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체개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됩니다.
그만큼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는 다는 것이죠.
아래의 글들을 읽어 보시고 일체개고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시길....
------------------------------------------------ 사실상, 삼법인 중에서 핵심에 해당하는 해석, 가장 중요한 해석이 바로 일체개고에 대한 해석이라 여깁니다.
일체개고의 해석 여하에 따라서 불교가 염세적, 해탈 중심의 종교가 되느냐, 아니면 현실참여적, 지혜중심의 종교가 되느냐가 판가름 난다고 생각합니다.
반항아님은 일체개고의 해석을 무상한 인생의 일체가 다 고통이다. 그러나 염세로 보아서는 안된다. 삶의 실상을 적시한 글로 보아야 한다 설명하였지만, 저는 좀 다른 견지에서 봅니다.
일단 일체개고를 삶 자체를 고통이라는 견해로 보면 어찌되었든 일찍 열반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염세라는 지적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체개고를 다르게 해석하면 어떨까요?
즉, 제법무아. 제법무상에 이어지는 결론으로 해석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해석이 나오겠지요.
"세상은 무상하며 존재는 항구한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집착하고 존재의 항구성에 집착하는 모든 욕망은 고통이니라."
다시 말해 일체개고를 삶은 무조건 고통이다가 아니라, 제법무아와 제법무상의 이치를 모르고 집착하여 매달리는 욕심은 고통이다 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해탈은 제법무아와 제법무상의 지혜를 참구하는 바로 이 자리의 문제가 됩니다.
반대로 일체개고를 무조건 삶은 고통이란 식으로 해석하면, 해탈 열반은 삶의 저편에 위치하고 있다는 소리밖에 안되며, 이는 윤회와 해탈 열반이 종이 한장 차이도 없다라는 불교의 교시를 위배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일체개고의 해석을 제법무아와 제법무상에도 불구하고 집착하는 욕망은 일체가 고통이니라 라는 해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 구조에 의하면, 제법무아, 제법무상, 일체개고에 열반적정이 덧붙은 사법인의 해석도 원활합니다.
제법무아와 제법무상으로 일체 욕망의 고통을 여윈 이 자리가 바로 열반 적정이다. 아니겠습니까?
지혜 있으신 분들의 의견을 바랍니다.
|
|
첫댓글 일체개고는 불교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일체개고는 주어요.나머지는 술어입니다.고,고의원인,고의멸,고의멸의길이사성제이고,고의 원인을 찾다보니 생,유 ,취착,갈애,수 ,접촉,육입,명색,식,행,무명 이 십이연기입니다. 고의 멸을 찾다보니 본래 무상하고 무아의 지혜가 나오는 겁니다.
몽환님 성의 있는 상담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_()_
일체개고. 一切皆苦: 일체가 괴로움이다 . 사는것이 괴로움의 바다이다. 왜그러냐. 산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즐거움이 무슨 즐거움이겠습니까? 천하의 왕, 누구도 살면서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집집마다 죽지 않은 사람 없고 , 사람마다 이별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 . . 당연히 일체개고지요. 물질적인 어떤 행복감은 덧없는 것이지요. 지금 생이 물질적인 즐겁다고 희희낙낙한다면 그 것 때문에 윤회를 하게 되고, 다음생도 즐겁다고 하겠자만 . . .지금 당신과 내가 혐오하는 삶이 되기 백발백중이라... 그나마 업을 깨끗이 한 스님이라면 약간 나은 생을 얻을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