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부터 이 땅에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계속해서 제기되어 왔다. 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은 권력이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 독재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노동자, 민중이 처한 상황이 진보정당을 허락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진보정당을 주장하는 운동 세력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어려움을 딛고, 또 그 길고 길었던 분열의 세월을 딛고, 실질적으로 민주노동당의 새싹이 척박한 땅 위에 돋아났던 것은 1997년, 국민승리21이 만들어 지면서 부터였다.
1. 민주노동당 이전의 역사, 국민승리21
1) 보수 정치가 노동자의 목에 칼을 들이대다
1996년 말,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고 지배계급의 배를 불리 우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단행한다. 그것은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에 대한 개악안을 새벽에 몰래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린 것이었다. 1995년,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어용노조에 대항하는 민주노조들이 모여 창립된 민주노총은 이 사태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초대 위원장인 권영길 위원장은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총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만 무려 20만 명,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최대 규모였다.
당시 모 언론에서는 ‘3김을 누른 권영길’이란 제목까지 뽑아내며 이 사태를 보도했다. 그만큼 정말 오랜만에 노동자들이 힘을 발휘한 그런 시기였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패배했다. 보수 정치의 노동법 개악안을 무효화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 정치권이 여야합의로 더 개악된 법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찌 생각하면 노동자 민중에게 결코 넘지 못할 벽이 국회 주위에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동자 민중의 해방을 염원하며 총파업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너무나도 뼈에 사무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92년의 패배 이후 무기력해져 있었던 진보 진영에 다시 한 번 진보정당 운동을 제대로 해봐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2) 진보 진영이 대통령 선거를 위해 집결하다
노동법 개악안 저지 투쟁에서 패배한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시급한 과제임을 깨닫고 1997년 3월 27일 2기 대의원대회에서 ‘98년 지방선거 적극 대응, 99년 진보정당 창당, 2000년 국회 진출’ 이라는 정치방침을 결정했다. 그 전까지 주로 지하정치조직에서 진행되던 진보정당에 대한 논의가 처음으로 대중조직에 의해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1997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노동법 개악 투쟁에서 패했던 진보 진영에게는 다급한 과제가 눈앞에 주어져 있었다. 그간 여러 가지 견해의 차이로 대립했던 진보 진영의 각 정파들이 모두 모였다. 이번 대선에서 만큼은 단결하여 대응하자며 결의를 모으고 노동법 개악 투쟁에서 언론의 관심사가 되었던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부 정파는 소위 ‘국민후보론’에 대한 비판을 제출하고 97년 대선을 보이코트 하겠다는 입장을 제출했다. (이들은 이후 1998년, 청년진보당을 창당했다.)
사실 대통령 선거에 대한 대응방식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이 있었으나 그러한 이견의 차이를 감수하고 진보진영의 거의 모든 정파가 모여 1997년 9월 27일 ‘국민승리21’을 결성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92년부터의 지난 5년을 돌이켜 보았을 때 아마 97년의 그 투쟁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으리라.
3) 국민승리21 내부에서도 대통령 선거에 대한 갑론을박이 시작되다
이렇게 온갖 고생을 다해 대통령 선거를 3개월 남겨놓고 국민승리21이 만들어 지기는 했으나 문제는 진보 진영 내의 여러 정파들이 다들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정파는 대통령 선거를 통해 후보를 내면 전 국민이 지지하고 대규모 민중항쟁이 벌어질 것이라 기대하기도 했다. 또 어떤 정파는 국민승리21을 통해 계급정당에 가까운 대중정당을 만들고 싶어 했고 또 어떤 정파는 계급정당의 모습에서 거의 탈각한 사민주의 대중정당을 만들고 싶어 하기도 했다.
게다가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급조된 선거 단체를 국민들이 선뜻 받아들일리도 만무했다. 총파업 당시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이 그렇게 언론에 자주 노출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권영길 후보에 대한 인지도는 심각할 정도로 낮았다. 그러다보니 뭔가 이번 선거가 기존의 실패했던 선거와 뭔가 달라야 한다는 인식이 진보 진영 전반에 팽배했고 그것은 ‘민중후보가 아니라 국민후보’라는 인식과 ‘총파업과 투쟁의 의미를 강조’하자는 서로 상반된 인식으로 나타났다. 손과 발이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이런 갈팡질팡하는 모습으로는 민주노총 조합원조차 설득해낼 수 없었다.
4) 국민승리21, 선거에서 패배하다
이러한 자중지란 상황에서 국민승리21 조직은 그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고지도부가 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가운데 국민승리21에 참여했던 전국연합과 정치연대가 조직운영과 선거운동방식에 대해 이견을 주장하며 국민승리21에서 공식적으로 철수했다. 결국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는 30만 6천표, 1.2%를 득표하는 것으로, 사실상 패배했다.
선거가 끝난 후, 모두가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갔지만 진보정당을 꿈꾸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총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진보정당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국민승리21의 상근자 15명이 일주일에 3만원 받는 고난의 행군이 계속 되었다.
갈팡질팡하던 진보정당 운동 세력은 결국 ‘실업자 운동’에서 해답을 찾았다. IMF 사태가 무지막지한 실업을 불러왔던 것이었다. 실업은 단기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치적 문제이며 진보정당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워 실천투쟁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당시 진보정당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내적 역량을 쌓는 기회가 되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민중의 얼굴을 보고 민중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었던 경험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언론의 관심을 얻으며 일정 정도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고, ‘청년실업문제’를 통해 학생운동 조직과의 관계도 복원할 수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민주노총으로부터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1998년 6월 4일 지방선거에서는 기초의원에 40명이 출마하여 18명을, 광역의원 6명 출마하여 2명을, 기초단체장 3명 출마하여 3명 모두를 당선 시킬 수 있었다.
2.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그 이후
1) 진보정당, 또다시 서다
이후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두 차례에 걸쳐 진보정당창당 원탁회의가 개최되었고 1999년에는 민주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2000년 1월 30일, 전국 30여개 지부와 1만 3천명의 당원으로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이 땅에 진보정당의 이름으로 태어난 몇몇 정당들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 규모와 내적 충실함이 격을 달리하였다.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을 통해서만 한다’라는 내용의 배타적 지지선언을 하여 대중적인 후원자를 자처했으며 선거 때마다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해야 한다고 말해왔던 재야 정치조직들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탓에 더 이상 비판적 지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었다. 진정한 의미의 진보정당이 이 땅에 드디어 서게 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창당되자마자 2개월 후에 있을 선거 준비에 매달렸다.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약속은 보수정당들의 이해관계 덕에 실현되지 못했다. 덕분에 민주노동당은 최악의 조건에서 2000년 4월 총선을 치러야만 했다. 227개 선거구 중 21개의 선거구에 후보를 출마시켰으나 아무도 당선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구 당 평균 13.1%의 득표를 하고 특히 울산, 창원과 같은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40%에 가까운 득표율을 올릴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민중당 시절의 2배에 가까운 득표율이었다.
2001년에는 전라북도 남원에 중앙연수원을 개원하고 기관지로 진보정치와 이론과 실천도 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민주노동당은 명실상부한 정당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2) 2002년 총선과 대선, 그리고 2004년 까지
한 발 한 발 전진해 나가던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한국 정치사에 의미있는 정치세력으로 발전했다. 2002년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광역의원비례대표 전국 평균 8.13%의 득표율을 획득한 것이다. 이는 민주노동당원들에게 대단히 고무적인 결과로 다가왔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전국 투표에서 1% 이상의 지지율을 획득해 본 일이 몇 번 없는데.. 혹자는 92년 이후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다고 평했다. 민주노동당 창당 2년 만의 쾌거였다.
그리고 2002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노동당은 권영길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웠다. 권영길 후보는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등의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며 큰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존의 민주당 체제를 뒤집고 후보가 된 노무현 후보가 문제였다. 그가 민주당의 기득권과 싸우면서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어느 정도 개혁적인 성향으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상당수의 민주노동당 지지층 들이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다. 심지어 87년과 92년에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민주노동당 내의 인사들이 노무현을 지지하자는 성명을 발표하고 권영길 후보에게 사퇴를 주장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거는 끝까지 가봐야 한다며 가슴을 졸이며 TV를 지켜봤던 민주노동당원들은 957,148표, 3.9% 득표율이라는 결과를 지켜보며 한숨을 쉬어야 했다. 아쉬운 결과였다.
이는 결국 민주노동당 내에서 과거 정파 간의 경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03년을 거치며 정파 간의 갈등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2003년 10월에 전국농민회총연맹이 민주노동당과 정치협상을 벌여 농민의 정치세력화 문제를 민주노동당과 함께 풀어 가겠다는 결론을 내게 되는데, 이 과정에 ‘당명 개정여부’와 ‘강령, 당헌 개정’ 등의 사항이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이 논란은 2003년을 거치며 다행히 별 탈 없이 일단락되었으나, 2004년 1기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특정 정파가 지도부를 독식하는 결과를 거치며 다시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파 간 갈등의 소지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상태다.
한편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은 17대 국회 비례대표 후보를 선출했다. 정당명부 비례대표 득표율에 따라 당선자들의 당내 경선 득표 순위로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당원들의 현명한 판단과 전략이 필요했다. 약간의 잡음도 있었으나 민주노동당은 별 무리 없이 비례대표 후보 순위를 결정했다.
3) 원내 진출과 민주노동당의 미래
그리고 2004년 4월 15일,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왔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 비례대표 2,774,061표, 13%를 득표하는 성과를 올렸다. 무려 8명의 국회의원이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중 비례대표 순위 8번 노회찬 후보는 구태정치의 상징 자민련 비례대표 김종필 후보를 낙선시키며 국회에 아슬아슬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 지역구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된 권영길, 조승수 의원을 합하면 이제 원내에 노동자, 민중이 파견한 국회의원이 10명이 된 것이다. 해방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004년 한 해 동안만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중심이 되어 발의한 의안만 61개다. 민주노동당의 자랑스러운 국회의원들은 각종 의원 평가에서 연거푸 1위를 했고 한국 정치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국민들과 당원들은 이제 이 국회의원들을 바탕으로 노동자 민중이 좀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2005년 10월, 민주노동당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보수정치권과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사법부는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게 하여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조승수 의원은 당시 함께 재판을 받은 다른 국회의원들처럼 뇌물을 수수한 것도 아니었고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조승수 국회의원은 단지 지렁이가 음식물 쓰레기를 분해하는 방식의 쓰레기 처리 시설에 대하여 발언한 것뿐이었다. 선거운동기간 이전이라 해도 이것은 상식적인 정당 활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 뿐인데 사법부는 오직 그에게만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게 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10명 국회에 진출한 것만으로는 정치판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없음을 의미했다. 지금도 지배계급과 보수정치권은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민주노동당을 어떻게든 무력화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2006년 2기 최고위원 선거를 거치며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고 전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2007년의 새로운 해가 밝은지 이제 5개월 남짓이 지났다. 2007년 한 해 동안 대선을 슬기롭게 돌파하고 2008년 총선에서 더 많은 국회의원들이 원내로 진출해야만 한다. 그런 역사적 사명이 민주노동당의 모든 당원의 손에 쥐어져 있다.
** (2007-05-14 23:49:38)
'승리적 평가'라? 좋죠!
근데, 역사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써야 합니다.
그리고, 평가도 냉정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동양에서는 춘추필법이라고 하지요.
가령, '2004년 1기 최고위원회 선거에서 특정 정파가 지도부를 독식하는 결과를 거치며 다시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를 공자가 다시 살아와 쓴다면 이럴 것입니다.
"2004년 1기 최고위원 선거에서는 주사파 3개 세력과 국민파가 야합을 하여 선거방식과 후보선출을 공동기획 하였다.
거기에 당원들을 조직적으로 입당시켜서 묻지마 투표, 줄서기 투표를 하였고 결국 승리하여 지도부의 다수가 되었다.
그 반대파들은 매우 멍청하여서 선거가 끝난 후 상황을 파악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에, 사관은 평한다,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세력이 야합을 하면 언제나 승리하고, 명분에 목숨거는 정치세력은 언제 패배하고 화만낸다."
어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