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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발발(勃發) 직후, 선조나 한양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명장으로 소문난 신립장군과 이일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상황이 급변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21일 선조는 “오늘날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당해낼 자가 없으니 신은 오직 죽을 따름입니다.”라는 이일장군의 보고서를 받았다.
선조는 만약의 경우 파천(播遷:임금이 다른 곳으로 피난)하기 위해 은밀히 미투리 등 피난 물품을 준비하고, 언제라도 쓸 수 있게 말을 대령하게 했다.
그리고 궁궐 밖에 살던 자녀와 사위, 며느리들을 불러들였다.
선조의 자녀들이 입궁하자 파천 소문이 퍼져나갔고,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4월 27일 상주 전투에서 이일장군이
敗北했다는 소식이 한양에 알려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도성(都城) 밖으로 나가는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다. 조정 신료와 종친들은 파천 소문에 분개하며 결사 항전을 부르짖었다.
결국 선조는 “종묘와 사직이 이곳에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며 파천하지 않겠다고 공언(公言)했다.
그러나 播遷소문 자체가 민심을 洶洶
하게 만들었고, 대신들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자를 세울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4월 28일 급하게 장남인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됐다.
4월 29일 저녁, 방어선으로 구축되었던 충주에서 신립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양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날, 한밤중에 播遷이 決定되면서 선조는 두 가지 措置를 취했다.
첫째는 宗廟와 社稷의 신주를 모셔와 파천 행렬에 동참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왕자들을 派遣해
근왕병(勤王兵) 을 모집하는 것이었는데, 둘 다 파천반대론을 누르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선조의 아들 7명 중 2명은 미성년이었으므로 세자 광해군을 제외하면 4명의 왕자들을 모두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그 중 임해군과 순화군 두 명만 각각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게 했다.
선조와 떨어져 근왕병을 모집하게 된 임해군은 21세로 이미 성년인데 비해 순화군은 13세에 불과했다.
반면 선조를 수행하게 된 신성군과 정원군은 각각 15세, 13세였다.
세자 광해군은 18세였다.
13세의 순화군이 15세의 신성군을 제치고 근왕병 모집에 나서게 된 이유는 선조의 편애 때문이었다.
선조는 후궁 중에서 숙의 김씨를 가장
寵愛했다.
당연히 아들들 중에서 숙의 김씨 소생인 신성군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실 선조가 임진왜란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룬 가장 큰 이유는 신성군 때문이었다.
선조는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 했지만, 왕비의 아들도 아니고 후궁 소생 중 첫째도 아니어서 그렇게 하지못했다.
선조는 조금 더 때를 기다렸다가 신성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뜻밖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부득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던 것이다.
선조는 신성군으로 하여금 자신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만약의 경우 세자 광해군을 대신하게 할 생각이었다.
신성군의 친동생인 정원군 역시 숙의 김씨 소생이었기에 선조를 隨行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勤王兵을 모집하게 된 임해군이나 순화군은 상대적으로 선조의 관심 밖에 있던 왕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근왕병을 募集하기 위해 咸鏡道와
江原道에 왕자를 파견한 이유는 파천 길에 오른 선조의 1차 목적지인 개성이나 평양이 있는 黃海道와 평안도에서 왕자들이 앞장서 근왕병을 모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함경도와 강원도는 태조 이성계가 태어나 활약하던 곳으로 조선 왕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최精銳 병력으로 손꼽히는 6진의 騎馬隊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4월 30일 새벽, 임해군은 창덕궁을 떠나 함경도로 향했다.
조금 앞서서 순화군도 강원도로 갔다. 5월 3일 강원도 금화에 도착한 임해군은 그곳에서 왜적이 이미 춘천을 占領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화와 춘천은 하루 일정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임해군은 즉시 북으로 길을 재촉해 5일에는 철령을 넘어 함경도의 안변에 도착했고, 이어 9일에는 원산 주변에 있는 덕원에 도착했다.
임해군은 그곳으로 함경도 감사와 군사령관들을 소집했다.
이에 呼應해 북청에 주둔하던 남병사 이혼이 4,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왔다.
이 병력이 당시 조선 관군 중에서는 최정예 병력이었다.
임해군은 그중에서 200명을 선발해 선조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전쟁터로 가게 했다.
이 외에도 임해군은 함경도 주민들의 항전 의지를 북돋우기 위해 말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세금을 대폭 감면해 주었다.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 활동은 몇몇 부작용(강제적 물자 收奪이나 불법적 노동력 徵發)을 야기하긴 했지만 현실적인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5월 27일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평양의 선조는 물론 덕원의 임해군 역시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할 覺悟를 하고 의주로 갔고, 임해군은 마천령을 넘어 함경북도의 경성으로 퇴각했다.
그 당시 순화군은 임해군과 함께 있었다. 임진강을 건넌 왜적은 황해도 평산에 이르러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로 각각 길을 나눠 북진했다.
함경도로 쳐들어간 왜장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
당시 우리 관군은 왜적의 침입로를 철령으로 예상하고 강원도 회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가토 기요마사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함경도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가토는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함흥으로 진출한 뒤 북청, 단천을 지나 계속 북진하면서 왕자들을 追擊했다.
6월 11일 선조가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자, 함경도에는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경성에서 회령으로 퇴각했다가 7월 23일 회령 사람들에게 捕虜로 잡혔다.
임해군과 순화군의 회령 도피 소식이 전해지자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대신을 잡아 적에게 항복한 것이다.
함경도 사람들은 선조에 이어 왕자들 역시 명나라로 망명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토가 회령에 들어왔을 때 왕자를 비롯한 대신들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가토는 “이 사람들은 너희 국왕의 친아들과 조정 대신들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困辱을 주는가?”라며 結縛을 풀게 했다.
이후 가토는 6진 지역을 모두 접수하고 9월 초에 안변으로 撤軍했다.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역시 안변으로 끌려갔다.
그때 가토는 돗자리로 싼 가마를 만들어 왕자들을 옮겼다.
밤이 되면 방문을 새끼로 얽어 묶고, 수많은 步哨兵을 세우고 밤새 불을 밝혔다.
7월이 되어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7월 8일 한산도대첩에 이어 7월 17일에는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이끄는 3,500명의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攻擊했다.
비록 이 공격은 실패했지만 조만간 명나라 군대 10만명이 출병(出兵)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선군의 사기는 높아진 반면 왜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가토를 비롯한 대부분의 왜장은 명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해 대책을 세우고자 했다.
가토는 조선 땅을 분할함으로써 일단 조선과 화친했다가 장기적으로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貫徹시키기 위해 가토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이용하려고 했다.
즉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대동강 이남지역 또는 한강 이남지역을 받아내려는 계산이었다.
대동강과 한강 사이를 절충지대로 하고, 대동강 이북은 조선이 한강 이남은 일본이 점유한다면 명나라가 합의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명은 요청에 의해 참전하기는 했지만 확전을 원하지는 않았고,
다만 일본군이 명나라로 침입할 것을 憂慮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군이 한강 이남에 머물겠다고 하면 명나라는 굳이 반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조선이 반대한다 해도 명나라가 밀어붙이면 협상은 관철될 수 있었고, 게다가 왕자들까지 풀어주겠다고 하면 협상 타결의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가토는 捕虜로 잡은 이홍업에게 자신의 협상안을 주어 선조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여기에 더해 왕자들의 편지는 물론 수행 대신들의 편지도 함께 보냈다.
가토의 협상안과 왕자들의 편지가 선조에게 전해진 때는 10월 19일이었다.
당연히 조정 중신들은 가토의 협상안을 결사반대했다.
선조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조는 협상안을 가져온 이홍업을 사형시킴으로써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한편, 명나라에도 강력한 반대 의지를 알렸다.
조선군과 왜군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1592년 12월 26일에 4만3,000여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전세(戰勢)가 바뀌었다. 1593년 1월 8일 조명연합군은 평양을 奪還했다.
이여송은 그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奪還했고, 1월 24일에는 서울 근교의 벽제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왜적을 얕보던 이여송은 벽제역에서 誘引술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놀란 이여송은 평양까지 후퇴하고
더 이상 진격하려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일본과 協商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명나라는 임해군과 순화군 석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두 왕자를 송환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왜군과 협상하자고 하면 선조가 결사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선조의 서장자(庶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은 선조의 둘째 서자(庶子)인 광해군(光海君)의 친형으로 선조의 제2계비인 공빈 김씨 공성왕후(恭聖王后)의 소생으로 어머니 공빈 김씨가 광해군을 출산한지 2년 후인 1577년 6월 13일 죽었다.
6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일은 임해군은 왕자로서의 품격을 찾아볼 수 조차 없는 데다가 어릴때 부터 사람들을 함부로 구타하고 죽이며 토지와 노비를 강탈하는 등 나쁜 짓을 일삼고 다녀서 아버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반면 둘째 아들인 광해군은
형 임해군과는 여러모로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착하고 늘 책을 가까이하고 평소 효성이 지극하며 선조의 말를 잘 따랐다.
또 선조의 여섯째 아들 순화군(順和君 : 1580년 10월 출생)은 선조의 제4계비인 순빈 김씨 소생으로 선조의 아들 중에서 가장 포악해서 순화군은 임진왜란 당시에 13살로 빈전(殯殿 :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상여가 나가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던 곳)의 궁녀를 겁탈하고 여러명의 백성을 죽이자
선조는 ''과인은 경악을 금할수가 없다.
순화군은 절대로 사람 노릇을 못 한다.,,고 하였다
선조 어진
선조수정실록에 선조가 순화군에 대해서 언급한 기록이 있는데 선조가 말하기를 "순화군의 성격은 극히 이상하여 어릴 때부터 천성적으로 잔인하고 사람을 때려 죽이는 짓이 잔혹하기 그지없으니 과인이 더욱 괴롭기만 하다.
비록 주색잡기를 하는 것은 미친 사람이라고 취급을 하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새나 짐승을 죽이는 데도 잔인하게 죽이면서 만족해 하니, 내 이미 그가 사람 노릇을 못 할 줄 알아 마음 속으로 항상 걱정하는데 성장하면서 그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과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부자간의 정으로 아비가 자식을 위해서 의리와 은혜로 숨기고 덮어야 했기 때문에 과인이 조정 대신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할 뿐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593년 2월 20일, 명나라 사신 풍중영은 안변에서 가토와 만나 강화(講和)회담을 가졌다.
가토는 “내가 명나라 사신과 회담하는데 조선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없습니다.”라며 통역을 위해 배석했던 조선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풍중영과 단둘이 하루 종일 회담했는데, 그 자리에 참여한 조선 사람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아마도 가토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협상안 즉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대동강 이남지역 또는 한강 이남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가토는 화친의 전제조건으로 영토 할양을 약속받으려 했고, 반면 풍중영은 먼저 왕자들부터 송환하라고 주장했다.
가토는 본토(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회답이 있어야 하므로 마음대로 풀어줄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고,
선조가 영토할양에 관해 어떤 서한도 보내지 않았음을 확인한 가토는 회담을 決裂시켰다.
그 대신 漢陽에서 강화회담을 재개키로 했다. 당시 임해군과 순화군은 협상이 決裂되면 일본으로 끌려갈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가토에게 끌려 한양으로 왔고 같은 집에 머물렀다.
그때 한양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일본군은 물론 왕자들 역시 먹을 것이 없어 굶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재개됐다.
가토는 이전과 같은 요구를 했고, 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화 회담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명과 일본 사이에는 暗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즉 일본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가고, 그 대가로 명은 일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묵인이었다.
1593년 4월 19일, 일본군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갔고, 이후 명군은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때 임해군과 순화군은 부산으로 끌려갔다.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명나라는 일본의 남해안 지역 점유를 묵인했고, 일본은 명나라 군대의 조선 주둔을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영토할양을 통한 화친이라는 가토의 협상안이 貫徹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묵인의 증표로 1593년 7월 임해군과 순화군은 명군에게 넘겨졌다. 포로로 잡힌 지 1년 만이었다.
선조의 입장에서 왕자들의 송환은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조선을 조선으로 보전하기를 원한다면 선조는 영토 할양을 인정하거나 묵인하는 그 어떤 상황도 容納할 수 없음을 천명해야 했다.
그러자면 영토할양 默認의 證票로 송환된 두 왕자를 단호하게 거부하거나 처단해야 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지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선조는 두 왕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처단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두 왕자를 수행했던 臣僚들만 苛酷하게 處罰했다.
선조는 자신과 왕자들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조금도 지지 않은 것이다.
이런 선조가 명나라 장수들에게 왜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 달라고 요구했을 때 얼마나 呼訴력이 있었을까?
실제로 명나라는 선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이나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자칫 왜군의 남해안 점유가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었다.
이런 위험한 狀況은 정유재란(1597년 선조 30년)에서 조선이 승리함으로써 끝날 수 있었다.
이렇듯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남해안 점유가 몇 년간이나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해서이고, 거기에 더해 선조의 무능함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