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8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 신심이 계속되면서 동방 교회에서 먼저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7세기 무렵부터 이 축일을 지내 오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9월 8일)을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로
정한 것이다.
☆☆☆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1,1-16.18-23)
Behold,
the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서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고 예고한다.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께서는 그들을
내버려 두실 것이며, 태어날 이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목자로 나설 것이다(제1독서). 다윗의 후손인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로써 동정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을 낳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졌는데,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경에는 성모님의
탄생에 대하여 언급하는 부분이 따로 없습니다.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는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그분께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미리
성자의 어머니로 준비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한 여인에게서 태어날 아드님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오래된 예언을
인용합니다. 미카 예언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이 베들레헴, 곧 다윗의 고향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리라고 예고하였고, 이스라엘은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 약속의 실현을 기다리는데, 그 아이가 이스라엘에게 평화가 될 것입니다. 한편 마태오 복음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고 하리라.”는 칠백 년 전의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께 이르러 성취되었음을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긴 족보도 세세 대대로 준비되어 온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흔적을 보여 줍니다. 기나긴 시간을
거치면서 하느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공들여 이룩하신 역사! 성모님께서는 그 하느님 계획의 마지막 고리이십니다. 성모님의 탄생에서 우리는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께서 역사 안으로 직접 들어오실 때가 되었음을 감지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도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속 사업에 특별한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천명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한 이 신비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성모님께서 고백하셨듯이 분명 그분의 겸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방독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에는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만 아는 도구였지만, 이제는 방송(주말 예능 프로에도 나오더라고요)을 통해서도 많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방독면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방독면은 오염된
공기를 걸러 내는 마스크입니다. 만약 전쟁 시에 화학 가스가 살포된다면 이 방독면을 통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가스를 막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방독면을 직접 써 보았고, 화생방 훈련 때 가스를 막아준다는 것을 체험했지요. 그런데 이 방독면도 막을 수 없는
가스가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네요. 무슨 가스일까요?
바로 방귀냄새라고
합니다. 방독면 흡입구의 정화부는 공기 입자보다 작은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가스가 침투했을 때 이를 막고 정화시킵니다. 하지만 방귀 입자는
그 구멍보다 훨씬 작아서 방독면은 냄새를 막을 수가 없다고 하네요. 가스에 있어서는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방독면을 생각하다보니 문득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즉, 성당 다니는
것이 마치 천하무적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요. 그래서 성당에만 나가면 죄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정말로 천사같이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아니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래?”
성당 다니는 것이
완벽한 방독면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미사 때만이라도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저 성당 다니는 것만으로 모든 죄를 걸러내서 천사처럼 깨끗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은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로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낳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래서 하늘로 직접 승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낳았다는 사실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그리고 그 뜻에 맞춰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통해서 그런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성당 다니는 행위 하나로, 레지오 활동 하나로, 구반장 모임의 참석만으로 성모님과 같은 영광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받으셨던 그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 또한 어떠한 순간에서도 놓지 않았던 하느님께 대한 믿음 등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우리의 삶을 많이 반성해야 합니다.
성당을 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보다 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본인의 노력을 통해서만이 아주 작은 입자와 같은 죄 역시 걸러
낼 수 있습니다.
역경은 희망에
의해서 극복된다(메단드로스).
사람들과 어떤
만남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맞이하면서 성모님을 묵상하다가 성모님과 엘라사벳의 만남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만남에서 성모님께서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지요. 이 노래와 두 분의 대화를 통해 이들의 만남은 하느님 역시 함께 하는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사람들과 어떤 만남을 하고 있습니까?
전에 성당의
카페에서 자매님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옆자리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드라마 이야기, 그러다가 아파트 당첨 이야기를 비롯한 돈
이야기가 주였습니다. 성당에서의 모임이지만, 주로 세상살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삶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마음 안에
세상일에 대한 것들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과의 대화 역시 세상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세상 문제들을
떠나, 하느님 구원에 대한 참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만남을 과연 갖기 힘든 것일까요? 여러분은 과연 누구와 생명의 노래,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까?
-조재형신부-
한 달에 한 번씩
적성 성당 친구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번 달에는
경복궁을 다녀왔습니다.
비가 온 뒤의
경복궁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경회루도
걷고,
추억의 거리도
걷고,
민속 박물관도
보았습니다.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만
24세 이하의 관람객은
‘무료’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무료로 관람을 하였습니다.
아직
24살이 안 된 분들은
경복궁 관람이 무료이니 가보시기 바랍니다.
만
65세가 넘으면
무료입장이라고 하니,
저도 앞으로
12년이 더 지나면
무료 관람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달에는 기차를
타고 남이섬엘 가려고 합니다.
저와는 큰 인연이
없어도 밤하늘의 별은 수십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저에게 빛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나와
만나는 이들은 얼마나 큰 인연입니까?
지금 당장 화려하게
보이는 ‘재물,
권력,
명예’는 블랙홀처럼
우리의 영혼을 어둠 속으로 빨아들입니다.
중요한 것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제 곧 가을이 올
것입니다.
노랗게 변해가는
은행잎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코스모스를 볼 수 있다면,
하늘공원에 펼쳐진
억새들이 바람과 더불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맺어지는 사랑과 은총의 인연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예고된 것이라고 합니다.
성모님의 잉태는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감사할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을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믿어주자고 이야기
합니다.
적성의 친구들은 또
다시 일상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민정이는 매일
유치원에 출근해서 아이들과 지내야 하고,
현지는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논문을 써야 하고,
자취를 하는
동현이는 세탁기를 돌려야 하고,
학자금 대출을 받은
새진이는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 지원
학생들과 면담을 해야 하고,
새로 온 신부님과
성소 개발에 대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합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영혼으로 빛나는 사람들이 있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 축일입니다.
우리는 생일을
맞이하는 분들에게 선물을 하곤 합니다.
선물은 주는
분이나,
받는 분이나 모두
즐거운 법입니다.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기도,
우리들의
선행,
우리들의 나눔을
성모님께서는 생일 선물로 받고 싶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을 드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향성(下向性)의
성모님
-양승국신부-
우리
인간들의 삶은 대체로 ‘상향성(上向性)’의 충동에 따라 움직입니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특별히 이 상향성의 충동이
강하다고 합니다. 아래를 쳐다 볼 줄 모르고 무조건 위만 쳐다본답니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급격한 압축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가
봅니다.
좀
더 많은 급여, 좀 더 높은 지위, 좀 더 안락한 생활, 좀 더 많은 권력, 좀 더 풍요로운 인생...그러다보니 작고 소박한 삶이라든지 겸손하고
청빈한 생활의 가치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기 어려워집니다. 상향성이라는 또 다른 우상숭배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본질적으로 지니고 계시는 속성은 철저하게도 ‘하향성’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높은
곳에서 맨 밑바닥으로, 승리에서 패배로, 부유함에서 가난함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
사목활동의 정점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 그 무력함 가운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 즉 철저한 겸손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께서 그냥 편하게 하느님으로 계시지 않고 때로 질퍽질퍽한 진흙탕 같고, 때로 악다구니가 끊이지 않는 전쟁터같이 소란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느님의 하향성이요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생애 역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철저하게도 하향적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일생을 묵상하다보면 진정한 하향성의 삶이 무엇인지 참된 겸손의 덕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지만 절대로 우쭐한 법이 없었습니다. 구세주 탄생이란 하느님의 큰 사업에 가장 큰 협조자로서 뭔가
기대할 만도 한데 결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한평생 자신 앞에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진의를 찾아나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별 것도 아닌 인간 존재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첨단과학이 점점 발전하면서, 인간은 큰 착각에 빠집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의 자리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니 인간 측의 가장 큰 문제는 겸손의
결핍이군요. 더 큰 문제 중에 하나가 겸손하게 살면 얕보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의 겸손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성모님은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신 분이십니다. 장차 구세주의 어머니로 살아가며 누리게
될 세속적 영예나 특권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작은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셨기에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오직 메시아를 담아내기 위한 질그릇 같은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았던 성모님의 겸손, 여기에 그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 성모님,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예수님 뒤에서 조용히 서 계시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성모님, 늘 예수님 그늘에 서계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이토록 겸손하셨던 성모님이었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인류의 어머니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축祝!
성모님 탄일誕日 -어머님
은혜-
-이수철신부-
오늘은
우리 모두의 사랑하는 어머니, 성모마리아 생신날, 하늘도 기뻐하고 땅도 춤춥니다.
이번
성모님 생신날은 참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살아계시면 100세가 되시는 저희 육신의 친모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살아생전
제대로 어머님 생신을 기억하지도, 차려드리지도 못한 불효한 자식이었기에
더
많이 생각납니다.
사실
50대에서 70대 이르는 자식들의 조선땅 어머니들은
온통
헌신적 삶이 또 하나의 성모님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어머니를 그리며 애창했던 ‘어머님 은혜’ 노래 두 곡이 생각납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하늘 그보다도 높은것같애-
이
곡은 제가 70년대 초등학교 교사시절 아이들이 애창했던 곡입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손 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아래
곡은 저의 여섯째 숙부가 회갑축하연에서
어머님(저에겐
할머니)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것을 목격했기에 지금도 감동이 생생합니다.
하늘보다
높고 하늘보다 넓은 어머님 은혜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 은혜 하나뿐 입니다.
어머님
사랑을 통해, 어머님 은혜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하느님 은혜를 깨닫습니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님의 은혜를 기리는 날입니다.
사실
궁극의 축일은 하느님 축일 하나뿐입니다.
모든
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축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육신의 어머님들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어머니 성모님이 계십니다.
세상
떠나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의 어머님들은 모두 성모님 안에 살아계십니다.
하여
나이들어 고향을 잃은, 어머님을 잃은 많은 신자들이 고향집을 찾듯이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성모 마리아 어머니를 찾아 본향집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믿고 사랑하시는 분을 구세주의 어머니로 파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얼마나 치밀하며 기다림의 인내는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대로
하느님 당신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닮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미카
예언자를 통해 성모님을 통한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됩니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업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미카의
예언은 그대로 성모마리아와 착한목자 예수 아드님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부전자전이라하지만
신앙과 사랑에 있어선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하고 싶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 배경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을, 사랑을 100%보고 배우는 자녀들입니다.
평화의
어머니였기에 아드님 역시 어머니를 닮아,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는 예언이 실현되어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 고백합니다.
‘평화를
주소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리스도처럼 주위 분들에게 평화가, 축복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밖에서
평화를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평화가, 성모님의 평화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주도면밀한 분입니다. 미카
예언자로 부족하여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구세주 탄생을 예고합니다. 하느님의
온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성모님과 예수 아드님이십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세상
눈으로,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하고 불우한 우리의 어머님 성모 마리아였고
그
절정은 ‘피에타의 성모님’일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중인 어머님들은 ‘피에타의 성모님’에서 얼마나 큰 위로의 구원을 체험하는지요.
세월호
사건에서 보다시피 ‘십자가의 주님’처럼, ‘피에타의 성모님’도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한 현재진행형입니다.
예수님의
잉태과정은 얼마나 위태했는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사실을 누가 인정하겠는지요. 하느님은
마리아가 파혼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당신
천사를 통해 약혼자 의로운 사람, 요셉에게 파견하여 그의 마음을 위무하시며 명령하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철저히
하느님 사랑의 섭리 안에 있는 마리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를 기억하여 예수라 작명까지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얼마나 길게 이어지는지요. 하느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같습니다. 하느님의
영원에서 보면 한 순간입니다. 이
모두를 직시하면서 마리아가, 예수님이 탄생하기까지 기다리신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가 놀랍습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 알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말그대로 '찬미의 어머니'였습니다. 하여
매일 저녁기도때마다 부르는 성모찬가요 잠자기전 끝기도 마지막 찬가도 성모찬가입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아,
찬미의 열매가 바로 성모님의 가난과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은 그대로 우리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의 우리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온갖
찬미를 마땅히 받으시리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어머님인 성모마리아 탄생을 축하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탄생하신
하늘 같은 성모님께 축시를 바치며 강론을 마칩니다.
-자주/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이/하늘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만으로/채워질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안에/빛나는 태양 오,
어머니, 마음 하늘 안에/빛나는 주님이십니다.-
아멘.
자기홍보(Pr)시대
-반영억신부-
현대를 자기피알
시대라고 합니다. 자기를 알려야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이력을 과대 포장하고 심지어 거짓으로 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는
법이고 마침내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으로 피알시대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째든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바라며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모습에
견주어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한 요셉은 그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마태1,19).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리아를 위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친절하며 그의 성숙한 인간성이 하느님의 계명과 잘 융화되어 빛을 발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 인간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조사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으니 요셉에게는 얼마나 큰 고뇌와 의혹, 심사숙고, 마음의 동요, 당황스런 모습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드러내어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바보이지만 그는 역시 의로운 사람으로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는 온유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버지의 특권과 아이를 낳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마태1,24) 마리아는 아기를 낳고 요셉은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뜻을 갖은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마태1,21).
요셉의 마음고생
못지않게 마리아의 마음도 고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까닭입니다.(루가1,45). 마침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았고, 예수님의 생애전체 안에 항상 함께하시며 한 번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즉 육화,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을 거치지 않고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못 누릴 따름입니다(차동엽). 그러므로 성모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마리아처럼 굳은 믿음과 온유함 속에 꿋꿋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주님 안에 머물면 주님께서 필요할 때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묵묵히 위엄과 사랑과 믿음 안에서 피할 것 피하고, 알릴 것을 알리는 지혜를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리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일상에서
복된 삶을 사는 길
-기경호신부-
구원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 안에서의 행복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비종교인들처럼 신앙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수도축성을 받고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면 과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행복과 기쁨이란 그만큼의 땀을 흘리고 공을 들이고 자신을 내어주고 견디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만큼 치열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모님을 본받아 일상에서 복되게 살아가는 길을
찾아본다.
오늘 복음은
서두에서 긴 예수 탄생에 이르는 긴 족보를 열거한다. 곧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지속되어온 구원의 역사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어 ‘함께
하시는 하느님’(1,23; 28,20) 그분이 구세사에 들어오심,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하심, 죄를 사해주심, 함께 하심을 함축하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핵심적으로 제시해준다. 여기서 동정녀의 잉태는 사실 부차적인 이야기로 나온다.
성모님은 시골
마을의 한 여인으로 태어났다. 누가 보아도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보잘것없는 탄생은 인류사를 바꿔 놓을 만큼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시작이었다. 이처럼 보잘것없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리는 영의 안목을 길러야
하겠다.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기쁨의 서곡이며 온 세상의 희망의 서광이 된다. 왜냐하면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 곧 하느님의 축복과 생명, 기쁨과 희망의 손길이
뻗쳐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탄생으로 평화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까이에 평화를 가져다주시게 되었다. 성모님을 통한 예수님의
탄생, 하느님의 강생은 온갖 억압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치유로 드러나는 사랑의 신비 자체이다.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의 삶이 예수님을 잉태하신 분으로 ‘복되게’ 사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천사로부터 처녀의 몸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인간적인 고통이 따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라고 대답하셨다. 그분이 복되신 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깊이 되새기심으로써 ‘말씀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에서 말씀의 경청과 수용, 말씀의 실행이 복된 삶으로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을 품어
잉태한다는 것은 성모님께는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다. 그분은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말없는 가운데, 철저히’ 따르시면서 전 생애를 온전히 되돌려 드리고 헌신하셨다. 동정 마리아는 침묵 가운데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분의 사랑으로 모두를 품을 줄 알았다. 그분은 이 사랑의 여정을 항구히 걸으셨기에 복되시다.
우리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사소한 일상사나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담겨 있는 구원의 표지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자.
성모님처럼 말씀에 귀기울이고 말씀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잉태하는 ‘품음과 헤아림의 영성’을 실천하자.
성모님처럼 착하고
거룩한 표양, 사랑의 견딤을 통해 하느님을 낳는 어머니들이 되도록 하자. 성모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하실 임마누엘’을 잉태하시어 우리에게
낳아주셨듯이 우리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내 마음에 하느님의 선과 사랑, 진리와 정의를 품고 이 길을 겸허히
걸어갈 때 기쁨과 행복이 시작되리라!
하느님의
지문
-김홍석신부-
사제품을 일주일
남기고 성직에서 도망치려 할 때 대품 피정 중이던 수도원 뒷문에서 원장 수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래도 고해성사는
보고 나가자는 마음에 성사를 청했습니다.
이 성사를 끝으로
이곳을 나가려 한다고 고백하는 제게 수사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래, 김 부제는
나가서 무엇을 할 계획인가?”
“뭐든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제 대답에 수사님은
씨익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나가서 뭘
하든 실패하게 되어 있어!”
떠나려는 이에게
축복은커녕 저주를 하다니,
저는 울컥해서
대들었습니다.
“왜요? 제가 왜
실패하는데요?”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자네가 어머니 배 속에서 만들어진 그 순간부터 하느님께서 손수 조물조물 쥐어 만드셔서 자네 몸에는 온통 하느님의 지문이 찍혀 있지!
하느님의 지문이
찍힌 하느님의 것이 하느님을 떠나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저는 화가 나서
방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제 온몸에 찍혀 있다던 하느님의 지문을 찾다가 그만 목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저의 온몸은 제가
모르던 하느님의 지문 투성이었습니다.
예수님 족보
이야기는 누가 누구를 낳았냐를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하느님의 지문이
예수님을 통해 오늘 우리들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들려주시기 위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 1,23)
-오상선신부-
성모님 탄생
축일, 말하자면 성모님
생신날입니다. 우리 어머니 생신
때 유일하게 온 가족이
다 모이기에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축제일입니다. 올해는 메르스
때문에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 생신도 같이
못지냈습니다. 늦었지만
가을에라도 함께 모이자고들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형제가 되신
예수님의 어머니시니 생신 축하받아
마땅합니다. 오늘 성모님께
인사올릴 때 성모님
생신축하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봅시다.
성모님이 낳으신
예수님의 이름은 사실
'임마누엘'이라네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뜻이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늘
느낀다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함께 계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아직 부활하시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계신 분인지 웃기는
소리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으시나요? 복되십니다~~^^
-한상우신부-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생명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탄생보다 더 진실된
생명의
힘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장 강력한
생명의
힘은 탄생입니다.
모든
탄생은 하느님을 향해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은 믿음의
탄생입니다.
탄생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생명으로 생명의 역사를
쓰내려가십니다.
하느님의
시간안에서 생명은 사랑의
관계로 구체화됩니다.
마리아의
탄생은 사랑을 키워
나가는 어머니의
탄생입니다.
십자가의
어머니는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합니다.
먼저 이 길을
걸으신 어머니의
시작또한 탄생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어머니를 생각하는 탄생
축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탄생은 사랑과
동일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다시
향하는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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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