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서 오랫동안 자체 정권을 유지했다. 길이는 거의 제주도만하지만 면적은 그 절반밖에 안 되는 대마도가 한·일의 중간에서 독립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한·일 간의 ‘힘의 균형’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의 균형이란 국력의 크기가 똑같았다는 게 아니라, 대마도가 상대방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견제할 만큼의 힘이 양쪽 지역에 모두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균형이 존재했기에 작은 섬 대마도가 한·일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봉과 식량원조를 받으면서 조선을 상국으로 대한 대마도가 끝내 조선 영토로 편입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같은 힘의 균형 때문이었다.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또 다른 힘이 일본열도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힘의 균형은 항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힘의 균형이 파괴되면, 대마도 같은 작은 섬은 어느 한쪽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서는 대마도를 사이에 둔 한·일의 역학구도가 파괴된 적이 몇 번 있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상황이 그러했다. 조선 전기에 한반도에는 조선이라는 통일국가가 존재했지만, 일본열도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양상이 전개되었다. 조선이 태평성대의 번영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일본열도에서는 1467년부터 1590년까지 길고 긴 내분의 시대가 계속되었다(센고쿠시대 혹은 전국시대).
이 시기의 일본열도에서는 다이묘(지역 지도자) 간에 세력 다툼이 벌어졌고 하극상 풍조가 무사계층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해서 혼란을 종식시키기 전까지 일본은 내분의 극복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열도 안에서 그 같은 장기간의 내분이 벌어졌으므로, 이 시기는 대마도를 사이에 둔 힘의 균형이 파괴된 때에 해당한다. 시소는 분명히 한반도 쪽으로 기울였다.
이치대로라면, 이런 경우에는 대마도가 조선왕조의 영토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해협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다 한들 조선만한 규모의 나라가 대규모 원정대를 연이어 파견한다면, 대마도 같은 작은 섬이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에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편입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고려 말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몇 차례의 대규모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한반도는 어떻게든 대마도 문제를 매듭짓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 수군은 일본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일본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때까지는 조선군이 해양에서만큼은 일본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예컨대, 우수한 해선과 해전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일본은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적인 해군을 양성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일본군’이란 관념이 형성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 이후였다.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난 왜구가 준동한 이유 중의 하나도 일본 내에 통일적 중앙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의 일본에서는 육군을 배로 실어 나른다는 관념은 있었어도 배를 타고 해상에서 적과 싸운다는 관념은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조선 수군을 압도할 만한 해군력이 부산 동남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열도도 그렇고 대마도도 그러하다. 이처럼 조선의 해군력이 일본열도나 대마도를 능가하고 있던 상태에서 15세기 중반 이후에는 일본열도가 100년 이상의 내분상태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보다 더 강력한 대마도 정벌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조선은 끝내 활용하지 못했다. 국력이 약해서였을까? 그것은 분명히 아니다. 태평성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에는 국력이 비교적 안정적인 편이었다. 그럼,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전기의 조선왕조가 활발한 대외군사활동을 벌였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군사활동은 주로 동북방의 여진족을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최강 명제국도 동북방 여진족을 핵심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전기의 조선왕조가 여진족을 최대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점은, 당시 조선군대의 훈련이 주로 북방 기마병대와의 전투에 대비한 것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느 일본사 학자는,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의 명장 신립 장군이 허무하게 패배를 당한 것은 그가 주로 북방 기마병대와의 싸움에 익숙한 장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조선 군대가 허약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기마병 중심의 여진족만 주로 상대하다 보니 보병(조총을 든) 중심의 일본군에 대해서는 미처 사전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학자의 지적이다.
실제로도,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군은 북방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여진족을 완전히 분쇄하지는 못했지만, 조선 전기에는 13회의 대규모 정벌로 여진족을 견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조선군이 동북방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면,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허무하게 당한 것은 조선의 군사력이 약해서라기보다는 조선군이 대(對)여진족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에는 동북방 여진족을 견제하는 데에 국력의 상당 부분이 투입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과잉 투입되었다는 점이다. 동북방에 대한 과대 투입은 대마도에 대한 과소 투입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국력이 여진족 견제에 과잉 투입되도록 만든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명제국의 조선-여진족 이간전략이었다. 조선 전기에 요동의 여진족 거주지에 설치된 184개의 위(衛, 일종의 지역단위) 중에서 79개의 위가 조선을 상국으로 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여진족들은 명제국에만 충성을 바친 게 아니라 조선에게도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래서 명제국 입장에서는 조선이 여진족과 연합하여 명제국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런 우려 때문에 명제국은 조선을 더욱 더 여진족 토벌전쟁으로 끌어들였다.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두 지역을 이간시키기 위해서 조·명 연합군 구성을 요청하곤 했다.
명제국이 아니었더라도 조선은 단독적으로라도 여진족을 토벌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제국이 아니었다면 그처럼 자주 여진족을 토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제국은 조선이 단독으로 여진족을 토벌하기보다는 가급적이면 자국과 공동으로 여진족을 토벌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여진족을 억누르는 동시에 조선의 힘을 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는 명제국이 동아시아를 통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여진족 일부와 대마도가 자국을 상국으로 대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얼마든지 자국의 대외적 영향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지만, 조선은 위와 같이 명제국에 이끌려 다니느라고 결국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제국을 위해 여진족 토벌전쟁에 국력을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벌하고 말았다. 명제국이 조선을 얼마나 견제했는가 하면, 명제국이 조선왕실의 정통성을 약점 삼아 조선정부를 압박해 말 5만 마리를 조공품으로 받아간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말은 군마로 전용될 수 있는 것이기에 말 5만 마리의 조공은 곧바로 군사력의 약화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본래 여진족 지역인 함경도에서 성장한 데에다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그 후손들은, 내부의 거센 정치적 도전을 물리치자면 명제국의 국제적 지원을 얻을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하자면 명제국의 군마 요구나 여진족 공동토벌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성계가 여진족 지역에서 왔다면 그 출신이 혹시?’라는 의혹을 무마하자면, 조선왕실은 더욱 더 여진족 토벌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전기의 조선왕조는 동북방 여진족에 신경을 쓰느라 대마도를 보다 더 강력하게 압박할 수 없었다. 처음 한동안 대마도를 열심히 정벌하던 조선왕조는 동북방 여진족 견제에 주력하느라 대마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명제국이 조선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툭 하면 여진족 공동토벌 같은 대규모 원정사업을 벌이는 통에 조선의 관심은 더욱 더 동북방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전기의 조선왕조가 일본보다 우수한 해군력을 보유하고도 또 일본이 100년 이상의 내분기로 접어든 호기를 맞이하고도 끝내 작은 섬 대마도를 정복하지 못한 것은, 이 시기에 동북방 여진족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명제국의 여진족 토벌전쟁에 이끌려 다녔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기의 조선왕조는 동북방에 신경을 쓰느라 대마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동북방에서 대대적인 성과를 거둔 것도 아니었다. 조·명 양국의 집중 견제 속에서도 여진족은 근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위협을 가했다.
설상가상으로, 대륙의 조·명이 여진족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일본은 내부의 혼란을 극복하고 대륙을 향해 임진왜란의 총탄을 쏘아 날렸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명의 관심은 이제 여진족에게서 일본으로 급격히 옮겨졌고, 그 사이에 힘을 비축한 여진족은 결국 조·명 두 나라를 모두 능가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 어수선한 와중에 대마도에 대한 조선의 영향력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일본의 분열로 인해 하마터면 조선에 편입될 수도 있었던 대마도는 그렇게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조선이 대마도를 끝내 정복하지 못한 이유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북방 여진족이 강성해져서 그곳에 군사력을 많이 투입했다. ▲명제국의 전략에 휘말려 여진족 공동토벌을 너무 자주 벌이는 바람에 군사력이 과잉 소비되었다. ▲여진족·대마도·일본에 대해 전략적 관심을 골고루 안배하지 못하고 매번 어느 한쪽에 편중되는 경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