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02
2월16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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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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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9YIDNYr_crE
[꼰솔라타선교수도회 김명호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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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 속에서도 기꺼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오늘도 바리사이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해도 해도 너무한 무례한 요구에 깊이 탄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황당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순식간에 불벼락을 내리는 것, 다양한 하늘의 이상징후를 보이는 것, 예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신앙을 신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에 큰 슬픔을 느끼시며, 그들을 뒤로 하고 떠나가십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특별한 징표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얼토당토 않은 엉뚱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털끝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은채 손을 놓고 있으면서, 하느님 편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기적은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 안에 다 있습니다. 참된 기적은 우리가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고백소 안에서 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참된 기적은 우리가 얼마나 먼저 변화하고 쇄신되고자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시대, 기적이 무엇이겠습니다. 하느님의 한량없으신 자비에 힘입어 이 아침, 우리가 다시금 눈떴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아침, 우리가 그 누군가의 부축 없이 우리 자신의 두 발로 서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또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성체성사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비천한 우리 인간과 합일한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어깨에 메어진 멍에의 무게로 휘청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 살며시 그 멍에를 벗겨주시는 하느님, 그분 안에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무인도처럼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매일 다정한 친구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그분 사랑 안에 하루를 기꺼이 견뎌내는 것이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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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Vs5e5FDC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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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당신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
어느 부부가 결혼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죠.
"여보, 당신 나 사랑해?"
남편은 쑥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사랑하지."
하지만 아내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면 증거를 대봐. 요즘 내 친구들은 남편한테 다이아몬드 반지도 받고, 유럽 여행권도 받는다던데 당신은 뭐야?"
남편은 고민 끝에 다음 날 아주 커다란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아내는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죠. 그런데 그 안에는 명품 가방 영수증이나 비행기 티켓 대신, 두툼한 서류 한 뭉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남편의 생명보험 증서였습니다. 남편이 비장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죽으면 당신한테 10억이 나와. 내 목숨을 건 이 증거보다 더 큰 사랑의 표징이 어디 있겠어?" 그러자 아내가 서류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양반아! 당장 죽지도 않을 거면서 이런 게 무슨 소용이야?"
우리는 웃지만, 사실 이 아내의 모습이 오늘 복음 속 바리사이들의 모습이자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또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진정으로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상대방에게 거창한 표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발견하는 것이지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젖은 눈동자, 무심코 건네는 따뜻한 물 한 잔, 나를 바라보는 그 미세한 입꼬리의 떨림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사랑을 느낍니다.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전 재산을 내 명의로 돌려라" 혹은 "모든 사람 앞에서 나를 위해 무릎을 꿇어라"라고 요구한다면, 여러분은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악한 사람일 뿐입니다.
실제로 이런 비극은 우리 현실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최근 유행하는 '로맨스 스캠'이나 가스라이팅 범죄를 보십시오. 사기꾼들은 말합니다. "내가 지금 급한 돈이 필요한데,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이게 우리 사랑의 증거야."
이런 악한 요구에 넘어가는 이들은 사랑이 너무 간절한 나머지, 사랑의 본질을 잊어버립니다. "내 사랑을 증명해야 해"라는 강박에 빠져 재산을 다 털리고 인생을 바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비참함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을 증명하라고 압박하는 사람은 결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신의 사랑을 연료 삼아 자신의 욕망이라는 괴물을 키우고 있을 뿐입니다. 악한 자는 결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는 오직 숫자로 된 증거, 육체적인 굴복, 눈에 보이는 커다란 표징만을 탐할 뿐입니다.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법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시인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그의 시 『오로라 리』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구는 하늘나라로 가득 차 있고, 모든 가시덤불은 하느님의 불로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사람만이 신을 벗는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 주위에 둘러앉아 블랙베리나 따 먹는다.』
꽃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길가에 핀 작은 들꽃 한 송이 앞에서도 발을 멈추고 창조주의 신비를 읽어냅니다. 하지만 마음이 악하고 무딘 자는 꽃을 밟으며 지나갑니다. 그리고 말하죠. "이게 뭐가 아름답다는 거야? 금으로 만든 꽃이라도 가져와 봐. 그럼 믿어주지."
개는 장미꽃의 향기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오직 먹을 수 있는 고기 덩어리라는 표징에만 반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내 병을 고쳐주시면 믿겠다", "내 자식을 합격시켜주시면 하느님 사랑을 인정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세속과 육신에 갇힌 개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자백과 같습니다.
아프리카 사막에서 평생을 바친 복자 샤를 드 푸코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막의 뜨거운 모래바람 속에서 아무런 가시적인 성과도 내지 못했습니다. 개종시킨 사람도 거의 없었고, 화려한 성당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일 아침 사막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아침,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태양을 띄워주셨고, 목마른 나를 위해 작은 오아시스의 물 한 모금을 허락하셨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은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신다.』 샤를 드 푸코 신부님은 세상이 요구하는 표징, 즉 교회의 성장이나 기적의 숫자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막의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듣고 말 한마디에서 그분의 뜻을 읽어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처럼 작은 것 하나하나에서 하느님을 볼 줄 압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주님을 시험하지 맙시다. 여러분이 오늘 성당에 올 수 있었던 건강, 오늘 점심에 먹을 따뜻한 밥 한 그릇,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앉아 있는 형제자매의 존재 자체가 바로 하느님이 보내주신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작은 것들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하늘이 갈라지고 죽은 이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우리는 잠시 놀랄 뿐, 결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약속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이 사랑을 알아보는 눈을 가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이용당하거나 버려지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고 행복한 자녀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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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원준 선생님의 ‘구약성경의 인물’이라는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영웅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신화는 구조가 단순하다고 합니다. 신과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신의 혈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똑같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하느님을 멀리했고, 죄를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용서하시고, 그런 인간과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고,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벨은 선하고, 카인은 악한 것처럼 보입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왜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느냐가 아닙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카인은 악하고, 아벨은 선하다는 구별도 아닙니다.
에덴동산 밖의 세상은 노동의 수고가 있고, 에덴동산 밖의 세상은 출산의 고통이 있는 세상입니다. 에덴동산 밖으로 나온 인간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공정하거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 고통받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성공하기도 합니다. 이 현실은 카인의 시대에도, 2026년의 시대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벨과 카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에 아벨의 모습도 있고, 카인의 모습도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남겨 두라고 하셨습니다. 밀이 가라지가 될 수도 있고, 가라지였지만 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카인의 속성은 희생양 아벨을 찾으려고 합니다. 아벨은 공동체에서 힘이 없는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강대국은 힘으로 약소국을 괴롭혔습니다. 그것이 제국주의입니다. 군사력으로 주권 국가의 대통령도 잡아가는 현실입니다. 일본의 대지진에는 조선 사람이 우물에 독을 탔다며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독일은 유대인을 제물로 삼아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박해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박해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에 커다란 화재가 있었습니다. 성난 민심을 돌리기 위해서 초대교회 신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소문, 거짓된 소문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초대교회는 박해와 시련을 받아들였고, 복음은 더 멀리 전해졌습니다. 로마라는 카인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아벨로 만들었습니다.
생각의 전환, 인식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땅에 있지만 우리는 우주적인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시간을 향해 나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채만 한 고래도 아주 작은 꼴뚜기도 저마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원하는 바리사이파들을 만났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예수님을 비교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보다, 엘리야 보다, 다윗보다 더 뛰어난 분인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비교하는 마음으로는, 상대평가를 하는 눈으로는 사랑으로 오시는 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월요일입니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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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계시다면, 저희한테 직접 보여 주실 수는 없나요?” 그러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시고 탄식하시며 자리를 떠나십니다. 그들의 태도는 ‘하느님이시기에 믿겠다.’가 아니라, ‘내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믿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기적이 먼저, 믿음은 나중’이라는 잘못된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표징을 본 뒤에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기 때문에 삶 안에서 표징을 발견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러한 믿음의 길에 지혜를 더합니다.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3).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십니다]”(1,5).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그저 고난을 피하는 요령이나 세상의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련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께 믿음을 두며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의 눈을 가리킵니다.
온갖 균과 바이러스가 가득한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균을 없앤 무균실에 머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면역력을 키워서 이겨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 우리가 신앙으로 받는 은총은 후자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악과 시련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겨 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으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 자비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제가 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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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13: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 바리사이들의 요구는 단순한 호기심보다도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교만한 태도였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수많은 치유와 빵의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이해와 욕망에 맞는 ‘권력의 증거’, 곧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높여줄 정치적 표징을 요구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의 부족을 드러내며, 그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시험하는 태도이다.”(Homilia in Matthaeum 43,3) 믿음은 외적 기적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과 내적 회개에서 자라난다.
예수님께서 거부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이미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가장 큰 표징은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결정적 기적이다. 성 바오로 사도도 말한다. “유다인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입니다.”(1코린 1,22-24) 즉, 세상이 어리석음으로 보는 십자가가 바로 하느님의 표징이자 구원의 길이다.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분의 메시지를 확증하는 표징들이지만, 그분 자신이야말로 참된 표징이시다.”(547항 참조) 또한 교회는,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회개와 성화의 열매야말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이라고 가르친다(1431항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너는 큰 기적을 찾고 있느냐? 너 자신이 변화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Sermo 29,2)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마음이 완고함에서 풀려 하느님께 열리고, 용서할 수 없던 이를 용서하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는 변화이다.
우리는 종종 바리사이들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만을 청하곤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 회개,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가장 큰 기적을 일으키신다. 내가 변할 때, 가정이 변하고, 공동체가 변하며, 세상도 변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는 어떤 기적을 청하고 있느냐?” 세속적인 부와 안락을 위한 기적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하느님을 더 깊이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기적인가?
우리가 청해야 할 기적은 십자가를 통해 이미 주어진 구원,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내적 회개의 은총이다. 표징을 찾는 대신, 우리 자신이 주님 안에서 표징이 되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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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희망 사랑>
마르코 8,11-13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믿음 희망 사랑>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믿기에
의심하지 않는 것이지요
의심하지 않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하기에
절망하지 않는 것이지요
절망하지 않기에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미워하지 않는 것이지요
미워하지 않기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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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들의 믿음과 신앙생활 자체가 표징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1)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한 것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한 요구가 아니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또 믿기 싫어서 한 요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짜 메시아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시면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셨다면, 그들은 또다시 그 표징은 가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거절하신 것은, 그 요구는 들어줄 가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단식기도를 하셨을 때,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던 사탄도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마태 4,6) 사탄의 요구는 바리사이들의 요구와 같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요구는 ‘사탄의 유혹’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람들은 다시 예수님께 그런 요구를 했습니다.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마태 27,39-44)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그런 요구에 시달리는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을 안 믿은 자들만 그런 요구를 한 것은 아니고, 믿고 따른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표현으로는,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사탄의 말과 별로 다르지 않은데, 사탄과는 다르게 ‘믿고 싶어서’ 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셨는데(마태 14,29),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조금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워져서 그만 물에 빠졌습니다.(마태 14,30)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꾸짖으셨습니다.(마태 14,31) 이 말씀은,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과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을 모두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하면 안 됩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제자라면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시는 주님을 배 안에서 맞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청을 들어 주신 것은,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게 하려고”로 해석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조금 걷다가 물에 빠진 것은, 예수님의 권능 덕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한 일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4) 사도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게 된 것은, 또는 믿음이 완성 단계에 도달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큰 표징이고, 가장 중요한 표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도들의(교회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처럼 개인적으로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 믿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의 ‘믿음’과 ‘신앙생활’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명하는 표징이 됩니다. <표징이 될 수 있도록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순교자들의 믿음과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예수님을 증명하는 강력한 표징입니다.>
5) 사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또는 그들의 논리대로 예수님을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어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안 믿는 자들과 안 믿으려고 하는 자들은 ‘우연의 일치’ 라고 주장하거나, 어떻게든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기적 자체를 부정하는 자들은 진짜 표징을 보아도 그냥 부정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의 믿음과 신앙생활 자체가 표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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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행인지, 모시고 있는 성당에서 난색을 표해서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고 은총도 그만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쌍꺼풀 하신 분이 인기가 좋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은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 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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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체코의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가장 큰 차이가 ‘인내’임을 통찰합니다. 신앙인이나 무신론자나 똑같이 하느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하려고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명확한 답을 바로 얻고 싶은 무신론자들의 성급함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도 신앙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바로 ‘인내’로 견뎌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신비의 오묘함과 우리 삶의 모호함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내로 기다립니다.
모든 것이 명백한 곳에서는 신앙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곳에서 요구됩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 차갑고 어두운 밤, 불확실한 삶 안에서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 신앙은 확실성과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믿음과 희망은 바로 불분명한 순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인내입니다.
제1독서에서 야고보는 삶의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시련을 잘 받아들이면, 그 안에서 인내가 생겨날 것입니다. 인내와 함께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을 단단하게 하여 주는 이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인내심 없는 자들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도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을 바랍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눈으로 확인하고 비로소 이해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무신론자들과는 다르지만, 인내심 없이 명확함을 바라는 성급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들에게 표징을 주지 않으시고 인내와 진정한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시는’ 성모님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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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성태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의 징표는?>
독일의 한 남작이 자신의 거대한 집에 있는 양쪽 굴뚝에 여러 갈래의 철사줄을 연결하면서 어떤 철사줄은 강하게, 어떤 철사줄은 약하게 연결시켜 그 줄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일컬어 거대한 바람 하프라고 불렀습니다.
이 거대한 바람 하프는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는데, 어떤 소리는 솔솔부는 봄바람소리요, 어떤 소리는 시원한 여름 바람소리요, 또 어떤 소리는 한겨울의 강풍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바람 하프가 내는 소리 중에서 가장 우렁차고 아름다운 것은 남작의 집 골짜기를 가득 메우는 한 겨울의 강풍소리였습니다. 한겨울의 강풍이 휘몰아칠 때 여러 갈래의 철사줄은 참으로 우렁차고 힘있게 소리를 냈습니다.
남작은 이 소리를 들으며 ‘인생에 있어서도 강풍이 휘몰아칠 때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베에토벤은 귀머거리가 되었을 때 불후의 명곡을 남겼고, 에디슨은 모든 시험에서 낙방하여 둔재 소리를 들었지만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였고, 헬렌 켈리도 맹인이요 귀머거리였지만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다가오는데 마음들이 깨끗하지 않는, 예수님을 시험하고픈 마음으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면서 그들에게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그들의 교만한 콧대를 확 꺽었으면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올바른 모습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접근한 그들에게 어떤 기적이 있어도 그들은 쉽게 수긍을 하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기적의 뜻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그들에게는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기적은 어떤 것일까요? 혹 우리는 마치 마슬사가 마술을 부려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듯이 그런 유형들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것들을 쫓아 계속 헤메는 것은 아닌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 기적은 사람과 동떨어진 어떤 것을 찾아서는 안 되리라 여깁니다. 거기에는 환상만 있을 따름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 불러 주시는 이런 모습이 오늘날 신앙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세라 여깁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아무 어려움 없이 아니 어려움을 피해가면서 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표징이 아니고,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수록 그것을 이겨나가고자 애쓰는 모습이 이 시대에 진정한 표징이라 생각합니다.
사목생활을 하다보면 가정형편상 여러 모습으로 어려움들이 있는데, 그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잘 이겨나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그분들이 바로 이 시대에 참다운 신앙적인 표징을 보여주고 있기에 마음이 기쁩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남보다 있으면서 많은 불만과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오늘 복음의 바라사이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나를 생각해 봅니다. 또한 기도해 봅니다. 나 또한 바라사이 모습은 없는지? 아니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이 시대 신앙의 표징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사목자가 되길 은혜를 청해 봅니다. 또한 모든 분들이 오늘 하루도 은혜로운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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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죽음을 앞둔 어떤 문학가에게 마지막 병자성사를 드리기 위해 사제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를 뉘우칩니까?”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사탄과 그의 모든 행위와 허영을 끊어 버립니까?”
이 질문에 문학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 적을 만들기에는 좋은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포기하겠습니다.”
병자성사는 적을 만드는 성사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우정을 받아들이는 성사입니다. 이 사실에 집중하면 하느님의 적을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 어떤 것과도 대치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이익이라면 어떤 것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곤 이렇게 말하지요. ‘하느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야.’
자기의 생각과 행동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이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런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면서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미 수많은 기적(치유, 구마, 빵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질병의 치유 등은 마귀의 힘으로도 가능하다고 여겼고, 메시아의 증거로 불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엘리야가 불을 내리거나,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거나, 모세가 만나를 내린 것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생각대로 해야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자기 생각과 방식대로 주님께서 움직이셔야 믿겠다는 억지입니다. 우리도 종종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주님을 믿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 안에서의 주님 손길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신 채 떠나십니다. 그들을 포기한 것입니다. 완고한 불신앙 앞에서는 어떤 대화도, 어떤 표징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왔으나 어둠이 거부했기에, 빛이 그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많은 청원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그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님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과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춰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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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코. 8,12)
주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은 다른 어떠한 표징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미 불신으로 가득 차 있어 예수님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오히려 자신들의 생각이나 신념을 방어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현존에 대한 표징은 이미 우리 삶 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바쁘게 지나쳐 버리는 우리의 일상 삶 안에 깊게 내재하고 있습니다. 스쳐 지나버리고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기에 우리 삶 안에 이미 드러나 있는 주님의 표징들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주님 현존의 신비는 우리 마음이 있는 곳에 하늘의 표징으로 드러납니다. 이곳 피지 신학교에서 살면서도 그동안 있어도 보지 못하던 정원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 하나를 볼 수 있는 것도 잠시 마음을 비우고 걸었기에 발견한 하나의 표징일지도 모릅니다.
날마다 봉독 하는 똑같은 주님의 말씀일지라도 타성에 젖어 읽는 마음으로는 ‘하늘의 표징’을 볼 수 없지만, 자신을 깊게 인식하며 열린 마음으로 읽을 때, 같은 말씀이지만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읽고 보아도 마음으로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늘 다른 표징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미 많은 하늘의 ‘표징’이 드러나 있기에, 진정 필요한 것은 우리의 열린 마음과 믿음입니다.
매일 주어지는 시간과 공간과 사람과 사건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주시는 표징들입니다. 열린 연민의 마음과 믿음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 볼 수 없었던 주님의 뜻을 우리는 보고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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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든 것이 기적이요, 신비입니다>
오늘 독서는 야고보 사도가 ‘시련과 시험’을 겪게 되는 신자들에게, 복음은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 어려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야고 1,2-4)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 세대'를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마태 16,4)라고 표현합니다. 곧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고 왜곡되어 있고 악의에 찬 까닭입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그렇게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 의혹과 불신을 넘어서는 믿음의 눈, 세상을 호의로 바라보는 선한 눈, 사랑으로 신비를 바라보는 눈이 필요할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든 것이 기적이요, 신비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이 갈파한 대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대로, 그 무엇도 이 지고한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사랑을 피해가고 거부해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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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되고 굳어진 제 마음을 풀어주소서.
감겨있고 가려져 있는 제 마음의 눈을 열게 하소서.
도처에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도처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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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
오늘 독서는 야고보서의 시작 부분인데 제 생각에 신앙생활 곧 믿음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믿음을 어떻게 성장하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신앙인이라면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르치는데 신앙인에게 믿음의 시험은 인내를 낳게 하는 것임을 알기에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겪는 갖가지 시련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도 하지만 인내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초보자들은 하느님을 믿으면 시련이 없을 줄로 압니다. 시련을 없애 줄 분으로 생각하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초장에 오히려 시련이 많게 되면 여기서 믿음을 포기하는 자와 시험을 통해 믿음이 단련되는, 인내력이 자라고 강해지는 기회로 삼는 자로 갈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초보자 때의 시련은 믿는 것의 효력에 대해 의심하게 하면서 이럴 바에 신앙생활을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지요.
그런데 믿음의 효력은 시련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견디고 이기는 힘을 길러주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최민순 신부님의 <기도>라는 시를 보면 내 인생길에서 바위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바위를 딛고 넘어갈 힘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지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매일 미사 때 주의 기도 다음에
모든 죄와 악에서 구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해달라고 기도할 때도 모든 악과 시련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악과 시련을 겪는 중에도 복된 희망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무튼 지혜로운 사람이란 이렇게 시련 때문에 믿음의 효력에 대해 의심이 들 때 시련이 우리의 인내력이 생기게 하고 자라게 하는 데 효력이 있음을 아는 자이고, 인내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 되게 하는 데 효력이 있는 것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이렇게 가르치며 권고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에 있어서 지혜로운 사람이란 시련이 인내심이 생기고 인내심을 단련하는 데 효력이 있음을 알고, 완전한 자 되도록 시련을 기회로 쓸 줄 아는 사람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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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ㄴ)
<단순한 믿음이 필요한 때!>
오늘 복음(마르8,11-13)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8,12)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메시아(Messiah)'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에 히브리어로서, '구세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메시아 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강한 메시아가 오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한 논쟁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 인지에 대한 논쟁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강한 힘을 지닌 메시아인지에 대한 요구이자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요구와 시험을 거부하십니다. 이 거부가 우리에게 필요한 '단순한 믿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2-3)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ㄴ-7)
달갑지 않은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과 불편함 앞에서 우리의 민낯인 진짜가 드러납니다. 정말 믿는지,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단순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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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표징이 없어도
주님은 계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표징을 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현존을 알아보는
신앙입니다.
이미 많은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기적이 없으면
주님의 현존을
의심합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물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는
우리 의지의
문제입니다.
계시 앞에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결단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기적을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동행입니다.
표징보다
함께하는
동행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들인지,
아니면 표징이 되는
삶을 사는
우리들인지를
다시 한번
묻게 됩니다.
결단은 항상
불확실성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불확실성의
제거가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의
올바른 선택입니다.
그래서 삶을
움직이는 힘은
완벽한 증명이 아니라
감히 믿어보는
진실된 용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숨 쉬고 있음이
이 시간이 은총이고,
누군가 곁에 있음이
진정한 은총이며,
말씀을 들을 수 있음이
고마운 은총입니다.
우리는 평범함 속의
신비를 보지 못하고
특별함만을 기다립니다.
이 모든 시간이
날마다 이어지는
은총의 표징입니다.
우리는 이미
기적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이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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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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