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이문(平昌李門) 이계동(李季仝)
이계동(李季仝.1450.세종 32∼1506.중종 1)
조선 중기의 무장(武將). 자는 자준(子俊), 시호는 헌무(憲武), 본관은 평창(平昌). 계남(季男)의 아우. 1470년(성종 1) 무과에 1등로 급제, 1479년 윤필상(尹弼商)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 1491년(성종 220 허종(許琮)의 부장(副將)으로 야인(野人) 이마거(尼麻 車)를 쳐부쉈다.
일찍이 영안북도(永安北道) 절도사가 되어 야인들에게 성의로 대하는 한편, 그들의 언어ㆍ지세에 밝았으므로 그들로부터 경복(敬服)을 받아 변경을 침범 당하지 않았으며,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藩記)>와 <서북지도(西北地圖)>를 찬(撰)하여 바쳤다. 벼슬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준(子俊), 시호는 헌무(憲武). 1470년(성종 1)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훈련원판관에 임명되었다. 1476년 무과 중시에 급제해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이 되었다가 창성부사로 나갔다. 이 해 10월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부사로 대마도에 갔다가, 정사 이형원(李亨元)이 병으로 죽자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황해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었으나 경력이 없어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가,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으로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돌아와 형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479년 선전관이 되었다.
1480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중국으로 떠나기 전의 사연(賜宴 : 베풀어준 향연)에서 불경한 행동으로 전라도 해남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 성종의 명으로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1482년 여진어에 능통하고 그들의 사정을 잘 안다는 점이 인정되어 함경도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여진을 성심으로 대해 재임 중 그 지역이 안정되었으며, 뒷날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에는 모련위(毛憐衛)의 여진인들이 늘어서서 인사를 할 정도로 신망을 받았다. 1486년 좌윤이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도상중원교사지법(圖上中原敎射之法)>을 필사해 왕에게 바쳤다.
1487년 형조참판을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489년 황해도에 김경의(金京儀)ㆍ김막동(金莫同)의 도적이 일어났을 때 금제사(擒制使)로 파견되어, 구질포지산(仇叱浦只山)을 공격해 우두머리를 체포하는 등 적을 소탕하고 돌아와 포백(布帛)과 무기를 상으로 받았다. 1490년 무과 출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야인(野人) 이마거(尼麻車)가 조산(造山)에 침입했을 때 윤필상의 추천으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허종(許琮)을 보좌해 토벌에 나섰다. 이 때 큰 성과는 없었으나 돌아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1492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계속된 흉년으로 도둑이 들끓자 연로수직법(沿路守直法)을 만들어 검색을 강화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494년 지중추부사로서 성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중국의 무기 통제나 조선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보고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듬 해 왕명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藩記)>와 <서북지도(西北地圖)>를 편찬해 올렸다. 1500년 병으로 병조판서에서 물러났다.
병조판서 재임 시에 특히 북방에 관한 여러 시책에 관심을 기울였고 용의주도한 대비를 하였다. 1504년 우찬성이 되었다가 이듬 해 좌찬성과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무신으로 크게 활약했으며 독서에도 힘써 당시 문무를 겸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한다.
조선 초기의 무신. 자는 자준(子俊), 호는 동호(東湖), 본관은 평창(平昌), 시호 헌무(憲武). 평원부원군 이영서(李永瑞)의 둘째 아들. 21세에 무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훈련원 판관에 임명되었고, 27세에 무과 중시에 합격하여 종친부 전첨에 제수되었다가 외직인 창성부사에 임명되었다. 이해(1476) 10월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부사로 대마도에 갔다가 정사인 이 형원(李亨元)이 병으로 죽자 모든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왔다. 이해 황해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었으나 경력이 없다 하여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으로 건주위를 정벌하고 돌아와 형조참판에 승진하였다.
관직에 몸담은 지 3년 후인 30세 때(1479)에는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주 문부사(奏聞副使)로 중국으로 떠나기 전의 사연(賜宴)에서 불경한 행동으로 전라도 해남현에 유배되었다가, 32세 때(1481)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쓴 성종의 뜻에 의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33세 때(1482) 여진어에 능통하고 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함경도절도사로 제수되었다. 이때 여진을 성심으로 대하여 재임 중 그 지역이 안정 되었으며, 뒷날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에는 모련위(毛憐衛)의 여진인들이 늘어서서 인사를 할 정도로 신망을 받았다.
37세에 좌윤이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뒤 중국의 교사 법(敎射法)을 그림으로 그려 임금에게 바쳤다. 이듬해 형조참판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 로 나갔다. 40세에 황해도에 김경의(金京儀), 김막동(金莫同)의 도적이 일어났을 때 금제사 (擒制使)로 파견되어 구질포지산(仇叱浦只山)을 공격하여 우두머리를 체포하는 등 적을 소탕 하고 돌아와 포백(布帛)과 무기를 하사받았다.
41세 때(1490)에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야인(野人) 이마거(尼麻車)가 조산(造山) 에 침입하였을 때 윤필상의 추천을 받아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허종(許琮)을 보좌하면서 토벌에 나섰다. 이때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돌아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43세에 경 기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계속된 흉년으로 도둑이 들끓자 연로수직법(沿路守直法)을 만들어 검색을 강화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2년 뒤(1494) 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성종 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중국의 무기통제나 조선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49세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 왕명에 의하여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藩記)>와 <서북지도>를 찬진하였다. 병조판서에 재임 중에는 특히 북방에 관 한 여러 시책에 관심을 기울였고 용의주도한 대비를 하였다. 55세에 우찬성이 되었다가 이듬해 좌찬성과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무신으로 크게 활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서에도 힘써서, 당시 문무를 겸하였다는 칭찬을 들었다. 향년 57세로 사망했으며 슬하에 5남을 두었다. 묘는 시흥시 대야동 상곡(上谷)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평창이문(平昌李門) 이계동(李季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