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을 좋아하는 나는
꼭 콘서트장에서 피아니스트의 연주모습을 보고 싶었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했는데 예술의 전당에서 티켓오픈 안내문자가 왔다
빛의 속도로 티켓팅을 시도한다
피아노연주회에서 내가 선호하는 중앙 로열블록의 왼쪽열로.
이 자리에선 피아니스트가 건반 위에서 추는 손가락 춤을 완벽하게 볼 수 있다
피아니스트 이택기는
모든 영재들이 그러하지만 17세의 나이로 헤이스팅스 국제 피아노협주곡 콩쿠르에서 우승과 청중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 중 한사람은 이제까지 들어본 연주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연주였다고 극찬한다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한 후
유럽과 미국에서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으며 연주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베를린 국립음대 마스터 과정에 재학 해 배움을 이어나가며 연주활동 중이다
오늘 연주하게 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3번이다
난 사실 2번을 더 좋아하는데 3번은 2번 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고 할 정도로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기 버거워 회피하는 곡이라고 들었다
임윤찬이 이 곡으로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3번의 인기가 한국인들에게 더 많아졌다는 후문이다
오늘 제대로 만났다
건반을 두드리고 휘젓고 어루만지는 피아니스는
격정적으로 우릴 이끌었다가,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서 있게 하면서 온몸의 세포를 긴장하게 하더니
어느 순간 잔잔한 호수에 우릴 데려다 주기도 한다
건반을 빠르고 바쁘게 옮겨다니는 손가락에 힘이 주어질 때마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건반을 내려칠 때마다
나도 같이 힘이 주어져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든다
피날레로 치닫는 격정의 순간에
김동인의 소설 '광염소나타'가 잠깐 떠오르기도 했다
작곡가 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느낌을 묘사한 재미있는 그림이 인터넷에 있다
쇼팽 - 건반을 휘젓듯이(생크림을 만들듯이)
베토벤 - 망치로 내려치듯이(템페스트나 월광의 아지타토 부분이 떠오른다)
리스트 - 두 손가락을 쵀대한 벌려야 연주 가능함 (라 캄파넬라를 연주할 때 너무나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가락)
바흐 - 로봇트 손인걸 보니 정확하게 건반을 눌러 연주하게 된다는 뜻인 듯하다
드뷔시 - 솜털로 건반을 쓰다듬듯이( 달빛이 언뜻 떠오른다)
그런데
라흐마니 손가락을 한번 보실까요?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10개의 손가락 만으론 턱없이 모자라고
길이도 웬만큼 길어선 연주하기 힘들게 보인다
많은 건반을 한꺼번에 눌러야 하는 테크닉까지 요구된다
그러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이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고 불릴 밖에
파가니니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린다면
피아노계의 악마는 바로 라흐마니노프가 아닐까 한다
너무나 멋진 연주모습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어떤 악기에도 눈 돌릴 틈 없이 집중했다
그리고 정말 이 연주회 잘 왔다 하는 만족감이 흥분과 함께 몰려왔다
충남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 정나라 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온몸을 다 사용해 관현악기의 모든 음을 뽑아내는 듯한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다소 덩치가 있는 이택기 님이 너무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모습에
약간 걱정이 된다
너무 몰입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힘의 안배가 잘 안 될 때가 있지 않은가
저러다 현기증이 일거나 혈압이 상승되어 쓰러지는 것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들 정도로 열정적이다
피날레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마지막 쾅쾅하면서 곡을 마쳤을 때
나도 모르게 온몸의 힘이 빠지며 앉아있는데도 휘청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다
지휘자는 곡 연주가 끝난 순간 지휘대의 난간을 잡고 한참을 서 있는다
꽤 긴 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는 관객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 인사를 한다
비를 맞고 내달린 듯 머리와 얼굴이 다 젖어있다
긴 호흡으로 긴장감을 달래며 박수를 쏟아내니 공연장은 그야말로 환호성이 가득하다
정말 멋진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더 이상 커튼콜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나도 기운이 다 빠져 차의 시동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