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430
■ 2부 장강의 영웅들 (86)
제7권 영웅의 후예들
제11장 결초보은(結草報恩) (5)
다음날 아침이었다.
공자 측(側)은 초장왕(楚莊王)에게 가서 간밤에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고 나서 말했다.
"화원(華元)은 어진 사람입니다. 어진 사람과의 약속을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왕께서는 1사(一舍)를 물러나라는 명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초장왕(楚莊王)의 반응이 뜻밖이었다."송나라 사정이 그토록 절박하다니 반가운 일이로다.
1사를 물러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나갈 일 아닌가.
이 참에 아예 상구성을 함몰하고 돌아가리라!"
공자 측(側)이 정색하고 말했다."우리는 상구성(商丘城)을 함몰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신은 우리 군중에 엿새치밖에 먹을 양식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6일만 버티면 우리가 스스로 물러갈 것을 저들은 알고 있습니다."
공자 측(側)의 말에 초장왕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대는 어째서 군사기밀을 적에게 알렸는가?"
"참상을 겪고 있는 송나라 신하도 자기네 나라의 형편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중원 패자국인 초(楚)나라 신하가 어찌 송(宋)나라 신하보다도 못할 것이겠습니까?
신은 군사기밀을 알렸을지언정 패자의 신하다운 면모를 잃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순간 초장왕(楚莊王)의 얼굴에서 노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그대 말이 옳도다. 지금 곧 군사를 1사 밖으로 물리도록 하라!"
초장왕의 후퇴 명령에 신서(申犀)는 땅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했다.
"왕께서는 내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구나.
"초장왕은 알자(謁者)를 보내 신서를 위로했다.
"그대는 슬퍼하지 말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너의 효성을 이루도록 해주리라!"
그래도 신서(申犀)의 통곡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마침내 초군이 상구성 포위를 풀고 30리 밖으로 물러나 영채를 세웠다.
송나라 재상 화원(華元) 역시 공자 측에게 약속했던 대로 송문공을 모시고 성문 밖으로 나와
초의 진영을 방문했다.- 초나라와 송나라는 서로 속이지 말고 영원토록 화친할 것을 맹약하노라.
초장왕과 송문공은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세했다.
맹약이 끝난 후 초장왕(楚莊王)은 송문공이 내준 신주(申舟)의 시신이 담긴 관을 앞세우고
영성으로 귀환했다.송나라 재상 화원 또한 공자 측에게 약속한 바와 같이 스스로 볼모가 되어
초군을 따라 영성으로 왔다.
영성으로 개선한 초장왕(楚莊王)은 가장 먼저 신주의 장례식을 크게 거행했다.
이어 그 아들 신서(申犀)에게 대부 벼슬을 내려주었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신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이로써 초장왕(楚莊王)은 송(宋)나라마저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명실공히 춘추시대 제 3대 패공의 자리를 완전히 굳혔다.
9개월의 항전 끝에 송나라가 초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진(晉)나라의 대송(對宋)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아쉽도다!진경공(晉景公)은 그 선대인 진영공이나 진성공과 달리 패기에 찬 인물이었다.
그는 송(宋)나라에 구원군을 파견하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다.
- 필(邲)에서 당한 패배를 설원할 좋은 기회였었다.
그러나 진나라 대부들의 생각은 진경공과 많은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 송나라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무리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순림보, 사회, 극극, 난서 등
진나라 6경(六卿)들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오르는 초나라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자는 것은 아닙니다. 내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주변 오랑캐족을
정리함으로써 힘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노재상 순림보(筍林父)는 흰 눈썹을 치켜올리며 진경공의 마음을 달래기에 바빴다.
아직 위(衛)나라나 노(魯), 조(曹)나라 등은 친진(親晉)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이탈을 막고 초나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나라 자체의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송(宋)이나 진(陳)나라도 다시 진(晉)나라를 섬기게 된다는 것이
순림보를 비롯한 귀족들의 생각이었다.
"초나라에 맞설 만한 힘을 기를 구체적인 방안을 말해보시오."
진경공(晉景公)은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하는 순림보의 태도가 여간 못마땅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권력 서열 2위인 사회(士會)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우리가 힘을 집중시킬 수 없었던 것은 주변 적적(赤狄)의 잇달은 배신 때문입니다.
특히 노적(潞狄)이 진(秦)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방치한 것이 큰 실수입니다."
진(晉)나라는 지리상 남쪽을 제외하고는 동, 서, 북이 모두 적족(狄族)에 들러싸여 있다.
진헌공 이래 계속해서 이들 적족 때문에 많은 골머리를 앓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진헌공은 군대를 증강해 경(耿), 위(魏) 땅을 점령하여 국토를 넓히고,
동산고락씨, 여융, 백적 등을 토벌해 진(晉)의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독 적적(赤狄)만은 끈질기게 진나라에 대항하여왔다.
진문공 대에 이르러 진나라는 겨우 적적(狄族)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진문공이 세상을 떠나자 적적은 다시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끈질기게
진나라 영토를 침공했다."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노적(潞狄)입니다."
노적은 적족의 일종으로 나라이름은 외(隗)였고, 주왕실로부터 받은 관작은 자작(子爵)이었다.
장구여(廧咎如)와 같은 혈통의 부족이다.노적(潞狄)은 처음에는 강하지 않았으나,
진문공이 죽은 이후 점차 세력을 확보하더니 마침내는 여(黎), 장구여, 수만 등 주변 여러 부족을
흡수 통합하여 나라의 면모를 갖추는 정도까지 되었다.
노적(潞狄)이 이렇듯 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노적 재상인 풍서(酆舒)의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풍서는 지략이 뛰어났고, 부하들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풍서는 20여 년 간 재상으로 지내면서 대부분의 권력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
임금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다.그나마 그를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었던 사람은
진(晉)나라에서 망명해온 호사고(狐射姑)였다.
그러나 호사고가 죽자 풍서(酆舒)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그는 전권을 잡고 나라일을 제 마음대로 휘둘렀다.그 무렵 노적 임금은 영아(嬰兒)였다.
영아는 친진파(親晉派)인지라 세자 시절 진성공의 큰 딸 백희(伯姬)와 혼인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영아는 진경공과는 처남 매부 사이였다.
그는 가능한 한 진(晉)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려고 했다.그런데 문제는 재상인 풍서(酆舒)였다.
풍서(酆舒)는 애초부터 진(晉)나라에 대해 호감을 갖지 못했다. 사사건건 임금인 영아와 대립했다.
그는 영아(嬰兒)의 뜻과는 다르게 자신의 직계 부하를 수시로 진(秦)나라로 보내 진환공(秦桓公)과
교류를 맺었다.그런 중에 진(晉)나라가 필(邲) 땅에서 초군에게 패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것이 풍서(酆舒)에게는 진나라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비쳤다.
- 더 이상 진(晉)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때부터 풍서(酆舒)는 노골적으로 진나라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행위가 노적 임금 영아의 부인인 백희에 대한 학대였다.
그는 백희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조당에 나가 많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영아에게 강요했다.
- 백희(伯姬)를 교수형에 처하십시오.영아(嬰兒)는 나약했다.
거기에 믿었던 진(晉)나라마저 초군에게 패해 패자국의 위용을 잃었다. 날마다 내궁에 들어앉아
고민만 했다. 이 모습을 보다 못한 백희(伯姬)는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풍서(酆舒)의 횡포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431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