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서러운 고(苦)의 진리
-상략-
"비구들아, 지금뿐만 아니라 과거(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선포했을 때)에도 나는 단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쳤을 뿐이다. (중부 22)
이 명료한 말을 이해해야 불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이 한가지 원리를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붓다가 발견한 것은 바로 사성제이며 나머지는 이 사성제의 논리적 발전과 사성제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붓다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그들의 전형적인 가르침이다(Viyaya, Maha-vagga). 붓다의 가르침에서 사성제가 가장 우월하다는 것은 녹야원에서 설했던 싱사파 숲에 대한 설법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어느때 붓다는 코삼비(알리하바드 근처)의 싱사파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붓다는 나뭇잎을 손에 조금 쥐고서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모은 이 한 줌의 싱사파 잎들이 더 많으냐, 아니면 저 숲에 있는 잎들이 더 많으냐?"
"세존이시여, 세존의 손에 있는 잎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저 숲에 있는 잎들이 더 많습니다."
"바로 그렇다. 비구들아,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지만 너희들에게 그것을 다 밝히지는 않았다. 내가 너희들에게 밝힌 것은 아주 적다. 비구들아, 그러면 왜 내가 밝히지 않았겠느냐? 그것들은 유용하지 않고, 청정한 삶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며, 싫어함, 냉정, 소멸, 적정, 완전한 이해, 깨달음, 열반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 비구들아, 내가 밝힌 것들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비구들아, 그러면 왜 나는 이러한 진리들(사성제)을 밝혔는가? 실로 그것들은 유용하고, 청정한 삶에 필수적이고, 싫어함, 냉정, 소멸, 적정, 완전한 이해, 깨달음,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들을 밝힌 것이다." (상응부 437)
붓다는 비할데 없는 의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뛰어난 의사이다. 붓다가 사성제를 설하는 방법은 의사의 치료 방법과 비교할 수 있다. 의사는 먼저 병을 진단하고 병의 원인을 찾아 낸다. 그리고 나서 병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지 생각한 뒤에 치료한다. 괴로움이 병이고 욕망이 병의 근본 원인이다.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병이 제거되어 그 병이 치유된다.
환자는 자신의 병을 알아차리고 병이 심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병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써 줄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 치료를 통해서 환자는 병에서 벗어나 치유된다. 괴로움은 무서운 병이기 때문에 무시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 갈애는 제거되고 버려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수행하고 계발해야 한다. 팔정도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치료법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알고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 갈애를 제거하면 열반의 실현은 보장된다. 열반의 실현은 병이 치유된 상태이며, 완전한 초월이며,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붓다의 깨달음이 흥미를 끌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던 셀라(Sela)라는 바라문에게 붓다는 말했다.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
그러므로 바라문아, 나는 붓다, 깨달은 사람이다. (중부 92.경집 558)
이것은 그가 붓다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는 스스로 말한다.
"비구들아,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여래는 아라한,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고 불린다." (상응부 433)
초기 경전에서 둑카라는 단어는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쓰였다. 문맥에 따라서 심리적, 물리적, 철학적 의미로 쓰인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사람에게 괴로움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불교 사상의 근본 원리이다. 사성제의 근본 개념인 '괴로움'을 무시하는 것은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무시하는 것이 된다. 괴로움을 알아야 할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괴로움을 아는 자는 또한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안다 ." (상응부 437).
이 사성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적이기 때문에, 네 가지 진리 가운데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을 안다는 것은 나머지 것들도 또한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상응부 437). '괴로움'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간단히 말해서 사성제 가운데 단지 하나의 진리만 부정해도 나머지 세 가지 진리 또한 부정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나는 이 모든 무의미한 것들을 받아 들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철저한 유물론자에게는 이 가르침이 상당히 무미건조하고 당황스럽고 부적절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참모습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이 가르침이 신화나 상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바른 시각으로 중생 세계를 조망하는 사람에게, 즉 냉철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유일한 문제는 바로 괴로움의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알려져 있든 그렇지 않든 모든 문제는 보편적인 이 괴로움 속에 포함된다. 그래서 붓다는 "이 세계는 괴로움 위에 세워져 있다 (상응부 40)." 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라도 문제가 되면 거기에는 괴로움, 불만족이 따르게 마련이고 우리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욕구와 현실 사이에는 갈등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인간은 그 문제를 풀려고 모든 노력을 다한다. 다시 말해서 불만족을 제거하고 갈등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한가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심지어는 종교적 문제라는 다양한 명칭을 부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괴로움 즉 불만족이라는 한 가지 문제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불만이 없다면 왜 우리가 정치, 경제등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겠는가? 문제 해결이 불만족의 감소를 의미하지는 않는가? 모든 문제들은 불만을 일으키고 노력에 의해서 불만들은 해소되겠지만 그것들은 그렇게 서로 생멸(生滅)을 거듭한다. 원인은 종종 외적인 것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속에 포함된 주관적인 데에 있다.
종종 우리는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다른 형태로,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나타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들과 직면하고 있는 듯이 보이고 그래서 그 문제들을 풀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문제와 문제에 대한 해결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성질 즉 중생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이다. 괴로움은 일어났다가 사라져 다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문제들은 육체적.정신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심리적인 문제보다 육체적인 문제를 더 잘 견뎌 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불교에 따르면 인생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이 모든 인생을 압도한다. 괴로움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세상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고, 아무도 이 괴로움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올바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분별력 있는 사람으로서는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즐거움이나 행복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괴로움을 초월한 붓다는 괴로움의 보편성에 대해서 설할 때 결코 인생의 행복을 부정하지 않았다. 팔리어로 쓰여진 근본 다섯 니카야(Nikaya)가운데 하나인 앙굿타라 니카야(Anguttara-nikaya)에는 중생들이 즐기는 행복에 대한 긴 일람표가 있다 (증지부 80).
마할리 릿차비(Mahali Licchavi)의 질문에 대해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마할리야, 만약 볼 수 있는 형상(色.색), 소리(聲.성), 냄새(香.향), 맛(味.미), 감촉(觸.촉) 들이 (감각 기능을 통해서 경험하는 감각 대상들) 모두 괴로움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가져오고 모든 즐거움과 희망을 빼앗는다면, 중생들은 이 감각 대상들에 대해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할리야, 이 감각 대상들 속에 즐거움이나 행복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거기서 기쁨을 느끼고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집착 때문에 중생들은 스스로 더럽힌다." (상응부 69).
인간은 감각 기능(기관)을 통해 감각 대상과 감각 대상이 주는 기쁨에 집착하게 되고 쾌락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즐거운 대상도 쾌락도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변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즐거움을 유지할 수 없거나 빼앗겼을 때 종종 슬퍼지고 쓸쓸해진다. 다양하지 못하면 불행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은 단조로움을 싫어한다. 그래서 소들이 싱싱한 풀을 찾듯이 신선한 즐거움을 찾는다.
그러나 이 즐거움도 한 순간의 것이기에 스쳐 지나가는 볼거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모든 즐거움은 고통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전주곡이 된다.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은 우리를 속여서 해를 가져다 주는 설탕 발린 독약처럼 어느듯 사라져 버리고 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요리, 불쾌한 음주, 추한 태도,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사소한 일들은 그가 불교도건 아니건,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지위가 높건 낮건, 학식이 있건 없건 우리들에게 고통과 불만을 가져다 준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붓다의 말과 동일한 말을 한다.
"슬픔이 다가올 때 그것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큰 부대를 이끌고 온다."
인간이 인생의 이러한 측면, 즉 즐거움은 변하기 쉽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 그는 실망하고 좌절한 나머지 지각이나 판단력도 없이 마음의 균형을 잃은채 어리석은 짓을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위험하며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은 빈번히 인생의 이러한 두 가지 문제, 즉 쾌락과 그 나쁜 결과에 직면해 왔다.
반면에 생물과 무생물에 대한 깊은 애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초연한 사고 방식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은, 올바른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그가 받은 문화적인 훈련 덕분에 인생의 어떤 흥망성쇠를 만나더라도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힌다. 그래서 그는 일이 잘 안 될 때에도 미소지을 수 있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떠나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는 결코 걱정하지 않으며 해방되어 있다. 쾌락, 쾌락의 나쁜 결과, 해방 이 세가지는 사실적인 경험들로 이른바 '인생의 진정한 모습' 이다.
붓다는 마할리의 질문에 계속해서 이렇게 답한다.
"마할리야, 만약 볼 수 있는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들이 모두 즐거움에 속하고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고통을 남기지 않는다면, 중생들은 감각 대상들에 싫증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할리야, 이 감각 대상에는 괴로움이 있고 즐거움은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중생들은 감각 대상에 싫증을 낸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 대상들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으로해서 스스로를 청정하게 한다." (상응부 69).
괴로움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 가장 분명하고 일반적인 형태의 괴로움(苦苦性.고고성), 둘째 조건 지어진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 즉 불만족(行苦性.행고성), 셋째 변화로 인해서 오는 괴로움(壞庫性.괴고성)이 그것이다 (장부 33. Samyutta Jambukhadaka-sutta).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모든 정신적.육체적인 괴로움(상응부 421)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괴로움이고 이것들을 고고성(苦苦性)이라 한다. 인생의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하는데 과학이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조건지어진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 불만족인 행고성(行苦性)은 철학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행(行)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처럼 고와 관계된 문맥 속에서는 다섯 가지 집합체(五蘊.오온)를 의미한다. 그것들은 물질의 집합체 (色蘊.색온. 이 경우에는 볼 수 있고 만져서 알 수 있는 형체를 가진 육체), 감각의 집합체(受蘊.수온), 지각의 집합체(想蘊.상온), 의지적인 형성력의 집합체(行蘊.행온), 의식의 집합체(識蘊.식온)를 말한다.
이것을 또한 간단히 명색(名色), 즉 정신적.육체적인 복합체라 하기도 한다. 색(色)은 물질적인 집합체를 포함하고, 명(名)은 나머지 네 가지 정신적인 집합체를 포함한다. 중생은 이 오온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와 경험의 세계는 둘 다 끊임없이 변한다. 그것들은 존재했다가 사라진다. 모든 것은 빙글빙글 돌아간다. 아무것도 이 무정하고 끊임없는 변화를 필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무상한 성질 때문에 아무것도 진정으로 즐거울 수 없다. 행복이 존재하지만 단지 순간적일 뿐이다. 행복은 눈송이 처럼 사라지고 불만이 생긴다. 붓다는 괴로움이라는 고귀한 진리(고성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린다.
"간단히 말해서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이상이 조건 지어진 것에 대한 불만족(行苦.행고), 괴로움이다.
괴고성(壞苦性)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만족의 범주에 속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즐겁고 행복한 느낌은 곧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 붓다는 수행자들이 사선(四禪)을 얻고서 경험하는 느낌들조차 괴고성의 범주에 속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도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하기 쉬운 것들이기 때문이다(중부. Mahadukkhandha-sutta).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참고 견디는 고통, 괴로움은 분명 아니다. 붓다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무상한 모든 것은 불만족스럽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매순간 변화를 겪고, 이 변화는 불만족을 낳는다. 무상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불만족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상응부 22). 그러므로 영원한 행복은 없다.
고성제(苦聖諦)를 공식화 하면서 붓다는 '간단히 말해서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한다(상응부 421). 이 가르침에 따르면 괴로움과 오온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괴로움은 오온으로부터 독립해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오온의 결합과 괴로움은 같은 것이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비구들아,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상응부 158)."
붓다는 다른곳에서 다음과 같이 설했다.
"세계와 세계의 생성, 세계의 소멸, 그리고 세계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은 의식과 자각을 갖고 있는
바로 이 몸 속에 있다고 나는 선언한다." (증지부 48)
여기서 세계란 말은 괴로움(苦.고)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바에 따르면 고성제와 나머지 세 가지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온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졌다. 그러므로 오온의 중요성을 인식하자.
불교에서는 세속적인 진리(俗諦.속제)와 궁극적인 진리(眞諦.진제)를 구별해서 말한다.
일반적으로 '존재'라는 말을 쓰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러한 존재란 없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육체적.정신적인 힘 또는 에너지라는 표현밖에 없다. 이 힘 또는 에너지가 오온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이 른바 '존재'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오온의 결합에 불과하다. 그러면 오온이란 무엇인가?
하략
피야닷시『붓다의 옛길(The buddha's Ancient Path)』 성서러운 고(苦)의 진리 에서....

첫댓글 예전에 [화엄 세계를 담아내는 꽃봉우리]를 읽으며 .. 세가지 괴로움에는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이 있다고 하며 그 설명들을 하셨죠.
고고성과 괴고성은 이해가 되던데 행고성이 참으로 묘해서 그 부분을 열번도 더 읽었던 기억이...
[ 방문객 15.02.06. 03:25
아...참고로요. 교학상, 유위법을 말할 때요. 수행을 여타와 구별해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유루인 오취온"과 "무루인 오온"으로 구별해 이야기하기는 합니다. "무루인 오온"도 유위법이구요. 그런즉 "무루인 오온"도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
==
위 방문객님의 댓글은... 오온이 행고성임을 의미한다고 나름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즐기지 않는 분별인데요. (상좌불교등의) 교학상, "오온"은 법이지만, "괴로움"은 법이 아닙니다. 괴로움은 관념입니다. [경]에 나오는 비유를 들자면요. 소는 관념이구요, 소를 해체한 구체적인 구성물이 법이예요.
그런데 괴로움이라는 말에 휘둘린 나머지, 쓸데 엄는 관념을 많이 만들어낸다고 하겠습니다. [ "일체의 드러남"은 "조건지어짐 즉 연기에 따른 성립"이고, 그러한 "일체의 조건지어짐 즉 속박된 상태"는 "괴로움" ]이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좌우당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 ]이란 말이 [ "일체의 속박 상태"와 "일체의 속박상태에 무애함" ]과 같은 뜻임을 알면, 괴로움에 대한 불필요한 관념이 줄어 듭니다.
네.. '법'과 '관념'을 바르게 파악해가며 불법을 이해하려 노력하겠습니다.
괴로움은 일체의 속박상태이고,
괴로움의 소멸은.. 어떠한 조건으로 이러한 속박상태에 처하게 되었는가를 알게 된 그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즉 조건(속박)을 떠나서 무애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속박)을 바르게 볼 때 무애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조건(괴로움, 속박)을 잘 알 수 있도록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부처님도 [나는 오로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생성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할 뿐이다]라는 말씀이 요즘은 참으로 와 닿습니다.
==
늘 "괴로움을 잘 알려고 노력하라" 시던 그 말씀들이 얼마나 실속있는 말인지 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