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언 날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多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어서 보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어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날이
지금 이 못물 속에 지쳐 옴을
(『문학사상』, 1975.2)
[어휘풀이]
-산문 : 절 혹은 절의 바깥문
-그리메 : 그림자
-즈믄 : 천(千)
-산다화 : 동백꽃
[작품해설]
송수권은 종래의 한국 서정시가 갖고 있던 부정적 허무주의를 남도(南道)의 서정과 질긴 남성적 가락으로 극복하고 역동적인 경지의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느 이러한 시인의 시 세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그의 등단작이자 대표작이다. 이 시에서 보듯, 그는 향토적이고 전통적인 소재들을 사용하여 튼튼한 민족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원초적 삶을 희구하는 방향으로 초기 시를 창작하였다. 그 후 그는 민족에 대한 사랑에서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분단 조숙에 대한 역사 의식으로 까지 점차 시 세계를 확대시켜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전통시가 아니다. 그의 시는 우리 가락과 소재와 정서를 노래 하면서도 소월이나 영랑의 감상주의와 나약함으로 치우친 취약점을 극복하고 있다. 그의 시는 전통적 한(恨)의 세계 표출과 토속어의 사용이라는 면에서는 박재삼과 유사하기도 하지만, 박재삼에게는 없는 민중적 힘의 분출이 들어 있다. 한편 박용래가 갖는 고향 정경과 유년으로의 지향 등 한국적 정서와도 공유하지만, 박용래가 다분히 과거 지향적임에 비해 그는 역사 속으로 전진하는 특이한 전통시 세계를 보여 준다. 게다가 신경립이 주로 농민과 농촌 현실의 고통, 모순, 비리 등에 초점을 맞춘 농촌 현장으로의 시, 즉 현실 인식을 일깨워 주는 시를 지향하는 데 반해, 그는 농촌의 가락과 정서를 형상화하여 여유와 원초적 인식을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시에서의 ‘산문’은 단순히 절의 문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을 넘자드는 경계의 문으로 윤회와 부활을 상징한다. 이 시는 3연으로 구성된 자유시로 첫째 연은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5항의 목적어가 결합된 형태의 구조이며, 둘째 연과 셋째 연은 첫째 연과 같은 질문에 목적오거 각각 2항, 1항이 결합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목적어인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의 의미는 죽음이다. 시인의 전기적 사실을 참고한다면,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와 자살한 동생을 누이로 대치시켜 누이의 눈썹이 가을 산 그림자에 묻혀 떠돌고 있는 이미지로 부각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무주고혼(無主孤魂)으로 인간이 이승에서 못 다 풀고 간 한(恨)의 덩어리이다. 그러나 그가 힘의 역학을 추구하면서 한의 덩어리가 승화되기를 누누이 강조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눈썹’이란 죽음이자 부활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목적어는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이다. 여기서 ‘즈믄 밤의 강’은 모든 것을 잠재우고 어둠 속에 묻어 버린 대상으로 결국은 죽음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누이가 보는 것은 그런 강이 아니라, 그 강이 ‘일어서는 것’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재생’의 패턴 속에서 강은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자작시 해설을 따르면, 죽은 누이의 혼은 신선한 물방울로 만나기도 하고,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또는 물속에서 반짝여 오는 돌의 모습으로 부활되어 생명을 얻는다.
이렇게 일관되게 추구된 부활의 의지는 마침내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 건네이던’ 암시적 행위로 마무리된다. ‘누이야 ~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의 마지막 목적어인 이 행위는 누이가 겪은 부활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자,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의 인과 법칙과 윤회를 암시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산문에 기대어」라는 이 시의 제목과도 일치되는 관조와 깨달음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연에서도 그 같은 부활 의지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샘솟고 있으며, 시인은 죽은 누이와 마주앉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는 슬픈 제의(祭儀)를 되풀이하는 행위를 통해 비극적 삶을 인식하고 있다. 셋째 연은 누이의 부활 내지 환생에 바치는 시인의 노래이다.
[작가소개]
송수권(宋秀權)
1940년 전라남도 고흥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 시인상에 시 「산문에 기대어」 등이 당선되어 등단
1975년 문화공보부 예술상 수상
1987년 전라남도문화상 수상
1988년 제2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3년 서러벌문학상 수상
1996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및 광주문학상 수상
2003년 제1회 영랑문학상 수상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 『산문(山門)에 기대어』(1980), 『꿈꾸는 섬』(1983), 『아도(啞陶)』(1985),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7),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1987), 『우리들의 땅』(1988),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별밤지기』(1992),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1994), 『수저통에 바치는 저녁 노을』(1998), 『들꽃 세상』(1999), 『파천무』(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