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인사
이병금
백두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스위스로 안락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공항까지 배웅나온 손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여든 살까지는
많은 걸 할 수 있었다
아흔 살까지도
백 살이 되었을 때
시간이 끊어지지 않아
숨이 가빠지고 멎을 것 같았다
물론 난 백두 살도 아니고
여든 살도 아니지만
일요일 아침 문득
어제와 다르게
오늘을 만들어가는
노동이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지막 날이
똑바로 나를 바라봤다
(그는 하루치의 시간을 버리러 전철을 타고 용문까지 가버리고)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돋아나던 작업실 의자에서
일요일의 시간을 짓뭉개다가
점액질 시간에 잡아먹힐 것만 같아
오늘이란 진흙 덩이를 일그러뜨렸다
빵집으로 광장으로 기차로 잠 속으로 달아나면서
일요일이 나를 못 본 척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 사이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창밖엔 손가락을 활짝 펼친
연두 플라타너스 잎사귀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돌아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벽에 기대어
난 겨우 거뭇한 저녁 시간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우정의 공동체?
-그날이 이럴까?
-조용하지만 격렬한 하루겠지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크게 외치지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백두 살은 아니지만
여든 살은 아니지만
미리 당겨 연기해보는
일요일 인사
빛나는 저녁입니다
시간이 나를 알아본다
그가 남긴 유산을 다 써버렸다
수십 년 거식증을 앓는
사람이 오늘을 먹고 있다
암녹색 산등성이 너머
회청 색구름그늘 그 너머
여든다섯 그가 살다 간 자리를 떠올리다
통구이, 식은 밥, 동치미 한 사발
김치찌개, 거뭇해진 바나나……
혼자 먹거나
둘이 먹거나
열이 먹거나
다시 창가로 돌아와
허연 하늘에 얼굴을 박고 토해내곤 했다
(12층 아파트는
늘 적정한 높이였지만)
지는 햇살을 그득 머금은 들판의 살갗
사월이라 돋아나는 꽃받침의 손톱
자동차바퀴굴러가는바순소
리클랙슨반짝임이렇게많은별들중
물 흐르는 창살에 기대어 언어 혼자
언어의 벽을 오르는지 명치 아려왔다
일생이란 네 개의 기둥
그 아래를 흐르는 검은 물의
시
간
다간다간다시
어지러웠다 두 번을 더 토했다
봄밤이 긴 혀로 방 안 가득 핥듯
내가 언어의 바닷말 속을 헤엄치듯
잠시 물 밖으로 튀어 올라
하늘이 다 비워진 채 번득이는 것 같아
다정한 그의 웃음을 조금 뜯어먹었다
너무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했었지만
쫓아가서 부둥켜안고
내가 만든 언어의 옷을 입혀주고 싶었지만
너무 많았다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