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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1998. 11.
[비화]10·26사건이후 19년만의 최초 전면공개
‘채홍사’박선호 군법회의 증언 녹취록
대통령 박정희의 ‘大行事’‘小行事’
◇10·26사건 19주년이 지났지만 사건동기는 아직 석연치 않다. 인간 박정희의 내면적 모습이 의문을 푸는 최후의 열쇠가 될지 모른다.「신동아」는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정보통치, 언론통제, 북한과의 대결주의를 다룬 「박정희의 유산」(김재홍著·도서출판 푸른숲 근간)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원으로 10·26사건에 가담했던 박선호의 군법회의, 증언을 토대로 한 「박정희의 술과 여자」를 소개한다.
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현직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감행한 박정희대통령 살해사건은 실로 누천년의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어처구니없는 돌발상황이었다. 당시 대통령 긴급조치로 통치되던 서슬 퍼런 유신체제 아래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권총으로 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온 국민에게 경악과 함께 인식의 혼란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오랜 철권통치자의 죽음에서 느낄 수 있을 법한 해방감도 워낙 컸던 놀람 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역사의 뒤편에는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업보가 감추어져 있었다. 박정희 시대사의 막후에서는 설마하던 일들이 실제 벌어지고 있었다. 국정 최고책임자이며 국민의 정신적 지주여야 할 대통령이 국민의 눈이 닿지 않는 중앙정보부 부속 비밀연회장에서 사흘에 한 번 꼴로 술자리 행사를 갖고 있었다. 충격적인 것은 그 자리 「술시중 여인」으로 일류 탤런트와 가수를 비롯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나이 어린 여대생까지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대통령전용 비밀요정의 호스티스를 시중에서 조달하는 책임자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였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대통령의 채홍사로 그는 최고의 비밀관리자였다.
그날 사건도 대통령 박정희와 그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권력자들인 중앙정보부장, 청와대비서실장, 경호실장, 이렇게 4명이 저녁에 벌인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79년의 일이다. 그 자리에는 여자 둘이 동석했다. 한 여자는 유명가수였고 다른 한 여자는 여대생으로 아르바이트 패션모델이었다.
이런 식의 대통령 술자리에 한번씩 왔다 간 여자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입을 벌릴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다고 대통령 박정희의 채홍사는 증언했다. 대통령의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됐다.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즐기는 것이고, 대행사는 측근 권력자 3~4명이 함께 하는 것을 뜻했다. 최후의 그날 술자리는 대행사였다.
다음은 1979년 12월11일 군법회의 제1심 4회 공판에서 박선호 피고인에게 처음으로 대통령 박정희의 술시중 여인들에 대한 증언을 유도한 강신옥 변호사의 신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다.
변호사: 피고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여자문제를 더욱 힘들게 하고 피고인 자신이 어린애들을 갖고 있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해 인간적으로 괴로워서 김 정보부장에게 수차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고 하소연하면서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으나 김 부장이 『궁정동 일은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사의를 만류시켰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제가 근무하기를 몇 번 꺼렸습니다. 그래서 부장님에게 계속하기 어렵다는 여러 가지 사유를 몇 번 올린 바가 있습니다.
변호사: 결국 정보부장님이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또 그렇게 해서 할 수 없이….
박선호: 네, 저를 신임하시어 자꾸 계속적인 근무를 원하셨습니다.
변호사: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은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 돈은 한 푼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도 말만 많아서, 피고인이 경호처장인 정인형한테 『당신이 고르라』고 말했더니 『청와대에서 고르는 걸 국민들이 알면 큰일 난다』며 안된다고 하기에 피고인은 『그러면 골라 놓은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말이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더니 그 이후에는 차실장도 잔소리가 적어졌다는데, 그렇습니까.
정인형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으로 박선호와 해병대 간부후보생 동기였다. 박선호가 소개받아 데려오는 여자에 대해 미인이 아니라거나 품위가 너무 떨어진다는 차지철의 지적을 정인형이 전달하곤 했다. 이에 박선호는 크게 반발했다. 그러잖아도 관립요정 관리자로 전락해가는 처지에 수치를 느끼는 판이었다.
그는 정인형에게 처음 경호실이 했던 것처럼 각하의 술시중여인 조달을 맡으라고 했다. 그러나 경호실측은 펄쩍 뛰었다. 골치아프고 불명예스러운 일을 떠안게 될까봐 큰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대통령 박정희에게 여자를 조달하는 일은 본래 경호실이 시작했다. 5·16쿠데타를 거사할 때부터 충직한 경호대장이던 박종규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박은 각하의 심기관리에서부터 술자리까지 챙겼다. 군대에서 부관이나 전령병이 지휘관을 잘못 모시면 전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는 말은 금언에 속한다. 그런 군사문화에 젖은 경호실장 박종규는 각하의 심기관리를 최우선 업무로 삼았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는 많은 비화를 남겼다. 70년대 초 어느날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를 면담한 어느 여성은 육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본다. 소문은 퍼지고 청와대출입기자들이 그 배경을 취재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박정희가 재떨이를 던졌다느니 손찌검을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한 기자가 직접 박정희에게 물었다.
『영부인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부부싸움을 하신 겁니까?』
이 말에 대통령은 몹시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만 했다.
『어허, 음, 흠…』
부부싸움은 대통령의 주색 때문이었다.
육여사는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게 해주는 경호실장 박종규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육여사는 박종규 거세계획에 착수한다. 이 계획에 동원된 사람이 당시 청와대 사정담당 수석비서관 홍종철이었다. 육여사는 홍종철을 은밀히 불러 박종규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눈물을 글썽이며 규탄했다.
『내가 이 사람을 더 이상은 각하 곁에 놓아둘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이래서 홍종철은 극비리에 박종규 비리조사에 착수한다. 본인과 형제 친척들의 이권개입과 인사청탁 여부에서부터 사생활 비리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막강한 경호실 안테나에 안 걸릴 리가 없었다. 박종규의 귀에 사정수석실이 자신의 비리에 대해 내사하고 있으며 홍종철이 직접 지휘한다는 정보가 들어갔다. 박종규는 흥분했다. 그는 경호실에 있던 엽총을 집어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 들어갔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냐』
박종규는 분에 못이겨 엽총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러나 총구는 천장을 향해 있었다. 그가 냅다 갈긴 엽총 탄알은 홍종철의 머리 위 천장에 맞고 튀었다. 홍종철은 박종규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경호실장은 박정희의 분신으로 누가 무슨 보고를 해도 경호사고가 나지 않는 한 문책인사 대상이 아니었다.
이 사건 후 대통령의 채홍사 일이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로 옮겨졌다. 술자리 마련과 여자 조달하는 일을 청와대에서 한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날이면 큰 낭패라는 생각에서 그 일을 비밀 공작수행기관인 중정으로 떠넘긴 것이다. 청와대는 출입기자들이 있는데다 공식적인 방문객도 많아 비밀스러운 일이 노출될 위험이 컸다. 어느 모로 보나 그 일을 맡기엔 중정이 안성맞춤이었다. 국가기밀이라는 허울좋은 베일 뒤에서 각하의 술과 여자가 난무하게 된 것이다.
박종규가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어난 육영수여사 피격사건으로 물러난 것은 묘한 아이러니였다. 육여사는 그렇게 싫어했던 경호실장을 생전에 밀어내지 못하고 죽어서야 뜻을 이룬 셈이다.
따지고 보면 10·26사건의 먼 원인은 8·15저격사건이 된다. 이때 박종규가 문책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차지철이 후임 경호실장으로 들어갔으며, 차지철의 횡포에 김재규가 자극받은 것이다. 사건 당일도 만약 임무수행에 철저한 박종규가 경호실장이었다면 그렇게 호락호락 김재규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종규의 엽총난사 사건을 보아도 박정희의 주색탐닉이 육여사가 죽은 후 홀아비 고독 때문에 생긴 일만은 아니었다. 육여사가 살아있을 때도 주색으로 충돌이 잦았다. 다만 홀아비가 된 후 그의 사생활이 더욱 절제없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며 이것이 그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가 됐다. 10·26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과 판단력 마비가 직접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 박선호의 증언 내용이다.
변호사의 술자리 여자문제에 대한 신문에 박선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목소리도 기어 들어가듯 작아졌다.
박선호: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변호사: (한참 묵묵히 있다가) 피고인은 1978년 8월11일에 의전과장이 되어서 1979년 10월27일 면직될 때까지 하루도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네.
변호사: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다는 말에 추석이나 정초 휴일까지 포함되지요?
박선호: 그렇습니다.
변호사: 휴일을 포함해서 하루도 결근을 하지 않고 계속 출근했다는 말이지요?
박선호: 네. 부장님의 언제 어떤 지시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제가 매일 나갔습니다.
변호사: 피고인은 어제 말한 소행사나 대행사, 이게 하도 빈도가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과 같이 앉아서,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라고….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일년 중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고위층이 사생활을 즐기는 데 그의 모든 시간을 바쳐야 했고 그것이 공무였다. 의전비서나 의전과장이란 본래 그 조직과 외부간 접촉에서 절차와 일정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고위층일수록 만나고 싶어하는 외부인사는 많고 시간이 부족한 법이다. 여기서 의전비서에게 세도를 부릴 권한이 생기게 된다. 즉 고위층과 만나는 시간을 잡아주는 역할이 상당한 영향력을 파생하는 것이다. 또 의전비서는 대부분 고위층의 심복이다. 자신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훤히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비서가 나중에 수틀려서 자신의 행적을 폭로한다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평생동지를 의전비서로 삼는 것이 통례다. 특히 독재자의 경우 개인적으로 가장 가까운 부하는 역시 경호실장과 의전수석비서관이었다. 개인생활과 관련된 역할을 수행하는 부하인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 의전과장은 부장이 가장 신임하는 오른팔이 맡게 돼 있었다. 대통령과 중정부장의 내밀한 사생활을 관리하는 직책이 되면서부터였다. 국가기밀과 정보관리를 내세워 일반 국민의 눈에 완전히 가려져 있는 중앙정보부에 대통령을 위시한 최고권력자들의 환락생활을 뒷바라지하도록 한 것이다. 그 실무 책임자가 의전과장이었다.
박선호가 이따금 함께 신세타령을 했다는 남효주 사무관은 궁정동 안가 비밀요정의 관리자였다. 대통령 전용 관립요정을 두고 그 관리자에게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직급인 사무관을 부여한 것이다. 남효주 얘기가 나오자 군검찰관은 당황했다. 대통령 사생활의 가장 깊숙한 비밀얘기가 노출될 위기였다. 검찰관은 급히 제동을 걸었다.
검찰관: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지금 본건 변호인은 본건 공소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사실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제한해 주시기 바랍니다.
법무사: 사건과 관련 있는 건만 신문해 주십시오.
변호사: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관련이 없다면 재판부에서 대답하지 않게 해도 좋습니다만….
법무사: 피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무상 비밀 등에 대해서 진술 거부권이 있다는 것은 고지한 바와 같습니다.
변호사: 어떻습니까.
박선호: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변호사: 소행사, 대행사의 빈도가 하도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하고 같이 앉아서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불평을 주고 받았다는데….
박선호: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변호사: 있죠.
박선호: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보통군법회의 재판 때만 해도 박선호는 박정희의 주색문제에 대해 공개진술을 꺼렸다. 그것은 고인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이지만 자신도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문제를 토로하기 시작하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 항소심인 고등군법회의 재판에 들어가서다.
채홍사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됐다. 그중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다. 채홍사가 구해 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채홍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도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 할 이름이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이다.
항소심에 들어가 강신옥 변호사는 박선호 피고인으로 하여금 채홍사 일을 진술하게끔 강력한 신문전략으로 나간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 박정희의 술판과 여자를 폭로하는 증언이었다. 대통령의 주색중독과 그로 인한 판단력 마비, 그리고 국가안보 위기, 이것이야말로 「10·26거사」의 정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변론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10·26거사」의 정당성이 인정되면 김재규와 박선호 등 피고인들의 죄는 내란 목적 살인에서 단순 살인으로 정상 참작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피고인들에게 극형을 면하게 해주는 길이었다.
항소심으로 가기 전 보통군법회의 4회 공판인 이날 강변호사는 여자문제 신문이 군검찰관의 제지로 벽에 부딪힌데다 박선호도 답변을 거부하자 김재규의 생활태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변호사: 피고인은 김부장님이 대통령 앞에서도 아첨하는 법이 없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거나 대통령과 전화를 할 때도, 피고인이 연결을 시켜주는 관계로, 들은 일도 있다는데 그런 경우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박선호: 그것은 급한 연락사항이 있을 때 부장님께서 각하실로 전화 대라고 하면 연결해 주고 한 일은 있습니다.
변호사: 글쎄, 그때 전화를 듣고 역시 김부장님은 대통령 앞에서도 솔직하게 무슨 말을 하는구나 하는 걸 느낀 것이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좀 몇 가지 말할 수 있습니까.
박선호: 모든 사항을 서슴지않고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여러 가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변호사: 다른 분 같으면 대통령 앞에서 그런 투로 말하지 않을 텐데 아주 의사를 분명하게 솔직하게 말한다 하는 것을 느꼈다는 말이지요.
박선호: 예, 그래서 항상 제가 존경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변호사: 또 한번 검찰신문 때도 그렇게 몇 가지 충고와 훈계를 해주었다고 했는데, 특히 피고인에게는 운동도 테니스나 하라고, 피고인에게는 그게 좋다고 훈계했다면서요.
박선호: 수시로 부장님께서 모든 것을 검소하게 하고, 운동 같은 것도 화려함보다는 정구 같은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겸손하라는 말씀을 수시로 하시고 저희들에게 지도의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보통군법회의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박선호는 상당한 심경변화를 일으켰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역사적 증언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다. 마치 주색에 빠져 나라를 빼앗긴 군주국의 마지막 왕들을 연상케 하는 얘기가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그는 각하의 술자리에 왔다 간 연예계 여인들의 명단을 두고 고민했다. 다음은 10·26사건이 일어난 해를 넘긴 80년 1월23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 설치된 계엄사 고등군법회의 2회공판의 녹음이다.
변호사: 피고인은 1심에서 변호인이 그날 당일 여자 두 사람을 인솔해 온 것을 물었을 때 대답을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 심정입니까.
박선호: 그 문제는 제가 답변하게 되면 지금 현재 시내에서 일류배우들로 활동하고 있고 이것이 역효과가 나고 사회적으로 혼란문제가 되고 돌아가신 분에게 욕되고 했기 때문에 제가 그 문제를 피했습니다.
변호사: 지금도 그런 심경입니까.
박선호: 예, 그 문제를 가지고 제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변호사: 이번에 한 행동의 숨은 동기 중 혹시 그런 사정 때문에 내 자신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잖나 하는 생각은 없습니까. 이번에 부장님의 명령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행위에 가담하게 된 사정 속에는, 사람의 행동 속에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결정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런 사정들도 이번 행동에 가담하게 된 어떤 숨은 동기가 되느냐 이겁니다.
박선호: 제가 무슨 동기가 있었다기보다, 저는 하여간에 1년 내내 하루도 근무를 쉬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불시에 오시기 때문에 그랬는데, 저는 그때 동기라든가 이런 것보다는 존경하는 부장님의 지시면 무조건 한다는 것 외에는 없고, 만약 그때 다른 지시를 했어도 응했을 것입니다.
박선호의 답변은 완전히 핀트를 벗어나고 있었다. 강변호사가 사전에 준비한 신문과 답변 내용을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강변호사는 1심인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김재규와 박선호를 교도소에서 접견하면서 이들이 심경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느꼈다. 법정에서는 각하의 사생활에 대해 일절 진술하지 않던 김재규도 80년 1월 중순 어느날 변호사 한 사람을 보자고 연락을 보냈다. 김재규는 깊은 비화를 털어놓았다. 궁정동 안가를 거쳐간 은막의 스타들에서부터 사후에도 그대로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그의 비밀저장고 속에서 밖으로 흘러나왔다.
변호사는 박선호보다 앞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채홍사역을 했던 윤모, 이모, 김모 씨(육사 15기,예비역 대령)와 만나 이 증언들을 검증했다. 누구나 한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인 C, C1, C2, L, L1, W 양 등이 궁정동 안가의 밤 연회에 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각하의 술자리 여인을 동원하는 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첫째 단독후보는 안되며 반드시 복수로 부르는 것이고, 둘째로 결코 동일인을 두 번 이상 들이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복수후보로 하는 것은 그의 선택 폭을 보장하기 위함이었고, 한 여인을 두 번 이상 부르지 않는 것은 각하의 이상한 인연이 깊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각하의 양 옆에 앉히는 두 여인 중 대부분의 경우 한 사람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타였고, 다른 하나는 연예계 지망 신출내기로 선택됐다. 각하는 술이 취하면 으레 둘 중 마음에 드는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그리고 그 다음 일은 경호실장과 이 관립 비밀요정의 담당자만 아는 비화속에 묻혔다.
한번 「인연」을 맺은 뒤 퍼스트 레이디 후임을 노리는 야심파도 나타나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한번 술자리에 참석한 뒤 각하의 후처가 되겠다고 나선 출세지향파는 유명한 은막의 스타 C양이었다. 이 바람에 박선호와 궁정동 안가 요원은 여배우의 「후처소동」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궁정동 행사에 참석했다가 각하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게 된 그 여배우는 행사에 연속출연을 요구해왔다. 중정측은 물론 같은 여자를 두 번 이상 불러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워 이를 잘랐다. 그러자 어느날 그녀의 어머니가 박선호 의전과장을 찾아왔다.
『각하께서 우리 아이를 좋아하는데 당신들이 중간에서 차단해도 되는 거요?』
대통령의 연심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한 스타의 어머니는 중앙정보부 간부에게 큰 소리를 칠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그 밖에도 박대통령 술자리에 왔다 간 연예계 지망생의 부모가 사후에 그 사실을 알고 항의해와 돈 주고 달랜 일 등이 옛 궁궐 속의 비밀처럼 묻혀 있었다.
박선호 피고인은 법정진술에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마음에 걸려 김재규 부장에게 「이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고 두어번이나 사의를 표했다』고 말했다. 절대권력자의 문란했던 사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토로였다.
10·26 당일 대통령의 최후를 술 취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 가장 확실하게 보았던 증인도 그렇게 불려온 두 여인이었다. 술자리에 두 여인이 동석했다는 사실도 박선호가 처음 공개했다. 여기서 각하 전용 비밀요정의 구조와 소행사·대행사, 각하의 연회주선이 주임무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직책도 밝혀졌다. 1979년 12월11일 보통군법회의 4회 공판 전반부의 변호사신문에서였다.
변호사: 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의 임무는 정보부 궁정동 사무실에 있으면서 궁정동에 있는 다섯 개 연회장을 관리하고 정보부장을 보필하는 비서까지 겸하고 있다는데요 ?
박선호: 네.
변호사: 궁정동 다섯 개 연회장은 피고인이 의전과장이 되기 전부터 있던 구관과 현재는 가동이라 부르는 신관, 세검동 및 피고인이 와서 새로 건축한 나동 다동을 말하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네.
변호사: 이번에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식당은 위에 말한 나동입니까, 그게 ?
박선호: 네.
변호사: 피고인이 관리하는 다섯 개 연회장은 대통령이 혼자 사용하시거나 이번에 사건이 생겼을 때와 같이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김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연회를 가질 때 사용하는 장소라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네, 그렇습니다.
변호사: 궁정동 연회가 있게 되면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인 정인형이 피고인에게 전화로 연락을 주는데, 대통령 혼자 오실 때는 「소행사」라는 표현을 한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그렇습니다만, 그 행사관계는 참고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선호의 진술은 목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됐다. 소행사라는 말이 경호실과 궁정동 안가에서만 쓰는 비밀용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변호사는 여기서 더 바짝 다그쳤다.
변호사: 아까 검찰관 신문할 때, 얘기하다 말았는데 그날 몇 시 몇 분에 플라자 호텔에 간 일이 있죠?
박선호: … 네.
변호사: 그때 플라자 호텔에 간 것은 바로 그날 연회장에서 도와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변호사의 이 물음이 나온 후 박선호는 머뭇거렸고 군사법정에 긴장이 흘렀다. 그때 박선호의 등 뒤에서 작은 외침이 터졌다.
『야, 얘기하지 마』
피고인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답변을 제지하는 목소리였다. 김재규는 법정진술에서 박정희의 사생활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했다. 그는 유신체제와 박정희의 영구집권 욕심에 대해서만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 이외의 사생활은 거론하지 않았으며 박정희를 호칭할 때마다 깍듯이 존칭을 썼다. 그런 그가 이날 공판에서 박정희의 치부를 은폐하기 위해 부하의 진술을 막기까지 한 것이다. 오랜 기간 모신 각하에 대해 애증이 엇갈리는 모습이었다. 이에 박선호도 잠시 「양심선언」을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법정에는 잠시 미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무언가 최고권력자의 내밀한 문제가 숨겨져 있는 것인가. 법정에서도 공개적으로 말 못하는 사연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10·26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데 대통령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대한 정치적 비판만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인간 박정희의 내면을 보여주는 사생활에 대한 증언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유신권력의 수혜자이기도 했던 중앙정보부장이 그를 쏘아버린 사건의 동기가 설득력있게 규명되기 어려웠다.
김재규의 제지에 박선호는 더욱 증언을 자제했다.
박선호: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박선호는 답변 말미에 살짝 웃음기를 띄웠으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변호사는 이날 준비해온 대로 밀고 나가기로 맘먹었다.
변호사: 플라자 호텔에서 내자 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박선호: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플라자나 내자 호텔은 박선호가 소개받은 연예계 여인을 만나 데려오는 장소였다. 그러나 그는 거듭 증언을 거부하며 『상상에 맡기겠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상 시인으로 박정희의 술자리와 여자조달 행각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박선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변호사: 그래서 도착한 것은 몇시였죠?
박선호: 제가 오니까 이미 행사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6시30분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날 변호사 신문에 앞서 진행된 검찰관 사실신문에서는 연회장의 여자 얘기가 나올 때마다 끊어지곤 했다. 박선호 피고인이 대통령의 주연담당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처음부터 군 검찰관은 사실신문에서 피고의 진술을 통제하고 나섰다. 박선호가 10·26 당일의 행적에 대해 진술하면서 「대행사」 얘기를 꺼내자 검찰관은 재빨리 『네 알겠어요』라며 말을 더 이상 못하도록 끊었다. 또 행사준비차 플라자 호텔에 갔었다면서 다음 말을 이으려 하자 검찰관은 급히 『네 알겠습니다』고 말을 막았다. 이는 군검찰관이 피고인을 신문하는데 있어 사건발생의 전후관계를 따져 밝히는 것보다 각하의 사생활 보호에 더 비중을 두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 그런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검찰관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 군사재판은 법정의 옆방에 보안사령부 파견관이 대기하면서 수시로 지시메모를 전달한 이른바 「쪽지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김재규는 주로 고도의 정치문제를 진술한데 비해 박선호와 박흥주 피고 등 그의 부하들은 핵심권력자들의 사생활과 권력투쟁상을 묘사했다. 당시까지 그런 비화는 국가기밀의 너울을 쓰고 바깥에 일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이 알건 모르건 그날의 궁정동 행사는 결국 「절대권력은 절대로 타락한다」는 금언을 실증하는 최후의 자리였다.
검찰관: 지난 10월26일 대통령 각하 주재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언제 누구로부터 받았습니까?
박선호: 26일 오후 4시 25분경에 청와대 경호처장으로부터 『오늘은 대행사가 있다. 장소는 나동이다』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연락을 받고 바로 나동을 관리하는 남효주 사무관에게 나동에서 대행사가 있다,… 대행사가 있다고 그러면….
검찰관: 네, 알겠어요. 김재규 피고인이 남산분청에서 본관 집무실에 몇 시에 도착했습니까?
박선호: 4시 30분경으로 생각됩니다.
검찰관: 피고인이 식당관리인이 남효주에게 만찬준비를 시킨 후에 시내에 손님을 만나러 간 사실이 있죠?
박선호: 네.
검찰관: 몇 시에 나갔다가 몇 시에 돌아 왔나요?
박선호: 부장님이 4시 30분경에 도착하셨기 때문에, 행사관계를 보고드리고 제가 차를 가지고 바로 플라자 호텔을….
검찰관: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18시 25분경 위 식당으로 되돌아 왔습니까?
박선호: 네.
검찰관: 피고가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만찬은 시작됐죠?
박선호: 네, 제가 오니까 이미 만찬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박선호의 이 증언으로 10·26사건 당일 밤 박정희의 양옆에 앉았던 두 여인은 법정 증언대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두 여인이 법정에 출두하는 날 보안사가 주도하는 합동수사본부는 이들의 신원이 알려지지 않도록 크게 신경을 썼다. 이들이 역사의 현장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사건 뒤의 여자」로 비쳐 세간의 눈길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계엄이었기 때문에 언론은 이 여인들에 관해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으나 시중엔 여러 소문들이 나돌았다. 두 여인의 프라이버시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에 그들의 사생활 보호가 국민의 알 권리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한 여인은 유명가수로 대중문화의 스타여서 일반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박정희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난여론이 부상할 수도 있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그래서 합수부는 언론보도에서 두 여인의 사진을 뒷모습만 게재하도록 제한했으며 이름도 가명을 쓰게 했다. 시중에는 이미 손금자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가수가 누군지 알리는 정확한 「유비통신」이 퍼져 있었다. 유수대학의 연극영화과 재학생이며 모델노릇도 한다는 정혜선양의 신원도 언론보도만 막는다 해서 감추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이미 알려진 대로 가수 손금자는 심수봉씨, 정혜선은 신재순양이었다 <편집자>).
12월17일 오후 4시 15분경, 두 여인은 감색 제미니 승용차를 타고 보통군법회의 8회공판이 열린 군사법정 앞에 도착했다. 이들은 별관에 별도로 마련한 소법정에서 수시간에 걸쳐 따로 증인신문에 답변했다. 두 여인을 신문하기 위한 별도법정에는 재판부와 검찰관, 변호인 그리고 보도진은 4명, 방청인은 기관원으로 제한됐다.
정혜선(H대 연극영화과3년. 패션모델): 처음 총소리가 난 후 화장실로 피신했는데 조금 있다가 또 총소리가 났습니다.
검찰관: 그 때 대통령 각하는 어떻게 하고 계셨습니까?
정: 쓰러져 있었는데 식탁 옆으로 몸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검찰관: 총소리가 난 후 불이 나갔나요?
정: 불이 꺼진 뒤 손양과 둘이서 각하를 부축했습니다. 그 때 차지철 경호실장은 『경호원, 경호원』 하고 소리치며 화장실에서 나와 문갑을 잡고 있었습니다.
검찰관: 당시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정: 식탁에 엎드린 각하를 일으켜 부축했는데 그 때 김재규 부장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각하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 나도 이제 죽었구나 하고 겁이 나서 실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조금 조용해지는 것 같아 나와 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각하를 업고 나갔습니다.
검찰관: 차실장을 본 일이 있습니까?
정: 방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차실장이 문가에 쓰러진 채 살아 있어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과 함께 부축하면서 일어나라고 했더니 『나는 못 일어날 것 같애』라고 하기에 그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때 옆 사람이 안내해 줘 어느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데 신음소리도 났고 조금 후 총소리가 계속해서 일곱 발 정도 났습니다. 그 방에 전화가 몇 번 왔는데 무조건 모른다고 했어요.
이어 변호인신문이 시작됐다. 김재규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된 안동일 변호사가 먼저 물었다.
안동일변호사: 검찰관이 신문할 때처럼 그냥 『네, 네』 하지 말고 아는 대로 대답해주세요. 궁정동에 도착해서 바로 방에 들어갔습니까?
정: 6시30분에서 40분 사이에 도착해서 잠깐 대기했었습니다.
안변호사: 방에 들어갔을 때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나요?
정: 대화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들어가 인사하고 앉았습니다.
안변호사: 대화 중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습니까?
정: 없습니다.
신호양 변호사: 대화 중 차실장과 김재규 부장 사이에 언성이 높았습니까?
정: 그런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이병용 변호사: 합동수사본부에 몇 번이나 갔지요?
정: 한 번 갔습니다.
이때 검찰관이 『본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문을 삼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이변호사는 『검찰신문의 신빙성에 관한 질문이다』고 응수했다.
이변호사: 그날 김계원 청와대비서실장이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는 것은 높은 어른 앞이라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무슨 꾸지람이나 죄책감이 있어선가요?
정: 무언가 초조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변호사: 그 날 저녁 손양이 자리에 들어가니 대통령 각하가 본관이 어디냐고 묻고선 얼마 전 작고한 총무처장관과 본이 같다고 했다는데….
정: 맞습니다.
이변호사: 각하가 총에 맞았을 때 비명소리가 있었나요?
정: 숨소리가 좀 거칠었습니다.
이변호사: 증인은 관상학을 공부한 일이 없지요. 그날 김계원 실장을 처음 보았고 조명도 흐렸지요?
정: 조명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안동일 변호사: 조명이 어두웠나요 밝았나요.
정: 조명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대생 패션모델 정혜선은 어린 나이에 비해 의외로 침착하게 진술했다.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는데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증언이었다. 현장에서 넋이 빠져서 허둥대거나 겁 먹었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텐데 상당히 자세히 돌발상황을 설명했다. 오히려 나이가 위이고 유명가수여서 사회경험도 많은 손금자는 진술이 엉성했다. 그런 정혜선이 당시 술자리를 가진 방의 조명 얘기가 나오자 거부반응을 보였다. 실내가 밝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진술이었다. 권력자들이 여자와 술을 희롱하는 관립비밀요정도 시중의 룸살롱처럼 어두컴컴했다는 얘기다. 이어서 가수 손금자가 증인석에 앉았다.
검찰관: 그 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대통령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던가요?
손금자: 조금 높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검찰관: 만찬석에 들어간 뒤 대통령 각하께서 총에 맞을 때까지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보세요.
손: 처음 들어가니 각하께서 차실장에게 『TV에서 삽교천 행사를 방영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차실장은 『시간이 되면 제가 켜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시계를 봤습니다. 이때 저도 시계를 보았는데 7시10분전쯤이었어요. 삽교천에 대한 말씀이 계속됐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들어와 김부장의 귀에 대고 『과장님이 뵙자는데요』 하자 바로 나갔습니다. 그후에 나갔던 김부장이 언제 들어왔는지 곧 총소리가 났어요.
검찰관: 그때 상호간에 주고받은 얘기는 없었습니까?
손: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고함소리만 들었습니다.
검찰관: 김재규 피고인이 두 번째 들어올 때 눈이 마주쳤다고 했는데….
손: 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굉장히 당황했어요. 설마 했으나 각하 머리에 총을 갖다대는 걸 보고 밖으로 튀어나갔는데 남효주 사무관이 부속실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두 여인의 진술은 사건 당일의 현장목격담이었다. 거기에 관립 비밀요정의 풍속도를 전해준 증언이었다. 두 여인은 사건 당일 밤 11시경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박선호는 이들에게 팁을 주어 내보냈다. 다음날 김재규가 국방부에서 헌병과 보안사요원들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중앙정보부는 평소대로 움직였다는 증거다.
다음은 1980년 1월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회 공판의 녹음이다.
변호사: 만찬에 참석한 여자 둘을 몇 시에 보냈습니까?
박선호: 제가 11시경에 보냈을 겁니다.
변호사: 11시경에, 그러니까 거사가 있고 난 뒤에 그날 보냈죠? 그날 돈도 주어 보냈죠?
박선호: 네, 완전히 다 계산해서 보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의 술자리여인들에게 주는 화대는 지금 돈으로 쳐서 보통 50만~100만원 선이었고 이름 있는 스타인 경우는 그 두 배를 주었다. 「당대 최고」의 술자리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의 상상보다 꽤 짠 편이었다.
그 이유는 권력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시중엔 대통령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공급이 많으니 가격이 비쌀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도 수요와 공급의 시장법칙이 적용됐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런 지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중간책이 장충동에 있던 모요정의 김 마담이었다. 김마담은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어 거물정치인과 접하려는 「화류계 매미(賣美)」들의 대모였다. 특히 연예계에서 스타가 되기 전 20대초의 나이 어린 신참들이 김마담으로부터 은밀히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응락했다. 이들은 그런 자리에 갔다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그것으로 연예계의 정상에 다가가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박선호는 급할 때면 종종 김마담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고 변호사 접견시 털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반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대통령이 영화나 TV연예프로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개 불려왔다. 다만 유부녀로서 본인이 거절하면 강요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궁정동 연회 차출지시로 영화나 TV프로 촬영 스케줄이 펑크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연예계에서 힘쓰는 「협회」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의 제작진 사이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판정에서 하는 것으로 마지막인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박선호 피고인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랐던 배경과 함께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들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 확실한 피고인의 최후진술마저도 남기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나섰다. 대통령의 채홍사였기에 할 말을 다 할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다음은 1980년 1월24일 고등군법회의 결심인 3회 공판에서 박선호가 남긴 최후진술이다.
법무사: 감사합니다. 들어가십시오. 박선호 피고인 앞으로.
박선호: 제가 지금 여기에서 최후진술을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정보부에서 근무하면서 존경하는 김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제가 아직까지 원망이나 비관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지금 저희가 거기서 근무하면서 부장님께서 구국을 위해 민주를 위해 수시로 청와대에 들락날락하시면서 간혹 저희에게 주시는 그 정보를 들어보면, 숨통이 막히는 절박한 상황을 저에게 수시로 전달해 주시고, 저로 하여금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고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되도록 길러주신 데 대해서 제가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당일에 있었던 상황은 1심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긴박한 상황에서 아마 어느 누구도 100명 중 90명은 반드시 그 행동을 그대로 취하리라 믿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금 제가 그 진행과정에서도, 어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궁정동 일대 모든 건물을 관리하고 있으며, 제 밑에 많은 부하들이 있습니다. 완전히 사살을 목적으로 했다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저는 구두로 지시만 했으면 됐습니다. 그러나 부장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 과연 누구를 사살하고 누구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흔히 각하 정도는 납치하면 될 일이 되지 않을까 항상 속으로 염려했습니다만 웃분이 하는 일을 제가 알 바도 아니고 하달하신 명령만 충실하기 위해서 했고, 전우를 살리려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희생시킨 데 대해서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번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박선호가 말하는 전우란 청와대 경호처장이던 정인형이다. 사건 당일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권총을 쏘는 소리가 들리자 정인형과 경호처 부처장 안재송은 박선호와 눈길을 마주치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재송은 속사권총 국가대표선수 출신으로 경계되는 인물이었다. 두 경호간부는 권총을 빼려고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순간 박선호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고 『꼼짝 말라』고 외쳤다. 이어 그는 『움직이면 쏜다』고 위협했다. 두 사람에게 총을 겨눈 채 박선호는 『같이 살자』고 설득했다. 정인형은 너무 당황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몇 초가 지나는 사이 정인형과 안재송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더니 이럴 수가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역시 안재송이 속사권총의 행동을 취하려 했다. 순간 박선호의 총이 안재송과 정인형을 향해 차례로 불을 뿜었다. 박선호는 재판정에서 제손으로 동기생을 쏘아 죽인 데 대해 여러번 자책했다. 박선호는 계속되는 최후진술에서 중앙정보부 부하인 경비원들에 대해서도 선처해 줄 것을 부탁했다.
박선호: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제가 그 장소를 피했어도 될 것을 살려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랬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여기에 지금 제 부하였던 이기주 유성옥 유석술 김태원, 이들은 아무 뜻도 모르고 나왔고, 제가 지시한 대로 한쪽으로 몰아라, 왜냐하면 제가 총소리가 났을 때 일단 저희가 먼저 행동하지 않으면 부장님이 희생당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염려해서 한 군데로 몰라고 지시했고, 이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고 따라 했다가 이 법정에 서게 됐다는 데 대해서 가슴 아픕니다. 아무튼 이 부하들에 대해서만은 관대하게 처리해주실 것을 말씀드립니다.
어제 여기에서 검찰관께서 그 집은 사람 죽이는 집이냐 하는 질문 같지 않은 질문도 받았습니다만, 그 집은 사람 죽이는 집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건물은 대여섯 개가 있는데, 이것은 각하만이 전용으로 사용하시는 건물로서….
그가 대통령의 술자리 행사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하자 법정에 파란이 일었다. 방청석은 숨마저 죽인 채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으나 재판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러잖아도 시중에는 별별 얘기들이 다 나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술자리여인 명단을 적은 괴문서가 풍선에 실려 북악산 근처에 뿌려졌다는 소문도 퍼졌다. 괴문서는 북한측에서 만든 것이라는 미확인 풍문까지 나돌았다. 신문 도중이라면 검찰측이 이의 제기를 하거나 피고의 답변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최후진술이란 재판부가 피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검찰이 나서서 제지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자 재판부의 실무책임자 역할을 하는 법무사가 나섰다.
법무사: 피고인, 범죄에 관계되는 사항만….
순간 박선호는 멈칫했다. 최후진술조차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다. 그는 그러나 할 말을 이었다.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에 대해 최소한의 증언을 남겼다.
박선호: 예, 그래서 이것을 제가 발표하면 서울시민이 깜짝 놀랄 것이고, 여기에는 여러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이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명단을 밝히면 시끄럽고 그와 같은 진행과정을 알게 되면, 이것은 세상이 깜짝 놀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평균 한 달에 각하가 열 번씩 나오는데, 이것을….
법무사: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박선호: 예 ?
법무사: 피고인의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진술하시오.
박선호: 예. 그래서 제가 1년 연중 하루도 쉬지않고 열심히 근무했고 상관의 명령은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박정희의 채홍사는 의외로 간단히 할 말을 줄여버렸다. 마치 무슨 최면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재판부가 한 마디만 하면 맘먹었던 증언을 얼버무리곤 했다. 이는 박선호 뿐아니라 김재규 피고인의 경우 더 눈에 띄었다. 변호사들은 그것이 「고문」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박선호는 80년 5월24일 오전 서울 서대문의 서울구치소에서 자신이 상관으로 존경했던 김재규 등 4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눈을 감았다. 5·18 광주시민항쟁이 터져 27일 새벽 살상진압되기 전 극도의 정국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신군부는 또다른 불씨가 될 수도 있는 이들을 서둘러 처형해버렸다. 유신체제의 반민주성에 대한 부산·마산 시민항쟁과 미국측의 압력과 함께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도 10·26사건의 원인(遠因)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출처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11/nd98110020.html
첫댓글 신동아 1998년 11월호. 전국민이 알 때까지 퍼뜨려주세요! @congjee
이게 자식들에게 약점이 잡혀 박정희가 딸과 최태민 관계에 대해 통제할 수 없었다는 기사도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