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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 단을 만드는 규례
출 30:1-10
1 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2 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
3 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를지며
4 금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쪽에 만들지니 이는 제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5 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6 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7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8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9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10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출 30:1-10 / [분향 제단] 아카시아나무로 분향할 제단을 만들어라. 2) 길이와 나비를 45센티미터로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라. 높이는 90센티미터가 되게 하여라. 또 뿔을 분향 제단 몸통에 붙여서 만들어라. 3) 분향 제단의 윗면과 또 사방 옆면과 뿔을 모두 순금으로 입히고 주위에 금테를 둘러라. 4) 금테 밑 양 옆면에 금고리 두 개를 만들어 붙여 거기에 운반할 때 사용하는 채를 끼울 수 있게 하여라. 분향 제단을 운반할 때 쓸 5) 그 채는 아카시아나무로 만들고 금을 입혀라. 6) 계약궤 앞에 내려친 휘장 앞, 곧 내가 너를 만나는 곳, 다시 말해서 계약궤를 덮는 속죄판 앞에 그 분향 제단을 갖다 두어라. 7) 아론은 아침마다 등잔을 손질할 때 그 분향 제단 위에 향기로운 향을 피워라. 8) 또 아론은 해거름에 등잔불을 켜 올려 놓을 때 향도 함께 피워 올려라. 이렇게 대대로 끊이지 않고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향을 피워 올려야 한다. 9) 그 분향 제단 위에 그 어떤 다른 향을 피워서는 안 된다. 또 번제물이나 봉헌 제물도 그 위에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 또한 포도주를 그 분향 제단에 부어서도 안 된다. 10) 그리고 아론은 해마다 한 차례씩 속죄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얼마쯤 가져다가 그 피를 분향 제단의 뿔에 발라 분향제단을 깨끗하게 하는 속죄 예식을 거행해야 한다. 너희는 대대로 끊이지 않고 이 속죄 예식을 올려야 한다. 이 분향제단은 여호와께 바치는 것 가운데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다.
본문에는 분향단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분향단 제작(1-6) 분향단은 여러 면에서 언약궤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먼저 재료가 같습니다. 분향단은 언약궤와 마찬가지로 조각목(싯딤나무)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분향단을 언약궤와 마찬가지로 순금으로 쌌다는 면에서 같습니다. 순금은 신성의 상징입니다. 이동 방법도 유사합니다. 언약궤를 고리에 채를 꿰어 운반했듯이 분향단도 양쪽 두 개의 고리에 메는 채를 꿰어 운반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아 여호와의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속죄한 것이 동일합니다. 이처럼 분향단이 언약궤와 공통된 점이 많은 것은 분향단이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한 제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능과 위치 면에서 다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자리이며, 분향단은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두었고 분향단은 지성소 밖 성소에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향단이 지극히 거룩한 것은 성소의 기구들 중 하나님의 임재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며 그 목적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분향 시간과 향 재료(7-9) 아론이 분향을 하는 시간은 매일 아침과 저녁입니다.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등불을 켤 때에 함께 향을 피워야 했습니다. 사실상 향기로운 향이 항시 위를 향해 올라갔고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셨습니다. 이때에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재료들로 만든 지극히 거룩한 향을 사용해야 했습니다(34-36). 분향단에는 다른 제물이나 소제나 전제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분향단의 규모가 놋 제단보다 훨씬 적은 까닭(2; 출 27:1절)은 오직 향을 피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올라가는 향기로운 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계 5:8; 8:3-4). 분향단의 향기가 항시 올라갔던 것처럼 성도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살전 5:17).
분향단의 속죄(10) 일 년에 한 번 있는 속죄일을 의미합니다. 아론과 그 후손들은 해마다 한 번씩 속죄일에 수송아지의 피,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뿔에 바르고 그 손가락으로 일곱 번 피를 뿌려서 속죄하였습니다(레 16:18-19). 이 속죄를 통해 여호와께서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언약의 관계를 새롭게 갱신하셨습니다. 해마다 속죄를 실시한 것은 실제로 짐승의 피가 속죄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이에 예수께서 영원한 속죄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히 10:3-5).
적용: 분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향이 항상 위로 올라가듯이 당신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향을 올리십니까?
소련이 공산화될 때 기독교인들은 핍박이 심해 비밀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모두 열 명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비밀경찰에 의해 전원 체포됐습니다. 단 한 사람 두목만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고문당하며 두목 이름을 대라 했으나 한결같이 결코 두목을 체포하지 못하리라며 죽었습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 사람이 고문당할 때 그 이름을 대고 죽었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 설 교 >
성소의 분향단
출 30:1-10 / 피영민 목사
서론
성막에는 두 가지 종류의 단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이고, 둘째는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입니다. 번제단과 분향단 모두 ‘제단’(Altar)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두 제단은 모두 싯딤나무로 기본골격을 만들고 금속으로 입혔습니다. 번제단은 놋으로, 분향단은 금으로 입혔습니다. 그래서 번제단은 ‘놋단’(Brazen Altar)이라고도 하고, 분향단은 ‘금단’(Golden Altar)이라고도 합니다.
두 제단의 용도는 둘 다 뭔가를 태운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번제단은 짐승을 태워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고, 분향단은 향을 태워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성막이 지성소와 성소로 나눠져 있고, 성소 안에는 세 가지 기구가 있는데, 동편 입구로 들어가면 오른쪽(북쪽)에 떡상, 왼쪽(남쪽)에 순금등대, 그리고 정면에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 앞으로 분향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5장에는 떡상과 순금등대에 관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고, 분향단에 관한 기록은 출애굽기 30장에서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 기자는 왜 한 장에 성소 안에 있는 세 가지 기구들에 관한 기록을 남겨주지 않고 따로 떼어 놓았을까요? 아더 핑크(A.W.Pink)라는 학자는 이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떡상이나 순금등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혜를 예표하는 것이고, 분향단은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를 예표하기 때문에 방향성에 있어서 분향단은 다른 기구와 구별된다. 둘째, 출애굽기 28~29장에 제사장의 의복과 위임식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제사장이 분향할 분향단은 위임식이 끝난 다음에 기록되는 것이 논리적인 전개이다. 셋째, 떡상이나 순금등대는 그리스도 자신, 또는 행위를 예표하지만 분향단은 그리스도의 행위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활동까지도 예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성령님이 이런 순서로 계시하기를 원하셨다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소의 분향단에 관해서 네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이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Ⅰ. 분향단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다른 성소 기구의 경우에는 그 재료와 구조에 대해 먼저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출애굽기 30장에는 분향단을 만들라고 하신 목적이 먼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0장 1절 전반에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향단은 향을 태우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향을 태운다”는 것에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요?
첫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기도를 해 주는 것이지 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Mediation)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사역입니다. 중보기도는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이 진정한 중보기도 입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시고,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간구하고 계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요한일서 2장 1절 후반에도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변호사가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사람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저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의 죗값을 갚은 것을 봐서 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도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분향은 일반 제사장들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0장 7절에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분향의 1차적인 주체가 대제사장 아론이라는 사실을 못 박아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이 향을 사른다는 것은 1차적으로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향이 대제사장만의 임무는 아니었습니다. 일반 제사장들도 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장 9절에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체가 ‘너희’라는 복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 제사장들도 분향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도 다른 불로 분향을 했다가 불이 나와 타 죽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일반 제사장들이 향을 사른다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41편 2절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향과 기도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장 9~10절에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제사장은 사가랴입니다. 그가 분향할 때 백성들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분향과 기도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에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향을 태우는 것이 성도의 기도를 예표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향은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향은 하나님을 향한 찬미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분향단을 만들라고 하신 이유가 더욱 분명해 집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대로 성도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훈련되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실제로 기도를 실천하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테니스를 칠 때 팔의 힘을 빼고 공을 맞춰 상대방 코트 안에 떨어지도록 하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합니까? 다 알 것입니다.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라. 기도에는 찬양, 고백, 감사, 간구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얼마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이론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테니스도 배워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론과 실제는 전혀 다릅니다. 팔에 힘을 빼서 능숙하게 공을 받아 넘기는데도 몇 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연습을 하면 달라진다”(Practice makes difference).
저는 교수생활을 하면서 테니스의 서비스 넣는 법을 많이 연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어깨를 봤는데 피가 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피가 나는 줄도 몰랐는데, 거울을 보니 피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습하고 나니 공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 이론적인 기도를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실제로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를 하고 계속 훈련을 해야 기도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라는 것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고, 앞으로도 나올 계획이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그러니 기도를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금요철야 기도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 훈련을 받겠습니까?
출애굽기 30장 7~8절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아침에 순금등대를 정리할 때 향을 피우고, 저녁에 등불을 켤 때도 향을 피우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조석(朝夕)으로 분향하듯이 아침과 저녁에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분향단의 목적은 향을 올리는 것이지만 향을 올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도들에게 기도를 실천하도록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우상숭배자들이 장례시 소독하거나 냄새를 제거한다고 향을 피우는데, 오히려 냄새가 더 지독합니다. 그런 분향은 모두 귀신 숭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촛불을 켜고 분향하며 기도하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우상과 귀신 숭배할 때나 하는 것이지 성도가 할 일이 아닙니다. 분향은 예표이고, 실체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장례식장에도 보면 어떤 가정은 향을 피워놓고, 과일을 깎아 올려놓은 것을 보는데, 과일을 깎아 놓는다고 죽은 사람이 먹을 수 있습니까? 만약 먹는다면 왜 과일만 깎아 놓습니까? 소를 잡아야지요. 그런 일들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모두 쓸데없는 귀신 숭배와 우상숭배의 잔재들입니다. 성도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Ⅱ. 분향단의 재료와 구조는 무엇인가?
분향단은 싯딤나무(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금을 입혔습니다. 그래서 ‘금단’이라고도 불립니다.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분향할 때는 나무가 보이지 않고 겉면의 금만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신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기도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광중에 계신 그리스도, 기도를 능히 응답해 주시는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생각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분향단의 크기는 번제단에 비하면 매우 작습니다. 뜰에 있는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의미하고, 가로 세로가 5규빗에 높이가 3규빗입니다. 그런데 분향단은 성소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중보기도 사역을 의미하며, 가로 세로 1규빗에 높이가 2규빗입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예표하는 것이고, 분향단은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분향단이 정사각형으로 된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기도가 동서남북 온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모든 택자들에게 유효적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17장 9절에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분향단에는 뿔을 만들라고 했습니다만 뿔의 개수나 위치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의 뿔이 네 개였고, 네 모퉁이에 있었음을 볼 때, 분향단도 그와 같은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뿔은 능력과 왕권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서 7~8장에 언급되고 있는 뿔은 모두 왕권을 가리킵니다. 또 사무엘하 22장 3절에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장 69절에도 침례요한의 부친인 제사장 사가랴가 예언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는 이처럼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향단 윗부분에는 왕관처럼 뾰족하게 나와 있는 턱이 있었습니다. 흠정역(KJV)에는 이를 ‘Crown of Gold’(금관)라고 번역했습니다. 금을 입혔으니 ‘금테’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분향단 위에 있는 향로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땅에 많이 떨어집니다. 기도가 위로 올라가다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매일 학교에서 꼴찌를 하는 아이를 하루아침에 서울대 합격시켜 달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기도는 하늘에 상달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연세가 100세 된 노인을 200세까지 살게 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떨어짐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 중에는 마귀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이고, 마귀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마귀는 베드로를 집중공격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수난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야단’(Rebuke)쳤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됩니다. 어디서 예수님을 가르치고 야단을 칩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저주한 것같이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은 “내가 저 사람을 알면 내 성을 간다”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저주했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개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죄나 베드로의 죄나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지옥에 떨어졌고, 베드로는 수석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차이가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마귀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멸망당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항하고 고라의 반역에 동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염병이 시작되어 14,700명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아론을 향해 말합니다. 민수기 16장 46~48절에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분향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염병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성도의 죄로 인한 징벌도 그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중보기도만 능력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기도도 모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변화를 일으킵니다”(Prayer makes difference).
그러면 분향할 때 사용하는 ‘향로’(Censer)는 어떻게 만들까요? 향로는 출애굽기 27장 3절에 보면 ‘불 옮기는 그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놋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성막 밖에 있는 번제단에 떨어진 불을 담아서 분향단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놋그릇입니다. 그런데 성소의 모든 것이 금인데, 향로만 놋이니까 후일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는 이것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금향로’라고도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놋입니다.
레위기 16장 11~19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년에 단 하루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번만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들어갈 때 향로에 향을 가득 채워 불을 피운 후 지성소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향(연기)이 지성소 안에 가득해서 하나님의 영광(쉐키나)이 대제사장과 직면하지 않을 정도로 자욱해 지면 대제사장은 자기 죄를 위해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두 번째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피를 속죄소 위에 뿌립니다. 그리고 다시 나와 세 번째로 들어갈 때는 백성들의 죄를 위해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들어가서 향로를 가지고 나와 분향단위에 다시 올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은 대속죄일이 되면 최소한 네 번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향단은 운반이 용이하도록 양편에 금고리를 두 개씩 달았고 거기에 채를 꿰어 고핫자손들이 어깨에 메고 이동하였습니다.
Ⅲ. 분향단의 위치는 어디인가?
그러면 분향단을 두는 위치는 어디일까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분향단은 지성소 휘장 앞 성소의 정면에 위치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하겠습니까? 이단자들이 분향단의 위치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4절에 보면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제사장 아론이 지성소에 매일 들어갔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9장 4절에 금향로가 지성소 안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가 분향단이 지성소 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금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속죄일에는 지성소 안에 금향로도 있고, 언약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분향단이 지성소가 아닌 성소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30장과 히브리서 9장의 내용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Ⅳ. 분향단의 향과 불은 어디서 오는가?
분향단의 불은 번제단의 불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불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완성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번제단에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했을 때도 번제단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번제단에 있는 그 불만 가지고 와서 향을 피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불로 분향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네 아들 가운데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불이 나와서 타 죽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분향할 때 번제단의 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속죄함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기도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번제단은 속죄의 장소이고, 분향단은 기도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분향단의 향은 어떻게 만들까요? 향을 만드는 방법은 출애굽기 30장 34~38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37~38절에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향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만들어 분향해야 하고, 분향단 위에서는 분향만 해야지 번제나 소제와 같은 다른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 론
구약시대의 분향은 예표입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이고,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중보기도 하시는 것은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일이고,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제사장들이 아침저녁으로 분향한 것처럼 아침과 저녁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금번 양수리수양관 여름산상축복성회로 다시 뜨겁게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은혜가 옵니다. 기도하면 재앙이 물러가고, 순금등대의 빛을 받은 것처럼 성령의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또 기도하면 염병도 떠나가게 되며, 죄 사함도 받고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향로마다 기도의 향이 가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니까?
출 30:1-10 / 이준행 목사
서 론
오늘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기도하십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합니다. “언제 기도하십니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성경공부하면서 “집사님, 기도해주세요”라고 부탁하면 “저 기도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신앙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기도 못하면 신앙 못하는 것입니다.
제 아들 상이가 이런 문자를 보냈습니다. “능력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시고, 너그럽기가 한이 없으시고, 이자 준자 행자의 이름을 가지신 우리 아버지시여! 2학기 등록금이 나왔습니다. 장학금을 타지 못한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고, 어여삐 여기시어 등록금을 주시옵소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문자입니까?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문자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아버지, 2학기 등록금 나왔어요. 장학금은 못 탔어요. 헤헤헤”하고 머리 두 번 긁으면 아버지는 “그래, 다음 주까지 보내줄게” 이렇게 간결하고 단순하게 핵심을 이야기 하는 것이 부자지간의 정상적인 대화입니다.
자녀가 어려도 대화는 가능합니다. 경찬이가 유목사님에게 “자녀를 셋이나 거느린 훌륭한 아버지시여! 비록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는 적을지라도 과자 하나 사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하려고 하면 대화가 너무 어렵습니다. “아빠, 과자” “그래, 가자” 이 정도면 다 알아듣고, 손잡고 가게로 가는 것이 아빠와 어린 자녀의 대화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잘 못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감의 부족입니다. 아버지가 너무 멀리 있는 것입니다. 하늘 끝에 계셔서 소리를 질러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둘째는 너무 어렵게 기도하려고 합니다. 수식어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안수집사님이 주일 낮 예배 대표기도를 43분간 했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을 떠나고, 모세가 홍해를 건너, 다윗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야기,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한 이야기, 사도행전을 지나, 요한 계시록에 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기도가 끝났습니다. 눈을 떠보니 교인의 1/3은 잠들어 있었고, 1/3은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안수집사님이 미안해서 목사님에게 슬며시 물었습니다. “목사님, 언제 사람들이 갔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갈 때, 우리 교인들도 우르르 따라서 다 도망갔습니다.”
기도는 친밀감 있는 대화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입니다. 어린아이가 말하기를 연습하면 말이 늘 듯이, 기도도 자주 하는 사람이 익숙해진 기도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기도 하십니까?” 만일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어보세요.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집사님 신앙은 엉터리군요.”
1절, 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오늘은 성막 안에 분향단을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고, 그 안에 언약궤를 만들게 했습니다. 진설해 놓은 떡상도 만들도록 하시고, 등잔대도 만들게 하셨습니다. 왜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성막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하시기에 성막에 갇혀 사는 분이 아닙니다. 성막을 만든 이유는 성막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함입니다. 언약궤로 만나주시고, 떡상으로 만나주시고, 등잔대로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만드는 분향단으로 만나주십니다.
2절, 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
분향단은 가로 세로 각각 45cm, 높이가 90cm 되는 작은 상입니다. 여기에 향기로운 향을 매일 살라야 했습니다. 향기로운 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분향단으로 만나주시겠다는 의미는 기도로 교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분향단에도 번제단처럼 뿔을 만들어 이어지게 했습니다. 뿔은 능력과 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를 찾아가 능력과 힘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고, 힘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찾아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힘이 우리의 삶으로 내려옵니다.
7절,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아론은 매일 아침마다 분향단 위에서 향기로운 향을 살았습니다. 아침마다 기도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위한 기도원까지 있습니다. 외국에는 이런 기도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국교회는 기도로 호흡하고 있구나. 뜨거운 교회구나. 불 받는 교회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많은 문제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기보다는 내 요구를 관철시키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사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내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따라가는 기도, 순종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까요?” 저녁에 기도하려면 “하나님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까요?” 이렇게 묻기보다는 “하나님, 오늘도 내 맘대로 형편없이 살았네요. 일찍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이런 후회가 있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기도하기가 쉽지 않아요. 어떤 목사님은 새벽기도만 없으면 목회 할 만 하다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새벽기도시간이 좋습니다. 물론 힘들지만 그 시간 아니면 기도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목양실로 내려가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새벽기도 잘하는 성도가 신앙도 더 깊어지고, 새벽기도 잘하는 목사가 더 영성이 깊은 설교를 합니다. 새벽기도는 목사요 설교자인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어떤 분은 베드로가 새벽에 닭 울음소리 듣고 통곡한 후 닭 울 때마다 일어나서 기도한 것이 새벽기도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아론과 제사장들도 아침마다 향기로운 향을 사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렇다고 아침만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8절,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저녁에도 향기로운 향을 사르는 일을 했습니다. 아침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는 기도를 많이 드리지만, 저녁에는 아마도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많이 드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죄 앞에서 무기력해집니다. 죄를 지으면 자신이 지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책감, 열등감, 두려움들이 자신을 괴롭힙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 민감한 사람들은 죄에 대해 절망하고 회개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민감하기보다는 자신의 죄에 더욱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했다는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새벽기도회도 있고, 수요일엔 저녁 기도회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혼자 기도할 때보다 함께 기도할 때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했습니다. 이제 직분자들을 거론하며 기도하자고 말하기도 죄송합니다. 기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다른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9절,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다른 향이란 무엇일까요? 기도가 아닌 다른 것, 불평과 불만, 원망과 탄식, 분노와 같은 것들입니다.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 어떻게 할 수 없는 답답한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한숨만 쉬고 있으면 다른 향을 사르는 것입니다. 한숨, 탄식, 원망, 분노를 내려놓고 기도하라는 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호시 탐탐 기회를 엿보고 공격하려 합니다. 영적으로 느슨하게 방심한 틈을 타서 우리를 혼란시키려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일들이 줄어들고 엎드려 기도하는 일들이 중단되면 마음이 무디어집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 끌려 다닙니다. 사단은 우리를 속이려고 끊임없는 질문을 쏟아놓습니다.
“네가 정말 구원 받은 사람 맞니? 이렇게 살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사단이 우리를 속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까닭 없이 피곤하고 곤고해집니다. 이때를 영적 고갈이라고 합니다. 영적 디프레션(Depression)에 빠져든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인생이 우울해지고, 메마른 사막처럼 답답해집니다.
마,12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서 머물 곳을 찾아다니다가 자신이 머물던 집에 와보니 텅 비워져 있는 채로 채워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와 처음 형편 보다 나중 형편이 더 심각해졌다.” 비워져 있기는 하나 채워지지 않은 빈집은 반드시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집을 사서 일 년만 방치해 보십시오. 쥐들이 들끓기 시작하고 집안은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 채워지고, 온갖 지저분한 벌레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창문은 바람에 흔들려 삐그덕 거리고 집안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제자는 비워진 깨끗한 그릇들입니다. 그 비워진 그릇에 날마다 채움을 경험하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채워져야 마음에 채워진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에 채워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나눔(Share)의 삶’이 시작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먼저 하늘로부터 부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한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누려야 나눌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부어진 것이 없이 절대로 누릴 수 없고, 내 마음에 누려진 사실이 없이 생명의 나눔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출발이 기도입니다.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기도하십니까?”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부족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시작하면 우리의 부족한 기도를 성령이 붙들어 주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천사가 분향단에서 드린 기도의 향기를 들고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의 불을 담은 향로를 다시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모든 죄책감과 열등감을 깨뜨리는 우레입니다. 모든 우울함과 무기력함을 몰아내는 번개입니다. 주저앉은 자를 일으키는 능력과 힘을 주시는 음성입니다. 알지 못하는 큰 일을 행하시는 지진입니다.
그래도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주 쉽고 간결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오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향기로운 기도
출 30:1-10 / 곽창대 목사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우선적인 열매는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의 무게를 재는 한 가지 방편이 있는데,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해야 할 상대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소를 통하여 표현되었습니다.
성소에 위치한 향단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 앞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6절). 향단에서 계속 피어오르는 연기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드리시는 예수님의 끊임없는 중보기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히 7:24~25; 롬 8:33~34). 성령 하나님께서도 성도들과 교회 안에 내주하셔서 중보기도하십니다(롬 8:26~27).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도 기쁘게 받으십니다(계 5:8). 이는 성도의 기도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도 많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기도할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 응답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약 4:3). 오히려 기도해서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만나 대신 고기를 먹고 싶다며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메추라기 떼를 보내주셨는데, 그들은 메추라기 때문에 탐욕의 노예가 되었고 하나님의 큰 재앙이 그들 가운데 내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시 106:15). 이런 점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한 대로 다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하지만 기도하기를 쉼으로써 영적 침체 속에 빠져 있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중보기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기어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에도, 우리가 계속 잘 못된 기도를 할 때에도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기도가 되는 것은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중보기도 덕분입니다.
그러면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베드로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눅 22:31~32). 유월절 만찬 때에는 설교를 마치시면서 성도와 교회를 위한 보호와 승리(요 17:15), 성화(요 17:17), 성령 충만(요 17:13), 제자들의 연합을 위하여(요 17:21 上), 그리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셨고(요 17:23~24), 나아가 세상을 위해서도 간구하셨습니다(요 17:21下). 그렇게 기도하신 후 늦은 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르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눅 22:40~42, 44). 그날 낮에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무지한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요약하면,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세워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를 위해 그렇게도 끊임없이 기도하실까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도를 쉬지 않으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성령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로 예수님과 교제하는 성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기 위해 나아오는 우리를 품에 안으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그 시간 그 장소에 기도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집니다. 기도의 향기는 우리의 심령을 맑게 합니다. 우리의 몸에 신령한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샘솟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달려 나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기도를 통해 경험하는 신령한 세계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예수님의 끊임없는 기도 덕분에 올 한 해도 살아왔음을 감사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셨건만 그 예수님의 기도에 우리가 즐겁게 동참하지 못한 것, 참회합시다! 예수님과 기도로 교제하는 연말과 새해가 되도록 분발합시다!
전 문
2019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전도서(3:1)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의 역사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올 한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 선배들, 어르신들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남기고 가겠습니까? 가족들에게 돈과 재물과 땅과 집과 기업을 유산으로 물려준다고 해서 여러분의 진실한 사랑이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멋진 유언을 남기는 것이 의미 있는 마무리가 되겠습니까? 성도라면 소풍가는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계신 천국으로 향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우리가 주님 앞에서 섰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우선적인 열매는 사랑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 얼마나 바쁘게 살았느냐,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느냐를 묻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얼마나 사랑하고 왔느냐?”라고 물을 것입니다.
2019년 한 해를 결산해봅시다. 아내와 남편과 부모와 자녀를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교회와 성도를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여러분이 지난 한 해 동안에 베푼 사랑의 무게가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이 한 해 동안 베푼 사랑의 무게를 재는 한 가지 방편이 있는데 그것이 기도입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했는가? 얼마나 자주 기도했는가?”를 헤아려보면 사랑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녀를 위해 기도한 것만큼만 사랑한 것입니다.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기도하기를 게을리 했다면 실제로 여러분은 남편이나 아내를 제대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기도도 깊어집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도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말은 많이 했지만 기도가 부족했다면 사랑도 부족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기도의 부족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사랑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구약시대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실히 드러났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성소로 표현되었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빛으로 해석하면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와 교제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이것이 성소의 진설병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이신 성령님을 환히 비추어주십니다. 이것이 성소의 등잔대로 상징되었습니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향단의 의미입니다.
그림 3을 보세요. 성소에서 향단을 두어야 할 위치는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 앞 한가운데입니다(6절). 그림 4에서 약간 확대한 향단의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는 향단을 어떻게 제작해야 할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순금을 입혔습니다. 단 윗면에 금테를 둘렀고 네 귀퉁이에는 순금을 입힌 뿔을 달았습니다. 운반할 때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두 개의 채를 만들어 각각 금 고리 두 개에 꿰어두게 했습니다.
본문 7-8절에서는 대제사장 이론에게 매일 일정한 시간에 향불을 계속 사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임무를 부여합니다. 이것은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끊이지 않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을 예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향단에서 계속 피어오르는 연기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드리시는 예수님의 끊임없는 중보기도를 나타낸다고 이해해도 좋겠습니다.
(히 7:24-25)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롬 8:33-34)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성령 하나님께서도 성도들과 교회 안에 내주하셔서 끊이지 않고 중보기도하십니다.
(롬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이 나오는데 그 금 대접에 담긴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설명합니다.
(계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사실 우리의 기도가 성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기도가 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도는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 받는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기도해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육체가 피곤하면 기도가 안 됩니다. 깨어 기도해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감깁니다.
육체에 병이 찾아 들면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안 됩니다. 몸에 열이 조금만 나도 기도에 집중이 안 됩니다.
기분이 상하면 기도할 마음이 안 생깁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도 기도가 안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기도 또한 막힙니다.
일이 계획대로 잘 안될 때 낙심하여 기도가 안 됩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한심하고 창피스러울 때 하나님께 너무 민망하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나 능력을 의심할 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게을러서 기도하지 못합니다.
할 일이 쌓여있을 때 기도하지 못합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재미있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만만해서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할 수 없는 경우를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기가 일쑤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연약하고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기도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확신에 찬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꽤 오랫동안 기도하기는 했는데 마음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중언부언하며 기도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도가 연약하고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런 경우의 기도를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기도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식량을 매일 공급하셨습니다. 만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만나가 싫증이 났습니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를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그 불평을 듣고는 하나님께서 메추라기 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메추라기 때문에 그들은 탐욕의 노예가 되었고 하나님의 큰 재앙이 그들 가운데 내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시 106: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이처럼 우리는 손해 보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한 대로 다 응답하시지 않는 것, 참으로 다행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도한 것마다 그대로 응답되었다면 크게 위험에 처할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날카로운 칼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정말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성령님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 8장을 보면, 한 천사가 등장하여 하늘 성소의 금 향단에서 피어오르는 많은 향을 금향로에 받아 하나님의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렸는데 그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로 올라갔다고 기록합니다.
(계 8:3-4)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땅에서 드리는 성도들의 기도가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중보기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냄새(향연)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기도하기를 쉼으로써 영적 침체 속에 빠져 있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중보기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기어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에도, 우리가 계속 잘 못된 기도를 할 때에도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기도가 되는 것은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중보기도 덕분입니다.
그러면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실까요?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고 기도하실 것이 분명하므로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고 계실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천상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고 계실까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과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날에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베드로를 위해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눅 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온갖 시험에서 믿음을 발휘함으로써 승리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긴 설교(다락방 강화)를 하셨는데 설교를 마치시면서 제자들과 앞으로 세워질 교회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문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명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립니다. 그 기도문에서 성도와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내용을 6가지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보호와 승리를 위한 간구: 제자들이 세상에서 악에 빠지거나 시험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게 하소서!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2) 성화를 위한 간구: 제자들을 진리(하나님의 말씀)로 거룩하게 하소서!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거룩한 자녀들이 되게 하소서!
(요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3) 성령의 충만을 위한 간구: 제자들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기쁨이 충만하여 핍박을 감내하게 하소서!
(요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4) 제자들의 연합을 위한 간구(요 17:21): 사랑으로 하나가 된 교회를 통해 세상에 도전과 감동이 되게 하소서!
(요 17:21 상반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5) 영광스러운 교회를 위한 간구: 온전한 교회로 성장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게 하소서!
(요 17:23-24)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6) 세상을 위한 간구(요 17:21):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백성들이 많게 하소서!
(요 17:21 하반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신 후 늦은 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르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눅 22:40-42)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그날 낮에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무지한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요약하면,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과 제자들에 의해 세워질 교회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성숙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천상에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그 같은 기도를 계속하고 계실 것입니다.
왜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도 끊임없이 기도하실까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도를 쉬지 않으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기도 덕분으로 지난 한 해를 살아온 것입니다. 천재는 노력 99%와 영감 1%로 만들어진다고 했지만 영적인 세계는 정반대입니다. 1%의 노력에 99%의 은혜로 짜인 것이 성도의 생애입니다. 아니 100%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기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고작 1%를 넘지 못할 것입니다. 나머지 99%는 주위의 성도들과 부모님들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채워져 있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기도에 빚진 자들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위의 기도 때문이었구나! 그 가운데서 나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 덕분이구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예수님과 성령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구약시대 성소에는 항상 향 내음이 가득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소에 가득한 향 내음은 예수님의 끊임없는 중보기도를 상징합니다. 그 향 내음이 가득한 성소에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 들어가서 향단을 정리하고 분향했습니다. 그때 했던 일이 기도였습니다.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백성들도 밖에서 기도했습니다.
(눅 1:8-10)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이처럼 분향과 기도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시 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성도 여러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끊임없이 중보기도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성도와 교회를 향해 우선적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기도의 교제입니다. 함께 기도하자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기도로 예수님과 교제하는 자리가 성소입니다. 기도로 예수님과 교제하는 성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시간이 정말 즐겁습니까? 기도하는 장소로 마음 설레며 달려가십니까? 우리가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시간, 기도하는 장소에 먼저 와계십니다. 기도하기 위해 나아오는 우리를 품에 안으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그 시간 그 장소에 기도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집니다. 기도의 향기는 우리의 심령을 맑게 합니다. 우리의 몸에 신령한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샘솟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달려 나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기도를 통해 경험하는 신령한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셨건만 그 예수님의 기도에 우리가 즐겁게 동참하지 못한 것, 참회합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향 같은 기도
출 30:1-10 / 박덕기 목사
오늘도 성막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쪽에 있는 문을 통해 성막의 바깥뜰에 들어서면 맨 먼저 번제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번제단을 지나면 물두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 물두멍에서 피로 물든 손과 발을 씻고 성소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외소에서 내소인 성소에 들어서면 금빛이 찬란한 광경에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소의 외부는 검은 해달 곧 물개 가죽으로 덮어서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성소의 내정으로 들어서면 등대와 떡상과 향단이 모두 정금으로 되어 있는데다 등대에서 비추는 빛으로 말미암아 휘황찬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성소의 외부가 초라한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있음은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성소의 내부가 모두 찬란한 금으로 되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첫 번째 성구는 순금 등대라고 했습니다. 성소는 창문 하나 없는 집이어서 칠흑처럼 캄캄한 곳인데, 이 순금 등대에서 비취는 빛으로 말미암아 금빛이 찬란하게 빛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등대는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참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등대가 어두운 성소 안을 환하게 밝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셔서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혀 주신 의의 태양이셨습니다. 이 세상 신인 사단이 믿지 아니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죄와 죽음과 절망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밝은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어두운 죄악 속에서 살며 인생에 대하여 절망과 신음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의 인생은 흑암에서 광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뀌게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천국 시민의 사명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이렇게 분명한 생의 전환점이 있는 성도라야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죄로 어두운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자고 했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두 번째 성구는 떡상이었습니다. 떡상위에는 항상 진설병이 놓여져 있었는데, 이 떡은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수 천가지 음식이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음식은 살려고 먹지만, 먹으면 죽는 음식입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밥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밥은 생명과 같습니다. 밥을 먹으면 살고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 밥을 먹지만, 밥을 먹고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그 밥을 먹고 다 죽었습니다. 두 번째 음식은 먹으면 반드시 사는 음식입니다. 이 음식이 무엇입니까? 곧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우리 모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온전히 믿어서 영생의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소 안에 있는 세 번째 성구인 분향단에 대하여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분향단의 의미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되어 있고 가로 50cm, 세로 50cm, 높이 1m가량이 됩니다. 성막에서 단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번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분향단입니다. 번제단은 족가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었고, 그래서 일명 놋제단이라고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분향단은 정금으로 싸서 만들었기 때문에 일명 금단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놋과 금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놋제단이 수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면, 금향단은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에 앉으신 존귀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사장들은 먼저 놋제단에서 번제를 드린 그 불을 가지고 성소의 휘장 안에 들어가 금향단에서 향을 피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신 후에 하늘 성소로 들어가서 영광을 받으시고 지금은 이 땅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대제사장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하나의 모형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한 말로 “그리스도께서는 참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금향단에서 향을 피우며 기도하는 제사장에게서 우리의 중보자 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이 분향단에서 아침저녁으로 매일 하나님께 향을 태워드렸습니다. 제사장들이 이 분향단에서 분향하는 일 곧 향을 태우는 일은 기도드리는 일을 상징합니다. 시 141:1-2에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분향단은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분향단에서 피어오르는 향연은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 8:3-4에도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향단에서의 분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어떤 기도가 응답받는 기도일까요?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을 분향단은 잘 가르쳐 줍니다.
2.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
하나님은 귀가 밝으셔서 우리가 기도하면 직접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막에 깊은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도가 기도하느라고 바쁘면 천사는 왔다 갔다 하느라고 바쁘고, 하나님은 응답하시느라고 바쁘며, 마귀는 방해하느라고 바쁘다.”어떻게 기도하면 기도가 기도에서 끝나지 않고 기도가 응답에서 끝나게 될까요?
1)믿음의 기도
분향단은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들었습니다. 금음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기도라야 응답을 받게 됩니다. 약 1:6-7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2)공의의 기도
분향단의 가로 세로는 각각 일규빗으로 네모반듯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사각형의 네모반듯함은 공의를 의미합니다. 기도란 우리의 뜻이 하나님 나라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나’이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최종 결론을 내리시고 기도를 끝내신 주님이십니다. 기도는 내 욕망에 하나님께서 보장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찾아 맞추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욕망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필요에 응답하신다.”
3)권세의 기도
분향단에는 4개의 뿔이 상단에 달려있습니다. 번제단의 4 뿔은 생명의 권세지만, 분향단의 뿔은 기도의 권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믿음의 기도를 넘어 권세의 기도까지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3일 길이었습니다. 두 사환도 갔습니다. 산 밑에서 아브라함은 사환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원어를 보면 ‘함께’라는 말이 돌아온다는 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삭을 죽이러 가면서 이삭과 함께 오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만 데리고 올라가는 데 이삭이 물었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은 또 선포를 하였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면서 엉뚱한 말로 두 마디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두 선포를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의 선포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권세의 선포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4)특권의 기도
기도는 의무이기도 하지만, 특권이기도 합니다. 분향단 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지 못 하였습니다. 문제만 생기면 제사장이 기도하여 문제 해결함을 받았습니다. 제사장만이 기도할 수 있는 자리인 분향단 까지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 제사장은 분향단에서 기도하였고 사람들은 밖에서 제사장이 기도응답을 받고 나오기까지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분향단까지 가서 건방지게 분향하다가 죽은 왕이 두 명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명은 여로보함 왕으로 분향하다가 손이 말라 비뚤어자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왕은 웃시야 입니다. 그도 분향하다가 이마에 문둥병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분향단 기도는 제사장만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에 특권입니다. 대통령에게 직접 말할 수 있는 것은 특권층에게 특권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특권을 주셨고, 기도도 가르쳐 주셨고, 주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분향단 까지 나갈 수 있는 우리의 신분은 고된 의무라기보다 신나는 특권인 것입니다.
5)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향을 피울 때는 반드시 등대의 불빛 아래서만 하도록 했습니다. 향을 사르는 일이 성도의 기도의 모형이라면, 성도들의 참 기도와 예배는 오직 성령의 조명과 인도함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진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롬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유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간구할 때마다 성령께서 마땅히 빌 바를 가르쳐 주셔서 그렇게 드린 기도마다 놀라운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항상 기도
제사장들은 아침저녁으로 분향단에 향을 피웠습니다. 향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루 일과 시작전 기도요, 할 일과 후 기도였습니다.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하루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아침기도는 열쇠요 저녁 기도는 자물쇠라고 말했습니다. 시 5:3에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고 했습니다. 아침은 기도하기에 상쾌한 시간입니다. 저녁은 하루를 마감하기에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끊임 없는 연속의 기도입니다.
7) 향의 기도
기도할 때는 그냥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향을 피우며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출 30:34-38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형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향을 피울 때는 아무 향이나 피우면 안되고 반드시 지정된 다음과 같은 5가지이어야 합니다.
(1)소합향
소합향은 스토렉스라는 향나무에서 저절로 나오는 향이라고 합니다. 억지로 나오는 향기가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향입니다. 우리 안에서 저절로 찬양과 감사와 기도와 기쁨이 가득 차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이처럼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것을 소합향이라 말합니다. 꽃은 억지로 향기를 내지 않습니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소합향을 태우게 되어 있습니다.
(2)나감향
나감향은 홍해 근처에서 살고 있는 오닉스라는 조개류의 껍질을 빻아서 만든 향입니다. 이 조개는 특징이 있습니다. 언제나 향기로운 식물만 먹습니다. 그래서 조개는 먹고 그 껍질을 가루로 만들어 태우면 향기가 났습니다. 이 향이 바로 나감향입니다. 기도할 때에 이런 조개껍질을 가루로 만들어 불태우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껍질이 가루로 부스러지듯 자아가 부서지고 깨어지고 씻기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기도하고 나면 고집스럽게 내 딱딱한 자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처럼 완전히 깨어져야 합니다. 겟세마네라는 뜻은 쥐어짠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기 위하여 고통스럽게 쥐어짜는 기도입니다. 자아가 부서지고 하나님의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경험도 나감향의 고통입니다. 조개껍질이 부서져야 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감향과 같은 기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풍자향
풍자향이란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향으로 소독제로 쓰이는 향이라고 합니다. 아무 고무나무에서나 나오는 향이 아니라 갈반이라는 특별한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향입니다. 우리 영혼에 묻어 있는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빨래해야 하듯 영혼도 더러워지면 빨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가 요구되며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다윗의 회개 기도, 베드로의 통곡 기도와 같은 기도가 풍자향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향에는 풍자향을 섞도록 하였습니다.
(4)유향
유향은 악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시체에 바르는 향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새벽에 예수의 무덤으로 갈 때 이 향을 지니고 갔습니다. 이 향의 의미는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우리에게 다가올 불행을 제거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얍봅강에서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다급함에 기도하던 애절한 야곱의 기도입니다. 브닌나에게 당한 무시에 너무도 서러워 술취한 사람처럼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던 한나의 기도입니다. 귀신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거라사인이 귀신을 제거시켜 달라는 기도가 유향의 기도입니다. 딸에게 당한 불행을 부스러기 사랑으로라도 제거시켜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던 가나안 여자의 기도가 유향의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기도에는 유향이 불타야 합니다. 유향의 향연이 필요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5)소금
분향단에 태우는 향에는 반드시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 소금은 언약의 상징입니다. 레 2:13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내 모든 예물에 소금을 둘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 응답의 왕 죠지 뮬려는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란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여 놀라운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하는 기도는 응답의 기도입니다. 그렇기에 향속에는 언약을 의미하는 소금이 들어있었습니다. 이같이 분향단의 기도는 5가지가 들어 있는 향연의 기도입니다. 어떤 성막 학자는 이 향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보기도 합니다. 소합향은 저절로 나는 향으로 향내 나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의미합니다. 나감향은 조개껍질이 부숴져서 향이 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합니다. 풍자향은 죄를 닦아주는 소독제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유향은 시체에 바르는 향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소금은 약속으로 그리스도의 언약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기도가 향기로운 기도들이 되어서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다 올라가 놀라운 응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