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미국 네바다주에서 출생한 앨버트 테일러는 스무 살 되던 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의 아버지 알렉산더 테일러는 금광 기술자였다. 조선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아들들을 전부 불렀다. 앨버트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굴삭기 매입 차 일본에 갔다. 요코하마 그랜드호텔에서 영국인 메리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1917년 인도에서 결혼했다. 긴 신혼여행을 했고, 그해 9월 서울에 정착했다.
앨버트와 메리 부부는 1919년 2월 28일 아들 브루스를 세브란스 병원에서 출산했다. 그 방은 앨버트의 아버지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난 방이기도 했다. 이때 앨버트는 운명적으로 3·1운동과 조우한다. 병원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간호사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다녔다.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세브란스 병원에서 인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AP통신원을 겸했던 앨버트는 이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선언서 1부를 손에 넣었다. 관건은 일본인들에게 들키지 않고, 외부로 유출시키는 것이었다. 자칫 적발됐다간 다음날 예정된 한민족의 거사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앨버트는 갓 태어난 아들의 침대 밑에 문서를 숨겼다. 병원을 나설 때 종이를 접어 구두 굽에 숨겼다. 그 뒤 동생 윌리엄 테일러에게 독립선언서를 맡겼다. 당시 조선의 정보유통 경로는 일본을 거쳐야 미국에 전해질 수 있었다. 윌리엄은 일본으로 건너가 형이 쓴 기사에 독립선언서를 첨부해 송고했다. 그렇게 3·1운동은 세상에 알려졌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적국관계에 있는 서양인들을 구금했다. 앨버트는 선교사 집에 감금됐고. 메리는 가택 연금됐다. 5개월간 감금됐다가 외국인추방령 2~3일 뒤 바로 추방됐다. 앨버트와 메리는 사실상 일본의 포로 신분으로 싱가포르까지 갔다. 그곳에서 포로교환 형식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뉴욕에 도착했다.
앨버트는 갑자기 나온 터라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재산과 사업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조선에 돌아가야 했다. 6년간 미국 국방부의 문을 두드렸지만 한국 땅을 밟기 전에 심장마비가 먼저 왔다. 메리는 해방 이후 가까스로 한국 정세가 안정되자, 미군 수송선을 타고 입국했다. 메리도 잠깐 들른 것인지라 한국의 지인들 안부를 확인하고 남편의 재를 한국 땅에 묻고 왔을 뿐, 실무적 정리는 못했다. 미국에 돌아간 메리는 1982년, 93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