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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저자 : 신상목
출판사 : 뿌리와 이파리
일본의 근세사
1)
일본인들은 왜 근세라는 시공을 설정했을까?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 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 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고대 중화문명 확산 경로의 선후관계에서 비롯된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은 에도시대로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고 고정관념화되어 있다.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p.14/352)
2)
에도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미혼 남녀가 공공연히 교제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다. 데이트 장소로 가부키 극장이나 사루가쿠 무대 같은 공연장이 인기가 있었고, 식사 장소로 운치가 있고 가격도 저렴한 소바집이 인기를 모았다. 남녀가 데이트를 하게 되면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가 당연히 생겨난다. 에도 서민들이 거주하는 나가야는 좁고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에도의 아베크족들이 둘 만의 공간이 필요로 할 때 이용하기 시작한 곳이 소바집이나 우동집 등의 대중음식점이었다. 소위 '소바집 2층' 푼습이다. 본래 주인의 거주용으로 사용되던 2층 방을 데이트용 방으로 빌려주는 것이다. (p.31/352)
에도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마실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우물을 파면 소금물이 올라왔다. 연약한 지반의 충적지가 많아 지하수에 바닷물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에도의 거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량의 생활용수 급수가 절질하였다. 이에야스는 충복 오쿠보 다다유키에게 임무를 맡긴다. 오쿠보는 에도성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고이시카와의 물을 에도로 끌어오는 수로를 뚫는다. 일본 최초의 수도水道로 일컬어 지는 '고이시카와 상수上水'이다. 에도인들은 생활용수가 흐르는 물길을 상수라고 불렀다.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쓰고 난 물을 흘려보내는 것을 하수下水라고 불렀다. 현대의 상하수도의 어원이다. (p.43/252)
3)
에도의 오늘날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치수공사로는 '도네가와 동천 利根川東遷'을 들 수 있다. 도네가와는 일본에서 가장 수량이 많고 유역이 넓은 강의 하나로, 군마현에서 발원하여 다기한 유로를 형성하며, 에도로 흘러내리는 거대한 하천이다. 에도의 배후에는 간토 평야라고 불리는 드넓은 대지가 있었으나 우기마다 범람하는 도네가와의 존재로 인해 불모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들은 대대로 도네가와의 치수에 역점을 두었다. 치수의 포인트는 도네가와의 물길을 컨트롤하는 것이었다. 자기한 지류를 합류시킨 다음, 중간 지점에 대규모 제방을 쌓아 에도로 흐르는 유량을 줄이고 동쪽 태평양 연안으로 흐르는 유량을 늘려 간토평야 일대의 수해를 제어하고 농지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 첫 삽을 뜬 것이 이에야스였다. (p.50/352)
4)
일본은 중앙의 징세권이 없었다는 사정이 천하보청과 맞물려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선 천하보청에 동원된 자원은 중앙의 지배층에서 이전되어 축적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지방 지배층인 다이묘들은 자본 축적의 기회는커녕 악몽 같은 상황에 처했다. 번 정부는 동원 인부들에게 노임을 지급하고 자재를 구매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정을 지출해야 했다. 천하보청 비용 마련을 위해 빚을 내야 하는 다이묘도 있을 정도였다. 말단에서 세금의 형태로 걷히는 생산물은 천하보청을 거치면서 노임, 자재 대금 현태로 재분배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자원 투입의 결과로 높은 수준의 공공인프라가 창출되자 한층 더 경제활동이 촉진되고, 이는 다시 말단 세금 납부자의 생활 개선으로 이어졌다. 천하보청이 의도치 않은 국부의 인큐베이터가 된 셈이다. (p.58/352)
5)
경제적으로 볼 때, 다이묘의 지출은 누군가의 수입을 의미한다.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교통·숙박의 요지와 에도, 오사카 등 대도시의 상공인과 노동자였다. 에도로 출입하는 교통의 요지에는 참근단의 숙박을 위한 여관 등의 시설을 갖춘 '슈쿠바마치'가 조성되고, 물자 수송을 위한 물류업자 등 각종 주변산업이 태동되었다. 참근교대에 수반하여 '고카이도'라 불리는 간선도로가 대대적으로 확충되고, 에도성을 비롯한 도시기반 건설에 필요한 자재의 운송을 위하여 해로와 수로가 정비되었다. 18세기 초엽에 미곡을 비롯한 각종 물자의 집산지인 오사카로부터 에도를 연결하는 복수의 민영 정기항로가 개설되었고, 18세기 말엽에는 전국을 연결하는 상업 해운망이 완성되었다. (중략) 다이묘라는 재향 지배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 증가가 상인 및 도시노동자 계층의 소득으로 흡수되는 현상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낙수 효과'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대의 낙수효과가 부유층의 조세 부담을 경감시켜 간접적으로 소비 지출 증가를 유도하는 논리임에 반해, 참근교대는 부유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부의 환류 및 경제 활성화에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p.66/352)
6)
센다이미소의 인기몰이는 이러한 도시화와 물자 유통망의 발달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3대 웅번의 하나였던 센다이번은 에도에 총 7개소의 에도 번저를 두고 3000명에 이르는 근번 인력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에도에서 유행하던 산슈미소나 아마미소에 만족하지 못하던 센다이 번사들은 해로를 통해 고향의 미소를 날라다 먹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내부용으로 소비하다가 점차 소비량이 늘자 아예 에도에 생산 공장을 차린다. (중략) 처음에는 자체 소비 후 남는 물량을 일부 '돈야(대도매상)'들에게 부정기적으로 출하하던 수준이었으나, 뛰어난 품질과 번 직영 시절에 출하된다는 프리미엄과 신뢰성이 더해져 수요가 점점 늘자, 번 정부도 직영사업으로서의 상업적 관점에 주목하고 판매 증대 노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당시 에도에서도 '미소' 하면 십중팔구 센다이미소를 지칭할 정도로 센다이미소는 높은 지명도를 자랑하는 미소의 대명사가 된다. (p.83/352)
7)
17세기 후반 이후 이동의 자유 제한이 점차 완화되면서 '쓰코테가타'를 발급받아 합법적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쓰코테가타는 에도시대 초기만 해도 발행이 엄격히 제한되었지만, 일본의 조상신을 모시는 이세신궁 참배라는 목적은 이러한 증서를 발급받는데 매우 유효한 명분이 되었다. 민간의 이세참배에 대한 욕구가 워낙 간절하다 보니 막부와 각 번도 민심을 무시할 수 없었고, 정치적 안정과 행정력 확립에 힘입어 점차 이세참배를 위한 여행에 관대한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중략) 도카이도 주요 길목에 위치한 하마나 호수에는 당시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통행인은 배를 이용해야 했다. 1702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운행한 도하선의 운행일지를 보면 4만 4700여 회 왕복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회당 20명 정도의 탑승인원을 가정하고, 우회 육로를 이용한 인원이나, 별도의 전용 선박을 이용한 다이묘 참근단의 인원을 더할 경우 연간 100만이 넘는 인원이 도카이도를 이용한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3000만 명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인원이 도카이도를 이용해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p.93/352)
8)
'고講'란 본래 종교적 교리나 신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기도회, 강독회 등을 하면서 일정 금액을 상호부조의 목적으로 적립하는 모임이다. 이세참배가 유행하면서 많은 '이세고'가 지역 공동체 단위로 생겨나 적립금을 모으고 추첨이나 투표를 통해 이세참배자를 선발하여 비용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여행에서 얻어진 결과를 기록하고 공유하였다. 당시 여행은 개별적 자아실현의 의미를 넘어 집단기억의 생성과 공동체 유대 강화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여행에 대한 의식은 명맥이 이어져, 지금도 다양한 공부회, 취미회, 동호회에서 기금을 적립하고 공동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단체영화를 즐기는 문화가 발달해 있다. (p.101/352)
9)
읽을거리가 많아지자 사회 전반에 글을 배우려는 의욕이 높아진다. 사설 교육기관인 '데라코야'는 글을 배우고자 하는 서민들로 넘쳐나고, 데라코야 교습으로 생계를 잇는 평민 지식인층이 대두한다. 데라코야는 공적 교육기관인 번교와 달리 신분을 가리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읽기, 쓰기 등의 기초부터 산수, 주판 등의 실용 기술 그리고 사서오경 등의 간단한 유교경전 등에 대한 지식이 데라코야를 통해 서민 사회에 폭넓게 보급된다.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붙자 자연스럽게 지적 욕구가 자극되고 독서의 수준이 높아진다. 조닌 계층의 경제력이 높아지고 조닌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서민들도 재미를 넘어 상식, 교양, 그리고 교육을 통한 '삶의 나아짐'을 추구한다. 어느 서양 선교사가 "이 나라는 시골의 어린 계집아이도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놀라움의 기록을 남길 정도로 전 국민의 문자해독률이 높아진 19세기 초엽, 당대 굴지의 넘버원 베스트셀러는 놀랍게도 <경전유사>라는 유교경전 해설서이다. 다이 햐쿠넨이라는 떠돌이 유학자가 저술한 것으로 이 책은 사서오경 등의 유교 경전에 히라가나로 음을 달고 저자의 주해를 붙인 일종의 초급 유교경전 해설서이다. (p.118/352)
10)
에도시대 출판업의 중심이 된 것은 '한모토版元'였다. 한모토는 판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목판은 제작하는 데 숙련 기술자들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불편이 있는 반면, 한 번 만들면 닳아 못 쓰게 될 때까지 몇 백 년이고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중략) 판목이 출판업자의 생명줄과도 같은 중요 재산이 되자 판목의 소유 및 이용 권리의 규범으로서 '판권'이란 개념이 형성된다. 판권은 출판업자 사이에 소유·양도가 가능한 재산으로 인정되었으며, 주식처럼 소유권을 분할하는 것도 가능하였다. (중략) 에도의 출판 조합은 이를 위해 중판 또는 유판 등의 복제판 제작과 출판을 규제하였다. 자체적으로 등록 신청 단계에서 내용을 검수하여 중판 또는 유판에 해당하면 등록을 거부하였고, 시장에 나도는 해적판은 자체 회수하거나 관청에 신고하여 단속을 의뢰하였다. 초기 형태의 지적재산권 보호 개념이 자생적으로 태동하고 업자들의 공동이익과 시장질서를 위한 민·관 협동체제가 구출된 것은 에도시대의 자본주의 발달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p.120/352)
11)
데라코야 교육은 실용적이고 수요자 중심이었다. (중략) 우선 데라코야의 교육 방침은 '요미·가키·소로반'이라는 것이다. 글을 읽고, 쓰고, 소로반(주판)을 할 줄 알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다. 그 방법으로 채택된 것이 '데라나이手習'이다. '시쇼'라 불리는 교사가 직접 손으로 쓰고 읽어주면 학생들은 종이, 붓, 벼루, 먹을 필수품으로 지참하여 교사의 지시에 따라 익술해질 때까지 글을 쓰고 읽기를 반복하였다. (중략) 당시 교과서로 주로 사용된 것은 '오라이모노往來物'였다. 오라이모노는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다방면의 주제에 대해 평이한 문체의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기술된 문집이다. 거의 모든 방면의 수천 종의 오라이모노가 교과서로 존재하여 교사들은 각 지역의 특성과 교육 수요 등에 맞추어 교과목을 선정하고 교습하였다. (p.140/352)
12)
겐파쿠 자신이 "키도 돛도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듯하다"고 표현한 어려움 속에서 수수께끼 풀듯, 퍼즐 맞추듯 번역이 진행되었다. 기의를 알아도 그에 해당하는 일본어 기표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단어를 창조해야만 했다. 신경, 연골, 동맥 등 기존 동양의학의 관념에는 없던 인체의 부위와 기관에 새로운 일본식 이름이 부여되었다. 참여자들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번역에 매달린 지 3년 후인 1774년 <타펠 아나토미아>의 번역본인 <해체신서>가 출간된다. 가장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진 료타쿠가 번역이 충분하지 못함에 부담감을 느껴 극구 작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는 것을 사양했다고 할 정도로 번역 자체의 수준은 높지 않다. 그러나 번역의 수준을 떠나 <해체신서>의 출간은 일본의 지식사에 있어 분기점을 찍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p.167/352)
13)
히로시마의 의사 호시노 료에쓰는 솜씨 좋은 의사로 평판이 높았지만 숙모의 하악 관절 탈골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낭패를 겪는다. 호시노 료에쓰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의사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인체 구조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절감하고 정부의 특별 허가를 얻어 사형수를 직접 해부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인체 골격 모델 제작에 나선다. 1792년 솜씨 좋은 목공의 도움을 얻어 300여 일의 제작 기간을 거친 끝에 인체 목골木骨이 완성된다. 일본 의학계가 세계 최초의 인체 골격 모형이라고 주장하는 '호시노 목골'의 탄생이다. (중략)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병원을 견학한 조선의 신진관료 송헌빈은 그곳에서 해부도와 해부용 인형 등을 보고 "정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다. 이는 인술仁術을 하는 자가 할 짓이 아니다. 고약하고 고약하다"고 적었다고 한다. <타펠 아나토미아>가 조선에 먼저 전래되고 조선의 지식인이 새로운 세계관에 노출되었다 할지라도 조선이 과학적 합리성에 눈 뜨고 스스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는 이유이다. (p.174/352)
14)
<두후하루마>의 초고를 접수한 막부는 서양 지식의 전파를 우려하여 인쇄본이 아닌 필사본만 30여 부 제작하고, 배포처도 막부와 일부 번으로 한정하였다. 뜻있는 난학자들이 서양 세력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서양을 알아야 한다면서 막부를 설득하였으나, 막부는 정식 간행에 소극적이었다. (중략) <두후하루마>는 난학 연구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지식의 보고였다. 막부가 배포를 통제하는 동안에도 서로 앞 다투어 입수하려고 경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비공식 사본이 만들어져 유통되었는데, <두후하루마>를 입수한 주쿠와 그렇지 못한 주쿠 간의 입학생 모집에 큰 차이가 발생할 정도였다. 워낙 고가의 책자였기 때문에 이를 보유한 주쿠들은 외부의 요청으로 사본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운영비를 보충하기 하였다고 한다. (p.200/352)
15)
서양언어 사전을 최초로 만든다는 것은 기존의 한자로 된 사전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지적 작용을 요구한다.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서양언어로 표현된 개념을 일본어로 옮기기 위해서는 그 개념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liberty'를 자유自由로, economy'를 경제經濟로, 'physics'를 물리物理로, 'chemistry'를 화학化學으로 번역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 없는 관념을 번역하기 위해 편찬자들은 서양의 개념을 수용한 후 그를 자국어로 변용하는 언어의 재창조 작업에 몰두하였다. 최초로 그러한 임무가 맡겨진 사람들 입장에서는 단어 하나하나가 문화의 충돌이었고 문명의 이양이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번역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일본의 근대화에는 서구화가 본질적 요소로 내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의 관념을 일본의 관념으로 변화시키고 내재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이루어진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는 그보다 100년 전부터 수많은 지식인들의 고뇌가 담긴 '언어의 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p.208/352)
16)
'노렌 문화'라는 것도 있다. 구획을 구분하고 출입 통로에 거는 일종의 커튼 내지 가림막이다. 에도시대의 주거 형태는 침실, 거실 등 각 장소별 독립성이 완벽한 것이 아니어서 구획 구분을 위해 노렌을 걸어놓았다. 영업장에서도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노렌을 객석에 걸었다. 본래 차양, 출입구 표시 등을 위해 상점의 현관 앞에 걸어놓던 노렌은 상점이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서고 경쟁이 치열해지자 마케팅적 관점에서의 중요성이 포착된다. 상점의 상호와 문양이 새겨진 노렌은 브랜드 마케팅의 도구로 그 상점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면은 염색 시 색 구현력과 표현성, 내구성이 뛰어난 소재이다. 상인들은 앞 다투어 질 좋은 면으로 원하는 색과 디자인의 노렌을 주문 제작하여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 (p.223/352)
17)
같은 규제였지만 사치금지령은 조선보다 일본 사회에 더 영향이 컸다. 조선인들은 의복색 규제와 관계 없이 아예 염색을 하지 않고 면포를 표백, 탈색하여 흰옷을 입고 다는 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막부의 의복 규제는 조선보다 구체적이었다. 의복의 색을 쥐색, 차색, 남색의 3색으로 제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천편일률적인 의복 문화가 될 수도 있었지만, 에도시대의 패션 문화는 퇴보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며 진화의 길을 걷는다. 삼도三都를 비롯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도시민들은 여전히 패션을 통해 개성, 지위, 재력을 나타내고 싶어 했다. 자신을 꾸미고 가꾸고 싶어 하는 욕구는 규제로 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쥐색, 차색, 남색의 3색만 허용되는 제약 조건 안에서 차별화된 미감, 개성을 찾는 것이 패셔니스타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색 관념이 '사십팔차백서'이다. (p.230/352)
18)
막부 규제에 대한 적응은 색뿐만 아니라 무늬에서도 생겨난다. 막부의 규제는 집요해서 무늬의 크기, 모양, 색까지 일일이 규정을 만들어 단속하였다. 에도의 패셔니스타와 옷쟁이들은 그러한 규제 속에서 멋과 새성을 찾기 위해 멀리서 보면 무늬가 없는 것처럼 보이거나 수수한 무늬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세련되고 정치한 미세 무늬가 전면에 펼쳐져 있는 옷감을 개발한다. 소위 '에도코몬'이라는 것이다. 에도코몬은 '다타가미'라고 하는 템플레이트를 사용하여 제작한다. 여러 번 염료를 발라도 손상되지 않는 두껍고 질 좋은 종이에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미세한 구멍을 내어 일종의 점묘법 효과를 통해 무늬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천공 시에는 반원 모양의 송곳칼로 미세하게 힘 조절을 하며 구멍의 크기를 달리하여 원근감과 입체감을 표현하는 고도의 기술이 사용된다. (p.234/352)
19)
1650년대 들어 명청 교체기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맞아 국제 도자기 시장이 요동을 치면서 일본 도자기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막는다. 당시 청을 적대시하며 복명 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정성공은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힘을 키우고 있었다. 1655년 청나라는 정성공을 견제하기 위해 해상 교역을 차단하는 해금령을 발령한다. 청의 조치에 엉뚱하게 타격을 입은 것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였다. 중국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는 것이 큰 수익원의 하나였던 동인도회사는 중국 도자기의 유통 중간으로 큰 타격이 예상되자, 대체품으로 이마리야키에 눈을 돌린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미 1650년에 이마리야키를 베트남 왕실에 납품하면서 이마리야키의 상품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1659년부터 대량의 이마리야키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과 중동 일대에 수출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약 50년 동안 이마리야키는 유럽의 도자기 시장을 석권하며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p.249/352)
20)
소라이는 주자학이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기론이라는 틀레 세상을 끼워 맞추려는 본말전도의 모순을 안고 있는 주자학으로는 세상을 개혁할 수 없으며, 보다 현실적인 세계관으로 기성관념을 혁파하여 '안천하安天下'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정도라고 강조하였다. (중략) 소라이의 이런 고전 중시 해석론은 '고문사학파' 또는 그의 호를 따서 '켄엔학파'를 이루었다. '주자학 등 후세의 해석에 좌우되지 말 것. 직접 중국 고전으로 돌아가 배울 것'을 강조한 소라이의 사상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실증적 연구와 고증을 중시하는 일본 유학계 학풍의 초석이 되었다. 소라이의 학문적 성과는 후에 조선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소라이의 <논어징>을 대거 인용하면서 "이제 그들(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우리나라를 훨씬 초월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p.274/352)
21)
조선의 유교적 전통이 우주의 원리로서 '이理'와 '기氣'라는 거대 담론에 치중하였다면, 일본의 유교적 전통에서는 인간의 원리로서 '심心'과 '성性'이 생활철학으로 중시되었다. '심'은 인간의 근본으로서 모든 사유와 인식의 출발점이며, '성'은 개개에 나타나는 심의 발현이다. 바이간은 상인의 심은 본시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근본이며, 그 근본을 실현하기 위해 평소 성실·검약·근면의 생활 태도를 견지하여 신용을 쌓음으로써 각자의 '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심을 중심에 놓은 그의 사상은 문하생들에 의해 세키몬石門 심학으로 체계화되고 다듬어져 교토, 오사카, 에도 등지에 그의 사상을 가르치는 상담소가 퍼져나갔다. (p.284/352)
22)
위에서 살펴본 유학, 심학, 난학은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3대 지적 줄기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사상의 조류와 그를 설파한 사상가들이 에도시대에는 즐비하다. '지식의 경연'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이러한 지식의 지형도의 변화는 일본의 지식인, 사상가들의 개인적 능력이 특별히 출충하여 발생했다기보다는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응하여 반작용으로 나타난 지적 진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제가 있어야 답을 구하는 것이지, 문제가 제시되지도 않았는데 답부터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조선의 지식사 발전 양상이 동시대 일본에 비해 단조로웠다면 그것은 조선 지식인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만큼 사회가 정체되어 있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p.296/352)
23)
채광기술의 경우 16세기 중반까지는 지면에 노출된 광맥을 캐는 수준의 노천제광에 머물렀으나, 16세기 말이 되면 지하를 수직으로 파내려가거나, 수평으로 갱도를 만들어 광맥 심부에서 채광하는 기술이 보급되면서 채광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추출기술의 경우 원광에서 납과 은 또는 금을 분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조선에서 전래된 '회취법'와 서양에서 전래된 '난반시보리법' 등의 연은 분리법이 잇달아 보급되면서 귀금속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6세기 말이 되면 이쿠노, 이와미, 사도 등의 명광에서 매달 수 톤에서 수십 톤의 은이 생산되었으며, 17세기 초반 일본의 은 수출향은 연간 200톤에 달했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로 일본은 세계 유수의 귀금속 생산·보유국이 되었다. (p.30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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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반 이후 전국적인 해운 물류망의 완성으로 물산 집산지로서의 오사카, 고급소비재 생산 중심지로서의 교토, 소비 중심지로서의 에도 간의 삼각 경제가 전면 가동되면서 은화와 금화 간의 교환 수요는 증가일로에 있었고, 규모가 큰 료가에쇼들은 이러한 환거래를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며 대상업자본으로 성장하였다. 미쓰이, 스미토모 등은 이 시기에 '료가에'업으로 부의 기초를 일군 재벌들이다. (중략) 데가타는 기능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아즈카리테가타'는 돈을 맡아두었다는 증서이다. 요즘의 양동성 예금중서이다. '후리테가타'는 발행자가 수취인을 지정하여 교부하면 수취인이 료가에쇼에 이를 제시하여 현금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증서이다. 요즘의 당좌수표 또는 어음에 해당한다. (후리테가타가 제시되었을 때 발행인의 잔고가 부족하면 료가에쇼가 '돈을 건네줄 수 없다'는 의미의 '후와타리 不渡り' 처리를 한다. 이것이 '부도'의 유래이다.) 료가에쇼의 또 다른 중요 취급업무는 '가와세'이다. 가와세란 원거리 송금 또는 결제의 의미로서, A라는 에도의 상인이 B라는 오사카의 상인에게 물품을 주문한 경우 해당 거래의 결제를 완성하는 것이 가와세이다. (p.318/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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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가타나 가와세 업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를 취급하는 료가에쇼에 대한 확고한 신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인이 여분의 현금을 맡긴다거나, 거래할 때 현금 대신 데가타를 수취하는 것은 료가에쇼에 대한 공적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현대의 금융기관도 마찬가지이다. 에도시대의 료가에들은 이러한 신용 기반 금융시스템을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어낸다. 료가에쇼들은 일종의 조합인 '가부나카마'를 형성하여 상호 보증을 통해 창출된 상력한 신용을 바탕으로 어음·수표 등의 신용화폐를 유통시키고, 원격지간 결제를 청산하는 금융서비스를 발전시켰다. (중략) 앞서 언급했듯이 화폐의 주조와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막부의 제도는 결코 우수하다고 할 수 없다. 조선, 중국에 비해 크게 나을 것도 없었다. 에도시대의 상품경제 발달을 뒷받침한 것은 (현물 화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신용금융경제이고, 이는 전적으로 상업세력의 자율적·창의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p.32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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