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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끝자락에 연해주로 / 김 난 석
‘매음 매음...씨이이... 십팔 십팔...’. 이것은 임영조의 시 ‘매미소리’ 의 일부분이다.
시인은 우리나라 서정시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광복되던 해 태어나
열한 해 전에 타계했다.(1945-2003)
어려운 시절을 어렵게 살다 간 시인은 주옥같은 시어를 지어냈지만
때로는 자조적 노래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잔뜩 깃든 매미 소리를 두고 겨우 매음하고 있다고 노래하다니.......
하긴 돈 몇 푼에 영혼을 팔아넘기는 자신을 돌아보았을 테니
마치 매음하고 서럽게 울어대는 신세에 빗댄 것일까?
아니면 광복을 맞아 두 동강 난 채 이쪽저쪽 눈치만 보는 우리의 실정이 서러웠을까?
그러나 매미는 사랑을 불러대는 것이지 매음하고 울어대는 건 아니다.
땅 밑에서 몰골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하고 지내기 수년의 인고 끝에
근사한 턱시도 한 벌 차려입고 세상에 나오지만
그 운명은 불과 일이 주 여 허용될 뿐이다.
그새에 매미는 맑은 이슬도 받아 마셔야 하고 사랑도 찾아야 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암컷의 뱃속에 자신을 묻어두어야 하느니,
참으로 애달픈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매미의 계절이요 광복절이 들어있기도 한 팔월의 마지막 주를
러시아의 연해주 일원을 둘러보리라 집을 나섰다.
그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해 마음이 북방을 향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내려 제일 먼저 얻어 들은 러시아어는 스파시버(감사하다)였으니
이곳에 와 무엇을 보고 들어 “감사하다” 는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연해주는 시호테 알린 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고,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이 산맥의 숲 사이를 훑어 내려 오호츠크 해로 흘려내는 광활한 지역일 뿐 아니라
장장 9288 킬로미터의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시발역이요 종점지역이기도 하다.
인천공항에서 두 시간 반가량 날아 하늘에서 내려다본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은
그야말로 빽빽한 수림지대였다.
물론 그 수림지대는 태평양을 향한 오호츠크해에 연해 있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이곳 일원을 연해주라 했던 모양이지만
러시아의 입국 비자를 받고 들어갔으니
옛 고구려 강역이요, 이어서는 발해의 강역이었음을 생각하면
옛 선조들의 고향을 입장료를 내고 찾은 셈이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조선조에 북벌정책도 시도해봤지만 힘없이 끝나버리자
고종은 1897년 원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로부터 이태 뒤인 1899년 청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한.청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곳(해삼위)에 통상사무소를 설치하여 북방 경영을 시도하게 되지만
열강들의 세력 다툼에서 이곳이 구 소련 영역으로 편입되자
8월 광복 후 남북으로 갈려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한 우리로선 왕래조차 안 되었으니
러시아의 개혁 개방에 따라 다시 발을 들일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이곳저곳 찾아 나선 거리마다 깨끗하고 정돈된 느낌이었지만
길이 끝나는 곳의 광장엔 여지없이 혁명을 상징하는 동상들이 세워져
자유스럽게 흔들어대던 어깨를 움츠러들게만 했고,
유럽풍의 건물 안이나 유원지에서 마주친 건 슬라브 족들 뿐이었다.
궁금했던 고려인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사람들은 재래시장에서나 만날 수 있었으니
반가운 건 그뿐이었다.
다시 거리에 나와 발길을 옮기노라니
옛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하다 스러져간 고려인의 이름을 딴 거리와 마주치거나,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희생된 한인들의 행적을 볼 수 있었으니
이건 모두 고려인들이나 한인들이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안위를 위해
영혼과 육신을 다 쏟아 붓고 희생되어간 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옛 이름으로 해삼위라 불리던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언덕 위에
나라를 잃은 1910년 이후 한인들이 모여들어 신한촌을 만들었다 한다.
헤이그 특사 중 한 분인 이상설과 연해주 일대의 항일독립군 재정후원자 최재형,
상해임시정부 총리 이동휘 등 항일투사들의 집결지요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삼일운동 시발점이기도 했던 이곳 신한촌이
이젠 모두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려
겨우 그 틈새에 아무 비문도 없는 묵언의 세 개 비석만이 그 자리를 일러주는 듯 서있을 뿐이니
이래저래 러시아의 안위를 위해 희생된 흔적만 두루 보았을 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하바롭스크로 가는 길엔 캄캄한 밤이기도 했지만
보이는 게 수림뿐이었다.
달리는 11시간 내내 답답할 뿐이었지만 그동안 보고 듣는 게 모두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명이 가까워오자 뽀얀 안개 속에 자작나무의 하얀 둥치가 한없이 스쳐가자
나무의 수액(자일리톨)은 저들이 다 빨아먹고
그 밑동에 기생하여 차가(借家)의 버섯으로 연명하는 고려인들의 운명이 서러워
내 자신도 모르게 “습팔 시벌......” 을 창 밖에 내뱉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라. 견디며 누리는 자 주인이 되느니,
쌀쌀맞고 척박한 환경일망정 견디며 누리면 참다운 주인이 될 날이 오지 않겠는가.
가버린 영광이여, 다시 찾을 영광이여!
오로지 중립일 뿐인 광활한 자연에나 감사해야겠다.
스파시버......(2014. 9. 2.)
* * * * *
연해주에서 사마르칸트로 / 김 난 석
어린 시절, 뜰에 떨어진 노란 감꽃을 보노라면
비록 그게 아픈 눈물자국일망정 하나하나 주워 실에 꿰었다.
그러면 순이와 나의 달콤한 이야기가 탄생되는 것이었다.
연전에 러시아의 연해주를 둘러보다가 이젠 폐역(廢驛)된 시골의 철도역 ‘라즈돌로예’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곳이 구 소련 스탈린시대에 연해주 거주 카레스키야(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대로
강제 이주(1937-1938. 1월)시킨 시발역이라 했다.
이주를 반대하는 고려인 2천5백여 명을 총살한 뒤에
나머지 모두는 겨울의 혹한기에 화물칸에 실려
장장 48일 걸리는 머나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황량한 벌판에 버려졌다 한다.
그 사유야 역사가들이 이리저리 기술하고 있지만
가는 도중 많은 노인과 어린이들이 굶어 허기지고 얼어붙어 죽어갔다니
살아남은 이들의 인고의 시련이 얼마나 깊었으랴.
그래서 그 정착지의 근황이 궁금해 그 중 한 곳인 우즈베키스탄을 들려보기로 했다.
속담에 <길은 갈 탓, 말은 할 탓>이라 했다.
같은 길이나 말이라도 걷고 하기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주는 영향이 다르다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봄에도, 역사의 사실들은 역사가들이 선택한 것일 뿐이라니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핼맅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의 기록은 그걸 기록한 역사가의 안목일 뿐, 직접 보고 느낀 것만이 나의 것인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에 오른 지 7시간 만에 그곳 수도인 타시겐트에 착륙했다.
잘 정돈되고 깨끗한 시가지가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라는 선입관에 어리둥절케 했지만
실은 1960년대 말의 대지진으로 모두 파괴되어 새로 신축된 시가모습이라 했다.
교외로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없이 넓은 벌판엔 온통 목화밭이거나 버려진 잡초지대였다.
우리나라 면적의 두 배인 44만 제곱킬로미터의 국토 중 40%가 사막지대라니
목화밭을 제외하면 모두 황량한 벌판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성싶었다.
그 중 목화밭의 한 귀퉁이에 있는 <김병화 기념관>을 방문해봤다.
지금은 독립국이지만 1991년까지 구 소련연방에 속한 콜호즈(집단농장)를 이끌면서
증산운동에 공을 세운 농장지도자 김병화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 했다.
60대 후반의 한인 3세 여성이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 조상들은 영문 모른 채 이곳에 실려와 움막이나 토굴에 기거하면서
자갈밭의 돌을 주워내고 갈대밭의 갈대를 뽑아내는 피눈물 나는 고역을 참아가며
메마른 땅을 옥토로 일궈나가 오늘과 같은 번영의 토대를 이뤘다니
고려인들의 질긴 생명력 앞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뿐이었다.
그 공로로 구 소련당국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훈장을 받았다니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수탈당한 공로라고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이것 말고도 고대 동서무역로(실크로드)의 중간 교역지인
사마르칸트를 둘러보는 것이었는데,
유네스코는 2001년, 세계 유산 목록에 사마르칸트를
<사마르칸트 - 문화의 교차로,(Samarkand – Crossroads of Cultures>로 추가하기도 했다.
실크로드라 하면 중국 시안에서 둔황에 이르러 천산남로나 천산북로의 오아시스를 지나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길로,
아라비아 페르시아를 거쳐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이어지는 긴 여로였다.
여기서 그리스를 거쳐 서로마까지 이어지면 동양의 문물과 서양의 문물이 교류되는 루트였던 것인데,
그 중간에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간 교역지인 관계로 여러 나라 군주가 쟁패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기원 전후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피를 뿌리고 당나라의 고선지 장군이 피를 뿌렸으며
13세기엔 징기스칸의 대부대가 피를 뿌렸지만
그런 과정에서 동서 문물과 생활양식이 교차 융합하여 독특한 문화유산을 낳기도 했으니
그 유형 중 하나가 아라베스크인 것이다.
아라베스크는 이슬람 미술 등에서 볼 수 있는 잎사귀, 꽃, 조수, 인물 등을 도식화한 무늬로,
공예품, 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문학에서는 아라비아적이라는 뜻에서 다양성 있는 문예작품을 이르며,
아라비아풍의 화려한 장식이 많은 악곡을 아라베스크라 부르기도 한다.
발레의 기본자세의 하나로, 한 쪽 다리로 서서 한 쪽 다리를 곧게 뒤로 뻗친 자세도 아라베스크라 하는데,
인체가 형성하는 곡선을 최대한으로 길게 한, 가장 아름다운 자세라 일컫기도 한다.
14세기 티무르제국 때 세워진 이슬람의 모스크들이
청아한 하늘색의 아라베스크 문양을 머리에 인 채 고풍스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티무르의 후예가 뒤에 인도를 침공해 무굴제국을 세웠다니
그 5대 왕 샤자한이 죽은 왕비를 위해 세웠다는 타지마할(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의 아름다움도
티무르제국 장인들의 작품일 것임이 분명했다.
1960년대 말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발굴된 7세기 때의 벽화에
조우관(鳥羽冠)을 쓴 사자(使者) 두 사람이 나타난다.
그 복식으로 보아 고구려인임이 분명하다는 의견이기도 하니
이미 그때부터 우리와 교역이 있었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 마지막 날엔 하얀 망토를 걸친 우즈벡 여인의 간드러진 춤사위를 보면서 여독을 풀었다.
여인의 망토와 치마 속에 숱한 민족의 피와 애환이 스며들어 흐느적거리고 있지 않는가.
역사는 이렇게 소용돌이치면서 엮어지는 게 분명할 터요 아라베스크는 바로 그 대명사가 아니가싶었다.
문양의 한 올 한 올 속에 우리의 피와 애환도 함께 굴곡지고 있다 생각하니
인고의 애환이 긴 시간을 거쳐 아름다움으로 치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 2016. 10. 25.
첫댓글 삿가스 님이 고운 글을 올려주셔서
긴 글이지만 화답해봤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난석님~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이 글을 주시어
감사하다를 적어야 하는데
습***로....
고려인이거나 한인이거나 그 정신은
계승 발전 할 것이니 염려 놓으시고
저네들 간들춤으로 여독 풀었으니
퉁치고 맙시다
그래도 눈이 내리기 전에
복껍질 뭐 그런얘기라도 놓고가면
누가 뭐라 하나요?
오라 하지않았어도 저 멀리도 다녀왔는데.ㅎ
공부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구우 고맙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스파시바
하라쇼 !
네에 고맙습니다.
난석 선배님
한참 머물다 가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