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
2. 생애[편집]
1969년 10월 6일, 경상북도 영일군 구룡포읍 하정리(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하정리)에서 태어났다. 하정리는 당시 50여 가구 남짓한 어촌마을이었으며, 그녀는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암으로 쓰러졌다. 특별한 약이나 치료방법도 없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병원비도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다. 어린 그는 어머니를 리어카에 태우고 40분가량 떨어진 예배당에 찾아가 병이 낫게 해달라며 기도를 드렸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해녀용 장화를 신고 바다에 가서 따개비나 군소를 잡아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4년간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공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남들이 버린 참고서나 문제집을 주워다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풀어가며 포항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를 중퇴[5]하고 부산시 동래구 반여동(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태광그룹의 한 방직공장 노동자로 취직해서 방직 공장과 와이셔츠 공장을 전전하며 일했다. 이러한 공장들은 여기서 일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어린 소녀들로 가득했고, 노동환경은 열악했다 한다. 노동3권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기본권조차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8시간 3교대로 진행되는 강도 높은 노동이 이어졌다고 한다.#, #
20대 초반에는 주경야독으로 일본어를 익혀 해운대 호텔 인근에 있는 잡화상에 취직했고, 그렇게 해서 저축한 돈과 친구 아버지에게서 빌린 돈을 보태 1994년 작은 초밥 가게를 열어서 운영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부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아 2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주경야독으로 동아대학교 법학과(야간)에 입학해서 졸업하였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1학년 때부터 고시반에 들어가 사법시험 공부에 몰두했다.#, #
2.1. 변호사 활동[편집]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을 34기로 수료했다. 변호사가 된 후, 여성, 아동, 인권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보호소년과 미혼모 등 사회적 약자에 각별한 관심을 쏟아 이들을 위한 변호활동을 했다. 여성변호사들로 구성된 여성 전문 로펌 한올을 설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가 성폭력 피해 여성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미투(Me Too)지원단'까지 이끌며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조증윤 미투 사건 때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피해자들의 변호인을 맡았다. # 국선 변호사로 15년간 760건 넘는 변론을 담당했다. #
2.2. 정치 활동[편집]
2016년 당시 새누리당 소속으로 해운대구 을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경선을 포기하고 비례대표에 도전하였으나 공천 받지 못하였다.#
자유한국당 부산시당위원장이었던 김세연 전 의원이 김미애 영입을 위해 삼고초려를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2018년 10월 김세연 전 의원이 "우리 당이 위기다. 저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할아버지의 기업,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노력을 좋게) 보지 않는다"며 "변호사님처럼 스스로 일어선 분이 정치하셔서 우리 당을 바꿔야 한다"고 설득하기도 했다.#
2019년 1월, 자유한국당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을 당협위원장에 선임되었다.
2020년 3월, 21대 총선을 앞두고 미래통합당 공관위로부터 해운대구 을 단수공천을 받았다. 상대 당 후보는 이 지역 현역 의원인 윤준호 더불어민주당 후보이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을 앞둔 3월 30일, 딸을 입양해 키운 이력 덕분에 전국입양가족연대가 김미애 후보에 대한 공개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4월 2일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자, 자신이 여공으로 일했었던 반여동 태광산업 앞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 또 지역 현안과 관련해서, 4월 6일 옆 지역구의 하태경 후보와 공동으로 해운대구 국제 바칼로레아(IB)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여론조사에서는 엎치락뒤치락 했지만, 총선에서 52.87%를 득표해 윤준호 후보(45.90%)를 7,101표 차이로 꺾고 제2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부산의 15곳 중 중구·영도구의 황보승희 후보와 함께 여성 후보가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보여준 위선과 대조적인 제 삶의 궤적이 당선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쉰 목소리로 소감을 밝혔다. 또 "사회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입양[6]·여성인권·장애인 문제 해결을 위해 발로 뛰겠다"고 하였다. #
한편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선거에 출마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도대체 왜 그 당에 가느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강령과 당헌을 모두 읽어봤다. 이 당이 맞다고 생각했다"며 보수정당을 선택한 이유로 다음과 같이 밝혀 미래통합당 지지층들과 보수층들로부터 굉장히 호평받았다.
나는 보수의 가치를 신뢰하고, 자유를 존중한다. 물론 평등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꿈을 이루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게 맞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나보고 구질구질하게 살라 하면 나는 못 산다. 열심히 살아서 내가 잘살고, 그걸로 어려운 사람 돕자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지 않더라. 뭐하러 그렇게 치열하게 사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명품을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사람을 봤다. 또 자사고나 특목고 반대하면서 자기 아이들은 거기 보내고, 또 미국 유학도 보낸다. 최강욱 당선인 봐라. 일제 차 렉서스 탄다는데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면서 자신만 옳은 척 대중을 선동한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역겨웠다. 나처럼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부자로 살고 싶은 것은 자유다. 박수받을 일이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