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는 서태지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수적인 부분을 서태지에게 강요한다. 그것이 이 사회가 천재를 죽이는 방식이다.
서태지에게 광대탈을 씌우고, 세시간 동안 헛춤을 추게한 몰래카메라의 이경규에게 선배대접을 깍듯이 하고 예의를 차리라는 식이다. 그렇게 예의를 잘 차린 연예인이 코미디언 배일집이다. 그는 구봉서선배를 깍듯이 잘모시고, 예의바른 생활로, 웃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카메라를 독점하였다.
그래서 코미디의 질은 낮아지고, 코미디는 망하고, 개그로 대체되었다.
왜? 구봉서가 예의를 강조해서 예의바른 배일집천하가 되었기 때문에 코미디언들은 영원히 설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실력으로 승부하자는 거다. 서태지에게 겸손을 요구하는 것은 이나라 음악시장을 미국과 일본에 내주고 다같이 죽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성공한 혁명의 경우]
가요계로 범위를 한정시켜 놓고 본다면 서태지의 혁명은 성공했다. 서태지에 의해 기존의 체제는 명백히 와해되었으며 새로운 질서가 정착하였다.(물론 그가 없는 사이 상업자본의 이수만이 다 가져갔지만)
서태지의 성공한 혁명은 변혁에 있어서 하나의 완벽한 성공사례이자 모범적인 모델로서 새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낙관적인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도 서태지처럼 하면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서태지처럼 하는 것인가? 바로 이 부분이 논의되고 또한 전파되어야 한다. 그래서 담론화과정이 요청된다.
[한국식 영웅주의]
작년 이맘때 김어준이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인은 영웅만들기에 인색하다"는 요지의 글을 쓴 걸로 기억한다. 확실히 한국에는 따라배울만한한명의 스승도, 위대한 국부도, 존경받는 정치인도, 대단한 스타도 없다.
더욱 노벨상이 나올만한 가능성도 없다.
왜 한국에서 노벨상은 가능하지 않은가?(평화상 빼고) 영웅이 자랄만한 토양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웅이 자라기엔 이 땅이 너무나 좁고 척박하다. 인심이 더욱 각박하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좋은 시스템이 좋은 영웅을 만들어낸다.
한 민족의 성쇠는 그 민족의 역사로 하여 가늠되는 것이며, 그 역사는 그민족의 영웅만들기시스템을 전달하는 수단에 다름 아니다. 그 역사가 중요하고, 그 민족이 강조됨은, 그 영웅만들기시스템을 후세에 전달하려는 목적이다. 영웅이 배출되어야 한다.
"사촌이 논사면 배아픈 한국인들이 과연 한명의 영웅을 만들어내랴?"
[한국인의 노예근성]
톨스토이 민화집을 참고하면, 무지한 러시아의 민중은 그 지배하고 수탈하는 귀족들보다, 중간에서 세금을 걷어 귀족에게 바치는 마름과 세리(그들은 농노 중에서 선발된다)만을 비판한다.
그들의 빈곤과 절망은, 귀족의 압제에 책임이 있지 않아서, 아니 귀족은자비심이 넘치고 은혜로운데도, 중간에 개입하는 마름들이 선한 귀족을 속이고, 민중을 수탈한다고 믿는다. 이건 무지에 의한 오해다.
그들이 마름을 질투하는 것은, 원래 자신과 같은 계급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태생적 출신성분이 다른 귀족의 압제는 은혜로이 받아들이고 본래 자신과 같은 계급이었던 민중 속에서 누군가가 신분상승을 하면 심술과 질투로 대응하는 것이 어리석은 러시아민중의 무지요 노예근성이다. 계몽되어
야 한다.
서태지가 이나라 일각에서 비난되는 이유는, 자기와 같은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출신이 아닌 것이다. 심술과 질투가 따라붙는다. 진정한영웅의 통과의례다.
농노들은 가난과 비참을 겨워하면서도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원치않는다. 두려워 한다. 노예근성이다. 진실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 지금 서태지인가?]
서태지를 바로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수(기능인)로 보거나 무지션(작가)으로 보거나다. 물론 가수로 보면 조성모도 낫다. 허나 그것은 숲이 아닌 나무를 보는 관점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려거든 가수도 무지션도 아닌 '주류질서의 전복자'로 보는 관점이 옳다. 이 관점에서 서태지효과를 우리 사회에 충분히 반영한다.
비록 서태지가 그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서태지가 스스로의 천부적인 재능만에 의해 영웅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요청에 의해 영웅으로 만들어지듯이, 우리는 우리사회의 진보를 위해, 서태지를 일개 무지션이 아닌, 주류질서의 전복자로 키워가야 한다. 영웅만들기다.(재능만을 논하자면 서태지보다 뛰어난 창법은 가요계에서 얼마든지 찾아질수 있다)
[전복의 방법론]
젊은이들이 한총련이다 운동권이다 해서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조선일보로대표되는 기성세대에 의해 한마디로 개무시된다.
"쯧쯧 철없는 것들, 현실과 이상이 다르다는 것 쯤은 알아야지"
여기서 철없다는 거, 철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의 논리다. 결국은 돈이다. "세상을 바꾸는건 구호가 아니라 돈이야 철부지들아," 문제는 서태지의 파워가 돈에 있어서도 그들보다 우위에 섰다는 거다.
서태지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아버지 나 서울대법대 안가고 내 하고 싶은 공부 하겠어요.' 하면 "세상물정모르는 철부지야 네가 그래서 김씨가문을 책임지겠어!"하고 귀싸대기 올려붙일 논리가 없어졌다는 거다. '아버지 서태지 보세요. 제 하고픈거 하고도 돈 잘벌잖아요.' 서태지는 돈을 벌
어야 한다. 작게 벌어서 안되고 크게 벌어야만 기성세대의 철부지논리, 세상물정논리, 돈없고 빽없으면 썩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존경쟁논리를 극복할수 있다.
[서태지의 전망]
서태지가 선 위치는 주류질서에 대해서 전복자, 곧 아웃사이더의 위치이다. 그 아웃사이더는 작게는 기성세대에 대해 신세대이며 더 넓혀져서 학벌에 대한 반학벌, 혈연지연연고주의에 대한 반연고, 정치권력에 대한 문화권력, 기존도덕에 대한 반도덕, 고급문화에 대한 대중문화, 유교전통에 대한 반전통, 등 광범위한 접점을 가진다. 서태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체제와 전통과 문화와 관습과 대결한다.
그렇다면 서태지를 영웅으로 키운다고 해서 거대한 변혁이 저절로 일어나는가? 천만에. 변혁은 산업에서 시작된다. 획일적인 아파트와 대량생산의 포드자동차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 획일주의에 대해서 소량다품종과 한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마니아주의로의 대체가 포스트모던한 경향이
된다. 서태지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전도사다.
"이제부터는 계장, 과장, 부장으로 사다리타는 시대가 아니라 한 분야에서의 전문성이 강조되는 마니아시대이다"
사다리타는 모더니즘시대에서, 과장을 거치지 않고 부장이 되는 방법은 없으므로, 궤도에서의 일탈은 용서되지 않는다. 마니아시대에서는 사다리가 없으므로, 일탈이 용서된다.
포스트모던한 후기산업사회에서는 부장-과장-계장으로 수직서열화된 상의하달식 사회구조가 생산성저조로 하여 버티어내지 못한다. 수직구조가 수평구조로 전환되는 현상은 기업에서, 가정에서, 문화계에서, 언론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또 일어나야만 한다. 전복의 논리다.
들리는 유언비어에 의하면 이수만은 HOT를 야구방망이로 때려서 가르쳤다한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상의하달식 수직구조가 한국에서 여전히 먹혀든다는 증거다. 몽둥이로 때려서 프로야구팀 성적이 올라가고, 몽둥이로 패서 축구팀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온다면, 우리사회의 현주소는 참으로 후지다. 쪽팔리게도 일정부분에 있어 사실이다. 한국은 여전히 패야되는 나라다. 왜? 후지니깐.
[서태지에 관한 잘못된 논의들]
1) 서태지는 한국에서 번 돈을 미국에서 소비하는가?
이수만의 HOT가 중국 등지에서 한류를 유행시켜 벌어온 달러는 근본 서태지의 몫이다. 서태지가 없었다면 한국인들이 일본음악과 미국음악을 소비하므로 해서 더 많은 달러가 유출되었을 것이다. 명백히 서태지는 국부를 증대하고 있다.
2) 서태지는 겸손하지 않은가?
대중의 스타가 겸손해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잘못되고 위험한 생각이다.
스타는 오만해야 한다. 비틀즈는 스스로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자랑했다.
HOT나 조성모의 겸손하고 예의바른 모습은, 상업자본에 의해 가공된 가짜다. 그러한 잘못은 연예인의 위치를 딴따라로 약화시키고, 이는 정치권력의 문화권력에 대한 우위를 강조하여,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기에 충분하다. 분명히 말하면 정치권력이 문화권력보다 우위에 서서 안되
며, 스타의 오만은 사회를 수평구조로 전환하여, 이나라의 자본주의를 더 성숙된 형태로 심화, 발전한다.
입국장에서의 '인사말없음'을 무례로 보는 시각은 서태지를 기자들의 상업주의에 노출시키는 무모한 언동이 된다. 서태지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방송출연이나 언론에의 무분별한 노출을 자제 내지 차단해야 한다. 서태지는 대중과 직접 접촉할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미디어를 독점한 자의 끼어들기를 허용해서는 '미디어를 통한 지배'라는 이나라의 기존주류질서를 강화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서태지의 메시지는 주류 질서를 해체하라는 것이므로 주류질서의 하수인인 언론, 방송과는 긴장과 대결을 절대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3) 서태지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상업적수완을 발휘하는가?
서태지의 무모한 모험은, 간섭받기 싫어하는 천재들 특유의 성격으로서,전혀 상업적인 시도가 아니다. 단지 성공했기 때문에 상업적인 수완으로 오해되는 것이다. 서태지가 상업적인 목적을 가졌다면 그리 무모한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조용필처럼 조용하고 끈기있게 음악을 하는 것이, 서태지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주고, 더 많은 음반이 팔리게 했을 것이다. 명백히 서태지의 상술(?)은 시장에서의 손실을 가져왔고 이 나라 음반시장을 위축시켰다. 서태지아류의 서태지모방은 음반시장을 교란하였고 음반시장의 위축은 이수만같은 상업자본의 시장침투를 용이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가요계가 상업자본에 휘둘리게 하였다. 전혀 이익이 되지 않았다.
4) 서태지는 천재인가?
서태지의 역량은 가수 혹은 무지션의 관점에서만 관찰되어서 안된다. 서태지의 음악이 과연 최고인가를 논하기 전에 대중의 기호는 대중의 눈높이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점을 먼저 따져봐야 한다.
누구라도 앞서가는 미국식의 좋은 음악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항상 강조되어야 하는 점은 초기 도입단계에서는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거다. 내용의 질적 수준을 논하려면 형식이 충분히 정착된 다음의 단계여야 한다.
좋은 요리를 하기는 쉽다. 그러나 흔히 그러하듯이 최고의 요리는 대중의입맛에 맞지 않다. 최고의 캐비어요리라도 처음 먹어보면 맛이 없다. 대중의 입맛을 바꾸는 작업이 중요하다. 서태지음악의 핵심은 한국어의 문장구조를 서태지특유의 문장자르기와 사자성어 사용 및 반복되는 각운으로 랩
음악에 맞게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난 알아요"의 가사는 한국어의 어순에 맞지 않다. 이러한 변형은 위대한 천재만이 할수 있는 일이다.
5) 서태지는 은퇴약속을 번복했는가?
약속이라는 말은 쌍무적인 경우에 사용하는 어휘다. "네가 숙제를 다하면피자를 사줄께" 여기서 숙제와 피자는 교환된다. 서태지의 은퇴는 무엇과 교환되는가? 아무것과도 교환되지 않는다. 이것은 쌍무적인 약속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언이다. 서태지의 은퇴선언은 상업적인 기도가 없는 진실이
었으며 그의 컴백은 그의 스스로 결정할 따름이다. 전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서태지가 은퇴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돈을 벌었을거라는 거다. 서태지의 은퇴선언을 정치인의 공약에 비유하여 도덕성을 운위하는 것은 서태지를 대통령후보로 착각한 경우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
며 그의 은퇴와 컴백은 순전히 그의 자유의사이다. 아무도 여기에 찐따를 놓을 수 없다.
6) 서태지는 신비주의상술을 사용하였는가?
역사상 위대한 천재들의 공통점은 귀찮은 일,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절대로 안했다는 거다. 그가 만약 타인을 위해 자기가 하기싫은 일을 했다면 틀림없이 서울대법대를 갔을 거다.
대중우상이 하기싫은데도 억지로 이쁘게 인사를 하고, 도덕규범에 앞장서며, 언론의 상업주의와 결탁하고, 대중과 친숙한 이미지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상업주의다. 즉 조성모나 HOT의 예의바름이 바로 일본시스템을 도입한 상술인 것이다.
한 분야에 미치지 않고, 타인을 의식하여, 예의를 유지하며 좋은 음악, 창의적인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은 불능이다. 그런 경우는 역사에 없다. 미쳐야 한다. 당연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때 진짜가 이루어진다.
서태지의 신비주의는 의도된 술책이 아니라, 천재 특유의 성격이다. 하기싫어서 대학도 안간 사람에게, 하기 싫은 일을 요구하는 그 자체로 무리다. 서태지는 절대로 본의를 굽히고 대중에 영합해서 안되며, 자기 하고싶은 대로만 해야한다. 그 점에서 서태지는 일관성을 지키고 있다.
나는 반도덕적인, 반권위적인, 제멋대로의, 자기하고잡은 일만 하는, 서태지다운 서태지를 원한다. 예의바른, 스캔들없는, 상업적인 방송사와 언론사의 구미에 잘맞는 서태지는 필요없다. 그것은 그의 노래가사와 그의 메시지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서태지를 증오하라]
서태지를 싫어하는 자는 큰소리로 외쳐 싫어하라. 더욱더 모함하고 더욱더 왜곡하라. 그리하여 왜? 무엇 때문에? 어떤 현실에서의 명백한 손해에 기초하여 싫어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를 똑소리나게 노출하라. 그리하여 타도되어야할 이 사회의 본질에서의 모순이 무엇이었는지를 증거하라. 그것이 이땅의 많은 꿈꾸는 서태지들이 원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