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허난설헌의 생가
유독 마음을 잡아끄는 터가 있다. 강원도 강릉의 경포호 곁이다. 솔향기 그윽한 오솔길로 접어드니 적송이 둘러친 고가(古家)가 다소곳하다. 지난 늦겨울에 살얼음 푸석푸석 밟으며 들어섰던 허난설헌의 생가터, 비록 450년 전의 생가는 아니지만 250년간 그 터를 지켜온 다른 고가가 옛 정을 돋운다. 머슴의 행랑채가 붙은 정문을 들어서자 빙빙 둘러봐도 그지없이 단정한 사랑채가 손님을 맞고, 그 뒤로는 아낙과 아이들이 기거하던 안채의 아늑함이다. 허난설헌이 여기서 7살까지 살았다던가, 연화부수(蓮花浮水)라, 집 앞으로는 넓은 개울이 흐르고 그 건너의 얕은 둔덕을 넘어서면 별안간 푸른 경포호가 펼쳐져, 마치 집이 물 위에 뜬 연꽃과 같았다고 하던데...
죽지사(竹枝詞) / 허난설헌
家住江陵積石磯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에 있어
門前流水浣羅衣 문 앞의 강물에 비단 옷을 빨고
朝來閑繫木蘭棹 아침이면 한가로이 목란배 노 저어
貪看鴛鴦相伴飛 짝지어 나는 원앙새를 애써 바라보기도 했어라
또 다시 온 고가에 가을색 짙다. 뒤뜰에 핀 배롱나무 꽃에 넋을 놓으며 낡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적송에 깃든 세월은 무구한데 짧은 사람의 수명이다, 27살에 생을 마감한 조선 사대부 여인의 한에 잠긴다. 봄비 머금은 창가에 기대어 집 떠난 임을 그리고, 달빛 깔린 뜰을 내다보며 귀양살이 간 오라버니를 근심하고, 그러다가 눈물천지를 헤치며 요절한 두 아이를 애석해 하다가, 백설의 화선지를 펼치고 차근차근 그려갔어라. 세상이 붓 끝만 같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쓱쓱 제자리를 찾아가는 획의 반만이라도, 아니 그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했으면 이렇듯 답답하지 않을 것을... 난새를 타고 선계에 오른다.
桂花烟露濕紅鸞 계수나무 꽃잎에 맺힌 이슬이 난새의 깃을 붉게 적시우네 (유선사 5)
그리하여,
六葉羅裙色曳烟 여섯 폭 비단치마 노을에 물들인 듯 (유선사 87)
지난번에 들렸을 때 검은색 표지의 책이 마루에 쌓여 있었다. 난설헌 허초희 시선집이었는데, 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이 누이의 글을 모아서 엮은 원본을 함종임 시인이 번역한 유선사(遊仙詞)였다. 책 욕심에 얼른 한 권을 집어 들고는 펼쳤다. 유려한 문장에 신비가 넘실댔다. 이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라서 깊고 넓다. 그리고 높다. 견문이 짧은 나로서는 대단한 수확이었으니 허난설헌의 진면목을 비로소 대한 것이다. 유선사는 칠언 사행의 총 87수로 엮어졌는데, 각 수가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대장문의 선시(仙詩)라서 시어 하나가 뜻하는 바를 이리저리 들쳐야 한다. 친절한 문화해설가 김덕자 씨의 안내로 허난설헌과 허균의 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렸을까, 유선사 번역본의 서문으로 봐서는 남자일 것 같았는데, 연락받고 나온 함종임 시인은 단아한 체구의 여류시인이었다. 함시인은 총 226수나 되는 허난설헌의 시를 망라하여 번역한 <채련(采蓮)>을 내밀었다. 3년간의 각고 끝에 겨우 번역하여 이번에 출판했다고 한다. 여러 꺼풀을 벗겨야만 비로소 속뜻이 드러나는 난설헌의 시를 제대로 번역했는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리는 함시인이었다. <채련>의 뒷장에는 함시인이 얼마나 허난설헌의 시에 매달렸는지 짐작되는 글귀가 있다.
미적분(微積分)과 같은 난설헌 허초희의 시 읽기
미적분은 난설헌의 시에서 개개의 변들이 이루어 내는 연립이고 대입이며 명쾌한 활용이었다. 이 공식의 대입물은 역사, 정치, 사회, 문화였다.
난설헌의 시는 0을 중심으로 작게 쪼개거나 크게 조합하여야 맥을 짚을 수 있다. 즉 분해하고 다시 재건축 하여야 비로소 형체가 보인다.
0의 기본값은 수학적으로는 모든 수에 포함되며 과학적으로는 무가치일 뿐이며 종교적으로는 비어있으나 가득 차 있는 것이며 문학적으로는 아우름이며 상생이니 곧 삶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난설헌은 채련(采蓮)과도 같은 인간의 삶을 상계(天) 하계(地) 중계(人) 상계(天)의 우주론적 접근방식을 취하였다.
사실 유선사를 제대로 해득하려면 선계를 차용하여 현실을 아우른 고도의 기법을 파악해야 한다. 선시 속에 세상과 인간이 연출하는 대드라마를 집어넣었다. 중국 명나라 삼대문호 중의 한 사람인 주지번은 허균이 보낸 난설헌재집에 이렇게 감탄했다.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속세의 흙먼지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듯, 높이 솟았으나 무너지지 않으며 공허하나 뼈가 있는 말이로다. 또한 유선사와 같은 작품들은 당대(唐代)에 귀속 될 정도이니 그 본질은 쌍성(雙成)과 비경(飛瓊)에 버금간다고 할 것이다... 행과 행 사이에 남아있는 묵흔은 모두 진주와 옥구슬이다. 비록 인간 세상에 존재하나 신묘함이 가득 이어져 있으며 숙진과 역안의 무리처럼 슬프게 읊조리고 고통으로 생각하게 하여도 불편한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으니, 이를 어찌 아녀자의 소리라고 비웃으며 빈축을 주겠는가,”
또한 청나라 왕사록의 <연지집(燃脂集)>에서 인용한 심무비(沈無非) 여사의 서문이 <경번집>의 서문으로 추정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조선 사대부 여성 경번 허난설헌의 시 약간수를 편찬한 것이다. 수려함이 경탄의 소리를 낼 만하여 여성의 분 냄새를 느낄 수 없다.”
함시인과 나는 허난설헌의 호흡에 취해 있었다. 좋은 글은 그 자체가 숨쉬는 생명이다. 작가의 성패는 글이 생명을 얻는가에 달렸다. 작가는 가도 그 기(氣)는 억센 힘으로 글 속에 뭉쳐남아 꿈틀댄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일 것이다. 함시인과 헤어진 후 다시 허난설헌의 생가를 둘러봤다. 김덕자 문화해설가는 대문 옆에 붙은 머슴의 방에 달린 창문을 “벼락창문”이라고 했다. 밤에 집안을 다 둘러본 머슴이 자기 방에 달린 미닫이 창문을 탁 내릴 때, 그 소리가 잠들기 직전의 정적을 흔든다고 한다. 하루의 일과가 다 끝났다는 신호로서 주인도 그때부터 머슴을 부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김덕자 문화해설가가 낭송하는 곡자(哭子)라는 시를 들으며 발길을 돌렸다. 이 시는 허난설헌의 두 아이가 죽자 그 묘 앞에서 통곡하며 지었다고 한다. 워낙 약했던 몸인지라 이 시를 지을 때에 뱃속에 들은 아이의 장래까지도 불안해했다. 지금 난설헌은 두 아이의 묘와 나란히 경기도 광주의 언덕에 묻혀있다.
곡자(哭子) / 허난설헌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도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도다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은 일고
소나무 숲에는 도깨비 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태워서 너희 혼을 부르고
네 무덤에 맑은 술을 올린다
그래 안다. 너희 남매의 혼이
밤마다 서로 따르며 함께 놀고 있음을
비록 지금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랄지 알겠는가
하염없이 슬픔의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나오는 슬픈 울음 삼키고 있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질곡의 세월을 어찌 보냈을거나....
저도 꼭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