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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등재 홍보 관광 마케팅 `일색’
-끔찍한 원폭 재난에도 조선인들 죽음은 빠져
지난 4일 점심 무렵.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주축이 된 일제강제징용현장 답사단(이하 답사단)은 군함도로 향하기 위해
나가사키항에 도착했다. 이날 군함도(하시마 탄광)로 향하는 유람선 블랙다이아몬드호는 평일임에도 만선이었다. 주말에는 예약이 밀려 한 달 전부터
표를 사야할 정도라고 하는데, 일본 정부가 추진 중인 세계문화유산 등재 움직임에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고 했다.
나가사키항에
위치한 매표소에는 이날 오전부터 군함도로 가려는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블랙다이아몬드호 한 직원은 “평소 200여 명 정도 탑승하는데,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이후 탑승객이 늘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항구 곳곳에는 군함도를 알리는 각종 팜플렛과 열쇠고리·엽서 등 기념품
판매도 활발했다. 항구 바깥 나가사키 대형 쇼핑몰 등에도 군함도 석탄 모양을 한 과자·우동·빵 등을 팔며 관광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침략 전쟁 뒷수발 채광에 조선인들 징용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군함도는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이 1890년 매수해 석탄을 캐기 시작한 곳이다. 총면적 6만3000m²으로 작은 섬이다. 그나마 초창기에는 현재
크기의 1/3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석탄 채광으로 인구가 늘면서 주위가 매립돼 면적이 확장됐다. 이곳에서 채취한 석탄은 일제의 침략전쟁의
자원이 됐는데, 미쓰비시는 채광 일꾼으로 조선인·중국인 등을 대거 모았고, 침략전쟁이 본격화된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이들을 강제 징용했다. 군함도
내 하시마 탄광에 징용된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일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가혹한 노동에 사망자도 속출했다. 더군다나 군함도에서의
탈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다른 징용지와는 달리 바다를 건너지 않으면 탈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른 탄광보다 몇배 어려운 조건이어서 당시
노동자들 사이에선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는 이야기가 퍼져 군함도는 ‘지옥도’, ‘귀신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실제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1925~45년 군함도에서 한국인들은 주로 질식·외상·변사 등으로
사망자가 속출, 그 규모가 파악된 것만 해도 122명이나 된다. 당시 군함도에는 약 500~8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전 이후 하시마 섬은 1974년까지 채굴을 계속하다가 석탄의 수요가 줄면서 자연스럽게 폐광되고, 현재는 무인도가 됐다. 이후 사람의 왕래가
끊어졌다가 2009년 일본이 군함도를 관광지로 개방하면서 방문이 가능해졌다. 이후 일본은 ‘큐슈-야마구치 산업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중이고, 이 중 군함도를 대표적 유산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군함도의 이같은 강제징용에 대한 역사와 정보는 현재
나가사키항과 군함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군함도 팜플렛에는 ‘1891년부터 1974년 폐광까지 해저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하면서 군함도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당시 아파트·극장·학교를 세워 근대문화를 꽃피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전지식 없이 군함도를 방문하면 누구라도 일제 강제징용
흔적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핀란드에서 온 야리 호일칼라(Jari Hoikala) 씨는 “일본 관광 중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강제징용의 역사는 전혀 듣지 못했다”며 “왜 팜플렛에는 이를 알려주는 게 하나도 없는지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인 황민영 씨는 “팜플렛에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이 숨겨지고, 근대문화유산으로 포장된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저는 한국에서 살아온 만큼 역사 관련 지식을 알고 있지만, 다른 외국인이나 일본인들은 이를 모르고 지나갈 것이라 생각하니 화가 난다”고
밝혔다.
원폭 피해 일본인만 추모, 조선인은 모른체 1945년 8월9일,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나가사키는 인구
24만 명 중 7만여 명이 숨졌다. 이중 조선인도 1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원폭의 강력한 위력으로 피폭지 2km 이내 생물은 죽었고,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하고 2차 대전이 끝났다. 이후 나가사키는 피폭지를 중심으로 평화공원,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등을 조성해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조선인이 죽은 사실은 빼고 일본인의 죽음만 추모하고 있다.
폭심공원·평화공원
원폭자료관은 원폭이 떨어졌던 8월에 방문객이 많지만, 평소에도 학생을 중심으로 소풍·답사 등이 이어진다. 연 30만 명 정도가 방문한다고 했다.
‘나가사키 피폭증언회’에서 활동하며 원폭 피해 유적지를 안내하는 모리구치 씨는 당시 피폭지에서 3.2km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그는 “원폭이
터진 후엔 모든 것이 소멸되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며 “소학교 1학년(7살) 때였는데. 다행히 몸을 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고
밝혔다. 당시의 이같은 경험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반핵운동에 나섰고, 일본내 피폭자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게 됐다.
그런데
최근 나가사키시가 조선인들의 피해에 대해선 함구한 채 일본인들의 피해만 기념하는 것을 발견한 뒤 조선인의 인권도 주목하게 됐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에선 원폭 투하로 한국인이 1만 명 정도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나가사키 시는 2000명 정도 죽었다고 공식 발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 기념관에서도 한국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또는 징용당해서 왔다가 원폭에
희생당했습니다. 이들은 군국주의에 징발돼 아무런 이유도 없이 희생당했고, 따라서 그 책임은 일본이 져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이를
숨기고 있으며, 죽은 일본인들은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곳 평화공원과 폭심공원에선 여전히 군국주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리구치 씨는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로
답사단을 안내했다. 나가사키에 살던 조선인들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나가사키 시민단체와 재일한국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공원 바깥쪽
한구석에 비를 세워 매년 8월 9일 위령추모제를 열고 있다. 위령비가 설치된 곳은 원폭자료관에서 폭심공원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관광객을 안내하는
일본인 가이드들이 이곳을 지나가지만, 다른 시설과는 달리 이 위령비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도 않고 지나쳤다. 이와 관련 모리구치 씨는 “굳이
조선인들 희생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라면서 “이렇게 제한된 정보만 알리고 배우다보니 조선인들의 피폭 사실은 자연스럽게 잊혀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폭심지 중앙 검은 탑과 함께 ‘원폭 순난자 명부 봉안함’을 가리키며, 모리구치 씨는 “일본이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피폭 피해자 15만여 명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그 숫자는 늘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상태에서 피폭 당사자들 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과거 잘못을 되돌아볼 계기들이 사라지고,
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호행 기자 gmd@gjdream.com
폭심나가사키원폭조선인희생자 위령비. 폭심공원 주변 조그만하게 서 있는 이 위령비만이 조선인들이 나가사키 원폭에 의해 희생됐다는 걸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다. |
일본 쇼핑몰에서 팔고 있는 군함도 화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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