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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다 (요한16,22)
1차( 04:30),2차(05:30, 05:48 ) 3차(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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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묵상글(강론글)
04시 3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30분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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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5일 금요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다 (요한16,20-23ㄱ)
제1독서<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사도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복음<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16,20-23ㄱ)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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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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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6,20–23ㄱ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하겠지만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 말씀은
고난의 현실을 부정하는 위로가 아니라
그 고난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슬픔을 모르는 척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슬픔을 정직하게 인정하시면서도
그 끝이 절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를 드십니다.
아기를 낳을 때 여인은 괴로워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그 고통을 넘어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누립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슬픔이 단지 잃어버림의 슬픔이 아니라
새 생명을 품고 있는 진통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눈물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고
때가 되면 다른 차원의 기쁨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기쁨을 세상이 주는 가벼운 즐거움과 구별했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상황이 바뀌면 쉽게 사라지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기에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슬픔이 없어진다”가 아니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데 있습니다.
곧 주님은 우리 삶의 아픈 시간들을
그저 지워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시간마저도 새 생명의 자리로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덜어 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절망을 덜어 내야 하고,
조급한 결론을 덜어 내야 하며,
눈앞의 감정만이 전부라는 생각을 덜어 내야 합니다.
아낌은 슬픔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꾸는 지혜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지금의 눈물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필요한 자기소모를 줄이고
약속을 붙드는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 안에서만 인간의 마음이 참된 안식을 얻는다고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기쁨도 바로 그 안식과 연결됩니다.
기쁨은 문제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이 내 삶을 붙들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슬픔 한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기쁨으로 이끄신다는 믿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깊은 위로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은 기뻐할 것이고
아무도 너희에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소중합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은
상황이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을 다시 뵙는 기쁨,
주님과 다시 연결되는 기쁨,
주님이 여전히 내 곁에 계시다는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회복은
주님을 다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슬픔 속에 있는가?
그 슬픔을 끝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 안에서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빨리 편해지기만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그 시간을 통해
더 깊은 기쁨을 빚으실 수 있음을 믿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눈물을 무시하지 않으시면서
그 눈물 너머의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주님,
제 슬픔이 절망으로 굳어지지 않게 하시고
당신 안에서 기쁨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눈앞의 고통만 보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더 깊이 믿게 하시며
빼앗기지 않는 기쁨 안에
저를 머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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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러나 같은 사랑이라는 말 안에도 서로 다른 깊이와 방향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랑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입니다. 부족함에서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내가 채워지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사랑을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여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끌리는 마음, 그것이 에로스입니다. 두 번째는 ‘필로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 사이의 사랑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이 되고, 함께 선을 추구하는 관계입니다. 친구는 또 다른 나 자신이라는 말처럼, 서로를 통해 더 나아지는 사랑입니다. 이 두 사랑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족함에서 시작되는 사랑,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전혀 다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위에서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사랑입니다. 부족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충만하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감정의 확인이 아닙니다. “너는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느냐?”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완벽하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사랑 안으로 이끄십니다.
성서는 아름다운 이야기, 희망찬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한 인간의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다투고, 죽이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렸던 아담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시기해서 죽인 카인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부하를 시기했던 왕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성서는 어째서 인간의 나약함을, 인간의 잘못을, 인간의 교만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완벽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이 아가페의 사랑을 자주 만납니다.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굳어가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말도 어렵고,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우들이 그 형제님을 위해서 작은 갈비탕을 만들어 옵니다. 정성스럽게 끓여서, 드시기 좋게 준비해서 가져옵니다. 또 어떤 분은 마사지해 줍니다. 이것은 한 번쯤은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누구나 한 번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은 매일 찾아갑니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없이 곁에 있어 줍니다. 또 어떤 자매님은 하모니카를 연주해 줍니다. 김밥을 싸서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한 번이 아닙니다. 매주, 반복해서, 꾸준히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의무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계산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한 자매님은 뇌졸중으로 10년째 휠체어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지극 정성으로 아내를 돌보며, 매년 유람선 여행을 함께 갑니다. 이 또한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또한 계산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도 1년에 두 번 병원의 예배실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느낍니다. 아, 여기에도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 있구나. 이 사랑이 무엇입니까? 에로스입니까? 필로스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아가페입니다. 에로스가 “나는 부족하다”라고 말하는 사랑이라면, 필로스가 “우리는 함께 좋다”고 말하는 사랑이라면, 아가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미 충분하다. 그래서 너에게 준다.” 이 사랑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나는 아직도 받기 위해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받았기 때문에 주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대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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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리고 이 말씀을 해산의 고통으로 설명하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16,21).
해산의 고통은 정말 큽니다. 그러나 새 생명의 기쁨이 고통보다 크기에 그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겪는 고통도 우리가 얻을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 선수는 “No Pain No Gain.”, 곧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라는 좌우명을 두고 날마다 연습을 하였다고 합니다. 완벽한 경기를 위하여 수천 번의 점프 연습을 되풀이하였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세상의 금메달이나 우승 트로피를 얻는 데도 이렇게 많은 고통이 따르는데, 하늘의 썩지 않는 화관을(1코린 9,25 참조) 얻는데 어찌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얻으려 성당에 왔는데 마음속에 번뇌만 더 생긴다며 성당을 떠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앉아 있는다고 저절로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수천 번 점프 연습을 하였듯이, 우리도 수천 번 다시 사랑하고, 실패하며, 용서하는 고통스러운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우리의 고난 끝에는 부활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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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원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함께 아파하셨던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1항)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 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새로 탄생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 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선사된 기쁨’, ‘주어진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죽음이 생명임을,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말해줍니다. 그 ‘기쁨’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도 주님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함께 하시는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고, 빼앗아갈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주님!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그 어떤 불길도 태울 수 없고
그 어떤 슬픔도 해칠 수 없고
비록 흔들리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 어떤 방벽으로도 막을 수 없고
그 어떤 감옥으로도 가둘 수 없고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결코 빼앗겨 질 수 없는 ‘임의 사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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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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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15 05:25
-우려에 대해 우려하는
우려(憂慮)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 좋은 말이 아닌 것처럼 쓰이고 그렇게 들립니다.
그러나 우려가 반드시 나쁜 뜻인 것은 아닙니다.
제 짐작에 우려라는 말은 논어의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必有近憂)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원려(遠慮)를 하지 않으면 근우(近憂)가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지요.
원려란 무슨 뜻입니까?
멀리 내다보며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근우란 어떤 뜻입니까?
가까이 있는 근심일 뜻일 것이고,
근심이란 늘 가까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이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내다보며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동양의 지혜가 담긴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
전화위복은 화가 바뀌어 복이 된다는 말이니
멀리 있는 복을 내다보면 가까이 있는 화를 보고 그리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옹지마는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는 것의 반복이 인생이니
일희일비(一喜一悲) 곧 하나하나에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오늘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일까요?
같은 맥락이면서도 그 이유가 사뭇 다릅니다.
곧 화와 복 또는 기쁨과 슬픔이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이유이고 하느님 때문에 그리 바뀌는 것이 차이입니다.
주님께서 떠나시기에 슬프고 근심스럽게 되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기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근심과 기쁨의 이유도 달라야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우려해야 할 것은, 이 세상 것에 관한 우려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놓치거나 잃을까 그것을 우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도 이 세상 것을 얻게 되었음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기쁨 곧 성령으로 인한 기쁨이어야겠지요.
세상 입맛이 천상 입맛으로 바뀌었음에 기뻐하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소유케 되었음에 기뻐하고,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음에 기뻐하고,
무엇보다도 모든 선이신 주님을 소유하게 되었음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프란치스코처럼 이 기쁨 때문에 또 이 기쁨을 위하여
“우리 모두에게 온 몸과 온 마음과 온 생명을 주셨고 지금도 주시는 주 하느님,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으뜸선이신 주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 말고 바라지도 말며 마음에 들어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는” 그런 우리가
되기로 마음먹고 그런 은총을 주십사고 청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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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주님과 더 깊고 친밀한 일치를 원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당부... < 05: 48 추가>
한 노신자가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삶의 체험을 나누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는 인생에서 많은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체험들은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그 가치를 깨닫고 나니 오히려 큰 은총과 축복의 원천이 되었고, 하느님의 놀라운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고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쁨 속에서는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는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잠든 세상을 깨우시는 메가폰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주님과 더 깊고 친밀한 일치를 원하는 이들에게 인내와 성장, 그리고 영적 진보를 위한 필수적인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여정에 고통과 슬픔이 반드시 존재함을 밝혀 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고통이 깊은 기쁨과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됨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현실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 현실이 하느님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증거임을 확신하셨기에 이 수난과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이런 확신 안에서 연약한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산모의 고통과 기쁨을 비유로 드십니다. "해산할 때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더 이상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요한 16,21)
이 비유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고통과 시련에도 빛과 희망을 비추어 줍니다. 출산의 고통은 극심하지만, 아기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고통은 환희로 바뀝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그분께 충실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고통도 하늘 나라의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손을 잡아 이 길로 이끌어 주시며,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주님과 일치하지 못하고, 또 주님께 온전히 충실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적어도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만이라도 갖고자 한다면 주님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다음 말대로 말입니다. "제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바람만 갖고 있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사도 바오로는 많은 박해와 고통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사도행전 18,9)
물론 결국 다른 순교자들처럼 사도 바오로도 순교를 당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미 그에게 부여해 주신 믿음의 기쁨이 있었기에 그가 순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은총이 그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죽음도 넘어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고통으로 우리를 찌를 때, 문제가 우리를 괴롭힐 때, 희망과 믿음, 신뢰와 용기를 가지고 상기합시다!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께서 잠든 세상과 우리를 깨우시는 메가폰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우리 삶에서 오는 시련들을 이겨낼 믿음의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히 고통을 참아내라고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이 모든 고통과 시련, 그리고 죽음까지도 넘어설 하느님의 힘, 즉 성령을 주시고 나서 그 모든 것을 이겨내라고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만찬을 드신 후,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신 후 당신께서 곧 떠나실 것을 예고하시지만, 이 때문에 슬픔과 낙심에 빠진 제자들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나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성령께서 위로자요 길잡이이시며 변호자로서 함께 하실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부재가 잠시일 뿐임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이고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큰 고통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질구레하게 겪는 일상의 갈등과 아픔, 혼동 가운데서도 용기를 내게 하시기 위해 영으로 함께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깨워 우리를 그분과 더더욱 일치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하는 자명종과도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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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본질적인 기쁨!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율리안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희망의 본보기를 제시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노리치의 율리안나: 보편적 신비주의자
본질적인 기쁨!
2026년 5월 14일 목요일
글로리아 두르카 박사(Dr. Gloria Durka)는 토마스 머튼이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긍정적 신학을 사랑한 그 깊은 영성을 탐구합니다:
고통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우리 모두가 때때로 맞닥뜨리는 영적 투쟁이며, 때로는 쓰라린 시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리치의 율리안나가 보여준 낙관은 토머스 머튼에게 그러했듯,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되어 줍니다. 머튼은 그의 저서 죄 많은 방관자의 추측(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율리안나의 저술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영적 삶 안에서 희망의 모든 차원을 체험하였습니다. 곧 반석처럼 확고하신 하느님, 언제나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우리에게 아버지이시며 동시에 어머니이신 하느님을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율리안나는 특히 희망의 기쁨스러운 성격을 깊이 인식하였습니다…. 인간의 기쁨은 율리안나의 영성에서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녀에게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이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기쁨이 삼위일체의 기쁨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창조 자체가 하느님의 기쁨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 충실하고 희망으로 응답할수록, 우리의 기쁨은 더욱 충만해질 것입니다.
율리안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욱 의미 있는 분이십니다. 그녀의 희망의 메시지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많은 이들의 영혼을 가볍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마 오늘날에도 그 메시지를 최소한 그만큼이나 필요로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핵 참사의 위협,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꺼질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서로 싸우는 민족들 사이의 치명적인 폭력은 우리 위에 드리운 절망의 구름을 날마다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파괴적인 사건들이 빚어내는 어둠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큰 믿음과 희망이 요구됩니다…. 또한 우리는 개인의 삶 속에서—우리의 실패와 나약함, 두려움의 어둠 너머를 바라보기 위해서도—큰 믿음과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둠과 두려움, 불안은 현실의 한쪽 면일 뿐입니다. 다른 한쪽은 우리가 "부활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고통이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 죽음과 부활은 우리 각자에게 죽음이 이미 정복되었다는 확실한 보증을 주었습니다…. 알렐루야!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노리치의 율리안나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이자 어머니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신 모습을 묵상하면서, "두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포용적 여정은 많은 고통과 실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신앙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오직 남성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세계 안에서 살아가며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리처드 로어 신부님과 CAC가 가능한 한 포용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걸어온 발걸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Jenny S.
References
[1] Thomas Merton, 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 (Image, 1968), 211–212.
Gloria Durka, Praying with Julian of Norwich (Christian Brothers Publications, 1989), 88–89, 9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yuhei Inoue, untitled (detail), 2020,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빛은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고요한 계시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온전히 담아내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혜와 힘으로 빛을 받습니다. 그 빛은 평화로운 때든 위기의 순간이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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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부활의 사랑과 오늘의 사회를 바라보며?!
사랑이 사라질 때, 공동체는 메말라 갑니다
— 부활의 사랑과 오늘의 사회를 바라보며
저는 문득 미국 사회의 동부와 서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정치에 큰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같은 미국 안에서도 동부와 서부는 분위기와 가치관,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종종 느끼게 됩니다.
겉으로 보면 서부는 더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가 강합니다. 정치적 영향력이나 문화적 파급력 또한 매우 커 보입니다. 오히려 동부보다 더 시대를 앞서가는 듯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의 깊이와 공동체의 안정감, 그리고 사람 사이의 신뢰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동부가 더 단단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경제·교육·전통·사회 시스템 등 여러 면에서도 기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묵상에서 말한 사랑의 차이, 곧 ‘받기 위한 사랑’과 ‘이미 받았기에 내어주는 사랑’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오래 견디며 서로를 품어주는 아가페적 사랑이 약해질 때 사회는 점점 피로해지고 메말라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약함과 분열을 숨기지 않습니다.
카인의 질투와 형제의 다툼,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까지 모두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조건과 계산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사회도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정치적 구호나 이념만으로 공동체가 건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마음, 불편해도 함께 가려는 인내, 계산보다 희생을 먼저 선택하는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사회는 깊이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19)
결국 사람도, 도시도, 사회도
‘무엇을 주장하느냐’보다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에 의해 오래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저는 문득, 내가 살아가는 이곳만큼은
사랑이 메말라 서로를 쉽게 상처 입히는 사회가 되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겉으로는 풍요롭고 화려해 보여도, 아가페의 사랑이 사라진 공동체는 결국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경쟁과 계산으로만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라,
부족함 속에서도 끝까지 품어주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When Love Disappears, a Community Begins to Dry Up
— Reflecting on the Love of the Resurrection and Our Society Today
As the reflection, I found myself thinking about the differences between the East Coast and the West Coast of the United States.
I am not particularly interested in politics, but even within the same country, the atmosphere, values, and ways people treat one another can feel remarkably different between the two regions.
On the surface, the West Coast often appears more progressive and free-spirited. Its political and cultural influence can seem powerful, and at times it even appears to be leading the 시대 ahead of others. Yet when one looks more deeply into the stability of communities, the depth of daily life, and the trust between people, the East Coast often seems to possess a firmer foundation. In areas such as economy, education, tradition, and social structure, reality does not always match the image people expect.
I began to wonder why such differences exist.
Perhaps it is connected to the difference between kinds of love described in today’s reflection — the difference between a love that seeks to receive and a love that gives because it has already received abundantly.
A society may speak often of freedom and diversity, but when sacrificial love, patience, and the willingness to embrace others begin to fade, communities themselves gradually become weary and spiritually dry.
Scripture never hides human weakness and division.
It records Cain’s jealousy, betrayal among brothers, Judas’ betrayal, and Peter’s denial. Yet despite all of this, God does not abandon humanity. That is the meaning of agape — a love beyond conditions and calculations.
Perhaps our society today is no different.
Communities are not sustained merely by political slogans or ideologies. A society gains true depth only when people are willing to carry one another’s burdens, endure discomfort together, and choose sacrifice over self-interest.
“We love because He first loved us.”
(1 John 4:19)
In the end, perhaps people, cities, and even civilizations are sustained not by what they proclaim, but by how deeply they are able to love.
And so I quietly find myself hoping that the place where I live will not become a society where love has grown dry and people easily wound one another.
For even if a community appears outwardly prosperous and impressive, it cannot endure for long once agape love disappears from within it.
Rather than becoming a world ruled only by competition and calculation,
I pray that we may become a people who continue to embrace, wait for, and care for one another despite our imperfections.
“You will grieve, but your grief will become joy.”
(John 16:20)
†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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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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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 속에 기쁨이 있고, 기쁨 속에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네 인생의 대 주제인 고통과 기쁨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정확한 해결책을 주시지는 않지만, 고통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인지를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성모 성월을 맞아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기쁨을 생각하니 예수님 말씀이 크게 수긍이 됩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기적같은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고, 동정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 베틀레헴에 큰 별이 뜨고,
그 먼 곳에서 온 동방박사들이 방문하고, 요셉이 피하라는 꿈을 꾸고,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갑니다.
기적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마리아의 생애는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파혼당할 위기를 겨우 넘기고, 출산 때 방 한 칸 못 구하고, 헤로데 학살을 피해 난민이 되고, 다양한 예수님의 돌출 행동이나 발언으로 상처 입고,
마침내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을 직접 목격합니다.
성모님 고통의 절정이라면 아무래도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아래 서 계셨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장면에 대해서 교부들과 역대 교황님들께서 동일한 강조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마리아께서도 십자가 아래서 영적 고통을 겪고 죽으심으로써, 둘째 아들, 곧 당신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그리고 또 다른 아들인 우리 교회를 영적으로 출산하셨다.
마리아의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유다교 학자 데이비드 플루서의 가르침이 큰 감동을 줍니다.
“마리아는 교회의 상징이자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한 가지 있다.
고통의 어머니 마리아는 구름 위에 떠 있던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지상의 구체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고통의 어머니(Mater Dolorosa)는 신학적 개념이나 산물이 아니라, 온 몸으로 고통을 겪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충만한 기쁨에 고무되어, 혹독한 고통에 꺾이지 않았던 한 실제 인물이다.”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충만한 기쁨에 고무되어!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숱한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고 좌절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 충만하다면 그까짓 고통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그것을 당신 전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잘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니 고통 속에 기쁨이 있고, 기쁨 속에 고통이 있습니다.
기쁜 고통의 배경에는 고통에 대한 의미 추구 작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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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0-23ㄱ).”
1) 이 말씀은, ‘죽음의 슬픔’과 ‘부활의 기쁨’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 기쁨은 십자가 수난 때의 참혹했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 ‘큰 기쁨’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기쁨을 얻으려면 슬퍼하여라.”가 아니라, “기쁨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라.”입니다.
신앙생활은 ‘큰 기쁨’을 얻으려고 일부러 슬퍼하는 생활이 아니고,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그것을 희망하기 때문에 슬픔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슬픔’을 ‘고통’으로 바꿔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지만(마태 10,22),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0,23).
일부러 고생하는 것은 ‘인내’와는 완전히 다른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2) ‘나인’ 고을의 과부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2-15).”
여기서 “울지 마라.”는, 우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이 아니라, 위로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슬퍼서 우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라자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도 울고 문상객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5).
슬픈 일을 당해서 슬퍼하는 것이 잘못은 아닌데, 슬픔에만 사로잡혀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들도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부활 신앙으로 사별의 슬픔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3) 21절의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는, “고통을 잊어버려라.”, 또는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가 아니라, “고통을 잊어버릴 정도로 기쁨이 크다.”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기쁨은 대단히 큰 기쁨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 안에서 살고 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고통과 슬픔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 고통과 슬픔을 잊어버리면, 왜 기뻐하는지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기쁨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해마다 반복해서 사순시기와 성주간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은, 부활의 기쁨을 더 잘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4)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희미해지는 기쁨도 아니고, 어떤 일 때문에 잃어버리게 되는 기쁨도 아닙니다.
묵시록에서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ㄹ-4).”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부활한 뒤에 너희가 나를 만나게 되면 너희는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인간의 처지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생로병사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희망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믿음과 희망은 온갖 슬픔을 극복하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반대로, 그 믿음과 희망이 없으면?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에 별 지장은 없겠지만, 인생 자체가 허무를 향해서 가는 허망한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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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5. 부활 제6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30 추가.
요한 16,20-23ㄱ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목적과 가치를 찾고자 하는, 다시 말해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사소하고 평범한 일 하나를 하면서도 내가 이것을 ‘왜’ 해야 하는지, 이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곤 하지요. 그런 우리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쉽고 편한 길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나쁜’ 거라고, 내가 뭔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내가 겪는 고통에서 ‘의미’를 찾아 받아들이고, ‘이유’를 찾아 합리화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 고통이 더욱 크게 느껴지고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 안에 숨은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하느님께서 고통이라는 포장지로 싸주신 선물이 크고 귀한 것일수록, 그 소중한 선물을 지키기 위해 겹겹히 쌓인 고통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는 작업이 너무나 힘들고 괴롭지요. 그러나 고통이라는 포장지 안에 숨은 귀한 선물을 발견하고 나면 하느님께서 왜 나에게 그런 고통을 주시는지, 그 고통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때부터 고통은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 막막하기만 한 ‘벽’이 아니라, 어렵고 오래 걸리지만 넘을만한 ‘언덕’으로 느껴집니다. 더 나아가 그 안에 숨은 선물을 곧 누리게 된다는 희망이 그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켜 주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드신 ‘산고’(産苦)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쌓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 비유 속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그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나의 아기’가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십자가를 나와 상관 없는, 그래서 피하고 싶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자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일 때, 그 후에 따라오는 영광과 부활도 ‘나의 것’이 되고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참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부활하신 주님을 내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고통은 내 앞에서 치운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품어서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극복한 고통이 나를 하느님 나라로 더 가까이 올라가게 만드는 ‘계단’이 됩니다. 부활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분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주는 슬픔과 절망을 기쁨과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점점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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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젠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육적 한계로 잠시 자고 일어난다는 것이 안되여도, 에전엔 기다리시는 분에게 미안하여 조급했었는데
이젠 그러하지 아니하다. 이해하여 주시겠지 ???
< 수도원의 주방. 밥짖는 수도자 초보이니 주님이 감싸 주시고 나이 지긋한 수도승 그 놈 늦잠 잤구만 하는 마음으로 이 곳에 오시는 분 이해, 너그럽게 --- >
지금 이 순간도 당쇠신부님(김 레오나르도 신부님 초창기 필명으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부른 는 것이 좋다)의 글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오늘은 여유가 있다. 새볔미사 참례 못해도 8시반에 장례미사 가기로 ---,
그렇게 성전에 가는 또 다른 의미도 부여하니---, (에전엔 새볔미사도 가고, 장례미사도 갔는데)
막 올라왔다 .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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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까지는, 언제 올라오지?, 5시10분쯤 부터 조급했다. 5시30분 ??. 5시35분 ?? ,
지난주말 침묵피정으로 이젠 내려 놓고, 더 자유로워 지자는 생각을,
그래서 1차, 2차 3차로 바꾸웠는데 모르겠다. 언제 다 내려 놓을지!!! (0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