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급반 교과서
김명수
아이들이 큰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시집 『하급반 교과서』, 1983)
[작품해설]
이 시는, 박정희 정권 말기였던 유신 시절, 모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상황 속에서 고통 받던 현실을 초등학교 하급반 아이들의 책 읽기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이 시에는 하급반 아이들의 따라 읽기처럼 오직 한 목소리로 같은 내용을 읊조려야만 하는 암담한 시대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봄날, ‘나’는 아이들이 ‘청아하게’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쓸쓸한’ 느낌을 받는다. 하급반 교실에서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담임선생님인 듯한 화자는 쓸쓸함을 느낀다. 하급반 아이들은 많은 음독(音讀)을 통해 정확한 발음 훈련을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화자는 아이들의 책 읽기에 대해 별 관심이나 기대감이 없이 그저 ‘물끄러미’ 듣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생기발랄한 아이들이나 화창한 ‘봄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아이들이나 봄날과 어울렸다면 당연히 밝고, 희망차고 힘찬 분위기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결국 ‘쓸쓸한 책 읽기’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쓸쓸함’을 통해 화자가 이 책 읽기를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같은 책 읽기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지도적 위치에 있는 듯한 한 아이의 선창(先唱)에 따른 다른 아이들은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그저 따라 읽기만 하는 이 책읽기는 바로 통제된 사회에서의 맹목적인 추종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니다’와 ‘그렇다’는 거부와 수용이라는 기본적인 가치 판단임에 틀림없지만, 유신 시대와 같은 통제 사회에서는 그것마저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없거니와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책을 읽게 하는 것은 획일적 사고의 겱하이자 전제주의적 현상이다. 결국 화자는 이렇게 획일적 가치관만을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군사 독재 치하의 암담한 사회 현실을 아이들의 책 읽기를 통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사회 전체로 화대해 본다면, 일체의 판단력을 상실한 사회 구성원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압제자가 제시한 ‘교과서’를 맹목적으로 따라 읽을 뿐이다. 이 때 ‘교과서’는 ‘전범(典範)’으로서의 권위를 앞세운 통제력과 획일성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이 시의 화자는 ‘깨어 있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선창자를 좇아 무조건 따라 읽는 ‘아이들’으 맹목성과 우매성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느끼며 쓸쓸해하는 것이다.
[작가소개]
김명수(金明秀)
1945년 경상북도 안동 출생
대구사범대학교 및 한국방송통신대 졸업
197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월식(月蝕)」 등이 당선되어 등단
1980년 제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1985년 신동엽창작기금 수혜
1992년 제18회 만해문학 수상
1997년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시집 : 『월식』(1980), 『하급반 교과서』(1983), 『피뢰침과 심장』(1986), 『질경이꽃』(1987), 『금수강산 오랑캐꽃』(1988), 『침엽수 지대』(1991), 『바다의 눈』(1995), 『보석에게』(1996), 『아기는 성이 없고』(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