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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묵상글(강론글)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요한16,24)
1차(260515. 22:10), 2차(05:35), 3차(09:30).
16일 묵상글, 15일 22시 1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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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6일 토요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요한16,24)
제1독서<아폴로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였다.>(사도18,23-28)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23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24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25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7 그 뒤에 아폴로가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하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그곳의 제자들에게 그를 영접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8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요한16,23ㄴ-2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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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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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6,23ㄴ–28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어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기도가 단지 필요를 나열하는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보여 줍니다.
기도는 멀리 계신 하느님을 억지로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하느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은총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갈 길이 열렸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기도를 가르치시는 스승이 아니라
당신 자신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문을 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청한다”는 말은
주님의 이름을 주문처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통해 청하는 것을 뜻합니다.
참된 기도는
내 욕망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에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는 비유로 말했지만
앞으로는 아버지에 대해 드러내 놓고 말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신비가
닫힌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더 분명히 열리고 있음을 뜻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숨김없이 드러내시는 분이라고 보았습니다.
주님을 알수록
아버지가 멀고 두려운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먼저 다가오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두려움의 언어보다
신뢰의 언어가 되어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따뜻한 말씀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자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마지못해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 놓으시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하신다고.
이는 매우 깊은 위로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기도와 희망은
하느님의 마지못한 허락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의 사랑 안에 뿌리내려 있습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기도에도 아낌의 지혜가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두려움을 덜어 내야 하고,
하느님을 오해하는 생각을 덜어 내야 하며,
내 욕망만 반복하는 기도를 덜어 내야 합니다.
아낌은
기도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더 본질적으로 만드는 절제입니다.
많은 말을 쏟아 내기보다
정말 구해야 할 것,
정말 맡겨야 할 것,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을 분별하게 합니다.
그럴 때 기도는
산만한 요구가 아니라
충만한 기쁨으로 열리는 길이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간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전체 여정을 아주 짧고 깊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아버지에게서 오셔서
우리 곁에 머무셨고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십니다.
그 길 안에서
우리도 아버지께 향한 길을 배우게 됩니다.
기도는 바로 이 길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갇힌 시야를 넘어
아버지께로 향하는 삶의 방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웃종교/생태의 날에
이 말씀은 더 넓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누구나
궁극의 근원과 의미를 묻고
자기 너머의 참된 실재를 향해 손을 뻗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그 갈망의 근원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믿음은
다른 이들의 영적 갈망도 함부로 무시하지 않고
더 겸손하고 더 경외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주님의 이름 안에서 청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 두려움과 조급함만 반복하고 있는가?
나는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얼마나 믿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억지의 요청이 아니라
사랑 안의 신뢰로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
제가 당신 이름 안에서 아버지께 바르게 청하게 하소서.
불필요한 두려움과 산만한 욕심을 덜어 내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친히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안에서
깊은 평화와 기쁨을 얻게 하소서.
당신께서 열어 주신 길 안에서
참된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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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 성야 미사는 다른 미사와는 달리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 의미를 잘 모르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 성야 미사의 의미를 미리 알고 참례하면 그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교향곡이나 소나타를 처음 들을 때면 지루할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알면 더 깊은 음악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활 성야 미사는 4막으로 구성된 뮤지컬과 비슷합니다. 1막은 ‘빛의 예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 부활하셨음을 기억합니다. 부활초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시대도, 공간도 초월해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합니다. 부활초에서 촛불을 옮기면서 함께한 신자들도 부활의 기쁨에 동참합니다. 사제가 부활초를 높이 들면서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외치면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사제는 ‘부활 찬송’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빛의 예식이 성대하게 끝나게 됩니다.
2막은 ‘말씀의 전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묵상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넌 이야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었던 이야기, 하느님의 사랑으로 죽은 이들이 새 몸을 얻게 된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말씀이 끝나면 사제는 ‘대영광송’을 노래하고, 그동안 멈추었던 악기를 연주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선포합니다. 천사들은 ‘갈릴래아’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래아’를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2,0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먼 훗날 이어야 할 미래의 사건도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던 곳, 표징을 보여 주셨던 곳, 바로 갈릴래아에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현재의 사건입니다. 지금 내가 머무는 곳이 바로 갈릴래아입니다.
3막은 ‘세례식과 세례 갱신식’입니다. 이번 부활에도 13명이 세례를 받았고, 15명이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예수님의 부활절에 세례를 주는 것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듯이, 세례를 받는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새 영세자와 함께 세례 갱신식을 합니다. 마귀를 끊고, 유혹을 끊고, 죄를 끊어 버린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을 믿고, 주님의 부활을 믿고, 거룩하고 보편 된 교회를 믿고, 죄의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사제는 새롭게 축성한 성수를 뿌리면서 공동체 모두가 성화 되기를 기도합니다. 새롭게 성화 된 공동체는 주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4막은 ‘성찬의 전례’입니다. 멀리 여행 가는 어머니는 이것저것 음식을 해 놓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신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백성을 위해서 빵을 나누어 주셨고, 물고기를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12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그리고 포도주가 든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마셔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피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성체성사’입니다. 제자들은 빵을 나눌 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성체성사의 핵심은 감사와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언제 어디서나 감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되는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이름으로 청하면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먼저 무엇을 청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를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삶의 방향에서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기도는 내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됩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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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체중 조절 약 광고를 풍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약은 먹기만 해도 한 달에 3킬로그램이 빠집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약을 먹기 전 아침에 3킬로미터 산책, 저녁에도 약을 먹고 3킬로미터 산책, 그 이후에는 금식과 금주.” 결국 약이 아니라 음식을 절제하고 운동하여 살이 빠지는 것이지요.
건강하게 살을 빼려면 생활 습관을 바꾸어야 함을 풍자적으로 말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그런데 예수님께서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16,23)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간접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하여 비유로 이야기하셨지만, 앞으로는 직접적으로 그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가 온다고 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알게 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고, 그때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비 신자들에게 “기도의 수준은 바로 신앙의 수준”이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내가 청하는 내용이 바로 나의 신앙 수준을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기도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약을 먹는 것만으로 건강하게 살을 뺄 수 없듯이 기도만으로 모든 일이 마법처럼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느님께서 바뀌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와 우리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느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삶이 참으로 거룩해지도록 우리 자신이 바뀌고 성장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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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으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함이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이요, 예수님의 의화에 힘입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기도함을 말해줍니다.
셋째,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으로, 구하면 받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약속’으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로 우리에게 기쁨이 선사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별히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청하지 않았다.”(요한 16,24)라고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일깨워줍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이 말씀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네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네 개의 동사’가 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선재하셨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온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 “세상에 왔다”는 말씀은 강생은 ‘보내심을 받아’ 오시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셨음을 말해줍니다.
셋째, “세상을 떠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원하여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음을 말해줍니다.
넷째,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말씀은 구원의 역사가 마쳐졌다는 것이요, 하늘로 돌아가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시어 당신 백성을 위해 대신 기도해주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로마 8,34;히브 7,2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신의 기원과 목적지를 밝혀주심으로써 ‘당신의 신원과 사명’을 가르쳐주십니다. 단지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혀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인격을 통하여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심을 밝혀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께로 끌어드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27)
이 모든 것이 먼저 베푸신 당신의 하염없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 하염없는 사랑에 우리도 하염없는 감사로 기도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하염없는 사랑이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도록 자신을 하염없이 내어놓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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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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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16 05:27
- 성부 목적성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오늘 이 말씀은 내일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 세상 일생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왔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수도자들을 위한 회칙 ‘봉헌 생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예수님 일생을 ‘A Patre, ad Patrem’ ‘From the Father, to the Father’
곧 ‘성부께로부터 와서 성부께로 돌아가신’ 일생이라고 요약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 것입니까?
왔다가 가는 인생이라고 주님 일생을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 것입니까?
성부께로부터 왔다가 성부께 돌아가는 것이 성자의 일생이라면,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것이라면 무엇 하러 이 세상에 오셨냐는 말입니다.
왔다가 돌아가시는 것 안에 많은 것이 있었지요.
왔다가 그냥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구원 사업이 있었지요.
우리 구원을 위해 육화하신 것이고,
우리 구원을 위해 공생을 시작하신 것이고,
우리 구원을 위해 공생활 동안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셨으며,
그러시면서 가르쳐주시고,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 주시고,
그 사이에 타볼산에서 내려와 해골산으로 올라가셨고 마침내 죽으셨지요.
이렇게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는데도 성부께로부터 왔다가
성부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줄여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것임을 강조함이고,
우리도 세상을 떠나야 하고 아버지께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시기 위함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살 일이 있고 돌아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살 일이 남아있고 잘살아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가 열심히 살 것이 아니라 잘살아야 하고,
특히 나이를 먹으면 더더욱 ‘열심히’가 중요하지 않고 ‘잘’이 중요합니다.
열심히 잘못된 길을 가면 열심히 간 것이 잘못 산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는 것이 잘 간 것이고 잘 산 것입니까?
우리 신앙인에게는 ‘주님처럼’이고,
오늘 주님처럼 성부께로부터 왔으니 성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사는 것은 ‘성부 목적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며
그런 다음 그 목적에 맞게 열심히 가는 것인데 그래도 사는 동안엔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을 성부께 청하되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대신 청해 줄 내가 없으니 너희가 직접 청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자식들 때문에 대신 걱정하고 대신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 가게 되면 이제는 내가 가는 하느님께
너희가 직접 청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직접 청하되 주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이고,
그러면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면서 자기 욕심 채우기 위해 청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면서 나쁜 것을 주십사 하고 청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면서 원수 죽여주십사 하고 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면서 주님의 가르침대로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어 살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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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의 그 그윽한 사랑을 마음 깊이 바라보고 마음 깊이 새기는 관상!
모든 사람은 사랑을 갈망합니다. 모든 사람은 돌봄을 원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면서도 당신의 영을 통해 이 세상에 현존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녀들인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며, 매 순간 그 사랑을 표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에 황금빛 글씨로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요한 16,27)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알고, 체험하며, 확신하고, 늘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가장 위대한 진리입니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 있기는 하지만, 때로 우리의 근본적인 갈망을 채워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바빠서 우리를 돌보지 못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사랑이 이해받지 못할 때,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그럴 때 우리는 상처와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은 우리가 버려지지 않았음을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홀로 남겨지지 않았음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사랑받으셨듯이,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고 있음을 힘주어 선포하십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분의 뜻과 시간 안에서 응답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줍니다.(요한 16,26).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또한 이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은 어떤 슬픔이나 걱정 속에서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깊은 평화를 줍니다.(요한 16,24).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그분의 뜻만을 따르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 우리의 아빠(Abba)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이 "미친 듯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도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안에서 더욱 깊은 확신과 사랑을 키워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바쁘십니다—당신의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시느라, 그런 사랑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시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의 말을 건네시느라, 그리고 게다가 사랑의 편지까지 써 내려가시느라 여전히 바쁘게 일하십니다.
이런 확신이 우리 신앙의 여정에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하느님에 대해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이 이해되지 않는 때에도 하느님을 여전히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것도 이 사랑에 의한 전능하심이지 어떤 지배적인 힘에서의 전능하심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이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고자 노력(수양)한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에서 위안을 받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성령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참된 의미의 관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그 그윽한 사랑을 마음 깊이 바라보고 마음 깊이 새기는 것 말입니다!
다음 주간 월요일에 우리가 오늘 복음 바로 다음에 이어질 내용, 즉 요한 복음 16장의 마지막 부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인간의 어떤 폭력이나 무력마저도 이기는 유일한 사랑의 힘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을 마치면서 성 프란치스코의 인준받지 않은 수도 규칙 23장에 나오는 권고를 함께 마음에 새겨 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선하시고(참조: 루카 18,19) 홀로 자비로우시고 홀로 양순하시고 홀로 부드러우시며 홀로 감미로우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정의로우시고 홀로 진실하시며 홀로 올바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인자하시고 홀로 무죄하시고 홀로 순수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하늘에서 함께 기뻐하고 회개하는 모든 이들과 의로운 모든 이들과 복된 모든 이들의 모든 용서와 모든 은총과 모든 영광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그분을 통하여 있으며 그분 안에 있는(참조: 로마 11,36)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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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하느님은 모든 존재 안에 거하십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그리스도의 신비체 인류 모두를 포함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노리치의 율리안나: 보편적 신비주의자
하느님은 모든 존재 안에 거하십니다.
2026년 5월 15일 금요일
매튜 폭스(Matthew Fox)는 율리안나의 메시지 안에 담긴 신비적 희망과 하느님의 사랑이 지닌 보편적 성격을 짚어냅니다:
율리안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특정 시대나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열려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니까 6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그 포용의 감각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 눈에는 온 인류가 한 사람이며, 모든 사람은 하나의 인류입니다."… [1]
율리안나에게 있어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인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al body of Christ)는 단순히 교회 공동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 인류 전체로 확장됩니다….
율리안나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찬미할 때, 특정 집단이나 교파에 국한하지 않고 모두를 향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본질을 풍요롭고 고귀하게 지으셨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뜻을 따르고 모든 일에 그분을 찬미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우리"라고 말할 때, 이는 모든 참된 영적 탐구자를 뜻합니다.” [2]
여기서 "모두"라는 말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의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유다인, 불교인, 힌두교인, 도교인, 무슬림, 여신 신앙인, 토착 종교인, 그리고 종교가 없는 이들(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까지), 영적인 추구를 하는 모든 이를 포괄합니다. 즉, 율리안나의 시선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넘어선 보편적 영성을 드러냅니다. 14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그녀의 이러한 포용적 태도는 놀라울 만큼 종교일치적이며,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는 종교 간 대화와 일치의 정신을 앞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리안나는 "우리 영혼 안으로 물러가십시오. 그곳에 우리의 사랑하올 님께서 계십니다."라고 말하며, 다시금 모든 이의 영적 탐구를 포괄하는 보편성을 강조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진리가 개인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보편적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인간 본성은 소중한 어머니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3]
여기서 율리안나가 말하는 "보편성"은 단순히 개인의 내적 체험을 넘어, 모든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율리안나가 자주 사용한 독특한 영성 언어로, 그리스도의 자비와 돌봄을 모성적 이미지로 드러내며, 인간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존엄하게 준비되었다는 신비를 강조합니다.
율리안나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환시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단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피조물 전체를 향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율리안나는 자신의 저술 과정을 설명하면서, 처음에는 환시를 개인적인 체험으로만 이해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것이 온 인류 전체에 해당하는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이 가르침을 나 자신에게만 적용했는데, 그때는 달리 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이어 온 크고 은혜로운 위로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 통찰을 온 인류를 위해 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4]
율리안나는 자신의 체험이 교회 안의 모든 신자들에게, 더 나아가 인류 전체에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는 이 '보여주심'을 사적으로만 받아들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내 이웃 그리스도인들을 더 사랑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웃 그리스도인을 더 사랑하게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모두 하나의 영혼임을 깨닫는 것보다 더 큰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5] …
율리안나가 강조한 보편성은 단순한 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의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보편적 사랑을 지닌 이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곧 모든 피조물과 만물의 창조주께서 함께 계십니다." [6]
이 말씀은 곧 창조와 우주 전체가 모두의 것이면서 동시에 누구의 것도 아닌 것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를 더 큰 의식으로, 곧 확장된 사랑의 영성으로 초대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노리치의 율리안나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이자 어머니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신 모습을 묵상하면서, "두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포용적 여정은 많은 고통과 실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신앙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오직 남성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세계 안에서 살아가며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리처드 로어 신부님과 CAC가 가능한 한 포용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걸어온 발걸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Jenny S.
References
[1] Julian of Norwich, The Showings: Uncovering the Face of the Feminine in Revelations of Divine Love, trans. Mirabai Starr (Hampton Roads, 2022), 133. Selection from chap. 51.
[2] Julian, Showings, 157. Selection from chap. 57.
[3] Julian, Showings, 172. Selection from chap. 62.
[4] Julian, Showings, 212. Selection from chap. 79.
[5] Brendan Doyle, Meditations with Julian of Norwich (Bear & Co., 1983), 64.
[6] Doyle, Meditations, 33.
Matthew Fox, Julian of Norwich: Wisdom in a Time of Pandemic—and Beyond (iUniverse: 2020), xxxii–xxxiii.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yuhei Inoue, untitled (detail), 2020,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빛은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고요한 계시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온전히 담아내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혜와 힘으로 빛을 받습니다. 그 빛은 평화로운 때든 위기의 순간이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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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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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의 목적은 황홀한 체험에 머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미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탁월한 영성가이자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코 로버트 배런 주교님(1959~)을 꼽겠습니다.
현재 미네소타의 위노나-로체스타 교구장으로 사목하고 계십니다.
미국에서는 도서 박람회가 열리면 저자들의 강연과 사인회가 함께 이루어지는데, 유독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코너는 로버트 배런 주교님이 계신 곳입니다.
최근 주교님이 쓰신 기도와 관련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제목이 ‘기도’입니다.
부제는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대구대교구 허찬욱 신부님께서 잘 번역하셨고, 생활성서사에서 펴냈습니다.
저도 기도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낸 바 있어, 이 시대 대세 영성가께서 어떻게 쓰셨나 꼼꼼히 읽고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기도할 때 준수해야 할 원칙에 대해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기도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보석 같습니다.
제가 쓴 책이 너무나 초라해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기도는 역사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말로 하는 기도, 노래하며 하는 기도, 혹은 침묵 속에 모든 생각을 비우는 기도, 영적 독서를 하면서 하는 기도, 춤추며 하는 기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청원 기도, 이 모든 것이 기도의 형식입니다.
이 모든 기도에 들어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8세기 신학자였던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드높이는 것’이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리지외의 성 데레사는 기도를 ‘마음의 솟구침이며 천국을 바라보는 고요한 시선이자, 시련과 기쁨을 모두 품어 내는 사랑의 외침’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도와 관련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할 때 들으려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 간의 대화도 그렇지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상대방의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혼자만 말한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말만 한다고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데도 시간을 내야 합니다.
기도는 숨 쉬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숨 쉴 때 들숨과 날숨이 필요하듯, 기도에소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둘 다 필요합니다.”
“참된 기도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조용한 고요 속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으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기도 안에서 깊은 신비를 체험한 사람은 그 신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황홀한 체험에 머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 속에 하느님의 빛을 보았다면, 이제 그 빛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산에서 내려왔듯, 우리도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따라 걸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그저 마음의 안정을 추구한다든지, 아니면 황혼한 신비 체험에만 목숨을 건다든지,
기도를 통해 늘 무엇인가 얻으려고만 혈안이 되어 있는 오늘 우리에게 로버트 배런 주교님께서 건네시는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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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3ㄴ-28).”
1) 예수님께서는 앞의 14장에서,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당신이 이루어 주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
그런데 이제 16장에서는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주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다른 말씀’으로 보이지만, ‘같은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0,30).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그분의 신앙인으로서 청한다는 뜻입니다.
‘청하다.’는 ‘구원을 청하다.’입니다.
<물론 어떤 소원을 비는 것도 포함됩니다.>
14장의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이고, 16장의 “아버지께서 주실 것이다.”는 “아버지께서 구원하실 것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표현하든지 아버지께서
구원하신다고 표현하든지 간에 어떻든 ‘같은 구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또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모든 권한’을 받아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내 이름으로 청하여라.”를 강조하시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당신의 주권과 신성을 선언하신, 즉 당신이 하느님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선언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삼위일체를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에 연결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활 전에는,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부활 후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에 도달했습니다(요한 20,28).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 머리글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은, 삼위일체 신앙을 전제로 한 증언입니다.
삼위일체를 안 믿는 사람들은 이 증언들을 말장난으로 생각할 텐데,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나타내는 단순하고 명확한 증언입니다.>
2)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구원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24절의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부활 전에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이 없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26절의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활 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그동안 예수님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만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하고, 예수님 부활 후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는,
메시아의 육화 강생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예수님의 승천을 가리키는 말씀이고, 동시에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아버지께 가는 일’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3)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셨다.”가 십자가에 대한 신앙이고, 그 십자가는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을 모르면 하느님을 알 수도 없고,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혹시라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안 믿어도, 그냥 하느님만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가 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요한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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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6. 부활 제6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9:00 추가.
요한 16,23ㄴ-28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내세우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로 다 이루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당신 말씀을 곧 현실로 만드시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이루시고야 마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그대로 다 이뤄주신다고 하면 이보다 더 든든한 ‘빽’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마음자세는 이런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우리가 당신께 청하는 것들을 귀기울여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청하는 그대로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자칫 하느님을 내 뜻대로 좌지우지 하려 드는 교만으로 굳어질 수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는대로 이루어주시는 분명한 ‘기준’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기도를 함에 있어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바람이나 욕심에 따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청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청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연히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우리가 청한 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을 억지로 떠넘기시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원해서 청하기를 바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청해야 할까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없애달라고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고통을 극복할 힘을 청하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큰 뜻을 받아들일 넓은 마음을 청해야겠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나의 십자가를 대신 져달라고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날마다 그 십자가를 꾸준히 지고 갈 인내심과 성실함을 청하고,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이 일치될 수 있도록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세상의 부귀영화를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가장 귀하며 영원토록 변치 않는 하늘의 보물, 즉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께서 우리 삶 가운데에 언제나 함께 하시며 우리를 참된 길로 이끌어주시기를, 내가 그분의 이끄심에 끝까지 잘 따라갈 수 있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청하는 와중에도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느끼고 깨닫기 위함임을 항상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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