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유배 기간 다산은 강진에서 다도를 익히고. 불교 사상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길은 조선 후기 다산의 실학 사상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대 최고 학자와 학승의 만남
이 길의 의미를 되새기려면 먼저 선생과 아암 혜장선사의 관계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1801년 경상도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은 당시 백련사에 머물던 혜장선사가 연 대흥사 법회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최고의 실학자인 선생과 불가의 손꼽히는 학승이었던 혜장선사는 서로의 학문적 깊이에 빠져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죄인으로서 다산과 당시 ‘8대 천민’으로 불리던 승려의 신분적 동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교류가 잦아지면서 다산은 혜장선사에게서 배운 다도에 심취하게 됐고. 심지어 “차만 탐닉하는 사람이 됐으며. 겸하여 약으로까지 삼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가 됐다.
그러나 강진읍 외곽의 주막에 머물던 다산이 1808년 지금의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문제가 생겼다. 백련사는 언덕 너머에 있고. 산 아래를 돌아가지 않고서는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차에 푹 빠진 다산으로서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지름길을 만드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초당 뒤편 언덕을 올라
백련사를 찾았고. 왕래가 잦아지면서 작은 오솔길이 생긴 것이다.
■백련사 가는 길
길은 초당 오른편 천일각을 끼고 시작된다. 조금 넓게 정비된 부분을 제외하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은 오솔길은 제 마음대로 휘어진다. 가을로 접어든 길가의 숲은 소리없이. 그러나 조금씩 그 색깔을 변화시키고 있다.
숲과 어우러진 길의 정갈한 모습은 사색하기에 딱 좋아 보였다. 앞서 가는 일단의 여행객들이 쏟아 내는 재잘거림이 귀에 거슬릴 지경이다. 몇 걸음 지체한 후 걸음을 떼니 어디선가 “따따따딱” 하는 소리가 적막을 깬다. 길 옆 나무에 붙은 딱따구리가 부리로 나무껍질을 쪼면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작은 다람쥐도 겨울 준비를 하는지 종종걸음을 재촉한다.
구릉에 오르니 구강포(강진만의 원래 이름)의 탁 트인 풍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시원한 가을 바람이 땀을 씻어 낸다. 200년 전 다산도 여기서 쉬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 산의 특징은 전체가 야생 차밭이라는 것이다. 차나무가 키 작은 가로수처럼 오솔길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산이 원래 ‘사암’이었던 호를 ‘다산(茶山)’으로 바꾼 것도 이 때문이다.
긴 내리막을 지나니 백련사를 둘러싼 푸른 동백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동백은 꽃과 열매를 떨어뜨리고 푸은 꽃망울을 만들어 겨울을 기약하고 있다. 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길은 이렇게 펼쳐지고 있다.
■곡차 해장에는 녹차가 최고?
“듣건데 고해의 다리를 건너는 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차 한 줌 몰래 보내 주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고려하사 베푸는 것을 잊지 마소서.”
‘걸명소(乞茗疏)’의 마지막 구절이다. 다산이 어느 날 혜장선사에게 차를 보내 달라며 보낸 편지다. 이 글을 읽은 혜장선사는 부처님에게 올리려고 준비해 둔 비상용 차를 보내 줬다고 한다. 걸명소의 전체적 형식은 정중하지만 “너만 맛있는 차를 마시냐”는 농담조의 내용을 담아 둘 사이의 친분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불경 외에도 <주역> 등 유교에도 조예가 깊은 혜장선사는 다산의 더없는 ‘학문적 파트너’였다.
둘은 서로의 처지에 얽힌 신세 타령을 포함한 세상 이야기에서 정치와 사상 등으로 교류 범위를 넓혔을 것이다. 그리고 근대 차 문화의 창시자로 꼽히는 초의선사도 합류하게 된다. 열띤 토론은 밤 늦게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혜장선사가 불가의 학승이었음에도 술을 매우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만날 때 곡차(술)가 빠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아침에는 해장을 위해 차가 필요했던 것이다.
혜장과 초의로부터 차 만드는 법을 배웠지만 이들이 만든 차맛과 같을까. 결국 다산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라도 백련사를 자주 드나들었고. 걸명소까지 쓰게 된 것이다.
다산은 이들로부터 불교 철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면서 학문적으로 더욱 넓고 깊게 눈을 떴고. 이를 바탕으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불후의 저서를 남길 수 있게 됐다. 다산이 저술한 500여 권 중 대부분이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 5년 동안에 쓰인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다산의 학문적 성취를 다룰 때 백련사가 빠질 수 없는 이유다.
■다산 초당
1808년부터 유배가 풀린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고 <목민심서> 등 500여 편을 저술한 곳이다. 다산 초당·동암·서암·천일각 등 유적이 있다. 이들 건물은 모두 최근에 지어진 것들이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닿는 초당은 원래 초가지붕이었으나 1936년 붕괴된 후 57년 중건하면서 기와를 얹었다. 초당 서편 뒤쪽에 발자취를 남긴다는 뜻으로 선생이 직접 ‘정석(丁石)’이라 쓴 바위. 수맥을 잡아 만든 샘 약천. ‘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란 뜻의 평평한 돌 다조. 바닷가 돌을 옮겨 만든 연못 연지석 가산 등 다산 사경에서는 다산의 손때를 엿볼 수 있다.
■백련사
신라 말엽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고려 때 귀족 불교에 반대. 서민 불교를 일으킨 불교 결사 운동의 본거지이자 고려 8대 국사와 조선 8대사를 배출한 도량으로 유명하다.
만덕산(408m)을 뒤로 한 채 구강포를 내려다보는 절간의 자태는 의젓하면서도 시원하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구강포를 감상하며 주지 법상스님이 내주는 연차와 홍차를 맛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템플 스테이도 가능하다. 061-432-0837.
■먹을거리
대표적 음식은 한정식이다. 바닷가 마을답게 해산물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남도 인심을 더해 양이 푸짐하고 종류가 다양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다. 한정식은 1인분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수지가 맞지 않아서다. 한 상(4인 기준)에 2만원부터 시작한다. 강진읍내 둥지식당(061-433-2080)이 인기 있다.
또 남해안에서 짱뚱어를 경험하지 않으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강진읍내 짱뚱어 전문점인 동해회관(061-433-1180)은 갓 잡은 싱싱한 짱뚱어를 이용한 전골(3만원)·탕(6000원)·구이(열 마리·2만원) 등 다양한 요리를 내놓는다.
강진=글·사진 박상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