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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스케치, 클레의 드로잉… 6일 거장들의 작품이 몰려온다
[토요기획] 미리 보는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전 세계 120여 개 갤러리 참가… 고미술 소개 ‘마스터스’ 특히 볼만
세잔 등 유명 작가 작품은 물론이고, 프로이트의 자필 연서도 볼 수 있어
어린왕자-진화론-국부론 초판본 등 중세 희귀 필사본 관람 숨은 재미
바스키아-앤디워홀-뱅크시 등 인기 있는 현대 미술 전시도 마련
지난해에는 에곤 실레의 작품이 화제였다면, 올해는 어떤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글로벌 아트페어인 ‘프리즈 서울’과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가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6일 동시에 개막한다. 지난해 처음으로 개최된 프리즈 서울은 올해 전 세계 120여 개 갤러리가 참여한다. 이 중 70여 개는 아시아 갤러리다.
아트페어는 갤러리들이 모여 작품을 파는 ‘미술장터’이지만, 해외 작품을 볼 기회가 드문 한국에서는 작품을 관람하는 기회로도 여겨진다. 지난해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에곤 실레(1890∼1918)의 드로잉 40여 점을 선보인 영국 ‘리처드 내기 갤러리’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작품 ‘술이 달린 붉은 베레모를 쓴 여자’를 출품한 아쿼벨라 갤러리가 화제였다. 올해 프리즈 서울의 화제작이 될 작품은 무엇이 있을지, 페어 참가 예정인 해외 갤러리들이 보내온 주요 작품을 소개한다.
● 밀레, 세잔, 클레… 거장의 드로잉
아트페어에 그림을 관람하러 오는 관객들에겐 현대미술보단 20세기 이전 미술 작품이 더 익숙하다. 20세기 이전 예술 작품은 서양 고미술을 선보이는 ‘프리즈 마스터스’ 섹션에서 볼 수 있다. 프리즈 마스터스에는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예술 작품을 취급하는 갤러리들이 참가한다.
에곤 실레 작품을 선보였던 리처드 내기 갤러리는 올해 참가하지 않는다. 지난해처럼 유명 서양 미술가 1명의 작품 여러 점을 한자리에서 보기는 힘들 전망이다. 다만 ‘만종’으로 국내에도 팬이 많은 바르비종 예술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인상파 거장 폴 세잔(1839∼1906), 독일 청기사파 화가인 파울 클레(1879∼1940) 등 주요 작가의 종이 드로잉 작품이 한국을 찾아 기대를 모은다. 이들 드로잉은 16∼20세기 서양 미술 거장들의 드로잉, 수채화, 오일 스케치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영국의 ‘스티븐 옹핀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드로잉 ‘밭에서 돌아오는 사람들’. 스티븐 옹핀 갤러리 제공
스티븐 옹핀 갤러리가 선보이는 밀레의 드로잉 ‘밭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밀레가 말년에 그린 동명 작품의 스케치다. 밀레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농부의 아들”이라고 밝히며, 이전까지 프랑스 사회에서 하찮게 여겨졌던 농민들을 캔버스의 주인공으로 앞세웠다. 이 드로잉에서도 농사일을 마친 뒤 가축을 몰고 집으로 향하는 가족이 묘사돼 있다.
파울 클레 ‘알프스 풍경’(1937년). 스티븐 옹핀 갤러리 제공
파울 클레의 ‘알프스 풍경’(1937년)은 그가 피부가 굳는 전신경화증을 앓고서 몇 년간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무렵 나온 작품이다. 치료를 위해 스위스의 병원을 오갔던 클레는 1936년 그림을 단 25점 그렸지만, 이듬해 건강을 일부 회복하며 왕성하게 작업했다. 이 작품은 클레가 병을 고치려 찾은 병원 근처 알프스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이 밖에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이 있는 풍경’, 파블로 피카소의 ‘예술가와 모델’ 등 거장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는 드로잉들이 출품작에 포함됐다.
루치안 프로이트의 편지. 스티븐 옹핀 갤러리 제공
미술사에 관심 많은 관객에게 흥미로울 작품은 영국 화가 루치안 프로이트(1922∼2011)가 남긴 편지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그는 주변 사람들의 적나라한 누드화를 자주 그렸다. 그런 그가 연인이자 훗날 아내가 된 캐럴라인 블랙우드에게 보낸 편지가 한국을 찾는다.
편지에는 연인에게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어떤 말이든 해줘요”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과 함께,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절친하게 지냈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 찍어준 사진을 토대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작업실에 놀러 온 두 연인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키스해 보라고 제안했다.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 다음 프로이트에게 보내줬고, 이를 받은 그가 드로잉한 것이다. 미술사가들은 이 일화를 통해 베이컨이 프로이트에게 더욱 과감한 주제에 도전하도록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한다.
갤러리 대표인 스티븐 옹핀은 “오래전부터 아시아에서의 전시를 원해 프리즈 서울에 참가하게 됐다”며 “르네상스부터 20세기까지 드로잉과 스케치를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나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까다롭게 고른다”고 했다. 40년간 20세기 이전 미술 딜러로 활동해 온 그의 갤러리는 2007년 영국 런던에 설립돼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 중세 필사본과 희귀 서적까지
프리즈 마스터스는 2012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됐다. 고대부터 20세기 예술 작품까지 광범위하게 선보이면서 컬렉터들에게 다양한 작품을 소개한다는 취지로 출발했다. 현대 미술 작품은 주로 젊은 컬렉터가, 고미술은 연령대가 높은 컬렉터가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소장가들이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예술 작품을 두루 살펴보며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프리즈 마스터스의 ‘숨은 재미’로는 중세 필사본과 장신구, 고지도, 희귀 서적을 꼽을 수 있다. 프리즈 마스터스의 디렉터인 네이선 클레먼츠길레스피는 “지도와 필사본, 장신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 무역의 중심에 있었고 예술 창작의 근원이었다”며 “런던 프리즈 마스터스에서도 하이라이트로 여겨졌던 아름다운 고대 예술품을 거래하는 딜러들이 서울에도 참가하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기욤 몰레의 기도서’ (Book of Hours·1480∼1490년). 레장뤼미뉘르 제공
이번 프리즈에서 볼 수 있는 중세 필사본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 시카고에서 운영되고 있는 갤러리 ‘레장뤼미뉘르’가 출품하는 ‘기욤 몰레의 기도서’(Book of Hours·1480∼1490년)이다. 프랑스 리옹에서 15세기 만들어진 책으로, 소금과 무기 무역으로 성공한 상인이었던 기욤 2세 몰레가 사용한 것이다. 몰레는 프랑스 트루아의 시인이자, 샹파뉴 지역의 유서 깊은 서적상인 가문 출신이다. 13페이지에 걸쳐 펼쳐지는 그림과 34페이지에 화려하게 장식된 글자를 통해 호화로운 중세 기도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에메랄드 반지(1680∼1720년). 레장뤼미뉘르 제공
레장뤼미뉘르는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에메랄드 반지(1680∼1720년)도 선보인다. 프랑스 루이 14세의 왕실 보석 디자이너였던 질 레가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과거 1억6000만 원 상당에 거래된 바 있다.
14세기 ‘범망경고적기’. 피터 해링턴 희귀 서적. 갤러리 제공
영국 런던의 ‘피터 해링턴 희귀 서적’ 갤러리는 8세기 일본의 ‘반야심경’과 14세기 ‘범망경고적기’를 출품한다. 일본에서 불교가 번성하던 가마쿠라 시대 나라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범망경고적기는 신라시대 태현 스님이 썼다. 피터 해링턴 갤러리 대표인 폼 해링턴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불교가 전달되고 번성하는 데 한국 승려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카날레토 ‘말게라의 탑’(1740년경). 로빌란트보에나 갤러리 제공
알바로 피레즈 데보라. ‘성모자와 성 요한, 성 야고보’(1415년경). 로빌란트보에나 갤러리 제공
이 밖에도 서양에서 처음 이동식 활자로 찍은 ‘구텐베르크 성경’의 한 페이지, 생텍쥐페리의 사인이 있는 ‘어린 왕자’ 초판본, 찰스 다윈 ‘진화론’과 애덤 스미스 ‘국부론’ 초판본부터 조앤 K 롤링의 친필 사인이 있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초판본까지 만나볼 수 있다. 고미술과 현대미술품을 함께 전시하는 로빌란트보에나 갤러리는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고딕 양식의 회화 ‘성모자와 성 요한, 성 야고보’(1415년경), 베네치아 풍경화의 거장 카날레토의 ‘말게라의 탑’(1740년경)을 선보인다.
● 페어장 밖에서도 굵직한 전시
프리즈 서울을 계기로 글로벌 경매사와 갤러리, 미술관들이 평소 보기 드문 좋은 작품을 가져와 국내에서 전시를 연다. 지난해 프랜시스 베이컨과 아드리안 게니 2인전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크리스티는 올해 장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작품을 가져온다. 두 작가의 작품 10여 점을 5일부터 7일까지 서울 용산구 ‘현대카드 스토리지’의 ‘헤즈 온: 바스키아 &워홀’ 전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1982년 바스키아가 그린 작품 ‘전사’는 2021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를 통해 4190만 달러(당시 약 472억 원)에 판매돼 현재까지 아시아 경매 거래 작품 중 서양 미술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5, 6일은 미술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다. 일반 관객은 7일 관람할 수 있다.
2018년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 직후 저절로 파쇄돼 엄청난 화제를 모은 뱅크시의 ‘사랑은 쓰레기통에’도 한국을 찾는다. 소더비가 파라다이스시티와 함께 준비한 전시 ‘러브 인 파라다이스: 뱅크시 앤 키스 해링’을 통해서다. 9월 5일부터 11월 5일까지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전시장인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전시는 뱅크시와 해링의 작품 36점을 선보인다. 필립스 옥션도 알렉산더 칼더, 데이비드 호크니 등 30여 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잠시 매혹적인’전을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송원아트센터에서 연다.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애니시 커푸어의 개인전도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전관에서 10월 22일까지 열린다. 미국 뉴욕의 ‘구름문’이나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앞 ‘큰 나무와 눈’ 등 대형 조각으로 익숙한 작가의 설치 작품과 회화를 다수 만날 수 있다. 국내에서 7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으로, 기존에 만났던 작품과는 달리 파괴적이고 거친 면모가 돋보인다.
아트페어를 계기로 다양한 기회가 열리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페어의 본질은 작품 거래라는 한계를 염두에 두고 감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인혜 미술사학자는 “아트페어의 각종 부스에 걸린 작품은 판매가 목적이고, 미술관은 주제에 맞는 작품을 미술관에서 연구하고 선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며 “페어에는 현재 거래가 가능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총제적 맥락을 제시하는 미술관과 달리 단편적 정보가 늘어서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이어 “책이나 미술관급 전시를 통해선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깊이 알 수 있지만 페어에서는 쉽지 않다”며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가운데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경험을 축적해 나간다는 의미를 두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혜경 홍익대 예술기획과 교수는 “자본의 힘이 강해지면서 아트페어가 기획 부스를 설치하거나 토크 프로그램을 마련해 비엔날레와 같은 미술계 제도 기관과 비슷하게 보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 교수는 “한국의 아트페어에서도 대가들의 대작을 만날 기회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라며 “평소 접할 수 없던 작품을 볼 기회로 삼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보다 개별적 특성에 초점을 맞춰 감상하기를 권한다”고 조언했다.
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