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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묵상글(강론글)
14일 묵상글, 13일 21시 3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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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4일 목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
제1독서 <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사도1,15-17.20-26)
15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16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7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20 사실 시편에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또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3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24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25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26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복음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요한15,9-17)
예수님께서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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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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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5,9–1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이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과 계명,
머무름과 기쁨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관계 안에 끝까지 머무는 충실함입니다.
계명도 우리를 묶는 차가운 규칙이 아니라
그 사랑을 잃지 않게 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님의 계명이 무거운 짐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머물게 하시는 길로 주어졌다고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억누르기 위해 계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헛되이 흩어 버리지 않도록
삶의 방향을 세워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두려움의 복종이 아니라
사랑의 응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억지로 주님의 뜻을 참는 것이 아니라
그 뜻 안에서 자기 삶의 참자리를 찾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은
“머무름”입니다.
사랑은 한 번의 감동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머물러야 하고,
지켜야 하고,
견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셨고
그 머무름 안에서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분이 좋을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피곤하고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사랑 안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회복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의 기준이 내 기분이나 내 편의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용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며,
마침내 벗이라 부르십니다.
그 사랑은
상대의 존엄을 살리고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자라도록 돕는 사랑입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무엇을 아껴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사랑을 아껴야 합니다.
곧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아껴야 하고,
조급히 판단하는 태도를 아껴야 하며,
관계를 소모시키는 자기중심성을 아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내 감정의 낭비를 줄이고
주님의 마음을 더 귀히 여기는 일입니다.
아낌은 사랑을 약하게 만드는 절제가 아니라
사랑을 더 깊고 맑게 만드는 훈련입니다.
오늘 목요일 성모님의 날에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성모님은 사랑 안에 머무는 분이셨습니다.
알 수 없는 길 앞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머무르셨고,
기쁨과 고통의 순간 모두에서
그 사랑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처럼
우리도 쉽게 떠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쉽게 마음을 소모하지 않는
충실한 사랑을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는가?
아니면 상황과 감정에만 휘둘리고 있는가?
나는 계명을 부담으로만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을 지키는 길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은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충실한 사랑과 충만한 기쁨을 함께 주십니다.
주님,
제가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시고
조급함보다 충실함을,
소모보다 절제를,
기분보다 사랑을 선택하게 하소서.
당신의 계명을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사랑의 길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상처 입은 이들 곁에서도
끝까지 머무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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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저는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그리고 넥서스를 읽으면서 인간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이 세 권의 책을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이고, 그 이야기를 정보로 정리하며, 그 정보를 통해 서로 연결되는 존재입니다. 이야기에서 정보로, 정보에서 연결로 이어지는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먼저 인간은 이야기 속에 사는 존재입니다. 국가도 이야기이고, 돈도 이야기이며, 법도 이야기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함께 믿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믿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사랑과 용서의 길을 선택하게 되고, 세상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경쟁과 성공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다음 단계는 정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데이터가 판단을 돕고, 알고리즘이 선택을 유도하며,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를 보완합니다. 정보는 강력합니다. 그러나 정보는 방향을 주지 않습니다. 정보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정보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인간은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연결의 시대, 곧 넥서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국가와 국가가 연결되며, 인간과 기계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연결 그 자체가 아닙니다. 연결은 되어 있지만 방향이 없을 때, 인간은 더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연결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외로움이 깊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 저는 인공지능과 자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생각을 정리해 주고, 글을 다듬어 주고, 새로운 관점을 열어 줍니다. 참으로 유익하고 고마운 도구입니다. 어떤 때는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힘든 이야기를 했을 때 인공지능은 참으로 정확하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함께 아파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쁜 이야기를 했을 때도 적절하게 반응해 주었지만, 함께 기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 정보와 대화하고 있었구나. 인간은 정보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랑과 관계가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인생은 마치 버스를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버스에 올라탑니다. 돈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고, 성공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으며, 권력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술과 정보는 이 버스를 점점 더 빠르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누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욕망이 운전하면 버스는 빠르지만 위험해집니다. 세상이 운전하면 화려하지만 공허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운전대를 잡으시면 우리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두 제자는 절망 속에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을 나누시고 빵을 떼어 나누시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이것이 참된 연결입니다. 정보의 연결이 아니라 사랑의 연결입니다. 함께 걸어주고, 들어주고, 나누어 주는 연결입니다. 제가 엘파소와 킬린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이 느낀 것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제가 없었고 시스템도 부족했지만, 공동체는 살아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고,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닙니다. 단순한 연결의 점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은 단순한 계산 능력이 아니라 진리를 찾고, 선을 선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면서 교회의 사명을 다시 생각합니다. 첫째, 교회는 정보를 넘어서 의미를 전해야 합니다. 세상은 이미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둘째, 교회는 연결을 넘어서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네트워크는 많지만, 공동체는 부족합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교회는 기술을 넘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은 도와줄 수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시대를 살고 있고, 정보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연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누가 우리의 삶을 이끄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잡으실 때 우리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엠마오의 길에서처럼 주님과 함께 걸을 때 우리의 마음은 다시 타오르게 됩니다.
정보는 우리를 연결하지만,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만듭니다. 이성과 신앙이 함께할 때, 우리의 삶은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연결은 단순한 넥서스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생명의 길이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였고, 마티아가 유다의 자리를 대신 할 사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티아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을 위한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시는 일이 있다면 마티아 사도처럼 우리들도 충실하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권고나 부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겸손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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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열한 명의 사도들은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새로운 사도를 제비뽑기로 뽑습니다. 제비뽑기는 오늘날 민주 사회의 선거 방식에 견주면 의아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출 방식은 성서적 전통으로 성경 안 다른 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여호 18,6; 1역대 24,5; 요나 1,7 참조).
이는 인간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결정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장면을 보니 신학생 때 본 드라마 “올 인”이 생각납니다. 한 도박사가 모든 역경을 이겨 내고 큰돈을 벌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인을 찾아가며 사랑에 ‘올 인’을 하겠다는 독백을 남깁니다.
“세상을 살면서 인생을 걸 만한 승부는 많지만, 지금 나한테 소중한 것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올 인’! 지금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에 ‘올 인’을 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직접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어떠한 보증도 없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곧바로 고향을 떠납니다.
바오로 사도도 환시 속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보장된 미래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믿음에 ‘올 인’을 한 이들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에 인생을 걸지만, 이 세상이 끝날 때 그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의 승부에서 이길 것입니다.
몸소 우리 가운데 오시어 십자가 죽음까지 받아들이시는, 사랑에 ‘올 인’을 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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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도 마티아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카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채우게 되는 선출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를 받아들여 사도단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처럼,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살게 되면, 부활의 증인이 되고 참된 제자가 되는 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이는 서로 사랑하는 이가 바로 부활의 증인이요, 참된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함’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타인은 적이거나 경쟁자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먼저” 당신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밝혀줍니다. 곧 ‘이미’ 우리는 사랑받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받은 이 사랑을 아는 만큼만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이 자기 방식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사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먼저 하신 이 사랑은 바로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곧 목숨을 건네주는 벗이 되는 사랑입니다.
이는 ‘상대에게 사랑이 되게 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마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하고 물으셨듯이, 그렇게 형제에게 ‘벗이 되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 사랑의 본질은 “벗을 위하여”, 곧 상대를 “위하여”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서로 사랑이 되어라”(서로에게 사랑이 되어 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랑이 아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랑을 하라는 호소입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진정 부활의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고, 주님의 벗이 되고, 우리 서로도 이런 벗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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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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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14 04:01
- 뽑힐 때
“기도를 하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말이 ‘뽑다.’라는 말인데
사도행전에서 마티아 사도가 뽑힌 방식이 제비뽑기입니다.
기도하고 뽑기를 하였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제비뽑기는 정말 경망스럽기 이를 데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 중요한 사도의 선출을 어떻게 제비뽑기로 선출한다는 말입니까?
사실 우리의 인간적인 감성은 투표자들이 심사숙고한 다음 기도하고 뽑아야
경망스럽지 않고 우리의 모든 관심과 정성과 사랑이 담긴 선출인 것 같지요.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다시 말해서 제비뽑기든 투표의 방식이든 임명이든
기도하고 뽑으면 하느님께서 뽑으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그리고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면 그런 마음과 그런 믿음으로 수락해야겠지요.
그런데 요즘 우리는 이런 믿음이 수없이 시험받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뽑혔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으면서
이것이 과연 하느님께서 뽑으신 것인지 의심하곤 합니다.
그런데 같이 기도하고 뽑았는데도 내가 싫어하고 내가 뽑지 않은 사람이 뽑히면
내가 뽑지 않았으니 하느님께서 뽑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어야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뽑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무신론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으면 하느님 뜻대로 된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데
내가 원하고 내가 뽑은 사람이 뽑힐 때만 하느님이 뽑으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자기중심의 믿음이고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내 뜻을 오히려 하느님께서 들어주셔야 한다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운 것이라는 말씀도
우리는 이런 뜻에서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사도들의 선출이나 교황님의 선출만 하느님께서 뽑으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모든 선출은 사제가 임명한 것이든 우리가 선출한 것이든
그 방식을 통해 하느님께서 친히 뽑으신 것이라고 믿어야 올바른 믿음의 자세지요.
그러나저러나 전에도 같은 성찰을 여러 번 했듯이 마티아를 세례명으로
가진 제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저는 오늘도 성찰해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뽑으셨다고 믿는 사람의 자세는
우선 대단한 영광이요 은총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의 종으로 뽑힌 것만도 영광과 은총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오늘 주님께서 당신의 친구로 뽑아주신다시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은총인지!
다음으로 이런 영광과 은총을 받기에 부족하다고 우리는 물론 겸손해야 합니다.
저는 서품받고 첫 미사 때 이런 강론을 했습니다.
앞으로의 사제생활은 예수님을 등에 태운 어린 나귀의 삶이어야 한다고.
예루살렘 입성 때 자기 등에 타신 주님 때문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을
자기를 보고 환호하는 거로 나귀가 만약 우쭐하면 정말 꼴불견이겠지요?
마지막으로 주님께는 나귀지만 사람들에게는 목자로 뽑혔으니
남은 생을 사랑과 열정으로 주님 양들을 돌봐야겠지요.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처럼 제게도
이렇게 물으시고 당신 양들을 맡기실 것입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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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인간의 계획,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고 헛된 것인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몇 그룹으로 나눠졌으며, 그들 사이에 등급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제자 공동체도 인간의 집단인지라 조직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최측근 핵심 제자단이 있었으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습니다. 교구나 수도회 조직으로 치면 교구장, 총원장을 중심으로 한 참사위원단입니다. 정기적으로 모여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자문하고 때로 결정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 제자를 특별히 여기셨으며 때로 종종 이 세 사람만 따로 불러 말씀도 하시고, 그들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기도 하셨습니다. 그 다음 조직으로 우리 귀에 가장 익숙한 12사도단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즉시 연상됩니다. 12라는 숫자는 완전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 인류 구원 사업에 협조자로 선발하심을 통해 구성된 12사도단을 언젠가 도래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동안 12사도 외에도 늘 그분을 따라다니던 추종 세력이 있었는데, 그 무리가 점점 늘어나 후에 72제자로 늘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120명까지 숫자가 불어났습니다. 그런데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마음에 늘 걸리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이 떠나간 빈 자리 하나가 늘 눈엣가시처럼 마음에 걸렸습니다. 따라서 그는 72사도 가운데 적절한 후보자가 있는지 훑어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최종 후보자로 선발되었습니다.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운 베드로 사도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조금 생뚱맞게 제비뽑기를 통해 마티아를 12사도단에 가입시킵니다. 지난 3년간 수제자로 살아오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으며, 최종적으로 스승님을 세 번이나 배신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베드로 사도는 느꼈을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 인간의 계획,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며, 헛되고 허황된 것인지를...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도 한 명을 채우는 선발 방식으로 인간이 결정하지 않고 하느님께 맡긴다는 의미에서 제비뽑기라는 특별한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제비뽑기로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채운 마티아 사도 축일에 다시금 기억하며 마음에 굳게 새깁니다. 우리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얼마나 은혜롭고 천부당만부당한 것인지를. 그래서 그분에 의해 선발된 우리는 그저 감사하고 기뻐하며 매일 그분을 따라나서야 한다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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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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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마티아 성인의 이야기는 참 흥미롭습니다. 언뜻 보기에 그는 "늦게 합류한" 사도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이스카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비뽑기로 선택되었으니까요. 사도행전 1장에 따르면,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그리고 제비를 뽑았더니 마티아가 선택되어 열한 사도에 합류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늦게 등장한 듯하지만, 사실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다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는 "두 번째 자리"를 맡았던 셈이지요. 중요한 역할이지만, 다시 무명의 자리로 사라졌습니다. 외경 전승에 따르면 마티아 사도가 에티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오리게네스 등 초기 교부들이 언급한 "마티아 복음서"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본질은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인데,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체적인 삶에서 사랑을 실행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기꺼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드러난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요. 그런데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러니까 우리가 참으로 서로 사랑하려면 우선 해야 할 일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노력하셨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우선은 그분의 우리에 대한 깊은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며 새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랑이신 분께서 우리 안에 머물며 우리 안에서 사랑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상황에서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떤 것일지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갈등과 염려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겪는 갈등과 염려 등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에고가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지?" "왜 저 사람은 그렇게 했지?" 등등과 같은 생각 속에 머물며 이런 갈등과 염려를 분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상황에 더 깊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연속되면 그런 염려와 불안의 상황이 가중되는 것이고요.
그러나 이를 분석하거나 그런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단순히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을 깊이 인식하며 그분이 '내' 안에 이미 부여해 주신 사랑의 힘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제적으로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우리가 언제 행복했었는가를 가만히 뒤돌아보면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정말로 행복했던 때는 '내'가 사랑받았을 때가 아니라 '내'가 사랑했을 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외부의 조건에 의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힘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명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요.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사랑받을 때가 아니라 사랑할 때 입니다. 우리가 겪는 갈등이나 염려, 불안 등은 사실 외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에고의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행복의 요인을 찾고자 할 때 우리는 더 깊은 갈등과 불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의식하고 인정하면서도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들, 특히 걱정과 염려, 불안, 미움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직면하여 알아차리는 순간 감정 에너지와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 감정은 우리 에고가 만든 어떤 실체이긴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떻게든 우리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참된 '나'는 사랑이신 하느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참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분과 일치되어 있는 진정한 '나', 즉 참 자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수양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우리에게는 서로 사랑할 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이런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들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의 후반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제로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늘 어떤 한계와 불완전함, 그리고 무질서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내면에 이 모든 것을 함께 극복해 주시는 주님을 모셔들여,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물고 또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려는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다시 힘을 얻어 우리 사랑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함께 다시 힘을 내어 우리에게 먼저 당신 사랑의 손을 내밀어 주시는 주님께 "예!" 하고 응답하며 그분의 손을 잡아 보도록 합시다.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 사랑의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당신 성령을 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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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모든 것이 정말 잘 될까요?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노리치의 율리안나: 보편적 신비주의자
모든 것이 정말 잘 될까요?
2026년 5월 13일 수요일
사랑받는 이여, 주님의 은총 속에 복되기를. 참으로 그러하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 노리치의 율리안나, 계시(Showings)
영적 스승이자 번역가인 미라바이 스타는 율리안나가 체험한 하느님의 긍정적 현존이, 세상이 "잘 되지 않는" 순간에도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고 설명합니다:
중세 영국의 은수자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우리에게 놀랍도록 낙관적인 신학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녀는 인간이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깨뜨리고, 하느님을 영예를 드리지 않으며, 불행한 선택을 하고,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리안 성녀는 굳건히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 안에서 잘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십시오.
율리안나의 이 확언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절망의 안개를 뚫고 우리를 깨우려는 강력한 영적 초대입니다. 그녀는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겁니다."라는 가벼운 낙관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영적 회피를 거부합니다. 율리안나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며,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느님의 본성이 자비와 사랑임을 확신하며, 이 진리를 우리의 존재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게 하기를 원합니다.
미라바이 스타는 율리안의 ‘죄에 대한 가르침’을 이렇게 숙고합니다:
율리안나는 자신의 신비적 대표작인 『계시(The Showings)』에서, 과거에 죄에 대해 집착하곤 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왜 인간의 부정적인 성향을 없애지 않으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창조에서 죄를 제외하셨다면, 모든 것이 잘 되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어머니께서 율리안에게 임종 직전의 환시 속에서 보여주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진리였습니다….
율리안나는 『계시』 제27장에서 죄에 대한 이해를 풀어내며, 죄의 개념을 사랑으로 대체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죄가 아무런 실체도 없다고 믿습니다. 존재의 한 조각도 없습니다."
즉, 죄 자체는 존재론적 가치가 없지만, 그 영향은 분명히 있습니다. 죄는 고통을 낳고, 바로 그 고통이 실체를 지닙니다. (역자 주: 율리안나는 죄를 단순히 도덕적 실패로만 보지 않고,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발생하는 현실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신학은 죄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치유되고, 그 고통마저 은총의 자리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나 자비는 신속히 다가옵니다. 언제나 즉시 주어집니다. 거스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며, 모든 종류의 것이 잘 될 것입니다)"라는 약속을 의심하는 것은 사실 무례한 일입니다. 율리안나는 하느님-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분께서 이 온유한 말씀을 하셨을 때, 나에게 보여주신 것은 그분께서 나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조금도 책망을 두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나를 책망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내 잘못을 하느님께 돌린다면 그것은 불친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비로운 본성은 결국 모든 "책망의 게임"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완벽한 내세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 이 땅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 가르침이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리안나가 깊은 연민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고통에 젖은 우리의 제한된 시각으로는 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진리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리처드 신부와 틱낫한 같은 오늘날의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노리치의 줄리안 같은 더 오래된 신비주의자들의 글을 읽고 들으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저는 설명하기 어려운 우울증을 겪어왔는데, 특히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조용히 앉아 호흡하며, 내 생각을 "하느님의 신성한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현존 안에 앉아 있으면, 어둠으로 기울던 내 마음이 빛과 일치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때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찹니다. 저는 오랫동안 약을 복용해 왔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음도 깨닫습니다.
—Daniel K.
References
[1] Julian of Norwich, The Showings: Uncovering the Face of the Feminine in Revelations of Divine Love, trans. Mirabai Starr (Hampton Roads, 2022), 67. Selection from chap. 27.
Mirabai Starr, Wild Mercy: Living the Fierce and Tender Wisdom of the Women Mystics (Sounds True, 2019), 175–17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yuhei Inoue, untitled (detail), 2020,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빛은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고요한 계시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온전히 담아내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혜와 힘으로 빛을 받습니다. 그 빛은 평화로운 때든 위기의 순간이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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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9-17).”
1)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라는 말씀은, ‘부르심’이 먼저 있었고, 신앙인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 ‘부르심’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5).”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에페 1,11).”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에페 2,8-9).”
‘부르심의 은총’이 사람들에게 내린 것은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구원 계획에 의한 일이고, 그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니고,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응답했더라도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부르심에 응답할 자유도 있고,
응답하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책임도 있습니다.
<어떤 직무를 맡는 것도 ‘부르심’과 ‘응답’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2) ‘응답’은 한 번 한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죽을 때까지) 응답하는 생활을 해야 ‘완성’되는 일입니다.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멈추면, 처음부터 응답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응답이 완성되지 않는 것은, 응답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도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 즉 사도로 뽑혔지만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사도가 되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사도로 뽑혔던 사람일 뿐이고, 사도였던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후임자가 아닙니다.>
‘응답’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뽑으신 일은 ‘사도단’을 구성하는 일의 시작일 뿐이었고, ‘사도단’의 구성이 ‘완료’된 때는 열두 사도의 응답이 모두 완성된 때, 즉 ‘사도들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쳤을 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라는 말씀은, ‘신앙’은 여러 신들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믿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선택을 취소하거나 변경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언제나 항상 ‘유일하고 절대적인 분’에 대한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0)”
하느님은 ‘한 분’뿐이신 주님이시니, 신앙은 여러 신들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라면, 그 신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을 믿거나 안 믿거나, 또는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면 구원과 생명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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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5,9-17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성 마티아 사도를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때부터, 그분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 승천하시는 순간까지 그분 뜻을 충실히 실천하며 교회 공동체에 머물렀다고 전해지지요.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기도하신 뒤 직접 뽑으신 ‘열 둘’에 속하지 못했던 마티아가 사도단에 들어가게 된 것은 유다의 ‘공석’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자기 뜻과 욕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반대자들의 손에 팔아 넘기고는, 그 죄책감과 후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겁니다. 그가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도 그분의 ‘친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따를 뿐 그 안에 숨겨진 그분의 뜻과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자기가 기대하고 바란 그 ‘메시아’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망설임 없이 그분께 등을 돌려버린 것이지요.
그런 유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마지못해서, 억지로 따르는 ‘종’으로 남지 말고, 스스로 원해서, 그 안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며 능동적으로 따르는 그분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친구가 된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랑에서 우러나온 순명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시는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순수한 열망으로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키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함으로써 누리시는 그 기쁨이 그 안에도 스며들어 그의 영혼을 충만한 행복으로 채워줍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이유이자 목적인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뽑으셨듯, 그들을 통해 마티아를 부르셨듯, 이제 우리를 ‘사도’라는 특별한 소명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건 그저 ‘일’을 시키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세가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깊은 친교를 나누었듯이, 우리도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깊은 친교를 나누기를, 그 친교를 통해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셔서 부르시는 겁니다. 그렇게 변화되면 우리는 ‘회개’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삶 속에서 회개라는 열매를 꾸준히 맺으면, 그 열매를 통해 구원이라는, 참된 행복이라는 유익을 누리게 되지요.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소명에로 부르신 목적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곧 그분께서 행하신 사랑의 목적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크신 사랑으로 우리라는 열매를 맺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일치와 평화라는 열매를 맺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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