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0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루카 10,38-42
필요한 것은 하나 뿐: 첫 도미노를 찾아라!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마르타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봉사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는 신앙인을 의미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육체적인 봉사를 열심히 하는 신앙인으로서는 성당에 앉아서 기도만 하는 이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기도뿐이라고 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선택’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도 우선으로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칫 그 우선순위를 잊고 살 경우가 많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1965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수녀원에서 수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활발한 성격 때문에 수녀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녀는 수녀원장의 권유로, 트라프 대령의 집에서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일을 하게 됩니다.
트라프 대령의 집에는 7명의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령은 아내의 죽음으로 아이들을 군인처럼 교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규율만을 강조하는 트라프 대령에 반기를 든 마리아는 그 아이들에게 사랑과 자유를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음악입니다.
음악의 즐거움을 전해줌으로써, 그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와 같은 노래를 통해 아이들에게 음악의 기본을 가르치면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자연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지냅니다.
음악은 마리아와 아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덕분에 아이들은 다시 웃음을 찾게 되고, 마리아 역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자기 삶의 방향을 찾게 됩니다.
마리아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트라프 대령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며, 결국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영화는 마리아와 트라프 가족이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으로 클라이막스를 이루며, 결국 그들은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피신하게 됩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마리아가 음악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트라프 가족의 삶에 변화와 행복을 가져다준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리아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음악을 선택하니 나머지는 저절로 잘 되어갔습니다.
이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 다 집중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중해야 할 하나를 잘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아침에 명상하는 한 시간을
꼭 가졌습니다.
빌 게이츠는 일 년에 두 번 생각하는 일주일을 가집니다.
마치 우리의 피정처럼 혼자 산속의 작은 집에서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이런 것들이 위대한 발견을 하게 하는 그들이 선택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이런 루틴을 절대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 중요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쏜턴은 “모든 위대한 변화는 차례로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가 도미노의 첫 시작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물리학 저널에 따르면 한 개의 도미노는 그다음 세워져 있는 도미노가 1.5배에서 많게는
2배까지 커도 넘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1cm 도미노로 시작해서 도미노 17개만 있으면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 롯데타워를 넘어뜨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원씽』의 저자 게리 켈러는 남다른 성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 도미노 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삶은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들로 뒤덮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세우고 줄을 맞춰 잘 세운다면 최초의 단 하나, 그것만을 움직임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저절로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게리 켈러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그리고 그것이 나머지 모든 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것만 찾으면 다른 일은 할 필요가 없거나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기도’입니다.
사제라면 첫 도미노를 무엇으로 두어야 할까요? 성경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친절하게 그 해답을
알려줍니다.
사도들이 여러 일로 바쁘다 보니 정작 첫 번째 도미노를 움직일 힘도 없게 되자 일곱 부제를 뽑아 그들에게 나머지 일을 맡깁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첫 노미노에만 신경 쓰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
사제가 성사를 집전하는 행위를 하는 직무라고 생각하던 저에게 큰 울림을 준 말씀이었습니다.
사제는 사실 성사를 집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기도로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몰방해야 합니다.
그것만 하면 성사 집전도 쉬워집니다.
말씀 준비가 잘 안되었을 때는 미사가 두려워집니다.
그러면 미사 집전에 게을러지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말씀 준비가 잘 되었다면 미사가 기다려집니다.
내가 깨달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제에게 첫 번째 도미노는 역시 말씀 묵상과 강론 준비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0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루카 10,38-42
평신도가 성화(聖化)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전형적인 마르타 스타일인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살짝 빈정이 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가 마르타가 아니라 관상(觀想)에 전념하는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시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깊이 있는 기도생활이나 영적 생활에 몰입할 수 없는 평신도들께서 약간 속이 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담컨대 절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이전, 3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평범한 평신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30년의 세월은 복음사가조차 별로 쓸 말이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청년의 삶을 사셨던 나날이었습니다.
때로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도 하셨을 것이고 마당도 청소하셨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동고동락하셨던 것입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도와 묵묵히 대패질에 전념하셨을 것입니다.
다 만든 물건을 납품하러 다니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이 따위로 물건을 만들었냐’는 주문자의 딱딱거림에 화도 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30년이란 세월동안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참 인간으로서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일상적 삶의 가치’를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평신도들께서 참으로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 가야하는 가를 몸소 삶으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우리의 이 일상적인 일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마주치게 되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일상의 삶은 결코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사 안에 늘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는 노력(Finding God in All Things)을 계속할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기도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상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영성과 관련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참으로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교회사 안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은 그렇게 적극적이었고 자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능동적이었던 박해시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교계제도가 확립되어가면서 점점 수동적으로 변화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했던 초기교회의 탁월했던 평신도들의 영성이었는데, 성직자들의 역할이 강화되어가면서 즉시 힘을 잃어갔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에 대한 불투명한 이해와 불충분한 개념정립은 평신도 자신들에게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불이익과 손실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신도 영성의 쇠락은 교회의 퇴보와 늘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과제 하나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 영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입니다.
평신도들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평신도들이 지닌 카리스마와 창의력을 존중하고 교회 쇄신과 발전을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제2중대가 절대로 아닙니다. 장교인 사제들을 맹목적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졸병 역시 절대로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수가 부족하고 그들의 업무가 과중하기에 이를 보완해주기 위한 존재도 결코 아닙니다.
평신도들 역시 성직자나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복음적 완덕에로 불림을 받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단 평신도들께서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이나 성전 안에서 살지 않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의 성화 여정은 당연히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도자가 평신도의 삶을 살길 원치 않으시듯이, 평신도가 수도자나 사제의 영성을 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각기 소명에 성실하며 각자의 카리스마, 달란트에 따라 복음적 삶을 다양하게 표현하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나 수도자 못지않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영성을 지닙니다.
평신도 영성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도피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그 구조들 안에서 육화하여 복음화하며 그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성화하고 또한 성화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평신도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며 성화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10.화."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 42)
가족은
공동체는
서로의 좋은 몫을
빼앗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가장 좋은 몫을
선택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주님께
마리아는 기쁘게
머물 줄 아는
좋은 몫을
선택합니다.
주님과
일상을
함께 할
가장 좋은
몫입니다.
아집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몫입니다.
주님의 말씀따라
사는 가장 좋은
몫입니다.
모두 다
이루어주시는
주님께 맡기는
좋은 몫입니다.
더 이상
염려와 걱정에
좌우되지 않는
좋은 몫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가장 좋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 좋은 몫입니다.
걱정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모두의 아픔을
감싸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먼저 주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뜻은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필요한 마음입니다.
분주한 마음이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이 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마르타도
마리아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을 나누는
오늘입니다.
우리 마음 안으로
모셔들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우리의
소란스러움을
내려놓습니다.
꼭 필요한
한 가지는
우리를
살게하시는
주님뿐입니다.
마리아처럼
좋은 몫을 선택하는
가장 좋은 오늘
되십시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