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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양지인(宋襄之仁)
송나라 양공의 인자함이라는 뜻으로, 제 분수도 모르면서 남을 동정하는 어리석은 어짊을 일컬는 말이다.
宋 : 송나라 송(宀/4)
襄 : 도울 양(衣/11)
之 : 갈 지(丿/3)
仁 : 어질 인(亻/2)
남을 생각하고 양보하거나 먼저 배려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미덕이다. 성인들이 양보를 찬양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성공의 가장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한다는 격언도 있다. 하지만 아무 때나 양보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죽고 살기로 싸우는 전쟁 통에는 남에게 이겨야 한다.
병사를 전쟁에 출전시켰을 땐 계책을 써야 할 뿐만 아니라, 속임수를 쓰는 것도 부끄러워하거나 싫증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병불염사(兵不厭詐)란 말이 잘 말해준다. 그런데 싸움터에 나가서도 쓸데없이 대의명분만 따지다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된 사람이 있다.
송(宋)나라 양공(襄公)의 인자함이라는 뜻의 성어를 남긴 양공이다. 불필요한 동정이나 배려를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비유하는 말이다.
송나라는 당(唐)을 멸망시킨 송이 아니고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소국이었다. 그래도 은(殷)나라를 계승한다는 자부심이 컸다. 양공은 태자 때 이복형인 목이(目夷)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부왕이 죽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7년째 되던 해 송나라에 강풍을 동반한 심한 비와 함께 운석이 계속해서 퍼부어졌고 얼마 안 있어 첫 패자(霸者)였던 제(齊)의 환공(桓公)이 죽었다. 양공은 이제 자신이 패자가 될 징조라며 야망을 품었다.
초기엔 제법 제나라를 치고 추종세력을 만들었고 우(盂)라는 곳에서 회맹하여 맹주로 자처하기도 했다. 재상으로 있던 형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그즈음 이웃 정(鄭)나라가 자기를 무시하고 초(楚)나라와 통교했다는 이유로 쳐들어갔다.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초나라의 대군이 홍수(泓水)라는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목이가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쳐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듣지 않았고, 건너와 진을 칠 때 공격해야 한다고 해도 물리쳤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오(君子不困人於厄/ 군자불곤인어액).’
전열을 가다듬은 초군이 공격해 오자 송군은 대패했고 양공은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어 그것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송나라 양공의 인이라며 비웃었다(世笑以爲宋襄之仁/ 세소이위송양지인).
사기(史記) 송세가, 십팔사략(十八史略), 좌씨전(左氏傳) 등 여러 곳에서 실려 전한다.
양보를 할 때도 그에 못지않은 이득을 차려야 성공한 협상이다. 당연한 권리를 주장 못하고 상대방의 힘에 눌려 자꾸 뒷걸음질을 한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작은 규모의 상담이나 국가 간의 외교전도 마찬가지다.
송양지인(宋襄之仁)
송나라 양공의 어짊이란 뜻으로, 제 분수도 모르면서 남을 동정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
명분은 순리와 이치를 앞세우고 실질은 현실을 중시한다. 베풂은 명분이고, 누구에게 어떻게 베풀지는 실질이다. 베풂이 상대에게 되레 해가 된다면 명분은 맞지만 실질은 어긋난 것이다. 베풂이 스스로에게 독이 된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다.
송나라 군사가 강을 두고 초나라 군사와 마주했다. 송나라 양공(宋襄)이 강 한쪽에 먼저 진을 쳤다. 막강한 초나라 군대는 송나라 진을 부수고자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송의 군대가 턱없이 약하다고 판단한 장군 목이가 양공에게 간했다. “적이 강을 반쯤 건너왔을 때 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양공은 듣지 않았다. “그건 의로운 싸움이 아니다. 정정당당히 싸워야 참된 패자가 될 수 있다.”
어느 새 초나라 군사는 강을 건너와 진용을 가다듬고 있었다. 목이가 다시 한번 간절히 진언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진용을 미처 가다듬기 전에 치면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양공은 재차 무시했다. “군자는 남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괴롭히지 않는 법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싸움의 결과는 이미 짐작했을 거다. 원래 열세였던 송나라 군사는 참패하고, 양공 자신도 허벅지에 입은 부상이 악화돼 이듬해 죽고 말았다. 남송 말부터 원나라 초에 걸쳐 활약한 증선지가 편찬한 십팔사략에 나오는 이야기다.
송양의 어짊을 뜻하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은 어리석은 대의명분을 내세우거나 과한 인정을 베풀다 되레 해를 입는 것을 비유한다.
누구는 조선 500년을 ‘명분의 시대’라고 꼬집는다. 명분만을 좇다 실질을 잃어 나라가 허약해졌다는 것이다. 실질이 빠진 명분은 탁상공론이 대부분이다.
가르침이 빠진 맹목적인 사랑은 자식과 부모 모두에게 화가 된다. 자식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게 참사랑이다. 자식의 수고를 부모가 모두 떠안으면 그 자식은 허약체질이 된다. 대개의 명분은 겉에 달콤한 초콜릿을 입힌다. 한데 그게 몸에 해로운 경우가 많다.
송양지인(宋襄之仁)
송양(宋襄)은 ‘송나라의 양공’을 말하고, 인(仁)은 ‘어짐’을 말한다. 즉, 의미없고 어리석은 대외명분을 내세우거나 불필요한 동정을 베풀다가 오히려 자기가 피해를 입는 것을 가리킨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辭讓)했다. 그래서 자부가 위(位)에 올라 송양공(宋襄公)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B.C.643), 춘추(春秋)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가 될 징조라며 송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간(公子間)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齊)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昭: 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宋), 제(齊), 초(楚) 세 나라의 맹주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송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楚)나라와 통교한 정(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송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다. 이때 장군 목이가 송양공에게 이르기를 “적이 강을 반쯤 건너왔을 때 공격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송양공은 “그건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참다운 패자가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면서 듣지 않았다.
강을 건너온 초나라 군사가 진용을 가다듬고 있을 때, 또 다시 목이가 참다 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송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
송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열세한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송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하는 바람에 결국 이듬해 죽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비웃어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하였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반면, 송양공은 송나라 대부들과 백성들로부터 무수한 책망과 질타를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자 목이의 말을 듣지 않아 패했다. 어째서 목이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가족을 잃은 통곡 소리와 재산을 잃은 원망 소리가 연일 궁중의 병상에 누워 있는 송양공의 귀를 때려댔다.
그런데 이에 대한 송양공의 반응 또한 걸작이었다. 이때의 이 표현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송양공을 비난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군자는 두번 다치지 않게 하고(不重傷), 이모(二毛)를 포로로 하지 않는 법이다(不禽二毛). 옛 성인들의 싸움 방식을 보면, 적이 험지에 들었을 때 괴롭히지 않았다(不以阻隘).
내가 비록 망국(亡國)의 후손이라고는 하나, 어찌 대열을 갖추지 않은 적에 대해 진격을 북을 울릴 수 있을 것인가(不鼓不成列).
두번 다치지 않게 한다 함은 부상자를 다시 상처입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친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모(二毛)란 흰 털과 검은 털을 가리키는 말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반백의 사람을 뜻한다. 즉 노병(老兵)은 포로로 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는 것이다.
옛 성인(聖人)들은 이러한 도리를 지켜 적이 조애(阻隘; 좁은 골짜기나 하천)에 머물러 있을 때는 몰아 부치지 않았으니, 비록 내(송양공)가 망한 은(殷)나라의 후예이긴 하지만 어찌 비겁하게 대열을 갖추지 않은 적을 공격할 수 있겠는가. 이는 결코 군자의 인의(仁義)가 아니다, 라고 송양공은 당당히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궤변인가, 아니면 군자로서 지켜야 할 인의론(仁義論)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송양공 특유의 미의식(美意識)인가.
이에 대해 수차례 송양공을 간언한 바 있던 공자 목이는 다음과 같이 송양공의 인의론을 반박했다.
모든 군대가 싸우는 목적은 이기기 위해서이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어차피 나라를 위해 군사를 쓸 바에는 적이 좋지 못할 때에 치는 것이 옳다. 한마디로 전쟁은 이겨야 한다는 것이 목이의 주장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저자 좌구명(左丘明)은 공자 목이의 이러한 반론을 세밀히 기록함으로써 송양공의 괴상망칙한 인의론을 비판했다.
대부분의 후세 사람들도 이에 동조하여 홍수전투(泓水戰鬪)를 다음과 같이 비꼬고 있다.
송양공은 인의(仁義)를 지키려다가 싸움에서 패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잃었다. 목숨까지 잃었다고 함은 송양공이 홍수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그 다음해 여름에 숨을 거둔 것을 말함이다.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학자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 인 염옹(苒雍)이 시(詩)로써 이 일을 탄식한 것이 있다.
不恤騰鄫恤楚兵(부휼등증휼초병)
寧甘傷股博虛名(녕감상고박허명)
宋襄若可稱仁義(송양약가칭인의)
盜跖文王兩不明(도척문왕양부명)
등(騰), 증(鄫) 두 나라 임금에겐 가혹하게 하고 초군에게 만 너그러이 대하다가, 마침내 넓적다리를 부상당하고 웃음거리가 되었도다. 송양공처럼 인의 찾다가는, 도척과 성인도 분별할 수 없으리라.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송양공의 괴상한 인의론(仁義論)을 가리켜,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비웃었다. 지금도 송양지인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지나치게 명분에 얽매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얻지 못하는 사람, 혹은 그러한 행동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가(史家)들이 송양공의 이러한 인의론을 비웃은 것은 아니었다.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은 송양공의 이상주의적(理想主義的) 행동을 어느 정도 높게 평가했다.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의 말미에 보면 사마천의 이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송양공이 비록 홍수에서 패했지만, 어떤 군자는 이를 대단히 칭찬할 만하다고 여겼다. 당시 중원지방(中原地方)에는 예의(禮義)가 땅에 떨어져 없었는데, 송양지예양(宋襄之禮讓)만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나라 제후 양공은 강을 건너오는 초나라 군사들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까맣게 강을 건너 몰려오는 초나라 군사의 숫자에 벌써부터 송나라 병사들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강을 건너오는 초나라 군사는 언뜻 보아도 자신의 군대보다 훨씬 숫자가 많아 보였다.
양공은 초나라 왕에게 군례(軍禮)에 따라 홍수라 불리는 이 강옆에서 싸우기로 정식 선전포고를 해놓은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전쟁 관례상 미리 통보하지 않는 전쟁은 다른 제후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것은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고 기습적인 공격이나 습격은 아웃 나라 제후들의 비난과 사관(史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정말 우아하고 명분있게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그 전쟁에서 이겼다고 해도 다른 제후들이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것이 전쟁의 불문율이었다.
걱정스런 얼굴로 초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오는 모습을 바라보던 양공을 지켜보던 그의 아들 목이가 참다못해 이렇게 간언하였다.
아버님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 초나라 군사는 우리보다 숫자가 훨씬 많기 때문에 그들이 강을 건너 이곳 들판에서 싸운다면 우리가 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지금 적이 강을 건너느라 혼란스러울 때 공격을 하셔야 우리 군대가 적은 병력으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공격하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양공은 심한 소리로 그의 아들을 꾸짖었다. “군자가 상대방이 어렵고 힘들 때 그 어려움을 틈타 공격을 한다면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없느니라. 지금 초나라 군대는 추운 초겨울에 강을 건너고 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을 틈타 공격을 한다면 다른 제후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아무리 싸움에 이긴다 한들 누가 그 승리를 인정해 줄 것이냐?
목이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군례(軍禮)에 의하면 강을 건너고 있는 적을 기습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예(禮)는 군자들의 정중한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강력한 명분과 힘을 가지고 있는 천자가 만드는 것이며, 무례한 제후를 처벌하기 위한 결정과 군대를 동원하여 그 나라를 정벌하는것 모두 천자가 결정하는 일이었다.
당시 아무리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이라 하더라도 이 약속을 깨고 명분없고 품위없는 전쟁을 하면 그것은 정벌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면 전쟁을 하려다가도 상대방 국가의 국왕이나 중오 지도자가 갑자기 상(喪)을 당하면 하던 전쟁도 멈춰야 했다.(不加喪)
또한 상대방 나라에 재난이 발생하면 하던 공격도 멈추는(不因凶) 정말 요즘 생각하면 이해 못할 우아한 전쟁 미학이 있었다.
전쟁할 장소나 시간을 정하고, 북이 울리면 전쟁을 시작하고, 기습공격은 할 수 없으며 정면공격만 가능하고(偏戰), 나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전쟁이라도 포로로 잡으면 안 되고(不擒二毛), 부상당한 적의 병사에게 두 번 상처를 주면 안 되는(不重傷)는 것이 춘추시대의 군대 예절이었다.
아무리 전쟁에 이겨도 그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면 안 된다. 문제가 된 지도자만 몰아내고 다른 지도자를 세우고 다시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오는 것이 군자의 명분있는 전쟁이었다.
정벌의 정(征)자는 가서 바르게 하고(正) 돌아온다는 뜻이 담겨있다. 무(武)라는 한자 역시 ‘그치다’ 라는 뜻의 지(止)와 창이란 뜻의 과(戈)가 결합하여 무력을 사용하여 명분없는 행동을 그치게 한다는 뜻이 있다.
결국은 명분상으로는 국토를 빼앗는 침략전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손자(孫子) 이전의 전쟁은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종의 룰이 있는 게임이었다.
이런 전쟁 미학에 찬물을 끼 얻은 것이 바로 강력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의 세력 약화였다.
춘추 말기에 들어서면서 천자의 지위는 약화되었고 예악(禮樂)의 제정과 정벌의 결정을 천자가 결정한다는 것은 강력한 힘이 있었던 옛날 천자 시절에나 가능한 일로 되 버렸다.
각 제후국들의 패권 전쟁이 심화되면서 점차 예의로운 전쟁의 미학도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필살(必殺)의 전쟁 정신이 점차 꿈틀되고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속에서 송나라 양공의 아들인 목이는 아버지에게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오기 전에 공격을 해야 한다고 간언을 드린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요구가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변해 가는 시대 상황을 재빨리 인식하고 있는 신세대의 한마디 충고였다. 명분은 이미 천자의 권위와 함께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였다.
내가 이기지 않으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굶어 죽으리라는 절박한 시대에 명분 찾고 예의 찾는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지면 누구 책임져줄 것인가? 옛날 같으면 전쟁에서 졌다고 완전히 나라를 잃지는 않았겠지만 이제는 시대가 완전히 변하였다. 누구도 우리와 우리 병사를 책임져주지 않을 것이다.
옛날처럼 늙었다고 봐주고, 다쳤다고 봐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의 예의가 없다고 해서 꾸짖을 사람도 없다. 옛날 같으면 천자가 나서서 꾸짖었겠지만 이제는 천자는 조그만 나라 제후보다도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양공의 아들 목이는 어찌보면 당시의 신세대였고 그의 아버지 송나라 양공은 구세대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명분찾고, 군대 예절 찾아가며 적이 힘들고 어려울 때 공격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논설을 늘어놓는 아버지를 보고 목이는 정말 시대환경에 적응 못하는 아버지 때문에 우리도 죽고 병사들도 죽을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그래서 초나라 군사가 강물을 건널 때 그 혼란을 틈타 공격을 하자고 했건만 양공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사마천 사기(史記)에 나오는 이 홍수의 전쟁(戰爭)에서 송나라 제후 부자간에 가치관의 갈등이 있었으며 이 갈등은 그 부자(父子)뿐만 아니라 그 당시 새로운 시대 환경 속에서 겪는 신구간(新舊間)의 갈등이었던 것이다.
송나라 양공은 계속해서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 진열을 정비하고 전쟁을 하기를 기다렸다. 이제 초나라 군대는 강을 다 건너고 일전을 벌일 대형을 짜고 있었다. 드디어 초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 진영을 모두 갖추고 들판에서의 신사적인 전쟁을 요청하였다.
북이 울리고 병사들은 한 걸음 씩 전진하고,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 그 위를 지나가고, 전차는 평지를 달려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가 상대 전차와 교전하였다.
다친 병사는 다시 창으로 찌르거나 칼로 베지 않았다. 이런 귀족적이고 예의바른 전쟁은 서양의 경우 거의 18세기까지 시행하였다.
귀족들은 뒤에 서고 병사들은 일렬로 앞에 서서 적의 총에 맞으면 쓰러지고, 그 뒤를 다시 후방의 병력이 채우고, 결국은 군대의 숫자와 병졸의 용기와 담력만이 승리를 장담하는 유일한 척도인 그런 전쟁이다.
여기에는 전략(戰略), 전술(戰術), 유인(誘引), 기습(奇襲), 화공(火攻), 정보(情報)라는 객관적인 전쟁 승패의 요소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당연한 결론이지만 송나라 군대는 완전히 패배하였다. 양공은 이 무모하지만 예의 바른 전쟁에서 크게 부상당하였고 결국은 오래 못가 그 부상 때문에 죽고 말았다.
전투에 참가한 대부분의 송나라 병졸들은 모두 죽거나 부상당했다. 폼에 죽고 폼에 사는 지도자를 만나 완전히 병사들의 인생이 여기서 끝나고 만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 사람들은 의외로 양공을 칭찬하지 않았다. 자신의 명분을 위해서 병사들을 몰살시킨 지도자로 그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송나라 양공은 정말 폼 나고 인의(仁義) 있는 지도자야!”라고 빈정댔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고사는 결코 휴머니즘도(仁), 사랑도, 명분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명분을 위해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을 몰살시킨 춘추 말기 마지막 명분전쟁이었다.
송양지인(宋襄之仁), 이에 대하여 후세에 평가가 나뉘고 있다. 유교(儒敎), 요컨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잇는 사람들은 ‘이것이 인자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인자인가?’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런데 군사적인 면을 인정하는 계통의 사람들, 즉 법가(法家) 등의 사상 쪽 사람들이 보면 ‘이것은 인자가 아니라 우자(愚者; 어리석은 자)다. 아군을 그 정도의 위기로 몰아넣고 자기 자신도 죽게 될 일을 하고서 무슨 인(仁)이냐?’ 라는 이야기이다.
이 양공이라는 사람은 어느 쪽인가 하면 종교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종교가가 되었더라면 성공했을지도 모르지만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비극을 낳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의 숫자가 적다면 양공의 사고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적은 대군이고 아군은 소수이다. 그 때문에 정면으로 싸우면 지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 군대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데도 패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나아가 전쟁에서 패하는 그런 인(仁)을 발휘했다는 데에서 양공은 지(知)가 부족했다고 느낀다.
인(仁)은 인(仁)이지만, 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양공에게는 확실히 배려도 있고 부드러움도 있고 후세에 찬탄(贊嘆)을 받는 부분도 있지만,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도 죽고 아군도 전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가 아주 어려운 부분이다. 우리는 ‘남의 일이다. 2천6백 년 전의 일이다’ 하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을 말하면 우리도 이와 같은 일을 매일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부정적인 말을 미리 해버리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회사의 영업부장 등을 맡으면 ‘우리는 다음 달에 도산할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거래를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식의 말을 불쑥 해버리기 때문에 상대는 도망가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인품은 좋아도 종교적인 인격 중에는 그런 약한 면이 있기 때문에, 자기자신 속에 만일 그런 부분이 있다면 조금 주의해야 한다.
자기 혼자라면 아직 괜찮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수에게 폐를 끼치는 수도 있으므로 타인에게까지 폐를 끼칠 때에는 조금 고쳐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이와 같은 송양지인(宋襄之仁)의 타입인 사람이 현대적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비무장 중립론(中立論) 등을 자꾸 말하고 싶어하는 경향의 사람이 될 것이다.
비록 적이 핵무기로 공격해 오더라도 비무장으로 가만히 참아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타입의 사람은 이상주의자이지만, 너무 극단적이므로 사실은 현실적인 위기를 구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경영자원에는 여러 가지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철광석(鐵鑛石), 석탄(石炭), 석유(石油), 천연가스 등 물질로서의 경영자원은 당연히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현대에서 미래 사회에 걸쳐 가장 풍부한 경영자원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지식(知識)이다. 이는 틀림없다. 지식만큼은 자꾸자꾸 늘어나고 있다. 지식은 새로운 경영자원으로서 무진장한 것이다.
또 지식은 확대 재생산이 가능한 자원이며 새로운 지식이 새로운 자원을 낳고 성과를 낳는다. 거기서 또 새로운 지식이 생겨난다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현대의 경영이론에 의하면 능숙한 경영을 함으로써 부(富)의 총합계가 늘어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것은 최근 2백년 정도에 발견된 것이다.
요컨대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따로 일하고 있으면 그 노동력의 합계 이상의 생산물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지혜를 모아 좋은 일을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따로 일해서 얻어지는 이상의 부(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산업사회의 특징이다.
예를 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철광석으로 철을 만들려고 해도 그다지 많이는 만들 수 없다. 또 그 철로 물건을 만드는 것도 상당히 힘든다. 그러나 자본금을 밑천으로 하여 회사를 만들고 다수의 사람을 고용하여 분업체제로 한다면, 개인이 따로따로 철제품을 만드는 것보다도 훨씬 더 품질이 좋은 것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얻어지는 수입은 크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富)의 총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각자의 경제적인 여유 또한 많아지게 된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공장을 지어서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판매 루트(route)에 올려서 국내에서 판매하거나 수출하거나 한다는 것이며, 또한 원재료를 외국에서 싸게 대량으로 수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의 바탕에는 역시 지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지력 베이스란 단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금까지 머리가 좋았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경영자원으로서의 지식이란 미래를 향해 무한대로 확대되어 가는 것이므로, 늘 학습하는 태세를 취하지 않는 한, 오늘은 우수한 사람이 일년 후에는 우수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사람의 경우도 그렇고, 조직의 경우도 그렇다. 더 새로운 것이 계속 생겨나기 때문이다.
시간은 유한한 자원이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고,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모두 합해도 사람 수 몫 이상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발전성이 높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항상 어떻게 해서 시간을 줄이는가? 하는 데에 시점을 둔다. 시간을 줄임으로써 발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간선(新幹線)이라는 고속철도가 생김으로써 일본의 GDP(국민총생산)가 상당히 방대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매우 넓어진 것을 의미한다.
도쿄에서 오사카 방향을 야간열차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 혹은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에 비해 GDP가 증대한 이유는 이동시간이 줄어들었다는 데에 있다.
또 계절상품이라는 것이 있다. 여름 물건, 여름 상품은 여름이 되면 만든다는 것만이라면 일년 중 나머지 계절은 손이 빈 상황이 된다.
일년 중 여름이 아니면 생산활동이나 판매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사고도 있겠지만, 여름 물건이라도 겨울 동안에 만들 수 있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아이스크림은 여름에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겨울에 만들어서 그것을 보존해 두어도 된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 시간의 관점에서 일을 진행시키면 여러 가지 것이 변화하게 된다.
어떻게 해서 시간을 줄이는가? 어떻게 해서 일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가? 성과를 낼 때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해서 단축하는가? 하는 것은 주로 그 다음 성과를 낳기 위한 과정이다.
한 가지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좀처럼 그 다음 일에는 착수할 수 없는 법이지만, 시간의 부분을 줄이면 그만큼 빨리 그 다음 일에 착수할 수 있다.
궁극의 타임베이스 매니지먼트는 하루의 수고는 하루로 족하다는 것이다.
일일일생(一日一生)이라는 말이 있다. 그 날 중에 할 수 있는 일은 그 날 중에 전부 다 해버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며 시기가 오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 다른 사정이 있어서 못하니까 오늘은 하지 않는다는 따위는 타임 베이스 매니지먼트에서 벗어난 것이다.
어떻게 해서 시간을 줄이는가? 어떻게 해서 일하는 방식을 단축하는가? 가 중요하다. 시간을 줄이는 것은 동시에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이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장소에 가는데 고속철도로 3시간이 걸리지만, 비행기라면 1시간만에 도착할 수 있다면, 2시간을 여분으로 일할 수 있게 되는 셈이며, 그만큼의 시간이 만들어진 것이 된다.
그리고 이 타임베이스 매니지먼트는 의사 결정의 속도를 올린다는 것이다. 커다란 조직이 되면 계층이 늘어나므로 아무래도 의사결정이 늦어지며, 정보가 닿는 것도 늦어진다.
이것을 어떻게 해서 허물어 뜨리고 짧게 하는가? 하는 것으로 현대의 기업들은 모두 고생하고 있다. 그것을 짧게 하기 위해 전화, 팩스 등 문명의 이기를 여러 가지로 사용한다.
옛날에 비해 현대는 인생의 길이가 같을지라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허비를 배제하고 액세스 타임(access time, 호출한 다음의 대기시간)을 짧게 함으로써 시간을 만들어낼 수가 있게 되어 있다.
벤처기업 등의 새로운 기업을 비롯하여 현재 급하게 발전 중인 기업은 어디나 타임베이스 매니지먼트를 사용하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 속도를 올리는가? 를 생각하고 있다.
옛날에는 사장의 결재상자에 결재서류가 사흘 분이나 일주일 분이나 쌓여 있다는 일이 흔히 있었다. 그 동안에 사장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면 골프를 치러가거나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결재속도를 올리는가? 에 골몰하는 것이 보통이며, 나아가 시대는 애당초 결재하지 않아도 좋게 만든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결재도장을 20개나 30개나 찍는 방식은 이제 시대에 뒤쳐진다. 될 수 있는 한 현장에 가까운 곳에서 판단을 하게 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도력이 있는 사람은 결단이 빠르다
지도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측정하는 기준 중의 하나로서 결단력을 들 수 있다.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은 예외 없이 결단력이 뛰어나다.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많은 보물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너무 깊이 생각함으로써 결단이 늦어져 인생의 성공을 놓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의 리더가 될 만한 사람은 결단이 빠르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선견지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단력은 결코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라는 식의 단순한 결단력이 아니라, 시시각각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나아가는가를 순식간에 생각하여, 잘못된 점이 판명되면 즉시 수정하는 힘이다.
따라서 결단력이라는 말은 사려 깊음이라는 말과 어느 의미에서 일치하는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사려가 깊다는 것이 결단력과 이어지지 않고 우유부단함과 이어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한 결단력이란 난관, 난국에서 쾌도(快刀)가 난마(亂麻)를 끊는 것과 같은 판단, 대국적인 판단을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일의 흐름, 운명의 흐름에서의 소국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정세를 보면서 그때마다 자신의 판단을 수정해 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단력에 관해서는 위대한 인물일수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에 신속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단력이 뛰어나다는 말은 일단 자신이 결정한 일을 결코 번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완고한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자신이 결정한 일은 어디까지나 관철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관철할 때 사리사욕은 없는가? 아욕은 없는가? 이것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길인가? 이것이 정말로 부처의 마음에 합치한 행위인가? 하고 늘 점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단력의 원천에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해 불리한 결단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생각될 때,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생각될 때는 그것을 깨끗이 인정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도 자신의 프라이드에 구애되어 자신의 허물, 잘못을 좀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든 때로는 무심코 해서는 안될 말을 하거나 잘못된 말을 하거나 남을 상처 주거나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프라이드에 사로잡혀서 그와 같은 작은 자기를 지키는 일에 급급해서는 안된다. 용기를 가지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결론을 바꾸어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것이 또 그 다음 결단력을 낳는 힘이 된다.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떤 어려움도 튀겨내는 바위와 같은 강인한 의지와 섬세하고 세심하게 여러 가지 일을 분석하면서 그때마다 유연하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가는 마음, 이 양쪽이 필요하다. 유연함을 상실한 마음이어서는 성공은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크게 성공한 사람의 대부분은 신념을 관철했다는 면과 매사에 유연하게 대응했다는 양쪽 면을 겸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 십년이라는 인생에서 대성 해 가기 위해서는 대국적 관점에서 결단력을 가지고 크게 관철해 가는 부분과 소국적 관점에서 시시각각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유연한 마음, 이 양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 宋(성씨 송/송나라 송)은 회의문자로 갓머리(宀; 집, 집 안)部에 기둥을 나타내는 木(목)을 더하여 이루어졌다. 본디 집의 뜻으로 중국(中國)의 옛나라의 이름이다. 그래서 宋(송)은 (1)성(姓)의 하나. (2)중국 주대(周代)의 나라. 은(殷)의 멸망 뒤, 주왕(紂王)이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로 하여금 은(殷)나라의 유민(遺民)을 거두게 하기 위하여 봉한 나라.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邱縣)에 도읍했다. 춘추시대에 12 제후의 하나가 되었으나 전국시대에 제(濟), 초(楚), 위(魏)의 세 나라에게 망하고 그 땅은 삼분되었다. (3)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南朝)의 한 나라이다. 동진(東晉)의 권신(權臣) 유유(劉裕)가 420년에 자기가 옹립한 공제(控除)의 선양(禪讓)을 받아서 세웠다. 건강에 도읍했다. 귀족의 신분을 보장하고 토단법(土斷法) 등에 의해서 경제 재건을 꾀하여 국세를 떨쳤으나 그 뒤 귀족의 발호, 내란과 외압 등으로 쇠퇴하여 최후의 순제(順濟)가 권신 숙도성(肅道成)에게 8대 59년 만에 망하였다. (4)중국의 왕조. 960년에 조광윤(趙匡胤)이 5대 후주(後周) 공제(恭帝)의 선위를 받아 세운 나라이다. 개봉(開封)에 도읍했다. 제8대 휘종(徽宗), 제9대 흠종(欽宗)이 금(金)의 침입을 입어 북쪽으로 붙들려 가기까지(1126년)를 북송(北宋), 흠종의 아우 고종(高宗)이 남으로 옮기어 향주에 도읍을 정하고 원(元)의 세조(世祖)에게 망할 때까지를 남송(南宋)이라 하였다. 등의 뜻으로 ①성(姓)의 하나 ②송(宋)나라 ③나라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송나라 때에 간행된 책을 송판(宋板), 송나라 때에 일어난 고문古文을 송문(宋文), 송나라와 원나라를 송원(宋元), 송나라 때에 만든 돈을 송전(宋錢), 송나라 조정을 송조(宋朝), 송나라 때에 만들어진 도자기를 송자(宋磁), 북송이 금나라에게 밀려 휘종의 아들인 고종이 남쪽으로 내려가 항주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를 남송(南宋), 중국의 나라 이름으로 송이 수도를 강남에 옮기기까지의 이름을 북송(北宋), 중국 송나라와 당나라 양조의 이름을 당송(唐宋), 송나라 양공의 어짊이라는 뜻으로 쓸데없이 베푸는 인정을 이르는 말을 송양지인(宋襄之仁), 송나라 때에 시작된 세 가지 빛깔의 그림을 넣은 자기를 송자가채(宋瓷加彩) 등에 쓰인다.
▶️ 襄(도울 양)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옷 의(衣=衤; 옷)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양)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襄(양)은 ①돕다 ②오르다 ③이루다 ④높다 ⑤옮기다 ⑥치우다 ⑦탈것,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도울 우(佑), 도울 좌(佐), 도울 조(助)이다. 용례로는 장례葬禮를 지냄을 높여 이르는 말을 양봉(襄奉), 강원도 양양의 옛 이름을 양산(襄山), 강원도 양양의 옛 이름을 양주(襄州), 윗사람이 하는 일을 거들어 도와 줌을 찬양(贊襄), 송나라 양공의 어짊이라는 뜻으로 쓸데없이 베푸는 인정을 이르는 말을 송양지인(宋襄之仁)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仁(어질 인)은 ❶형성문자로 忈(인)과 忎(인)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二(이)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두 사람이 친하게 지냄을 뜻하는 데서 어질다의 뜻으로 쓰인다. 공자(孔子)가 특히 仁(인)을 도덕의 중심으로 삼은 후로는 자기에게는 엄하게 하지만 남에게는 어질게 하는 정신을 인(仁)이라고 설명한다. ❷회의문자로 仁자는 ‘어질다’나 ‘자애롭다’, ‘인자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仁자는 人(사람 인)자와 二(두 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仁자에 쓰인 二자는 ‘두 사람’이라는 뜻을 위해 쓰인 것이다. 仁자는 본래 두 사람이 친하게 지냄을 뜻했던 글자였다. 그러나 공자가 仁을 도덕의 중심으로 삼은 후부터는 인간의 근본적인 마음가짐을 대표하는 글자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仁(인)은 (1)공자가 주장한 유교의 도덕 이념, 또는 정치 이념 오상(五常)의 하나로 모든 덕의 기초로서 공자는 이것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설명하고 일반적으로 사랑 또는 박애가 그 내용으로 됨. 천도(天道)가 발현하여 인이 되고, 이를 실천하면 만사 모두 조화, 발전된다는 사상임 (2)애정(愛情)을 타에 미침. 곧 어짐, 착함, 박애(博愛) (3)식물의 씨에서 껍질을 벗긴 배(胚), 배젖의 통틀어 일컬음 (4)세포(細胞)의 핵(核) 안에 있는 작은 구형(球形)의 구조. 핵 하나에 한 개 또는 몇 개 들어 있고 리보 핵산과 단백질을 함유하여 단백 합성을 하는 것으로 생각됨. 비교적 큰 입상체(粒狀體)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어질다, 자애롭다, 인자하다 ②감각이 있다, 민감하다 ③사랑하다 ④불쌍히 여기다 ⑤어진 이, 현자(賢者) ⑥인, 어진 마음, 박애(博愛) ⑦자네 ⑧씨 ⑨과실(果實) 씨의 흰 알맹이, 속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사랑 자(慈), 어질 량/양(良), 어질 현(賢)이다. 용례로는 마음이 어진 사람을 인자(仁者),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인자(仁慈), 어진 임금을 인군(仁君), 타고난 성질이 어질고 착함을 인선(仁善), 인덕이 있고 수명이 긺을 인수(仁壽), 인덕의 감화를 인화(仁化), 어질고 후덕함을 인후(仁厚), 어진 덕을 인덕(仁德), 어질고 명철함을 인명(仁明), 인자스러운 마음을 인심(仁心),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인애(仁愛), 어질며 은혜가 있는 일을 인혜(仁惠), 어진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 구제함을 인휼(仁恤), 어진 것과 의로운 것을 인의(仁義), 어질고 덕망이 있는 성인을 인성(仁聖), 성질이 어질고 순함을 인순(仁順), 어질고 착하지 아니함을 불인(不仁), 너그럽고 어짊을 관인(寬仁), 어질다고 소문난 명성을 인문(仁聞), 친소의 차별없이 널리 평등하게 사랑하는 일을 동임(同仁), 복숭아씨의 알맹이를 도인(桃仁),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마음가짐 곧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와 지혜를 인의예지(仁義禮智), 어진 사람은 널리 사람을 사랑하므로 천하에 적대할 사람이 없음을 인자무적(仁者無敵), 인과 의와의 도를 인의지도(仁義之道), 의를 위하여 나서는 어진 사람의 용기를 인자지용(仁者之勇), 어진 사람은 도리에 따라 행하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므로 근심을 하지 않는다는 인자불우(仁者不憂), 인자는 의리에 만족하며 생각이 깊고 행동이 신중함이 산과 같으므로 자연히 산을 좋아한다는 인자요산(仁者樂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