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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FIVE
두 갈래 길이 있다. 한 곳은 주투기장이고 다른 곳은 보조 투기장
. 이왕이면 이란 생각에 당연히 기대감은 커다란 주투기장 쪽을 향
한다.
아참. 그전에. 어제 또 놀러 오겠다던 세아토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소식이 없어 후드가 달린 간단한 로브를 사입고 혼자 여
관을 나섰다.
태양빛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가끔 피부가 따가워 준비한 로브
의 후드를 조금 더 깊게 눌러썼다. 아무래도 여자 혼자 투기장을
관람하면 시선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로브,
참 잘 산 것 같다.
한마디로 굳 쵸이스.
“예약이 되어 있으십니까?”
“아니요. 가능한 조금 뒤쪽 자리로 계산해주세요.”
특별한 결투가 있는 날은 아니기에, 밀리지 않고 단번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좌석팔찌를 달아주는 사람이 여자라니, 꽤 특
이하네. 상업전략인가. 뭐, 손님의 대부분이 남자일테니, 그럴 수
도 있겠다 싶다.
자리를 찾아 앉으니, 조금 더 고동소리가 진해진다. 전부터 동경
해 마지않던 영웅들과 그들의 싸움. 정말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 숨
소리.
“아~, 취할지도 몰라~”
구경하는 사람도 듬성듬성 했지만, 나 혼자만의 열기에 취해 엄
청 두근거린다. 새장을 열고 날아올라 하늘에서 본 나무들 빽빽한
숲. 마치,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 순간을 나와 함께 하는 듯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 숲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나는
단,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투기장을 나섰다. 그 이유는 바로…
“우엑~! 지, 진짜 피잖아! 아악~. 정말 싫어~!!!”
음식이 역류하는 품위 없는 사태까진 치닫지 않았지만, 마른 침
이 계속 나왔다. 한참을 퉤퉤 거리고 나서야, 그제야 주위의 따가
운 시선이 느껴졌다. 품위를 잃었다.
안면몰수할 내공은 안 돼, 거친 세상에 꺽인 새의 날개처럼 고개
를 푹 숙인 채 무조건 투기장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내가 왜 이렇
게 오래 뛰어야 하는지 의심이 들 때쯤 멈춰서니, 딱 공원 정문으
로 향하는 길이었다. 익숙한 공원.
“후아, 후아. …하아.”
정말 오래도 뛰었다. 내 딴에는 말이다. 계획이 틀어져 딱히 할
것도 없거니와 슬라임처럼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는 땀도 씻자는
생각에 그 길을 따라 쭉 걸었다.
공원 입구가 닿기 전에 보이는 수돗가. 물이 나오는 마력진을 내
쪽으로 돌려 한바탕 뒤집어쓰고 싶었다만, 간단한 세수와 손, 그리
고 손목부터 어깨, 목과 가슴을 끝으로 마력진을 뒤집었다. 으, 차
가워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서니, 아래의 주황색 원형 마력진으로부터 따
듯한 바람이 살랑인다. 잠시 후, 입체로 변했던 마력진이 다시 평
면이 되어 일렁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따듯한 물이나 나오게 해주지.”
마나가 부족하려나. 뭐 쨌든. 2시까진 그냥 공원을 둘러보기로 마
음먹었다. 그 다음은 뭘 해야 하나. 나도 참할 짓 없는 사람이다.
대낮에 이게 무슨 생쇼람. 옷을 털고 발을 옮겼다.
생각도 없이 걷다 닿은 곳은 로베 유랑극단의 공연이 있었던 무
대의 작은 언덕. 생각도 없었다기보단, 자연스럽게 닿았는지도 모
르겠다. 이만 날개를 접고 조용히 앉았다. 평안하다.
여행. 나랑은 상성이 안 좋나 보다. 그냥 이렇게 다리 쭉 피고 앉
아, 손과 머리를 기분 좋게 뒤로 넘기면 상쾌한…
“누, 누구세요?”
상쾌한 바람을 마시려 젖혔던 내 목은 무거운 인기척에 놀라 그
대로 굳은 채 떨리는 목소리만 밖으로 기어나갔다. 깔끔하다 못해
위엄까지 서려있는 중갑을 착용한 두 경비병. 잘못 보여서 좋을 거
단 하나도 없어 보인다.
“후드 좀 벗어 주시겠습니까?”
“저, 저요?”
반문도 아니다. 의문 섞인 음성을 냈지만 그들의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당장 모자를 벗어 보였다. 투기장에 앉았을 때보다 몇십
배는 더 심장이 쿵쾅거렸다. 전쟁에서나 울리는 북소리처럼 나를
긴장시켰다.
계속해서 내 머리를 짓누르던 경계 어린 시선이 치워졌다. 그 대
신 밀려오는 백색 파노라마. 물속에 비친 달을 만지듯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종이를 쥐어 잡았다.
“수배서입니다. 혹시 보시면 신고해주세요.”
“아, 아, 안녕히 가세요.”
무슨 기계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등을 보였다. 그제서야
쉬어지는 안도의 한숨. 완전 쫄았다. 인상도 인상 나름이어야지.
뭐 씹은 고릴라처럼 생겨서는 정말 습격이 따로 없었다. 저 뒷보습
봐라.
히끅, 눈 마주쳤다.
빛의 속도로 눈을 깔아주었다. 괜한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
자연스레 시선은 그들에게 받은 수배지로 향했다. 굉장히 익숙한
맛의 사진이었다.
어깨에 살짝 걸치는 미지근한 물에 달인 풀잎 색의 단발 머리칼.
그 날카로운 끝을 따라 지어진 매끈하게 빠진 턱과 함께 어우러지
는 특유의 기분 좋은 웃음. 사진에 구애받지 않은 그녀의 천진난만
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세아토였다.
“…말도 안 돼…….”
당장이라도 수배지에서 활력 넘치는 웃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기
분에도 평안할 수가 없었다. 모를 장난 같기도 하고. 황당하다. 그
리고 당황스러워 코끝을 간질이는 작디작은 풀벌레를 뚫어지게 쳐
다보았다.
자세히 보이지도 않았다. 검은색 엷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
지만, 다른 생각을 하기 두려웠다. …하지만 진짜인가 보다.
밑에 깨알같이 적힌 글은 더 가관이었다. 폭력이며, 협박이며, 절
도며. 죄목이란 죄목은 죄다 달아놓았다. 정확한 사건의 요지는 없
이 말이다.
알아봐야겠다. 그래, 알아내야겠다.
뭔가 자라나는 풀같이 수직적인 마음에 이끌려 벌떡 일어났다.
지들끼리 교란되는 실마리 중에 가장 그럴듯한 지식인 책의 내용
을 생각해냈다. 밑도 끝도 없이 술집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갖혀 지내며 많은 책을 읽었지만, 꼭 이런 유의 상황에서는 술집
에서 정보를 얻었던 것 같다. 공원을 빠져나와 급하게 유흥가를 찾
았다. 지친 다리가 물 맞은 새처럼 떨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갇혀
지내면서 운동이라도 꾸준히 하는 건데 말이다. 월드보이처럼.
왜 이렇게 불안함이 마음을 닦달하는지 알지도, 생각지도 못한
채 세로 무늬 문의 문고리를 꽉 쥐었다. 터져 나오는 시끄러운 소
리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지만, 위축되지 말아야 함을 의식하
며 단걸음에 카운터 앞 높은 의자에 떡하니 앉았다.
“주인 아저씨. 아무거나 한 잔만 줘라.”
너무 의식했나 보다. 존댓말과 반말이 여울에 어우러져 방향을
잃고 흘렀지만, 당황하지 않았고 눈매를 매섭게 지었다. 지금까진
잘 하고 있다. 분명.
“뭐로 드릴까?”
“해골맛 스위트드림.”
일단 뭐든 간에 팔아주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봐야
겠다는 생각에, 익숙한 그림을 골라 술을 시켰다. 곧바로 후회했지
만 당황하지 않고 한쪽 눈매를 찡그려 상황을 모면했다. 후드를 깊
게 썼지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지는 거다.
거대한 슬라임. 그 위에서 춤을 추듯. 아니면, 그 위에서 끊임없
이 이어지는 미끄럼을 타는 골렘 같은. 결국에는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바닥을 부정하고 싶은 그런 느낌의 술이 나왔다.
살짝 입을 대는 순간 구세계와 신세계…
이쯤 해두자.
“콜록, 콜록! ……코올~~록~~~! …에헴. 주인장. 혹시 이거에
대한 정보가 있나?”
“음….”
최대한 입을 씰룩거리며 거만한 몸짓으로 수배서를 넘겨주니, 이
아저씨도 짐짓 그런 날 의식했는지 심각하게 내 손을 떠난 그것을
주시했다.
너무 순조롭다는 생각도 잠시. 역시나 무언가가 없었던 탓인지
술집 아저씨의 입은 때질 기미가 안 보였다.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꺼내든 반짝이는 물건을 들어 그 무언가를 채워주었다. 바로, 돈이
다, 돈.
하지만, 웬걸. 반짝이는 쇠붙이를 바라보는 술집 아저씨의 표정
이 좋지만은 않다. 속으론 주인장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실수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잔에 담긴 술까지 출렁거렸다.
당황하지 않았다. …라는 자기최면까지 동원하며 있는 힘껏 잔을
쥐었다. 하지만 어찌 된 게 돌아오는 것은 날개를 깍는 윽박힘뿐이
었다.
“이 자식이, 지금 누굴 놀리나? 장난할 거면 딴 집으로 가!”
“…수, 수배서는 던지지 마라. 돈이 모자른 가? 그럼 여기 하나
더 줄 수 있는……데요. 에엑~!!! 아, 아, 알았어요! 나간다니까요?
!”
대가가 싸서라고 생각해 금화 하나를 더 꺼내 들었건만, 오히려
화만 더 버럭 내는 주인장. 나중에는 들고 있던 쉐이커까지 내게
던지려 했다. 어쩔 수 없이 작전을 변경하는 수밖에. 어디서나 당
당하게 걷기…
“으악~! 던지지 좀 말아요! …이 즈질 콧수염 주인장!!!”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또 미친 듯이 뛰었다. 그야말로 미친 듯
이. 누가 봐도 미친 듯이 말이다. 그렇게 튀었다. 그럼 어째. 술을
따라줄 때 봤던 그 주인장의 커다란 손바닥. 한대라도 맞았으면 정
말 이 세상과 안녕이었을 것이다.
유흥가를 나선 후에야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고개가 절로
절레절레 탄식했다.
“참 험한 세상이야….”
역시 세상은 아름다운 소설같지만은 않는구나. 다시 새장 속. 원
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시간과 내 체력뿐,
사건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채 제자리다.
스스로 날개를 꺽으며 대로변에 무턱대고 주저앉았다. 아직 내가
아는 세아토라면 이 수배서엔 뭔가 문제가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단 이틀이지만, 내 눈에 비친 그녀에게 전혀 안 어울린다. 이 수
배서는.
답은 둘째 치고라도, 그 문제라도 알고 싶다만. 도저히 어디서부
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세워지질 않는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
들을 혀끝에 모아 살짝 물며 답답한 앞 머리칼을 들어 올렸다.
한결 시원해진 시야와는 별개로 골목 쪽에서 울리는 둔탁한 소리
가 내 귓가를 물었다. 술집 아저씨 만큼이나 가까이 하기 싫은 소
리였다만, 왠지 궁금해서 시선이 안 가볼 수가 없었다.
조금씩 좁은 길로 들어갈수록 날 불안하게 다그치는 무거운 쇳소
리가 커진다. 그리고 보이는 익숙한 얼굴. 점심때 본 경비병과는
또 다른 두 경비병이 한 소년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그 무쇠다리
로 갈대 같은 정강이를 걷어찼다.
빠각.
뼈나가는 안쓰러운 소리가 예까지 울려 퍼진다. 주위의 보는 눈
도 더러 있는데, 무슨 죄를 지었건 아무리 경비병이라도 사람을 저
렇게 다루다니.
사람들도 그렇다. 선뜻 나서는 사람 하나 없이 가증스럽게 걱정
으로 물든 저 시선들. 그래,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아니
지. 나는 더 심하다. 더러운 겁쟁이.
하지만 어떻해. 힘도 능력도 없는걸.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고 한
들, 나까지 잡혀버리면 아니 한만 못한 결과잖아. 그리고, 혹시 진
짜 죄를 지었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알고 지냈다고 감싸주기 식의
선입견에 나 자신이 휘둘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냥 돌아서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여느 소설에 나
오는 주인공의 도리도 아니고. 수많은 책의 영웅과 같은 힘 따윈
한겨울 벚나무가지에 달린 이파리만큼도 없다만, 화려했던 봄의
용기만은 잃고 싶지도, 잊고 싶지도 않다.
사시나무마냥 떨리는 두 다리를 굽혀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머
리는 한없이 침착하건만 돌멩이를 주워든 손 역시 주체 없이 떨려
온다. 겨울을 담은 시린 흰여울에 빠졌던 돌이였나 보다. 차가워서
. 그래서 떨리나 보다.
꽉 쥐었다. 요동치는 마음과 굳건한 돌을. 순간이나마 갑작스레
벚꽃 향기가 피어난다.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얼음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날개를 활짝 펴 내질렀다.
“야이 개새…!!! 으읍.”
온갖 욕지거리를 장전했건만, 거친 손길에 그만 입이 강제로 봉
해져 버렸다. 골목의 골목으로 날 이끌어 들인 이가 내 등을 쳤다.
뭐 표현하자면 토닥토닥. 아니, 조금더 약하게 도닥도닥. 몸을 빼
려했던 노력이 그 살보드라운 손길에 줄줄이 새버린다.
“누구…?”
대답대신 내 몸을 휙 하고 돌려 마주한 후, 그대로 끌어 안아버리
는 세아토. 분명, 이는 바로 세아토였다. 하늘로 떠오르는 풍선을
옥상에서 잡아챈 아이처럼 내 등을 양손으로 움킨 세아토가 터질
듯 말듯 불안한 음성으로 바람을 전했다.
“흐윽. ……라웨르. …우리 일에 더 이상 …상관하지마.”
“세아토. 세아토, …왜. 도대체 왜 그러는데…? 그리고, 아까 걔.
에가하 맞잖아? 그렇잖아? 근데 그렇게 두려고? 그렇게 두라고?
그리고 너는. 정말 에가하를 저렇게 둘 거야? 어서 구해야 하잖아!
안 그래?”
“만난지 …이틀이잖아? 우린 지금 정말 위험하다고! 누구든 관계
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단 말이야!!! ……에가하는 우리가 어떻
게든 구할거야. 넌 참견하지마.”
그리고는 후드를 머리에 살짝 걸쳐 놓은 채 그녀의 손가락이 내
어깨를 스스럼없이 미끄러진다. 그러고 보니, 세아토가 입은 로브
와 내 로브의 상표가 똑같다. 같은 길드의 제품인 것이다.
돌아서려는 그녀의 손바닥에 억지로 깍지를 껴 이번엔 내가 그녀
를 마주 보게 하였다. 어떤 것이든 세아토를 잡을 이유로 만들었겠
지만, 지금 가장 눈에 띈 건 이거다.
“사, 상표가, 로브 상표가 같아, 세아토. 그래서인지 도와줄 수도
…, 도와줄 수도 있을 것만 같은데…….”
“네가? …니가 무슨 수로? 아무 힘도 없잖아!!!”
그랬다. 난 아무힘도 없었다. 전혀 말이다. 근데 내 주제에 누굴
도와준다 했던 거람. …자기 눈길조차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는
내가 누구에게 따듯함을 전한다는 거야. 그건 따듯함이 아니라, 오
히려 민폐…
“민폐가 아냐! …세아토, 만들기 대회때 너도 봤지? 나 거대 슬라
임도 소환할 수 있어. 뭐든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조금은….
”
…녹여줄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렇게까지? 이런 심한 소릴 듣고도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
가 고개를 못들겠잖아. 너무, …너무나도 미안해서.”
“언니를 닮아서 그런가봐.”
“……심한 말 해서, …미안해.”
나도 따라 눈물이 글썽인다. 그렇게 서로 부둥켜 안고 주저앉아
울었다. 그 무엇에 대하여서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강이 바다
가 되듯 흐느꼈다.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았었나 보다. 한참을 서로
따듯하게 지켰으니까.
내가 지났던 유흥가의 옆 길로 몰래 뻗은 개미허리처럼 가느다란
길. 아직 어스름이 끼어 있었지만, 낡은 벽돌이라던지 사납게 설킨
덩굴손 따위들 때문에 분위기는 어두컴컴한 깊은 밤중을 방불케
했다.
길도 좁아 두 명이 채 같이 걷기가 불편해, 세아토의 손을 움켜지
고 살짝 뒤에서 길을 밟았다. 음료 대회 때랑 상황은 바뀌었어도
항상 뒤따르는 건 내 쪽이다. 언젠간 앞서서 누군가를 이끌고 싶다
는 자극이 생길 때 즈음 으시시한 창고 앞에 걸음이 세워졌다.
“몇몇 극단원들과 여기에 은신하고 있어.”
“몇몇 ……이라니? 에가하 말고 또 억울하게 잡혀간 사람이 있어
?”
“억울하게? …하하하! 라웨르 진짜 말 이쁘게 해주네~! 전후 사
정도 잘 모를 텐데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다 가벼워진다 얘. 정
말 고마워~”
오해가 꼈다는 건 수배서를 확인한 순간 알았으니까. 무엇보다
여전하구나. 세아토의 예쁜 초승달 눈웃음은. 그런 웃음들은 꼭 단
장 오스렌 씨와 닮았다. 부녀지간이 아니려나.
“들어와.”
녹슨 기염을 토하며 열리는 창고 문. 열린 것인지 부서져 옆으로
떨어진 것인지 자세히 드려다 볼 시간 따윈 없었다. 천장에 달린
휴대용 마법 전구에서 흐르는 희미한 빛을 통해 낯익은 이들과 눈
을 맞추는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 친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이렇게 눈시울이 붉어지나 싶
다. ‘그 초췌한 모습이 안쓰러워서’ 라기보단, 단순히 내가 아는 사
람들이 슬퍼한다는 사실에 흐르는 눈물을 후드의 그림자로 애써
가렸다.
“…….”
“뭐가 뭔지 모르겠다만. 어찌 됬건 뭐든 뭉쳐보자. 요호~, 화이팅
이다!”
이름도 모르지만, 다 썩어서 풀려버린 짚단을 엮으며 운을 띄우
는 남자에 의해 나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었다. 세아
토를 포함, 총 여섯 명의 극단원들이 자리에 있었다. 소소한 이야
기를 나누느라 나머지 극단원들의 이야기는 한참 나중에나 유리잔
닦듯 조심스럽게 꺼내볼 수 있었다.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실제로 듣고 나니 마음이 천근만근이
다. 오스렌 씨와 에가하,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모든 극단원
이 잡혀간 상태라고 한다. 대귀족. 즉, 성주[城主]에게 말이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듣고만 있는 나도 여간 충격이 아
닌데, 당사자들은 어땠을지. 분한 마음에 애꿎은 땅에 여린 주먹을
꽃으며 세아토가 말을 곱씹었다.
“확실해. 이것만은 확실해. 아리비는 무단이탈이 아니라 납치 당
한 거고. 이 성의 대귀족, 브렌서스 가와 아주 깊이 연관돼 있다는
거야. 이 일들이.”
“상대가 너무나도 커. 하지만, 뭣 같아도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
은 없지. 어떻게 되든 꼭 구해서 성을 빠져나가야 돼. 성을 빠져나
간다고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뭐 무사히 나올 수만 있다면야
야숙이 뭔 대수겠냐.”
“야간 투기장의 특성을 노려야 돼. 생사불문. 그러니까 ……”
귀족들이 여럿 관람하는 야간 투기장. 당연 대귀족이라고 관련인
이 없을 리가 없다고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장남이든 차남이
든 아니면 하다못해 시종이라도 납치해 정보를 캐자는 것이었다.
물론 대어가 낚이면 인질극으로 가는 거고, 아니면 육탄전이 될
수밖에 없단다. 물론, 개죽음 작전이라고 생각한 나는 만류하기 위
해 세아토에게 시선을 두었지만, 그녀 또한 이미 이 작전으로 완전
결심이 선 듯 보였다.
그곳에 함부로 톱을 넣을 수 없었다. 그러다 상황이 흘러 도착한
곳은 작은 폭포. 그래, 폭포수 같은 말들이 이 녀석들 입에선 아무
렇지도 않게 튀어 흐른다. 콸콸콸.
“말도 안 돼! 내, 내가 시선을 끌라고? 아무리 내가 육신계약 소
환술사라곤 하지만, 최하급인 F급 소환사라구. 날 너무 과대평가
하지 말아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도 반대야. 기본은 세우고 시작하자.
솔직히 말해 라웨르가 이 자리에 있어준 것만 해도 우린 감사해야
할 처지야.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아줬으면 해. 내가 부담스
러우니까.”
“그럼 어쩌자고. 시선 끌기의 최선은 소환수야. 위급할 땐 역소환
도 있잖아? 만약, 13급 마나 무사인 우리 중 한 명이 그 일을 해야
한다면 희생자가 나올 확률이 너무 크다고. 알아?”
“내 생각도 그래. 솔직히 소환사라 하더라도 미끼가 되는 건 위험
하겠지. 하지만 13급 무사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나을 거야.”
미, 미끼란다.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하나
. 마지막 극단원의 말로 세아토와 나머지 극단원들 사이에서 미묘
한 신경전이 오가는 것 같다. 하나 확실한 것. 내 입장에선 세아토
가 아군이라는 것이랄까.
바닥에 쓸린 연붉은 손등을 입술 사이로 살짝 물며 고민에 눌린
눈살을 한껏 찌푸려보는 세아토. 그러다 질끈 하는 소리와 함께 손
을 하늘 높이 쳐든다. 검지만을 활짝 편 채로.
“내가 할게. 그럼 이 얘기는 그만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
“뭐야~, 분위기 다운? 어서 다음 작전 짜자~”
“……야냐, 세아토. 내가 해볼게.”
이대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한 번쯤
불타올라 보고 싶다는 것은 한창 갇혀 지낼 때 해봤었던 결심이다.
‘이제 와서’ 라는 생각은 현실과 타협하는 나약한 나. 그래 나는 아
직 뜨거워. 퐈이야! …너무 오바했나.
몇 번이고 사양하는 세아토를 불로 태워버리고 영광스런 임무를
독차지한 나. 하지만 왜 이렇게 서글픈 걸까. …여하튼, 언제까지
나약할 순 없어. 정신 똑바로 차리자.
“라웨르, ……정말 괜찮겠어?”
“물론. 나와 거대 슬라임 콤보는 승률이 무려 백 퍼센트라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투기장 앞에 서서야 아침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그 추잡스런 붉은색의 몸에서 삐져나오는 …. 피
! 으악, 설마 피를 보게 되진 않겠지. …에이, 설마.
에이……. 흑흑. 서, 설마아아~! 블러드, 블러드, 블러드. 싫어,
싫어, 싫어! 싫단 말이야아~~~!!!
“라웨르, 정말 미안해. 그럼 우리도 자리 잡으러 갈게. …만약의
경우지만, 정말 만약 네가 위험에 빠진다면 만사 제쳐두고라도 구
하로 달려올 거야. 네가 다치면 …아무런 의미도 없잖아?”
“고마워, 세아토. 나 힘내 볼게. 피는 무섭…”
“응?”
“아냐, 아냐. 그럼 너희들도 화이팅이다~”
그렇게 세아토를 포함한 극단원들을 보내고 나서야, 다시금 밀려
오는 걱정 한 뭉탱이. 물에 가라앉힐 수도 불에 태워버릴 수도 없
는 난제다.
투기장 입구에서 한 걸음 앞. 절로 한숨이 쉬어진다. 우물쭈물 하
는 새, 브레이슬릿 카운터 언니가 먼저 선수쳐 인사한다. 일 참 열
심히 하신다.
당연하게도, 마주 인사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터벅터벅 혼 빠진
사람처럼 카운터로 향했다. 사람이 바뀌었다. 아침에 있던 여자와
교대한 언니인가 보다.
망설이는 내 팔을 힘껏 들어올린 여자. 친히 좌석팔찌를 달아주
시려나 보다. 친절도 하셔라. 체념하며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작전
들의 시뮬레이션을 펼치고 있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도 손목에
감기는 느낌이 없다.
무슨 일인가 해서 고개를 들어 여자를 주시했고, 그 여자의 시선
을 따라 내 손목으로 내려왔다. 이미, 팔찌가 감겨져 있었다. 아침
껄 아직까지도 안 풀렀었다. 완전히 까먹은 채 있었다.
허망한 표정으로 꺼내든 좌석팔찌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는 여자.
바람 따라 시선을 옆으로 굴리며 민망하단 음성으로 말했다.
“마니아셨구나. 난 또, …한참 우물쭈물하시기에 숙맥이신 줄 알
고요…. 제가 실수했어요. 어서 들어가세요.”
“네?”
“알면서 왜 그러세요~. 좌석팔찌의 유효기간은 하루잖아요. 출출
하셔서 뭐 드시고 오시는 길이신가 봐요?”
완전 오해받았다. 마니아라니. 내가 도대체 왜. 아냐, 뭐 한 번 보
고 말 사이인데 어때. 그래도 낯뜨겁긴 하다. 나도 여자라고. 이런
것에 마니아라는 불명예 딱지는 정말 싫어~
하지만, 어째. 더욱 큰 날개를 품고 있기에, 오늘은 그냥 아니여
도 그런 척, 일부로 낮게 깐 중저음의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 그렇죠 뭐. 세상이 다 그러니까요. 하. 하. 하. 하. 하.”
미친년 같았을까. 제빨리 자리를 떠, 투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연
붉은 풍선 바람 빠져 홍당무 되듯 양볼이 다 민망함에 물들었다.
후아. 후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세상은 이렇게 가슴 떨리는
일 투성이려나. 어째, 집 밖으로 나와서 후들들 손발 떨리는 일속
에서만 살아가는 것 같다. 말하자면, 스펙타클한 일상의 연속.
자초한 일이란 생각과 함께 이마를 차가운 벽에 잠시 시켰다. 하
지만, 사람들 눈에 너무 튀어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쏜살같이
이마를 때고 머리칼을 정리했다. 그리고 최대한 평범하게 걸으며
브렌서스 가의 문장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눈알만 대구루루. 역시 평범하게 걷는다는 걸 인식한 순간 이미
평범한 걸음이 아니려나. 스스로 진정을 다지며 잡다한 생각으로
기분을 업 시키고 있을 때, 시야를 스치는 거북이 닮은 문장.
다른 곳을 보며, 그 문장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 후, 젭싸
게 목과 눈을 돌려 확인했다. 대략적인 위치는 목으로, 세세한 확
인은 눈빛으로.
맞다. 창고에서 극단원들이 말해준 무늬가 확실한 것 같다. 가슴
에 같은 문장을 단 사람들끼리 꽤 모여 있었는데, 몇몇 다른 귀족
가도 다 전세라도 냈는지 지들끼리 잘도 모여있다. 찾기는 쉬워 좋
다만.
“오. 호. 호. 내 자리가 어디람? 바, 반대 쪽이였을라나~”
한 번의 연극 경험으로 단련된 내 연기실력으로 그들의 눈과 귀
를 모두 속였다. 그냥 뒤돌아서서 가면 눈길을 모으게 될까봐 자
리를 못 찾은 척 연기한 것이다. 그렇게 매우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그들의 자리를 확인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근디, 등 뒤가 왜 이리 따끔거리는 겨.
이제 토끼의 간만큼 중요한 일들만이 남았다. 적절한 장소를 물
색한 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시간동안, 적절한 강도로 브렌
서스 가의 사람들을 혼란시켜야 했다. 아주 적절하게. 절묘하고도
오묘한 말이다. 적절이란. 후훗.
일단 여차하면 최대한 빨리 몸을 뺄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 물
론 동, 서쪽 문이 가장 편하겠지만, 거기서 서성거리다간 너무 튀
어 보여 금세 발각될 것이다. 그렇다고 몸은 완전 내빼고 소환수만
떨굴 수도 없는 일이다.
그건 교감률 때문. 싱크로율이라고도 불리는데, 책에서 확실히
읽어두었다. 육신계약은 소환수가 받는 고통이 그대로 소환술사에
게 전해지는데, 그 고통의 정도가 서로의 교감률과 비례한다.
당연, 교감률을 낮추면 고통도 비례해 미미한 정도밖에 전해지지
않지만, 그럼 반대로 소환술사의 마나가 소환수에게 효율적으로
소통되지 못한다. 전투 시, 까딱하면 강제 역소환으로 이어지기 십
상.
그렇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여유를 남겨두고 교감률을 끌어
올려 싸우다가, 피해를 받을 것 같으면 완전 낮춰버리는 전투 방식
이 기본이다. 그런 컨트롤을 하려면 당연 전투에 대한 소환술사의
시야 확보도 분명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렇기에 소환수와 조금 떨
어져 있을 순 있어도, 확실히 몸을 내빼진 못하는 것이다.
낮은 교감률로는 시간을 오래 끌 수도 없고, 칼의 베이는 고통을
감당할 수도 없어,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해지는
고통이 심하면 소환술사도 결코 안전하지 못한다. 컨트롤 실패로
죽는 사례도 허다하다 하니, 두 번째 토끼를 잡은 거북이처럼 온몸
이 긴장된다.
이번 작전의 신호도, 시작도 모두다 내 담당이다. 거대 슬라임을
떨어뜨릴 위치선정을 시작했다. 잘 굴려보지도 않은 머리로 여러
가지를 고려하려니까 나른하고 귀찮은 신호가 몰려와 대충 확 질
러버리라고 날 떠민다.
하지만, 신중해야만 한다. 주제에 기특하다는 칭찬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이후의 일어날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넣었다. 해변가 모래
알에 그린 것 만큼이나 스르르 파도에 금세 형체가 망가졌지만, 그
그렸던 느낌이라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이다. 그래도 타이밍만은 어쩔 수 없는 필[feel]이었다. 마법
진 연상과 함께 위치 선정. 완벽해.
“거대 슬라임 소환!”
스멀스멀.
“…? 꺄아악! 이게 뭐야~!!!!!!”
“이, 이쪽으로 피하세요. 아가씨!”
“놀라지 마십쇼! 슬라임쯤이야 별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일단, 어서 뒤쪽으로!”
꽤나 소란을 피우는 건 성공이다. 이제 적절한 시간 동안 버티기
가 문젠데. 좀 힘들어 보인다. 벌써 슬라임을 견제하기 위한 라인
을 구축한 브렌서스가 호위병들. 능숙하게 대처하는 모양새를 보
니, 오래 끌기는 글렀다.
선수 필승. 외워두었던 거대 슬라임 기술의 마나배열을 상기시키
며 손을 양쪽으로 전개했다. 기술을 쓰는 건 처음인데다가, 흥분까
지 더해져 필요 이상의 마나가 펼쳐졌지만, 시간관계상 추스릴 정
신도 없이 바로 발동시켰다.
“하울 오브 킹 슬라임.”
상당히 적들의 신경을 긁었을 우리 라임이의 기분 나쁜 울음 소
리와 함께 전방으로 무공해 짖은 녹색 안개가 생성되었다. 무공해
라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겐 완전 죽음의 안개로밖엔 안 보일
것이다.
당연히 공격성 복잡한 수식은 모두 제했기 때문에, 꽤 넓은 범위
로 독안개를 펼칠 수 있었다. 혼비백산하며 몇몇 이들은 좌석에 걸
려 넘어지기도 한다. 이런 생각 자체가 이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큰 부상은 없었으면 한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견제 라인을 풀지 않는 브렌서스 가의 호위
병들. 금방 안개의 본질이 탄로 날 게 분명하다. 이윽고 달려드는
호위 무사. 원래대로라면, 굼뜬 거대 슬라임의 움직임 때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교감률을 낮춰야 했지만, 그럼 바로 연이은 공격에 역
소환 당할 게 불 보듯 뻔하다.
한 번 참아보기로 했다. 감 찔러보듯 슬라임에게 검을 들이미는
무사. 평균 교감률을 유지 했는데도 여전히 굼뜬 슬라임의 몸에 얇
지만 조금은 깊은 생채기가 생겼다.
상호 교통의 마나 교환이 아닌, 일방적으로 튕겨져 나온 마나가
내 왼쪽 팔꿈치를 휩쓸고 지나간다. 저런 견제용으로 찔러보는 검
끝에도 걸려 이렇게 허둥거리는데, 이젠 본격적이 되어가는 그들
을 어찌하란 말인가. 무엇보다도, 거대 슬라임. 완전 얕잡아 보이
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기세를 되돌릴 수가 없다.
…근데, 젠장. 이거 꽤 아프잖아?
무리하게 역소환은 피했다만,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더
러운 고통이다. 게다가 일부로 의식하며 왼 팔에 시선을 두길 피하
곤 있지만, 피를 보면 정말 정신을 잃을지도 몰라, 상처는 어느 정
돈지 정확히 알 수도 없어, …막연한 공포도 밀려온다.
이상은 무리다. 이젠 혼란을 틈타 세아토 일행이 납치에 성공했
길 비는 수밖에, 내 쪽에서 더 버티는 건 정말 무리다. 무리. 비상
용으로 마련된 출구로 조용히 몸을 내빼며 거대 슬라임의 마지막
난동을 끝으로 소환수를 역소환 시켰다.
투기장 밖으로 나오자 말자, 폭우처럼 쏟아지는 시선들. 이놈의
왼팔 상처가 크긴 큰가 보다. 마지막 난동, 그 조금의 시간을 끌어
보자고 말 그대로 살을 내주어 버렸다. 적의 뼈만 잘 깍았다면 후
회가 없으련만, 그건 아지트 창고로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는 일.
사람이 더 모이기 전에, 로브를 왼팔에 둘러친 후, 최대한 고개를
숙여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아지트에서 반대방향으로 걷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책에서 봤는데, 꼭, 거리 사람들의 진술로 말미
암아 뒷덜미를 잡히곤 한다. 그 꼴을 미연의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좁은 길에서 더 좁은 길로 갈아타 가며 발자취를 이리저리 엮어
놓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드디어 가발을
벗어젖힐 수 있었다. 으으, 머리가 근질근질. 작전대로 많은 사람
들 앞에서 다른 머리칼 색도 비춰줬으니, 날 잡으려면 고민좀 해야
될 거다.
“역시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니까.”
옷가지를 다독이며 먼지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대발견을 이룬 탐
험가 처럼 달빛에 폼 한번 재주며 유유자적 리듬위를 걸어 아지트
창고로 향했다.
“요오, 나왔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으스스함이 짙어져 가는 창고의 문을 활짝 열었
다. 어디 물건이 있다는 것만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들어왔
으나, 고즈넉함만이 나를 방겨주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그래서 더욱이 부자연스러운 오래된 창고 안.
일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나를 놓았나 보다. 서운함보단
고마운 감정을 갖기위해 애쓰며 한 발자국 안으로 들이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스르르 문을 닫아두었다.
위험해질 것 같으니, 나를 위해 선택해준 그 결심. 알 것도 같다.
창고 손잡이에 닿아 누르스름해진 손을 공중에서 탁탁 털고, 몸을
돌렸다. 좁은 골목을 지나면서 가발이며, 왼손을 지혈하던 로브며,
미련없이 담장 너머로 넘겨버렸다.
피묻은 로브를 던져버리며, 팔꿈치 쪽 상처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몰라라 비명 지를 뻔했다. 피는 정말이지, 정말 정말 싫
다. 저절로 고개가 획 돌려진다.
처음에는 바로 여관으로 가려 했지만, 책에서 읽은 또 한가지의
지식. 상처소독엔 술이 좋다는 글귀가 내 감성을 자극했다. 꼭 필
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은 일이랄까.
아름다운 인연이 있었던 주점을 건너뛰어, 그 다음 가게에서 진
열대 위에 그럴듯하게 장식되어 있는 술병 하나를 집어들어 계산
을 마쳤다.
갑자기 종류별로 술을 모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며, 그리운
여관 문을 열었다. 눈이 마주쳐버려 어쩔 수 없이 주인 아저씨에게
한 배꼽 인사를 끝으로 2층 계단을 사뿐히 즈려밟았다. 익숙한 꽃
향기.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셨던 건 아니셨겠죠.
“언니….”
“라웨르. …어떻게 된 거야?”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