민간단체의 후원과 결연사업, 집 고쳐 주기사업 등을 한다고 요란을 피웠을 법도 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대부분 가난한 국민들이기에 정부나 민간단체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방임된 한 명의 아이 일 뿐이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피노라는 주홍글씨도 덧씌워 있었다. 필리핀 시간에서 보면 결코 특별한 가정이 아닌 듯하였고, 이 가족들도 누군가에 특별대우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이러한 가정에 국제적 지원을 한다는 것이 얼핏 보기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순간적인 생각도 스쳐갔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도 필리핀과 경제수준이 비슷한 50·60년대에 정부의 생활보호법이란 무늬만 있을 때 저소득계층에게 민간단체 지원이 먼저 실시되었다. 또, 그보다 잘사는 나라의 국제원조, 사회복지시설 지원 및 해외 입양사업이 우선시 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처지와 비교해 볼 때 필리핀도 국내적 자구책도 필요하지만 어쩌면 국제적 관심과 지원을 통해서 문제의 핵심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지 아닐까 싶다. 필리핀의 한 섬에 버려진 코피노 고아의 가족문제 해법도 역시 현장에서 묻고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필리핀을 방문하기 전에 세부와 코피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겨우 어느 위치에 있는 섬인지와 그 단어에 담겨져 있는 뜻이 무엇인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일부 정보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곳에서 회장과 가이드의 얘기와 가정방문을 통해서 그들의 현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마음이 착잡하였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하면서 뭔가 접점과 해결책을 찾고자 했지만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결코 녹록한 코피노지원사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복지행정연구회에서 이 사업을 3년째 실시하고 있기에 뭔가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좀 더 장기적인 호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시종일관(始終一貫) 차분하게 대처하였다. 다른 연수 같으면 앞에서 받아 적느라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준비해간 필기도구도 애써 꺼내지 않았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였기에 다만 눈으로 보고 머리로 기억하면서 차곡차곡 쌓아만 갔다. 쉽게 달궈진 냄비가 빨리 식어버리기에 연탄처럼 서서히 데워지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세부와 코피노는 도대체 무슨 관계에 놓여있을까? 먼저 세부는 필리핀이 7,1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곳 중에서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인구는 약82만 명이고 제5의 도시이다. 적도 위치의 아열대성기후라서 연중 따뜻하고 휴양지와 미항으로써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세계적인 관광객이 끈이지 않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관광도시다. 특히 인천과 막탄 세부 국제공항 사이에 직항로가 개설된 후 다른 나라보다 우리나라 교포와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는데, 교민의 수는 유동인구를 포함하여 2만 여명이 체류하고 있다고 했다.
코피노(KOPINO)란 코리안과 필리피노의 합성어로써 한국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2세를 일컫는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혼혈아라고 할 수 있다. 회장의 얘기에 의하면 “필리핀에 코피노 숫자는 1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만 그 숫자는 더 많을 것이다”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코피노는 우리나라 남성들 중에서 관광객, 유학생, 근로자 등이 필리핀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문제는 임신했거나 출산 후에 대부분 책임을 회피하고 우리나라로 도주하였기 때문에 아빠 없이 자라나는 모자가족 또는 미혼모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해양관광도시 세부도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못지않게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가이드 요한씨도 버스에서 자투리 시간이 있을 때 마다 그 얘기를 언급했다. 그 피해의 심각성과 우려를 나타내며 무분별한 성매매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세부시 나이트투어’는 꿈도 꾸지 못했다.
우리나라에도 한때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이 기승을 부려 사회적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 과거를 잊고서 우리나라가 관광이라는 미명하에 동남아국가에서 그런 작태를 재연하는 것을 보니 서글펐다.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다. 그런데 필리핀에도 코피노 못지않게 저피노(일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2세)도 많다고 했다. 일본은 최소한 경제적 동물능력을 발휘하여 국적취득, 경제적 지원, 취업 등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정부나 민간단체의 지원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상태라 하였다. 이에 대해 가이드는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순간 코피노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우리나라에서 부채의식을 느낌으로써 국가적 문제가 될까봐 회피하지 않느냐”하고 일갈했다. 윤 회장은 한 가지 더 보탰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후원기관과 접촉해 보았지만 국가적 눈치를 봐서 그런지 이보다 더 못한 나라들의 아이들을 지원해 주는 것이 원칙이라는 원론적인 얘기만 들었다”며 “코피노 지원책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매우 소극적” 이라고 했다. 후원기관 저마다 지원기준이 있겠지만 이 문제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국가적인 문제인 만큼 최소한의 국가적 대책마련과 민간단체 지원 방안도 절실함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코피노 가족들이 도망간 아빠를 찾기도 어렵고, 찾는다 하더라도 법적으로 유전자 감식을 강제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한국인 계통이라는 것을 법과 과학적으로 입증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워 보였다. 이에 대해서 윤 회장은 “엄마들의 증언, 집에 보관되어 있는 사진 혹은 아이들의 몽골 반점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엄마가 아이 아빠의 한국 주소라면서 보여 준 것을 펼쳐봤는데 너무나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것은 주소가 아니라 한국말로 욕이 쓰여 있었다.”며 “그걸 보고 너무 제가 창피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했다. “미안하다. 우리 한국에 지진이 나서 이 도시가 없어졌다.” 우리나라 남성들은 필리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갖고서 일단 임신이 되면 ‘한국에 갔다 와서 돌봐주겠다.’ ‘돈을 건네주면서 낙태 수술하라.’고 한 후 감감무소식이라 했다. 심지어는 “집에 엄마, 큰딸, 작은딸이 있으면 그 세 여자를 다 건드리고 간 그런 예도 있다”고 윤 회장은 말하였다.
그런데 필리핀은 법적으로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 만약 낙태수술이 발각되면 의사와 산모 양쪽 모두가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또, 국민의 97%가 가톨릭 신자로서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허용되지 않았다. 임신은 곧 출산인 것이다. 다른 한편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만18세가 성인나이 이기 때문에 가족생계 유지를 위해서도 취업을 해야 했다. 세부시가 관광도시이다 보니까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미성년자 또는 20대 여성들이 많다고 했다. 필리핀 국민들이 한류 열풍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동경심도 강하지만 점차 코피노가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반한감정도 점점 끌어 오르고 있다고 하였다. 언뜻 올해 필리핀에서만 한국인이 현지인에게 10명이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생각이 났다. 필리핀을 방문하는 한국인 수는 지난해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선 데 이어 올해에도 매달 평균 20% 가량의 증가율을 보였다 한다. 치안이 불안한 나라에서 코피노 문제로 한국인이 안전을 더 위협 받고 있지는 않는지 그 본질을 꿰뚫어 볼 필요가 있다.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인들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에 대해 윤 회장과 가이드는 이구동성으로 “한국 드라마에서 결혼 전 임신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을 시켜 주는 것도 이곳 여성들의 막연한 기대심리라 하였다.” “필리핀은 미국식민지 문화 영향 때문에 더치페이를 하지만 대부분 한국 남성들은 필리핀 여성들을 사귈 때 대부분 비용을 부담하고 온 정성을 쏟아 붇기에 이 나라 여성들이 공주대접 받는 느낌을 받으면서 많은 유혹에 넘어간다고 하였다.” “20대 젊은 나이의 유학생들이 부모의 보호권 밖에 있으면서 충동적인 문화에 쉽게 노출되는 것도 문제라 하였다.” “필리핀은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수백 년 동안 받아오면서 외국인과의 접촉과 혼혈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한류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과의 호감도 더 늘어났다.” ….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나라 남성들이 국내 성매매 행위도 모자라서 섬나라에까지 가서 퇴폐적인 행위를 일삼고 국가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을 듣고 있자니 분노의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귀국 후 언론 자료를 살펴보니까. 우리나라 남성들의 해외에서 성 착취의 공통적 특징으로는 콘돔 사용을 거부하며 미성년자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공격적·폭력적 태도와 행동을 일삼으며 가학적 성행위를 요구한다고 했다. 국내에서 그릇된 성행위가 해외에서도 버젓이 재연되고, 그 흔적까지 버젓이 남기고 있는 작태가 가히 짐승만도 못한 짓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필리핀은 한국전쟁 때 UN군을 파견해준 동맹국이자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국가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가이드로부터 “장충체육관이 그 나라의 설계와 기술력에 의하여 1963년에 건설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마라’는 옛말이 있듯이 잘사는 우리나라가 필리핀에 국제적 원조는 못해줄 망정 코피노 가족의 가정파탄은 이제는 더 이상 먼 남쪽 나라 얘기도 우리나라에서도 결코 외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한편 우리나라도 6.25 이후에 세계 여러 나라와 단체들로부터 1980년대 까지도 꾸준히 원조와 지원을 받았다. 심지어는 한때 고아수출 1위라는 불명예 타이틀도 간직하고 있다. 그 분야에서 세계 기네스북 기록 보유 국가가 아닌가 말이다. 우리나라도 주한미군 기지촌에서 태어나서 자란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컸던 만큼, 코피노의 아픈 현실도 이에 못 지 않으리라고 본다.
코피노의 한국 입양도 쉽지 만은 않아 보였다. 우선 이 가족들이 원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그 나라 국민들의 가족중시 풍습 때문에 입양이라는 단어가 낯선 땅 같아 보였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민족 배척도 한 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가난한 모국 필리핀의 자체 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 또한 아빠의 나라 한국에서도 애써 외면 받는 그런 신세일 뿐이다. 이 혼혈아들은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도 왕따 취급을 받고 있다고 했다. 가족 생활고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면서 일탈과 비행청소년으로 커나갈 확률이 높아 보였다. 윤 회장은 “이러한 아이들이 비행집단으로 형성된 슬럼가가 형성돼 가고 있다”고 하였다. 이들의 눈에 한국인과 교포는 당연히 범죄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이처럼 코피노가 필리핀의 사회 문제로 자리 잡아가면서 우리나라와의 국가 간 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다. 이제는 이들 가족들이 한국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국제 소송까지 준비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마치 빙산이 바다 물속에 잠겨 있다가 그 일부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빙산의 크기는 어림짐작 할뿐 실체는 알 수가 없었다.
코피노지원사업을 두둔하면 분명히 반대하거나 꺼림직 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반대 입장으로는 ‘우리나라에도 모자가족 등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외국의 어려운 아이들부터 도울 필요가 있는가?’ ‘코피노보다 더 어렵게 생활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이 더 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개인이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성관계를 통해서 코피노를 잉태한 사람들은 조요히 숨어서 잠자코 있는데, 왜 그들의 문제를 나서서 해결해 주어야 하는가.’ …. 이 같은 이유도 분명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반면 동의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정말 불쌍해서 돕고 싶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다른 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도와줘야 한다.’ ‘술 한 잔 값이면 얼마든지 도와 줄 수 있다.’….
반대와 찬성, 모두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다. 이에 대해 윤 회장은 “한 가정만이라도 지속적으로 후원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코피노가 태어나지 않도록 우리나라에서 그 실상을 전파하고 국민들에게 제대로 실상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였다. 지원도 중요하지만 예방대책도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한사연 차원에서도 세 번의 기관방문을 실시한 만큼 이제는 탐색기를 넘어서서 자체적인 지원책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사회복지직공무원들끼리 코피노 국제지원사업을 공유하고 새로운 국제적 복지정책을 개발해 나갔으면 한다. 언제가 사회복지직공무원이 지방자치단체의 복지정책을 주도할 권한이 주어질 때 분명코 코피노의 눈물도 함께 거둘 수 있는 그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다양한 기대와 희망을 가져본다.
막탄 세부는 포르투갈 탐험가 마젤란이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태평양을 건너 세계 일주를 하면서 원주민들과 싸우다가 추장 라푸라푸에게 1521년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그 후 필리핀은 묘하게 포르투갈이 아닌 스페인 식민지의 길을 걸어왔다. 막탄슈라인 공원에는 침략자인 마젤란과 추장 라푸라푸를 기념하는 비가 마주보고 서있다. 마젤란은 가톨릭을 전파한 최초의 서양인으로써 지금도 추앙을 받고 있다. 라푸라푸는 외적을 물리친 민족영웅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침략자와 애국자가 공원에 함께 공존하는 나라, 참으로 묘한 운명이다.
한국-코피노-필리핀은 어떤 운명일까? 함께 공생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세부는 돈쓰면서 먹고 놀기 좋은 관광지이지만 코피노와는 애증관계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가 세부 코피노와 공생하는 길은 무엇일까? 옛 조상들은 ‘함부로 씨를 뿌리지 말라’고 했다. 오늘도 그 씨는 그곳에 뿌려지고 있지만 제대로 자라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말라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코피노와 인연을 맺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먼저 앞장서서 이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도와서 그 뿌리를 단단하게 매듭지어 가다보면 먼 훗날 한국과 세부시 코피노와도 ‘희망의 다리’가 연결될 것이다.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 루쉰은 <고향>에서 희망을 이렇게 말했다.
“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코피노의 국가적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회복지서비스의 블루오션(blue ocean)이다. 우선적으로 씨를 뿌린 우리나라에서부터 국가적, 단체적, 국민적 차원에서 다양한 지원과 해결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 이다. 국내에서도 이들의 실상을 사회에 꾸준히 알림으로써 국민 경각심을 갖게 하고, 국제적 공조를 통해서 불법 성매매에 대한 처벌을 강화시켜야 하며 해외 관광․연수․근로 문화를 바꾸어 나가는 전환점으로 삼도록 해야 한다. 한사연도 이들과의 생명 나눔에 동참한 만큼 뿌린 씨를 거두도록 노력할 것이다. 한국인이여! 외국에 나가면 제발 코리안 드림과 한류문화가 태풍속의 찻잔이 되지 않게 국가적 품격을 지켜나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